집 근처 컴벌랜드 검트리 숲은 부시워킹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동네공원은 너무 가볍고 산은 힘에 부치기에 운동 삼아 걷는데 이만한 곳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이 숲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계절 같은 색을 하고 있어 언제나 한결같은 정직함에 우선한다.
나는 오늘도 숲으로 간다. 대로 옆 카페 사인을 비껴 들어가면 별천지 숲길이 나오고 진입하는 순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태양을 보려고 다투어 하늘로 뻗은 나무들은 이파리들이 나무 끝에서만 무성하다. 그래서 검트리 숲은 멀리서는 꽉 차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틈이 많다. 애써 가꾸지 않았지만 정갈하고, 정갈한 가운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만만함이 있어 좋다.
검트리 숲은 글자 없는 책이다. 나무 끝, 가지마다 이파리가 행을 이루고 행간마다 바람이 지나며 운율을 만든다. 나무가 각자의 문장을 만들면 문장이 모여 단락을 이루고 단락과 단락 사이에 새소리가 장단을 넣는다. 가끔 비와 구름이 변화를 주고 태양이 물기를 말리면 숲은 책으로 완성된다. 멀리 한 권의 책 표지가 항상 초록인 이유는 검트리가 제 잎을 떨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숲에 올 때마다 자연이 주는 교훈을 읽는다. 숲의 검트리는 태양을 좆아 하늘로만 자란 탓에 몸통에는 가지가 없다. 제 몸에서 난 이파리가 제 몸을 가려 가지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나무, 스스로 포자를 퍼뜨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가지가 떨어져나간 자리마다 생채기가 났다. 상처가 아무는데 또 긴 세월을 견뎌야 할 것이다.?높이 올라가려는 나무는 옆으로 뻗지 못하는 세상사의 이치를 이 숲에 와서 읽는다.
언덕배기에 곱게 자리한 우리 동네, 하이게이트(Highgate) 번지에 사는 이십여 채의 집들도 서로에게 가지를 뻗지 못한다. 바람소리인가, 새소리인가, 건너편 집에서 한국말이 들리는데 못들은 척 외면하고 곁가지를 쳐낸다. 건너편 집에서도 익숙한 새소리 들었을텐데 손에 닿는 가지가 없다. 이민자들도 이렇듯 숲을 이루고 살지만 태양빛이 급한 나머지 서로의 행간을 읽지 못하고 제각기 하늘로만 향한다. 새는 가지가 풍성한 나무에 깃든다. 멀리 하늘 높은 가지에는 태양이 뜨거워 새들도 앉지 못한다. 이민자가 이민자와의 간격을 두게 되는 원인을 나는 이 숲에 와서 읽는다.
비온 뒤, 여기저기 음에서 양기로 피어나는 버섯들은 숲이 품은 보물이다. 검트리 밑을 피해 터를 마련한 하얀 알들은 이 숲이 보이지 않는 생명의 땅임을 알려준다. 근처에 웅덩이만한 늪이 생겼다. 작은 연못이 오랜 세월 검트리 잎을 차곡차곡 받아 모아 썩지도 섞이지도 못한 채 꼿꼿이 부서져 늪이 되었다. 그래서 이 물은 맑다. 다문화 사회에서 사는 나에게 비록 이들과 온전히 섞이지는 못하지만 맑은 정신을 지키라고 당부하는 듯 고고하다.
검트리 숲은 생명의 기운이 장하다. 스스로를 지키려고 품은 방부제 때문에 근처에는 잡초하나 자라지 못한다. 그 기운을 뚫고 나온 생명체들은 마치 숲의 전사들 같다. 검트리 숲에서 공기 샤워를 하고 나면 심신이 맑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 숲에서 생의 본능에 가장 치열한 것은 검트리 자신이다. 비바람에 쓰러져 있던 검트리 하나가 꿈틀거린다. 몸 중간에 새 가지가 나와 하늘을 향해 기운을 뻗고 있다. 실낱같은 물관으로 뿌리를 지키며 숨을 연장하다가 급기야 새 싹을 틔웠다. 옆으로 눕고서야 몸에 가지를 허락한 검트리, 새로 돋은 가지는 세월이 지나면서 모주가 차지했던 자리를 메울 것이다.?그리고는 또 하늘을 가리게 될 것이다. 앞 다투어 일어나는 숲의 생기에 내 숨이 활짝 열린다.숲은 허물을 품는다. 검트리는 날마다 자신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낸다. 그래서 이 숲의 바닥은 허물로 가득하다. 껍질이 떨어져 나갈 때 마다 몸은 아름답게 빛나고 땅은 허물을 받아 조용히 자신의 뿌리를 덮는다.
사람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숲은 안다. 나는 가끔 내 안 깊숙한 흉과 어둠과 비밀을 허물 벗듯 이 숲에 쏟아내곤 한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 허물 하나씩 새들이 물고 날아간다. 나는 면죄부를 받은 양 몸이 가벼워져 어깨를 펴고 비로소 하늘을 본다.
숲은 여인의 향기를 품는다. 몇 몇 허물 벗은 검트리는 여인의 나신인양 매끈하고 희다. 간혹 하늘을 향해 두 갈래로 뻗은 몸통은 영락없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여인의 다리이다. 알몸으로 머리를 땅에 박고 두 다리는 하늘을 향해 벌리고 태양빛을 받고 있는 숲의 여인들을 상상해 보았는가.
여인은 숲에 허물을 벗고, 숲은 여인을 품고, 여인은 태양빛을 받아 새로운 표피를 다시 만들며 숲은 그렇게 끊임없이 소멸하고 완성되어 간다.
태양이 기울면 이 숲은 문을 닫는다.
숲은 사람의 기운을 몰아내고 달의 기운을 받아 내일을 준비한다. 나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런 밤의 향연을 감히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내용을 알 수 없는 검은 숲은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아 멀리서 바라다만 본다.
내일 다시 태양이 뜨면 나는 또 검트리 숲으로 갈 것이다.
유금란(수필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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