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줄 몰랐다”
100년도 훨씬 더 지난 1886년 출간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극단적으로 분리된 자아의 선악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능하고 자비로운 의사인 주인공 지킬 박사는 명망이 높은 훌륭한 인품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밤이 되면 자신이 발명한 약물을 마시고, 내면의 ‘악(惡)’을 분리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자아 ‘하이드’로 변해 폭행과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낮에는 성자와 다름없는 존경받는 의사로, 밤에는 끔찍한 악마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그렇게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채 한 몸 안에서 역설적인 동거를 어색하게 이어나간다.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악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누구나 마음 한 켠에 밖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더럽고 위험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정신역동이론가 융(Jung)은 이를 그림자(shadow)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밝으면 밝을수록 내면의 그림자는 짙어지기 마련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캐릭터화한 것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이다. 스스로 인식하기도 어렵고 인식했다 한들 인정하기 싫은 것이 그림자(shadow)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그러한 내면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현실의 자신을 바꿔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자주, 너무나 자주,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할, 존경받는 종교인이나 교육자들이 평소의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게 도덕적으로 추문에 휩싸여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관전평은 한결같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어?”“그 사람이 그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어!”
실망과 절망, 그리고 분노로 그런 인물에 대한 품평이 이루어진다. 그 품평은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그렇게 존경받던 그 사람이 천하에 둘도 없는 몹쓸 사람으로 난도질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됨됨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과거의 존경과 현재의 혐오를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가? 성경에도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고 했는데, 한 인격체 안에서 성인과 악마의 모습이 발현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안전지대는 없다
앞서 언급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분리되어 한 몸에 존재하는 전형적인 ‘다중인격 장애’(정확히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디기 힘든 갈등으로 인해 자신의 인격이 여러 개로 해체(혹은 해리)되는 질환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똑같이 한 인격체 안에서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각각의 인격에 따라 목소리와 말투, 자신의 이름과 언어가 달라지기도 한다.
미국 최고의 호황기를 대표하는 대통령 클린턴은 여러모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는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치명적인 흠결은 인턴과의 불륜관계 여과 없이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드러났다.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된 그의 스캔들은 소위 ‘지퍼게이트’란 조롱을 받기에 이른다.
전세계적인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대통령직을 이어나갔고, 때로는 여러 가지 미담기사를 채우며 연임한 2기 행정부를 마쳤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 지금은 전세계를 누비며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앞장서고 있다. 자선규모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클린턴 자선재단은 해마다 9월이 되면 세계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각계각층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거액의 모금활동을 펴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그가 쓴 책 <나눔(Giving)>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순위 3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온갖 고뇌와 갈등 그리고 회개와 거듭남에 따른 결심이, 남을 돕고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며 젊은이들로 하여금 꿈을 실현하는 삶의 기회를 갖게 하는 데 여생을 바치겠노라는 진솔한 고백이 배어 있기도 하다.
세계 최고 권좌의 유능한 인물과 지퍼게이트의 주인공이란 도무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이 어색한 두 역할을 클린턴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1인 2역을 잘 연기해냈다. 그의 1인 2역을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하는 성격적 특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카소주의 작은 마을에서 불우한 가정환경을 견디며 힘겨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여러 가지 모순적인 모습들을 때때로 서로 다른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며 지내온 것이다 ‘구획화’라는 방어기제는 자신의 내면에 공존하기 어려운 모순되는 특징들 사이에 구획(벽)을 세워 그들을 함께 유지하는 형태이다, 다중인격의 방어기제인 ‘해리’가 자기 내면의 서로 모순되는 마음들로 결국 스스로를 둘로 쪼개버리는 양상이라면, 구획화는 격벽으로 나뉘어진 사무실처럼 억지로 그들을 한 인격체 안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은 ‘공적인 나’이고, 인턴과의 일은 ‘사생활의 나’라며 서로 다른 영역의 일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는 그 사람의 학력, 종교, 인격과 도덕성, 사회적 신분 등과전 거의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이 특별히 악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일탈이 주는 짜릿함과 쾌감’이 조성될만한 환경이 되면 거의 예외 없이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합리화와 변명으로 무마해보려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순간의 실수는 평생 치명적으로 남는다.
