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이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등장한 건 19세기 영국 캐드버리(Cadbury’s)사가 선물용 초콜릿 상자를 출시하면서다. 서양에선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뿐 아니라 사탕·카드 등 다양한 선물을 주고 받는다.
아시아에서 밸런타인데이가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굳어진 건 일본 제과업계 때문이다. 일본 메리 초콜릿이 1958년 백화점에서 밸런타인데이 선물용 초콜릿 판매를 실시했지만 사흘 동안 고작 3개가 팔렸다. 메리 초콜릿은 이 굴욕적 결과에 굴복하지 않고 이듬해 ‘매년 한 번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 고백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대적인 판촉전을 벌여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자 다른 제과업체들이 가세했고, 이것이 한국·대만·중국 등으로 번지면서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로 정착했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이 마케팅에서 비롯된 근본 없는 풍습인 건 확실하지만, 초콜릿은 그 어떤 음식보다 사랑 혹은 관능, 쾌락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초콜릿이 오랫동안 최음제로 여겨졌다. 유럽에 초콜릿이 처음 전해졌을 때 ‘정력에 좋은 음료’로 소문 나 인기를 끌었고, 바람둥이의 대명사 카사노바도 여성을 사로잡는 음료로 초콜릿을 꼽았다. 성직자들은 ‘음란한 욕망을 없애기 위한 단식 기간에 성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초콜릿을 마신다는 건 반(反)종교적’이라 비판하기도 했다.
초콜릿은 과연 ‘사랑의 묘약’일까. 초콜릿에는 쾌감의 경험에 일조하는 천연 각성제 성분이 매우 소량이나마 여러 종류 들어있기는 하다. 아난다마이드와 페닐에칠아민이 대표적이다. 아난다마이드는 마리화나(대마초)에 존재하는 테트라히드로카나비놀(THC)와 매우 닮았는데,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페닐에칠아민은 암페타민 계열의 화학물질로, 사랑하는 감정을 느낄 때 분비되는 물질이다.
하지만 초콜릿이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내지는 못하는 건 이들 성분의 함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페닐에칠아민의 경우 초콜릿 1kg당 함량이 3mg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김치나 소시지에도 같은 성분이 있다.
이처럼 초콜릿이 최음제가 아니라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됐지만, 초콜릿을 먹으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도취감이 존재하는 건 분명 사실이다. 초콜릿이 주는 행복감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과학자들은 초콜릿, 더 구체적으로는 코코아 버터(cocoa butter)의 독특한 물성(物性)을 꼽는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가공하면 고형분인 ‘코코아 분말(코코아 매스)’과 지방인 ‘코코아 버터’로 분리된다. 코코아 분말과 버터에 설탕, 각종 향신료를 더해 초콜릿 제품을 만든다. 코코아 기름은 버터처럼 상온에서 고체이다. 하지만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보통 기름은 여러 종류의 지방산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지방산은 녹는점이 모두 다르다. 버터나 옥수수기름, 포도씨유 등 일반적으로 우리가 식용하는 기름들은 입에 넣으면 일부 지방산이 녹지만 일부 지방산은 녹지 않고 입안에 남는다. 기름을 먹으면 느끼하거나 초를 씹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다.
하지만 코코아 기름은 딱 세 가지 지방산(팔미트산 25%, 스테아르산 32%, 올레산 36%)로 구성된다. 식용하는 기름 중에서 가장 단순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지방산은 사람의 체온보다 조금 낮은 온도에서 모두 녹는다. 하지만 코코아 기름은 모두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그래서 기름이지만 심지어 ‘시원하다’는 쾌감이 들 정도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물성이 초콜릿을 먹으면 느끼는 쾌감의 원인임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됐다. 음식 심리학 연구로 이름난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폴 로진(Rozin) 교수는 초콜릿에 대한 욕구가 초콜릿에 함유된 화학물질 때문인지, 아니면 감각적 경험 때문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실시해 그 결과를 1994년 발표했다. 로진 교수 연구팀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1)밀크 초콜릿 2)화이트 초콜릿 3)코코아 가루를 넣은 캡슐 4)화이트 초콜릿과 코코아 가루 캡슐 5)가짜 알약 6)그냥 물만 마시도록 하고 그 결과를 비교했다.
실험 참가자들을 가장 만족시킨 것은 밀크 초콜릿이었다. 놀라운 건 코코아 가루 캡슐은 가짜 알약 이상의 효과가 없었다는 점. 만약 초콜릿의 화학물질 때문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면, 일반 초콜릿과 동일한 약리활성 성분이 들어있는 코코아 가루만 섭취하더라도 똑같은 쾌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반면 화이트 초콜릿을 먹을 경우 밀크 초콜릿의 69% 효과가 나타났다. 화이트 초콜릿은 코코아 분말 없이 코코아 버터에 설탕 등을 더해 만든다. 코코아 분말이 들어가지 않아 흰색을 띄는데, 엄밀히 말하면 초콜릿은 아니다. 일반 초콜릿의 화학물질은 없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특성만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근접한 수준의 쾌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초콜릿은 음식을 맛볼 때 촉감(觸感)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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