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NO justice, NO peace)”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
3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에선 오후 내내 이 같은 함성이 가시지 않았다. 벌써 사흘 째 반복된 일상이다. 20대가 대부분인 시위대는 누군가 선창하면 모두가 따라 하는 구호를 몇 시간째 계속 제창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3km 가량 떨어진 하워드대에서 오후 2시쯤 모인 1,000여명의 젊은이들은 30여분간의 집회를 마친 뒤 백악관으로 향했다. 행진 동안 경찰 통제를 잘 따랐고, 광장에 도착한 이후에도 펜스를 사이에 두고 질서를 유지했다. 참가자들은 “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전원 손을 드는 제스처로 평화시위의 성격도 분명히 했다.
낮 집회 참가자들은 야간 폭력시위에 거리를 뒀다. 하지만 약탈과 방화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초래하는 것이란 양면적인 입장도 보였다.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에 거주하는 대학생 솔즈러 힐은 “폭력 시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너무 화가 나 있다”며 “정부가 시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모른 채 분노만 더 자극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테러 집단으로 규정한 ‘안티파’에 대해서도 “그들이 옳지 않지만 왜 분노하는지 이해는 간다”고 말했다. “흑인을 억압하는 데 질려”서 거리로 나선 흑인 대학생 에이브릴 역시 “경찰과 폭력 시위 모두에 유감이다”면서도 “폭력을 촉발한 건 경찰”이라고 주장했다.
오후까지만 해도 시위대는 함성과 손팻말 만으로 의사를 표출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은 빚지 않았다. 상황이 돌변한 건 해가 진 뒤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백악관 근처에서 폭력이 빈발했다. 요즘 미 전역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을 압축적으로 보는 듯했다. 일부 무리는 길거리에서 성조기를 불태웠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커피숍과 은행 창문 등을 부수고 다녔다. 깨진 창 틈을 비집고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모습도 포착됐다. 백악관 맞은 편 세인트존 교회 지하에선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도 발생했다. 건물에는 ‘맞은 편에 악마(트럼프)가 산다’는 낙서도 새겨졌다. 심지어 DC를 상징하는 건축물,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서 불길이 치솟는 모습까지 포착됐다.
경찰과 주(州)방위군이 최루탄과 고무탄 등을 쏘며 시위대 해산을 시도하면서 마찰은 더욱 커졌다. 순간 흑인 경찰 한 명이 바닥에 무릎을 끓어 시위대에 연대감을 표시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고 참가자들은 전했다. 야간 폭력이 날마다 재연되자 뮤리엘 바우저 DC 시장은 이날 밤 11시부터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으나 흥분한 시위대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이런 장면이 140개 도시로 확대됐다”고 전했다. 지난달 25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진 지 일주일도 안돼 벌어진 일이다. 뉴욕 맨해튼에선 시위대가 밤늦게 경찰과 대치하며 여러 곳에 불을 지펴 검은색 연기가 일대를 뒤덮었고, 보스턴에선 경찰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백인인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의 혼혈 딸 키아라(25)는 맨해튼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폭동 양상이 두드러지면서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도시만 40개가 넘었다. 이런 규모는 “1968년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암살 사건 이후 처음(NYT)”일 만큼 분노는 거셌다. 또 21개주는 시위 진압을 위해 방위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물리적 통제는 시위 확산세를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DC에서처럼 무릎 꿇기로 시위대에 동조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속속 올라와 뜨거운 반응을 낳았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는 전날 대학생을 전기 충격기로 과잉 진압한 경찰관 두 명이 해고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 대응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이날 낮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안티파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할 것”고 공언했다. 다만 백악관 밖에서 폭력 시위가 계속되는 밤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백악관이 외부로 나오는 거의 모든 조명등을 끄고 암흑 속에 있었다”고 NYT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주변에서 처음 시위가 발생했던 29일 지하 벙커로 피신해 한 시간 가량 있었던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CNN방송에 따르면 현재 백악관 내부에서는 대국민 연설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온건파와 일괄 진압으로 지지층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병이 여전한 데도, 이를 개의치 않고 밀집한 시위대의 모습은 그만큼 분노가 크다는 것을 웅변하지만 감염병이 재확산할 것이란 걱정도 키우고 있다. 시위대 상당수가 마스크를 쓰긴 했으나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근접해 끊임 없이 구호를 외치는 데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이들도 많아 집단 감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바우저 DC 시장은 “대규모 항의 시위가 코로나19가 재창궐할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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