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고?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이런 생각과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과장된 표현(혹은 ‘허풍’)을 거리낌 없이 즐기고, 작은 일을 뻥튀기하여 확대재생산하며, 극적(혹은 극단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소위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시대(자기애적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자기의 품격을 높이고자 하는 일련의 활동들이 각광받는, 본격적인 나르시시즘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이전에는 나 개인보다는 가문의 명예, 조직의 가치, 집단의 목표와 그 안에서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었던 시대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장을 강하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나 기준을 존중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공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면 영락없이 ‘꼰대 대열’에 들어서야 한다. ‘모난 돌이 정을 맞던 시대’에서 ‘모난 돌도 그 개성을 인정받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사회적 변화이며, 추세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성과 개인성을 존중하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건강하고 성숙한 변화 방향이기도 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화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개인 중심의 시대에 ‘내가 최고’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애 인식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어디를 가도, 어느 집단이나 조직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매일 만나야 하는 직장 상사나, 동료가 이런 자기애적인 인격성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주변에 한번 살펴보시라. 이런 사람이 없는지!
자신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망상적인 말을 자주하는 사람.
성공과 권력, 아름다움, 이상적인 비현실적인 상에 집착하는 사람.
지나친 존경을 주변에 요구하는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
늘 자신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타인을 질투하거나 타인이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성취나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여 말한다. 딱히 이룬 것도 없음에도 자신은 “급이 달라. 결이 달라” “수준이 달라” “언젠가 난 큰 인물이 될 거야!”하며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다고 인식되기를 바란다.
왕자병, 공주병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남다르다. 같은 직장에서 주목받고 매력적인 사람에게 당당하게 접근하면서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내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특별히 내가 고백한다” “내가 큰 프로젝트로 정신없이 바쁜데도, 너니까 특별히 마음이 간다”는 식이다.
문제는 정작 상대방은 전혀 관심도 없고,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특별히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지?”라는 스탠스로 상대방을 대한다. 이들은 ‘소중한 자신’이 거절 받는 상황은 애초에 상정조차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정중하게 거절해도 눈치도 못 채고, 인정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정색을 하며 불쾌감을 표시하면 그제야 억지로 억눌러왔던 무의식적 불안,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닐까?’ ‘내가 매력 없는 건 아닐까?’하는 현실적인 생각에 부딪힌다. 그러면서 가냘픈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을 억지로 붙잡으면서 또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자 애를 쓴다.
“네가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일부러 이야기 안했는데, 나 능력 있어. 우리 집 잘 살아. 이러이러한 사업 구상하고 있어” 등등 자신을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연극을 한다.
이런 애틋한 노력에도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을 경우, 이제는 자신의 열등감과 상처입은 자존감에 대한 보상과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한다. “네가 뭔데 날 거부해? 날 무시해?”로 시작해서 “그럴 거면 왜 처음부터 분명히 말 안했어? 나를 보고 간을 잰 거야?”라는 식으로 트집을 잡기도 한다. 그 다음엔 합리화과정으로 넘어간다. “어차피 저 사람이랑은 오래 못갔을 거야. 알고 보니 성격도 별로야!”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이처럼 자존감이 과하게 높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해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들을 가진 나르시시스트들(한국말로는 ‘왕자병’ ‘공주병’이라고 -은 같이 어울리기 상당히 거북한 사람들이다. 주변 삶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도대체 저 사람은 어쩌다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이토록 짜증나는 성격을 갖게 된 걸까?’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발전되어 왔다. 심리학자 코헛(Heinz Kohut)은 발달단계의 문제, 특히 부모와의 공감 실패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기애성 인격성향인 사람들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칭찬받고 과시하고자 하는 소아의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로 브루멜만(Eddie Brummelman)은 이와 반대로 부모로부터 성장기 동안 지속적으로 과대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나르시시스트 어른으로 자랄 확률이 뚜렷이 높았다고 한다. 여기서 ‘과대평가’는 아이에게 “너는 또래 친구들보다 뛰어나고,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라는 평가를 아이의 능력이나 실제 행동에 상관없이 내리는 걸 뜻한다. 아이는 점점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의 핵심이다. 기존 정신분석학에서는 따뜻한 손길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나르시시스트가 될 확률이 높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나르시시즘 대신 적당한 자존감(self-esteem)을 길러주는 방법은 왕자병, 공주병 아이를 길러내는 과대평가 교육과는 다르다. 애정(affection)과 공감(appreciation)으로 키워낸 아이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고착된 문제와 남 탓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나르시시즘을 본능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이러한 욕구를 들키지 않으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율해가는 세련되고 성숙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자기애적 인격성향은 노골적으로 이런 욕구를 표현하거나 과도하게 고착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에 대한 과도한 이미지, 이상화된 자기상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약한 부분들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즉 쉽게 ‘남 탓’을 해버린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이 있고(물론 왜곡된 믿음이긴 하지만), 무척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너무 소중해.” “나는 인정받아 마땅하고, 성공할 거야!”
