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벗어!”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아주 큰 음악회가 열렸다. 이 콘서트에서 곡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지휘자는 온 정열을 다해서 지휘를 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아주 혼신을 다해서 그 곡에 도취되면서 연주했다. 청중들은 조용하게 그 연주에 흠뻑 빠졌다. 바로 이런 기막힌 순간에 어쩌다가 너무 열정적으로 지휘하다보니, 이 가난한 지휘자 예복의 소매가 찢어지면서 펄렁펄렁 하더니 그만 이 소매가 떨어져 나갔다. 한쪽 소매가 떨어져나갔는데도 지휘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잠깐 쉴 때, 이 지휘자는 민망하니까 옷을 벗어버리고 그만 셔츠바람으로 지휘를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수선해졌다. 망신스럽게 셔츠바람에 이게 뭐냐는 소리도 들렸다.
이때 맨 앞 에 앉아있던 귀족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자기 웃옷을 벗고 다시 앉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차례로 웃옷을 벗었다. 모든 사람이 웃옷을 벗고 오케스트라를 보게 되었다. 곡도 곡이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음악회는 최고의 감동을 주는 음악회가 되었다. 지휘자의 옷이 찢어졌다고 비판하겠는가?
“당신도 벗어!”
이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존중이요, 존경이다. 그의 입장에서 그와 같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것이 공감(Empathy)이다. 멀리 앉아서 교훈하거나, 가까이 서서 잔소리하거나, 바로 앞에서 충고나 교훈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생각해서 한 마디 한다”며 이래라 저래라 하고 ‘바른 말’로 훈계하는 것, 그건 생각해주는 것도, 존중하는 것도, 사랑도 아니다. 그가 부족하면 나도 부족한 것이요,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픈 법이다. 누구를 향해서 비판과 비난과 훈계를 하겠는가? 그와 같이 되는 것,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약자에게 보내는 갈채
우리는 이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약자를 응원하고, 갈채를 보내곤 한다. 특히 경쟁에서 지고 있는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약자라고 믿는 주체를 응원하게 되는 현상 혹은 이들에게 부여하는 심리적 애착을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라고 한다. 이 현상은 특히 스포츠에서 자주 나타나고, 정치나 예술, 마케팅의 영역에서 종종 사용되기도 한다.
언더독 효과는 투견장에서 아래에 깔려서 지고 있는 개(underdog)라는 단어에서 유래하는 ‘패배자, 약자’란 뜻이다. 상대 개를 위에서 누르고 있는 개(top dog)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옛날 벌목산업의 나무 자르기 관행도 이 표현의 유행에 일조했다. 큰 나무는 미리 파둔 땅 구덩이 위로 나무를 걸쳐둔 뒤 위아래로 톱질을 하는 방식으로 나무를 잘랐다. 그런데 구덩이 속에 들어가 톱질을 하는 건 매우 어려운 고역이었다. 구덩이 속에서 톱질을 하는 사람을 ‘언더독’, 나무 위에서 톱질을 하는 사람을 ‘탑독’이라 불렀다. 19세기 후반부터 쓰인 말이다. 사람들이 지고 있는 개가 이기기를 응원하듯이 상대적 약자, 즉 어려운 환경에 있거나 경쟁에서 지고 있는 사람이 이기길 바라고, 응원하는 것이 ‘언더독 효과’라 불리게 되었다.
선거나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스토리텔링과 결합해 언더독 효과를 활용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역경을 이겨내는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마케팅은 ‘언더독 마케팅’이다. 사람들은 언더독 스토리텔링에 쉽게 감동도 하고, 잘 속기도 한다. 그래서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분식이나 국밥을 먹으며 서민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도 언더독 효과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약자의 성공을 응원하고, 거기서 공감을 얻는 것이 대중의 보편적인 심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는 이런 언더독 효과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많은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언더독, 정치부터 스포츠까지
언더독 효과는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치에서 열세 후보에 대한 동정으로 해당 후보에게 막판에 표가 몰리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언더독 효과로 진단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토마스 듀이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우세한 지지를 받으며 당선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련데 ‘안타깝다’라는 이유로 인해 낙선이 예상되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다. 언더독 효과가 극명하게 드러난 대표적 사례이다.
사회학 용어로 언더독 효과에 대배되는 개념으로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가 있다. 쉽게 표현해서 특히 선거와 관련한 밴드왜건 효과(대세론)는 “대세는 결정되었음니 나에게 줄을 서시오!”이다. 언더독 효과(동정론)'는 “(불쌍하고 연약한) 나를 좀 봐주세요!”이다.
감성적인 한국 사람들에겐 ‘언더독 전략’이 비교적 잘 먹히는 나라이다. 선거에서건 일상의 삶에서건 한국인들은 ‘언더독 스토리’, 즉 낮은 곳에서 오랜 세월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은 후에 승리하는 스토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위인전이나 동화는 거의 언더독 스토리를 빼면 구성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만큼 언더독 스토리가 늘 한국 선거판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당이나 정치인이 너무 속 보이는 언더독 전략을 쓰면 ‘엄살 작전’ ‘약자 코스프레 등의 말로 집중세례를 받기도 한다.
