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 인생
한국의 신간 서적들의 책날개에 기록된 저자 소개를 보면 최상급의 현란한 수사들이 춤추는 것을 보며 현기증을 느낄 때가 많다. 이른바 ‘네임 밸류’가 떨어지는 일천한 젊은 필자일수록 심하다.
“세계적인 학자로...”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며...” “한국인 최초로 개발한....”
객관적인 경력과 학력 소개가 아닌, 검증되지 않은 일들에 초일류 형용사를 동원하여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물론 일 년에 수천종이나 발행되는 출판 시장에서의 생존 전략으로 “제목을 띄우든지 필자를 키우든지” 하는 상업 논리를 따라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럴수록 겸손의 미덕을 최고로 삼는 선비정신과는 철저히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당장이라도 어떤 책이든지 펴놓고 살펴보라.
이런 자화자찬적인 말을 비웃듯이 <타임>지 창간인 헨리 루스 부인으로서, 이태리 대사를 역임한 클레어 여사는 “모든 인물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언어 두세 마디로 그 인생이 요약되고,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K 전 대통령은 상당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IMF로 나라 망친 대통령’이란 한 마디로만 기억한다. 그가 세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펴내며 그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을 고쳐보려고 처절하게 노력하지만, 그 자서전 내용대로 평가하거나, 그 내용을 몇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해서 기억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억울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평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남긴 명언 한마디 정도나 명저 한두 권 정도 기억해주는 것이 고작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 하면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분이라거나 ‘흑인 인권 운동의 기수’라는 단 몇 단어로 그 생애가 요약되고, 평가된다.
한 문장, 몇 단어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한 시간 이상 침 튀어가며 칭찬해주거나 장황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아니 이력서 한 장 정도로도 대답하지 않는다. 심지어 ‘오만과 편견’이 가득한 말로 대답하기 일쑤이다.
“응, 그 사람? 사기꾼이야!” 단 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그 사람, 참 웃기는 사람이야!” 역시 한 문장이다.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마!” 두 문장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 믿어도 좋은 사람이야!” 한 문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분,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야. 그만한 사람은 이제까지 못 만나 봤어!” 두 문장 정도다.
이처럼 각 사람의 평가에 대한 문장의 내용은 다 다를지라도, 분명한 공통점은 단 몇 마디이거나, 한 문장이고, 길어봤자 두세 문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나를 두 문장, 세 문장으로 늘여서 칭송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이하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다른 사람을 한 문장 이하로 평가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성품과 능력 이상으로 칭찬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한두 마디로, 한 문장도 안 되는 말로 가혹하게 평가할 때가 많다. 사람의 마음은 죄악된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천 가지 좋은 일에 대한 칭찬보다, 한두 가지 나쁜 일에 대한 악평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어쨌든 좋지 않은 평을 받을 때 우리는 분노하고, 잠 못 이루기 마련이다. 또 그런 세평들이 상당히 객관성이라도 보증 받은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나’로 낙인찍히고, 어느덧 나의 정체성처럼 되어버릴 때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스티그마 효과’(낙인 효과, stigma effect)를 생각해 본다.
한 번 찍히면 끝난다?
‘스티그마’는 고대 헬라 사회에서 뻘겋게 달궈진 쇠 인장으로 노예나 죄수, 범죄자, 윤리·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의 신체에 찍는 일종의 ‘낙인’(烙印)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즉 치욕, 오명, 오점, 불명예를 얼굴로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외면하게 만들고 배척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성향을 지닌 ‘흔적’(labelling)이었다. 이 낙인이 찍히는 순간 사회적으로 재기할 기회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세월이 흐른 1960년대, 하워드 베커(Howard S. Becker)에 의해 ‘낙인 이론’(labelling theory)이 등장 했다. 이는 제도, 관습, 규범, 법규 등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제도적 장치들이 오히려 범죄를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베커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으면 결국 스스로 범죄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재범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당사자의 행위 자체가 범죄가 되거나 반도덕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낙인 효과’는 이 낙인 이론에서 유래한 용어로, 범죄학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쓰인다. 특히 일탈행위자와 범죄자, 현대 청소년 문제 등을 논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이처럼 낙인효과는 사회심리학에서 일탈행동을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남들이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면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지만, 부정적으로 평가해 낙인을 찍게 되면 부정적인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긍정적인 기대를 받게 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이 실수를 했을 때 “저 사람은 실수가 많아” “실수할 줄 알았어” “그 사람? 좀 그래” 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면 그 사람을 볼 때 늘 실수하는 사람이라는 신념이 생기고 부정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한 번 ‘돌아이’ ‘고문관’ 등의 낙인 대상이 되면 스스로 낙인에 맞추어 살게 된다. 당당하지 못하거나 위축된 상태의 자아를 형성하고, 낙인찍힌 대로 생활태도를 변경해서 그런 삶을 받아들인다. 어린아이도 주위에서 지속적으로 ‘바보’라고 낙인찍으면, 아이는 점차 자신이 진짜 바보라고 의심하게 되어 결국 본인의 잠재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랄 수 있다. 아이들에게 “넌 못해!” “넌 최악이야!”라는 발언(낙인)을 할 경우에는 공부에 대한 의욕뿐만 아니라 탈선까지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따뜻한 말과 칭찬, 격려의 말로 잘 이끌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이는 사회가 비행청소년, 전과자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은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의지를 꺾고 사회 적응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낙인은 결국 한 개인의 인격을 무참하게 짓밟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아호도 아닌 꼬리표
