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지 비치에서 본다이 비치로 가는 해안 길은 시드니사이더에게 인기 있는 걷기 코스 중 하나이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때 고급 주택이 들어설 법한 위치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한참이나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좋은 곳에 눕고 싶은 것은 같은 마음일까.
시집 온 첫 설 날 외며느리인 나는 한복에 키 높이 고무신을 신고 조상님께 인사를 다녔다. 낙향한 시삼촌이 선산을 저당 잡히는 바람에 두 번씩이나 시아버지께서 사들였다고 했다. 웃 대 어른들은 양지바르고 바람이 자는 곳에 나란히 누워 계셨다. 시할아버지는 골바람이 불어 나도 모르게 이가 부딪히는 곳에 비스듬히 누워 계셨다. 시어머니는 두 해 전에 자리를 펴신 시아버지 옆자리 대신 능선의 끝자락이 자신의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름난 풍수지리학자와 고향 사람인, 풍수에 해박한 회사 직원을 대동하여 본인이 갈 자리를 진작에 점을 찍어 두셨다.
시어머니는 팔 년간 신장암으로 투병하셨다. ‘천국 문이 열리는 유월에 내가 하늘나라로 갈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마지막으로 내가 병실 문 앞에서 의사와 이야기하는 짧은 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시어머니는 서둘러 떠나셨다. ‘객사시키지 말아달라’는 평소의 유언을 받들어 집에서 오일장을 치렀다.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묏자리를 보았던 회사 직원을 하루 전날 장지로 보냈다. 두툼한 봉투를 고향마을 지관에게 전해드리고 유언하신 대로 묘를 쓸 수 있도록 터를 닦아 달라고 부탁했다.
장지에 이르렀을 때는 큰 포크레인이 산자락을 들쑤셔 놓았다. 땅을 파고 다지기를 하느라 나지막한 산의 끝자락이 주는 아늑하고 고즈넉한 풍광은 온데간데없었다. 명당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자리는 깊이 팔 수가 없었다. 땅속에 큰 암반이 있었다. 하관을 할 때 나는 너무 울어서 기절했다. 나의 울음은 시어머니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되어 시어머니가 가고 싶었던 그 터가 얕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워 더 큰 울음으로 이어졌다. 시숙부님들은 시어머니 묘를 산줄기의 끝자락에 썼기 때문에 자신들이 갈 자리가 없어졌다고 지관에게 언성을 높였다. 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지관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엄숙하고 능숙하게 장례를 집행하였다. 고인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모든 말을 잠재웠다.
좋은 묏자리가 자손을 번창하게 만든다고 종교처럼 믿었던 시어머니. 명당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많이 있다고 한다. 밭 명당이란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작은 열매를 솎아내기라도 하듯 시어머니는 자신의 무덤을 마지막으로 그 줄기를 끊어내어 다른 사람이 묘를 쓰지 못하게 하셨다. 아버님 옆자리로 가셨다면 숙부님들을 위해서 자리를 넉넉히 남겨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시댁 친척 중 누구도 내가 풍수를 보았던 직원을 전날 장지에 보낸 것을 모른다. 심지어는 남편조차도. 서른을 갓 넘긴 세상 물정 모르던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를 내었는지 모르겠다. 시어머니는 산줄기를 홀로 힘겹게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았다. 지관에게 모든 장례 절차를 맡겼다면 시아버지 곁에 쌍봉으로 정답게 누웠을 텐데. 유언대로 홀로 산 끝자락에 누울 자리를 펴게 해 드린 것이 과연 시어머니께 잘한 것일까!
코로나 거리 제한이 풀리자 다시 쿠지 본다이 산책길을 찾았다. 이번에는 공동묘지 사이에 난 길을 걸었다. 비석에는 한결같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하늘나라에 간 연대기가 적혀 있었다.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요새처럼 만든 무덤이 시선을 끌었다. 사이사이 이름 없이 비석만 세워진 무덤을 지났다. 2022라고 큰 글자로 새긴 무덤 앞에 발이 멈췄다. 이럴 수가! 19세기에 만든 공동 묘지에 최근에 만든 묘가 있다니. 둘러보니 군데군데 빈 터가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환갑이 되던 해에 도시 인근에 있는 공원묘지를 구입하셨다. 좌청룡 우백호 혈 자리에 박힌 명당이라는 감언에 그 당시 아파트 한 채 가격을 지불하셨다. 선산 부근에 송전탑이 세워져서 풍수가 이전 같지 않다고 하셨다. 날이 갈수록 숲이 우거지니 몇 안 되는 자식이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도시 부근을 선택하신 것 같았다. 친정아버지께서 잡아 두신 공원묘지에 민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삼십여 년 넘게 손수 잡초를 뽑고 관리한 아버지의 빈묘는 잔디만 무심하게 푸르다.
나이가 더 들고 시한부 삶을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빈 무덤을 미리 차지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한 때 헛된 풍수의 신비를 끌어안고 살았던 것 같다. 풍수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거리를 더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인데도 말이다.
송조안(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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