스포츠는 역시 챔피언과 도전자가 맞붙으면 으레 도전자를 응원할 정도로 흔 언더독 현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분야이다. 선수와 나의 일치화,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그들의 도전정신은 우리가 더 크게 응원하도록 하는 요소이다. 랭킹 1위라고 항상 1등을 하는 게 아니기에 스포츠는 경기에 긴장감을 더욱 불러일으킨다. 동계 스포츠를 하기 어려운 아프리카나 더운 나라의 선수가 동계 올림픽 종목인 봅슬레이에 출전했을 때 한마음으로 응원하던 1988년 캘러리 동계올림픽이 언더독 효과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스포츠 종목에서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국가대표 1,2’,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이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던 것 또한 언더독 효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불 수 있다.
희망과 감정이입
“우리는 이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합니다.”
언더독 포지셔닝 광고의 일환으로 에이비스(Avis) 캠페인에서 사용한 슬로건이다. 이들은 1등은 아니지만, 항상 더 노력한다는 모습을 부각하면서 소비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유도했다. 한국의 진라면이 ‘현재 매출 1위는 아니지만, 이렇게 맛있는데 언젠가 1위가 될 것이다’라는 식의 문구를 통해 소비자들의 응원을 받은 적도 있다. 연구에 따르면 감정이입 성향이 언더독 상표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공감과 감정이입의 효과가 ‘돈도 벌게 하는’ 원천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신데렐라 스토리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언더독 스토리는 조금 더 현실적인 면에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준다. 그리하여 보는 이들에게 언더독이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은 이미 여러 차례 연구에서 입증되었다. 그들은 약자가 강자를 제압하는 간접체험을 통해서 대리만족과 희열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약자라고 항상 약하기만 한 게 아니다. 누구든 마음먹고 열심히 노력하면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언더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마음의 상처와 ‘호오’와 놀람
사람들은 사소한 일(당사자에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에서 상처받기 쉽다. 특히 ‘언더독’일수록 그렇다. 그럴 때마다 위로받고 격려 받고 싶어 하며,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려줄 친구나 상담자를 찾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대방에게 공감하며 이해하고 위로해 주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기분대로 말을 뱉으며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언더독 : (울먹거리며)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주변 환경이 모두 절벽처럼 느껴져.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
친구 : (장난스럽게 싱긋이 웃으며) “뭐 그런 걸 가지고 힘들어 해. 그건 다른 사람에 비하면 약과야, ‘힘들지 않다’고 생각해! 그럼 괜찮아져.”
그러면서 이 친구는 다른 대화 주제로 대뜸 넘어갔다고 가정해 보자. 이 친구의 위로(?)에 언더독은 아픈 곳이 다시 또 찔리는 기분이었고, 괜히 말했다는 후회도 들 것이다. 이 문제로 온통 마음을 쏟고 며칠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터인데, 언더독은 ‘별것도 아닌 일’에 ‘유난 떠는’ 개복치가 되어버린 기분일 것이다. 친구와 만나 그때 그 순간만큼은 아픔을 평가받기보다는 ‘공감’ ‘위로’ ‘격려’가 필요하다.
친구는 그 고통을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언더독에겐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섭섭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물론 친구는 그가 겪는 일을 겪어보지 않았고, 어느 정도로 어떻게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언더독에겐 아플 수밖에 없다. 마치 넘어져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야, 피도 안 나네, 뭘 울고 그래 뚝. 그만 징징대”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뼈가 부러지거나 피가 나지 않았더라도 아이는 놀란 게 먼저다.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을 것이고, 아이들은 더욱이 이런 일에 대한 경험이 많이 없으므로 더 크게 놀란다. 그럴 때, 대부분의 엄마들은 “우리 귀요미, 많이 놀랐구나. 아프지~엄마가 호오 해줄게 호오~~”라고 아이의 상처를 쓰다듬어 준다. 이게 무슨 큰 효과가 있을까? 놀랍게도 아이들은 울음을 뚝 그친다. 상처가 크지 않을 경우, 아이에게는 상처의 아픔보다는 ‘놀람’이 더 큰 법이다. ‘호오~’는 그걸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이도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에게로 와서 ‘호오~’하는 시늉을 보이는 것 아닐까? 본인이 실제로 ‘호오’를 통해 나아졌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힘들 때, 타인이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이해가 없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시련에 대해서는, 그 아픔이 어떨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너 많이 힘들구나!” 한마디면 충분할 때가 많다. 사실, 들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옆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으로도 마음의 상처는 조금 나아지기 때문이다
충격과 에어백, 마음의 반창고
똑같은 시련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받아들이는 에어백은 저마다 다르다. 이 세상 사람의 수만큼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다양하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문제에서는 남들보다 무딜 수 있는 반면, 어떤 문제는 심각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사건의 종류에 따라. 충격의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치유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라서, 어떤 이들은 술이 최고의 치료약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운동이 그러할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충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래도 대부분 마음이 아픈 ‘언더독’들의 공통된 치료책은, 약자에게 갈채를 보내며 응원하는 따뜻한 시선에서, 마음에 품고 있는 각양의 사연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며 호응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고, 위로이니까.
누가 봐도 화자가 자신의 ‘아픔과 고통, 상처’에 대해서 말하는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별거 아니네”라며 그것의 무게를 평가하고, '의지박약'취급을 해버린다면, 그를 더 아프게 할 수도 있다. 소중한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와 어렵게 마음의 상처를 내보인다면, 혹여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모른 척 반창고를 슬쩍 붙여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된다. 그 시간을 잘 견디어 자연스레 그 상처가 아물고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누군가와 오랜 대화를 나눈 끝에 치유 받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을 되찾은 적은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믿을 수 있고, 개방적이고, 솔직한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상대방은 아마도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며 당신의 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칼 로저스
송기태 / 알파크루시스대 글로벌 온라인 학부장,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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