우리가 잘 아는 ‘대도 조세형’은 자기 이름 앞에 아호도 아닌데 ‘대도’가 따라붙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유명한 절도범이었다. 주로 고위층의 저택에서 금품을 털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해서 대도로, 때로는 ‘현대판 홍길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15년간 수형 생활을 마치고 종교에 귀의하면서 새 삶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죄목은 절도죄였다. 병적인 도벽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많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그를 ‘새 사람’으로 봐주지 않은 탓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출소한 뒤 여기저기 간증 활동을 할 때도 전단지나 플래카드에 들어가는 그의 이름 석 자 앞엔 늘 ‘대도’가 수식어처럼, 꼬리표처럼 낙인이 찍혀 따라다녔다. 좋은 뜻으로 내주는 인터뷰 기사에도 ‘대도’란 말은 떠나지 않았다. 그런 전단지, 플래카드, 인터뷰 기사를 대했을 때 본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개과천선한 인생으로 마무리가 됐으면 좋을 텐데, 얄궂게도 그의 삶은 나이 팔순이 넘어서 다시 범죄자로 전락했다. 다세대주택에서 5만원도 들어 있지 않은 저금통을 훔쳤다는 얘기에 대도라는 수식어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사 가운데 열에 아홉은 대도를 붙여 그를 설명했다.
그에 대한 묵은 기사들을 검색하면서 죄를 범한 자는 분명 조세형이지만, 우리 사회가 그를 끊임없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있는 건 아닌지 멈칫하게 만들었다. ‘대도’란 그 낙인은 오랜 세월의 퇴적 속에 지워질 듯도 하지만, 희미한 흔적처럼 남아 좀도둑으로 재생되고 만 셈이었다.
조세형은 자기 이름 앞에 붙는 ‘대도’라는 수식어가 평생 그렇게 지우고 싶었지만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화인이요, 낙인이었다. 지우려 할수록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심지어 초청한 교회들조차도 그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그걸 얼마나 크게 광고하고 알렸던가?
낙인보다 지지와 격려
둘러보면 낙인찍기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번지고 있다.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가 부각되면서 ‘조현병 환자=잠재적 범죄자’처럼 보는 시각이 있다. 우울증 환자도 언젠가 큰일을 저지를 사람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치료를 받고 있는 정신병 환자들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더 움츠러들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재기와 새 출발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는 활력을 잃는다.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신뢰를 잃은 기업은 다시 일어서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과거의 부정적인 이력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치료를 받고 있는 정신병 환자들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더 움츠러들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재기와 새 출발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는 활력을 잃는다. 오늘도 스마트폰으로 시시각각 쏟아지는 ‘낙인 뉴스’의 쓰나미에 무심코 맞장구를 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니 돌아봐야 한다. 누구에게나 지울 수 없는 화인을 새기는 비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찍히면 끝장인 세상에서 새 출발, 패자부활전이 있을 수 없다. 한번 찍혀도 끝장이 아닌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 사람 잘 해내겠지. 이겨내겠지. 나아지겠지’ 하는 북돋아주는 마음이 모아져야 할 때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물론 어른도 예외는 아니다. 어른들에게는 더 많은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비록 실수와 실패의 현장에 있을지라도!
“최상의 선생님은 당신이 마지막으로 저지른 실수이다”(Your best teacher is your last mistake)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크고 작은 실수를 거듭하며, 실수를 통해 성장한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기보다 위로와 격려와 공감이 필요한 시대이다.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결국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격려 한 마디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나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지금 무슨 단어 어떤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위선자!” “거짓말쟁이!”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몹쓸 사람!"
“지지자!” “격려자!” “칭찬하는 사람!” “위로자!”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 “다른 사람은 못믿어도 그 사람만큼은 믿을만해!” “ 그 사람 옆에만 가면 힘이 나!” “아무도 날 신뢰하지 않는데 그 사람만큼은 날 믿어주고 격려해!”.....
어느 쪽일까?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들여다보며 요약한 한 마디 말, 한 문장은 어느 것에 가깝다고 생각되는가?
“긴급 수배자 명단을 보면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 저들에게 따스한 격려 한마디라도 해주었다면, 만일 저들에게 누군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면 현재처럼 저렇게 지명수배자 명단에 오르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에데 칸토
송기태 / 알파크루시스대 글로벌 온라인 학부장,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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