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법정에 선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악이 저토록 평범하다니!”
히틀러 정권의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 학살 집행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아르헨티나에서 15년 간 숨어 지내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한 유대인이 증인으로 나왔다.
“이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이 말을 듣고, 아이히만을 쳐다보는 순간 증인은 기절해 버렸다. 그가 깨어나자 다시 물었다.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전혀 대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을 정치 역사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한다.
“악이 저토록 평범하다니····”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약 600만 명이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학살 대상이었다. 워낙 대규모로 저질러진 학살이라, 지금까지도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2003년 9월에 밝혀진 극비문서에 따르면 나치 정권은 2차 대전 발발 이듬해인, 1940년 1월부터 1941년 8월까지 독일 각 병원에 수용돼 있던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 27만 5천명을 학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해 LA 시몬 바이센털 센터의 R. A. 쿠퍼 소장은 “나치정권은 장애인 학살의 살인기술을 연마하고 정당화하는 도구로 약용했다”고 비난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하여 자주 논의되는 인물이 바로 위의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는 1961년 4월 11일부터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과정을 취재한 한나 아렌트는 1963년에 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책에서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고력의 결여’는 어떻게 발생하며 무엇이 그 ‘결여’를 메워 주는가? 히틀러의 병사들에게 ‘명예’는 곧 ‘충성’이었고, ‘충성’은 곧 ‘명예’였다. 또 히틀러 일당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역사적이고 웅대한 의미를 부여하게끔 병사들을 세뇌시켰다. 2천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일이라는 걸 주입시켰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라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내 어깨에 걸린 역사적 책무가 참으로 무겁도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명령하는 국가, 수행하는 인간
당시 아렌트가 송고한 기사는 곧 미국 전역에 걸쳐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인물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학살을 저지를 당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인간관계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 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착한 사람이 저지른 악독한 범죄라는 사실에서 연유되는 곤혹스러움은 인간의 사유(thinking)란 무엇이고, 그것이 지능과는 어떻게 다르며, 나아가 사유가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게 만들었다.
혹 학살의 정교한 분업 시스템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는 데에 일조한 건 아니었을까? 크게 나누어 명령을 내리는 자, 세뇌하는 자, 집행하는 자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갖게 될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와 세뇌를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의 끔찍한 현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조치하시오’라는 우아한 말 한마디, 또는 ‘국가와 영광을 잊지 말라’는 애국적인 말 한 마디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그들의 손엔 피 대신 향기로운 술잔이 들려 있을 것이다. 직접 살인하는 병사들도 그 순간 명예와 충성과 역사적 책무와 국가의 영광이라는 주문만 외우면 되는 것이고, 그들의 살인 행위도 단추 하나만 누르면 해결되는 것이라 죄책감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심리적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여러 가지 다른 장치들이 개입된다. 학살의 집행자 또는 하수인들은 자신들이 잔혹행위에 개입해 있는 그 ‘현실의 어처구니없음을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는 인식하게 마련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된 공백을 환상으로 메우려 하는 과정에서 ’위조된 세계‘를 창조한다고 한다.
세뇌하는 사회, 불감되는 인간
여기에는 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부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등장한다. 그 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쟁의 경우 군인들이 애용한 헤로인과 마리화나 등의 마약복용이었다. 독일군들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술과 고전음악을 즐겼으며, 수용된 여성들에 대한 변태적인 성적 학대를 즐겼다. 이런 수단들을 통해서 학살의 하수인들은 스스로 ‘심리적 불감’ 상태를 불러일으키며 정신적 공황을 메우려고 했다.
‘심리적 불감’은 학살과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비현실화하는 심리적 과정과 연결돼 있으며, 이 과정엔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와 도구들이 동원된다고 말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베트콩들의 시체 수를 확인하기 위해 시체마다 귀를 잘라 모으는 짓(임진왜란 때 일본인들도 행한 짓)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베트남전쟁에서도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존재했다는 걸 말해 준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즉 기술적인 일만 성실히 수행했다. 이게 곧 아이히만의 대답이기도 했다. 닐 포스트먼은 “아이히만의 대답이 하루에 미국에서만도 5천 번 이상 나오고 있을 것이다. 즉, ‘내 결정의 인간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담당자는 관료주의의 효율성을 위해 맡은 역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뿐이며, 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이히만과 관련, 에리히 프롬은 ‘관료주의적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프롬은 관료주의적 방법은 인간을 물건처럼 다루고, 수량화와 통제를 보다 쉽고 값싸게 하기 위해서 이 물건을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프롬은 아이히만이 조직화된 인간의 상징이며 우리 모두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히만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스스로 모든 것을 자백하고도 자신의 완전하고 선한 신념에 의거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프롬은 관료주의 체제엔 아직도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수천의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는 점뿐이라는 것이다. 병원의 관료가 환자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한다는 그 병원의 규칙 때문에 중환자를 거절 했을 때, 그의 행동은 아이히만이 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관료주의적 규약의 어떤 조항을 위반하기보다는 빈민을 굶주리도록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사회사업가의 행동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러한 관료주의적 태도는 단지 관리들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사, 간호사, 교사, 교수들 속에도, 많은 부부관계와 친자(親子) 관계 속에도 살아 있다. 일단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의 숫자로 격하되면 관료주의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비례할 만큼의 지독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대상물에 대하여 아무런 인간적인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새디스트보다는 덜 포악하지만 더욱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심과 의무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논쟁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독일인들의 심리상태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2년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쓴 <평범한 사람들>은 “동료간의 압력, 출세주의, 조건 없는 복종”이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홀로코스트에 동참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1996년에 나온 대니얼 조나 골드헤이건의 <히틀러의 자발적인 사형집행인들>은 브라우닝의 주장에 정면 도전하면서 독일의 병리현상인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에서 원인을 찾았다. 즉, 모든 독일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특성을 잘 읽은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독일인과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50만부 이상 팔려 나갔다.
2000년에 나온 에릭 존슨의 나치테러는 독일인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침묵은 통탄할 일이지만, 이방인들로 여겨지던 그들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도덕적 무관심과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침묵은 이해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제이 고넨의 “나치 심리학의 뿌리”는 골드 헤이건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독일의 신화와 역사가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집단 환상’을 키워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한다는 이유로 수직적 명령체계나 관료적 타성 때문에 집단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에릭 프롬은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모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사랑하고 존중하되, 조직의 부정과 불의에조차 따르는 조직의 노예가 되지 않는 건 영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까? 아마도, 시대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옳은 편에 서서 좁은 길을 걸으려는 ‘순교적인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일로 보여진다. 그래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한 의인은 시대를 초월하여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로 하여금 당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이 아닌) 순전한 생각 없음 (thoughtlessness)이었다.” -한나 아렌트
송기태 / 알파크루시스대 글로벌 온라인 학부장, 상담학 교수
info@itap365.comwww.itap36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