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은퇴하면 이것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하면서 내게 건넨 것이 있다. 생소한 이 상자는 몇 달 동안 닫혀 있었다. 은퇴 후 커피 대신 민들레차를 즐겨 마시며 백수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문득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겉표지는 화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1500개의 퍼즐 조각들이 드디어 상자 속에서 해방되어 하나씩 책상 위에 앉기 시작하려는 순간이다.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일단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막상 작은 조각 더미들을 접하고 보니 어리둥절 할 밖에. 우선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것들을 찾아본다. 한 면이 직선이라 골라내기 쉬워 퍼즐하는 재미를 살짝 맛봤다. 겉그림에 맞춰 짜깁기하듯 직사각형 테두리를 힘겹게 완성하고 나서 그제야 어찌해 볼 마음이 생긴다. 스트라스필드에 사무실을 얻고 텅 빈 공간에 커다란 책상 하나를 먼저 들여놓던 날도 이런 마음이었다. 그 후 이 책상은 삼 십여년 동안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렸고 이제 집으로 옮겨져, 나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림의 전체 윤곽이 잡혔으니, 다음으로 검붉은 색을 모두 골라낸 뒤 왼쪽 하단부터 위로 쭉 뻗은 나무를 채워나갈 요량이다. 고흐가 이 세상을 떠나기 13개월 전, 정신병원에 있을 때 밤하늘에 심취해서 그렸다는 이 그림은 나무가 마치 하늘을 뚫을 듯 우뚝 서 있다. 모아놓은 퍼즐 조각들은 색으로는 구분하기 힘드므로 붓터치 방향이나 모양으로 겨우 하나씩 채워 나가려는데 도대체 진도가 안나간다. 비슷비슷한 조각들의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는 과정에 머리가 아파온다. 이럴땐 잠깐 쉬어가는 방법을 터득했었으니, 민들레차를 마시며 창 밖 푸른 나무들을 감상한다. 커피가 이 역할을 했던 때가 있었다.
사무실에서 책상에 이어 컴퓨터, 팩스 등을 마련하며 일을 시작하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다. 은행으로부터 부도 처리된 수표가 우편으로 날라 왔다. 그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민생활에 노련함이 묻어나는 나이 지긋한 한 고객이 회사 설립을 의뢰하면서 건넨 것이었다. 사무실을 방문할 때마다 많은 말로 희망을 주던 그 고객은 결국 이민 새내기에게 믿는 도끼가 되었다. 우리 사무실에서 미리 지불한 진행비용은 자그마치 이주일치 사무실 임대료에 해당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한 달치가 날라 갔다고 느낄 만큼 컸다. 그것도 모자라 은행 수수료까지 얹어졌으니 발 등 찍히는 순간임을 절감했다. 사방으로 수소문 해 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 순간 수표는 휴지조각이 되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 당혹감은 배신감이기 전에 사업에 대한 무지함이었다. 비즈니스 초년생이 비싼 수업료를 내며 겪은 그 혹독한 경험을 달래 주었던 것이 커피 한 잔이었다.
그날 겨우 몸을 추스리며 카페에 들어서는데 가득한 커피향이 먼저 온몸을 감싸 안아준다. 말 수 적은 청년이 정성을 다 쏟아 만든 커피 한 잔을 내게 내미는 모습에 ‘그래,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지’ 울컥하며 저런 사람의 이름조차 잊기로 한다. 거기에 머무는 십 여분이 나를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놓는다. 그 후 사무실에서 힘든 일이 생기면 바로 카페로 달려가는 버릇이 생겼음에랴.
이제 휘몰아치는 형상의 나무를 다 채웠으니 밤하늘을 수놓은 나선형의 별들 차례다. 짙거나 옅은 노란색을 찾아 모으며 소용돌이로 묘사된 고흐의 마음도 상상해본다. 그림에서 나무 옆 하단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마을이 있다. 끝으로 이 부분을 끼워나가는 내 마음도 차분해진다. 이 마음은 민들레차와 맞닿아 있다. 완성을 앞 둔 마지막 한 조각은 채워넣는 손의 촉감조차 감미롭게 하고, 성취감에서 얻은 기쁨은 극에 달한다. 치열하게 일하던 그 책상 위에서 스물 아홉해 후면 퍼즐놀이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숨 쉬기가 쉬웠었을까?
은퇴 전에는 커피로 달래가며 숨도 안 쉬고 일했고, 은퇴 후에는 아예 내게 불면을 일으키는 커피를 멀리하고 민들레차와 함께 더 좋은 숨을 쉬니 삶의 질이 좋아진다. 하지만 고흐는 고통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마감했으니 내 입장에서 보면 쓰디쓴 커피만 마시다 멈춘 셈이다. 고비를 잘 넘기고 민들레차까지 즐기며 살다 떠났다면 고흐의 그림은 어떻게 변했을까. 상자 속 그 많던 조각들을 모두 채워 완성하며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고흐에게 민들레차 한 잔을 바친다.
차수희/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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