내 안에 사는 23명의 사람들
다중인격의 극단적인 유형을 묘사한 것으로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를 들 수 있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 ‘케빈’과 그에게 납치된 소녀 ‘케이시’ 사이의 사건들을 담은 스릴러 영화이다. 주인공 ‘케빈’은 다중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23개의 인격이 있으며 인격들은 서로 완벽히 구획화 되어 존재한다. 성별, 성격, 나이, 기억,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다른 23명의 타인들이 케빈의 안에 공존하고 있다. 인격들은 서로 대화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들은 협의를 통해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장악권인 ‘불빛’의 사용자를 정한다.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불빛’의 권한이 인격들 중에서도 가장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3명의 인격에 의해 장악되고 만다.
3명의 인격들은 숨겨진 24번째 인격 ‘비스트’의 숭배자들로, 그들은 초월적인 힘과 파괴력을 지닌 ‘비스트’가 케빈을 대체하는 새로운 주인격이 되길 원한다. 비스트를 위한 제물로 그들은 3명의 소녀들을 납치하게 된다. 케빈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소녀들과 그런 그녀들을 막는 케빈의 인격들, 그리고 그녀들을 도우려는 또 다른 케빈의 인격들 사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영화는 전개된다.
주인공 케빈의 다중인격 장애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해리 정체성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이다.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편람인 DSM-Ⅴ에서는 해리 정체성 장애를 두 개 이상의 인격 상태, 반복되는 기억상실, 간헐적인 기능적 신경적 증상 등으로 정의한다. 또한, 진단 기준으로 “인격이 바뀌었을 때의 방대한 기억으로 중요한 개인 정보를 회상할 수 없는 상태(일반적 건망증으로 설명되지 않는)에 있을 것”과 “술에 취했을 때의 의식 상실과 같은 행동 직접적인 물질의 생리학적 영향 또는 일반적인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러한 해리 정체성 장애는 아동기에 경험한 극도의 스트레스나 외상이 장애의 주원인이다. 미국, 캐나다, 유럽의 해리 정체성 환자 중 90%는 어린 시절에 육체적, 성적으로 심한 학대를 당했거나 방치되었으며, 학대를 받지 않았더라도 부모의 상실 등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방어가 장애 증상을 낳는다고 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인격을 키워, 스스로를 현실과 트라우마 기억으로부터 무감각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음은 전쟁터
<23 아이덴티티>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빌리 밀리건’은 1977년 성폭행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다중인격의 존재를 인정받고 무죄를 선고받은 인물이다. 당시 보고에 따르면 그의 안에는 무려 24개의 인격이 존재했다. 10개의 초기 인격과 이후 발견된 14개의 인격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나이와 성별, 성격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다중 인격이 정말 발현됐는지, 발현됐다고 해도 그러한 이유로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때문에 빌리 밀리건의 사례는 아직까지도 세간에 큰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해리 정체성 장애 환자들의 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이슈는 뜨거운 논의 주제이다.
보고에 따르면, 해리 정체성 장애 환자의 대체 인격이 요정, 신, 악마 등의 초자연적 대상인 경우가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고 한다. 트라우마를 이겨낼 만한, 보다 강한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리 정체성 장애는 문화권에 따라 ‘빙의’와 같은 오컬트(occult)적 요소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중 인격은 더 이상 미스테리나 미신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치료 가능한 ‘마음의 병’이다. 합리화된 치부, 범죄는 점차 곪아갈 뿐이다. 하이드 씨의 악행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결국 지킬 박사를 집어삼켰듯이, 언제까지나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얼굴을 못 본 체하고 외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 전쟁에서 악이 승리하면 하이드 씨가 될 것이고, 선이 승리하면 비킬 박사가 될 것이다. 이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송기태 / 알파크루시스대 글로벌 온라인 학부장,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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