신기한 것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묘한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인격성향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딱히 비호감 그룹도 아니다. ‘저 사람은 잘난 척하고, 허세를 떨면서 푼수같이 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한결같아. 큰 사기꾼도 아니고, 엄청 나쁜 사람은 아니야’라며 의외로 크게 미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예측가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칭찬해주고, 인정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허세나 과장된 말에 태클만 걸지 않으면 이들은 딱히 크게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특히 이들은 직장에서 모임과 분위기를 주도하고, 어떤 일이나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할 때 윤활유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부하직원이 나르시시스트라면 무시하거나 핀잔을 주면 그만이겠지만, 상사일 경우는 때로는 적절이 맞춰주는 기술이 필요하다.
1. 직면시키지 말 것
이들은 누구보다 공감을 원한다(반사회적 인격성향과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상사가 말하는 허세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말고, 상사의 열등감이나 외로움에 집중해야 한다. 눈치 없이 사실을 거론하며, “에이 부장님, 그건 못 믿겠는데요? 그거 진짜에요?”라는 태클을 걸면, 아마도 미운털 1순위의 부하직원이 되어, 앞으로의 직장생활이 순탄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나르시스트들은 자존감이 높은 척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열등감이 깊다. 누구보다 수치심에 약하고, 민감해서 (특히 여러 사람 앞에서) 부끄럽고 ‘쪽팔린’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주변에서도 쉽게 그걸 눈치챌 수 있지만, 본인은 끝까지 모른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사실을 직고한 이들은 모두 벌을 받고 왕국에서 쫓겨났다. 물론 끝까지 거짓말로 임금님께 아부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이들에게 직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오직 이들 자신이다. 최소한의 인식과 통찰이 생기고 나서야 이들은 타인의 쓴 조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물론 그 타이밍은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걸린다.
2. 들어주기만 해도 평균 이상
이들은 타인의 진정한 지지와 관심을 받기 어렵다. 어린 시절, 도무지 끝날 것같지 않던 어른들의 잔소리를 누가 큰 관심을 갖고 감동하여 오래오래 기억하며 인생의 길잡이로 쓴단 말인가?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 당연히 이들의 껍데기뿐인 허세와 과시는 공감을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다.
이들의 자기과시적인 자랑과 허세에 대해 이들과 다투지 말고, 이들의 내면의 아픔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들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미성숙함을 까발리지 말고 인정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이들은 자신의 언행이 극적이고 과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타인의 반응에도 퍽 민감하다. 영혼 없는 칭찬이나 아부는 금방 눈치 채고 거부반응을 강하게 나타낸다.
이들의 주변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허하고 외롭다. 따라서 이들의 말에 약간의 인내심만 가지고 최소한의 반응과 비언어적인 지지적 추임새(눈 맞춤, 고개 끄덕임 등)만 넣어줘도 그 효과는 엄청 크다.
3. 그의 다른 점을 칭찬하기
상사가 “나 대학 때 춤으로 날렸어! 인기 짱이었어!”라고 허세를 부릴 때, 누가 봐도 그럴 확률은 병아리 눈물 짜기 정도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면,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신 “부장님은 사실 목소리가 좋아요” 라든가, “일 처리가 정말 깔끔해요. 한 번도 지각하지 않으시잖아요. 정말 자기관리가 철저하세요” 등등 사실에 근거한 다른 점을 칭찬하는 것이 좋다. 거기에다 “부장님은 일하실 때 보면 열정이 대단하세요! 항상 좋게 생각하고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칭찬으로 되돌려주는 센스까지 가졌다면 어떠한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상호 간에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도 남들 못지않은, 뛰어난 장점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에 대해 진짜 관심과 인정을 받는다면 그 상사는 더 이상 쓸데없는 허영과 과시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의 열등감을 지적하고 공격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거짓 이상화’된 자신에게서 실제의 관심을 전환해주는 것이다. 이럴 때 그 상사는 부하의 신중한 배려에 오히려 감사할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생각은 내가 누구보다 잘났다, 우월하다는 생각이다.” - 부시만(Brad Bushman)
info@itap365.comwww.itap36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