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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산후조리를 위해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호주로 초청하려는데 어떤 비자로 호주로 오실 수 있으며 얼마 동안 체류할 수 있나요? A: 현재 이민국에서 부모님을 초청하고자 할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임시 비자가 유효합니다. 부모 기여 임시 비자: 이 비자는 2년 동안 부모님이 호주에 머무실 수 있는 비자이며, 비용은 $31,930입니다. 이 비자는 후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비자입니다. 전자 여행 임시 비자: 이 비자는 관광 비자이며, 부모님들이 3개월 동안 체류할 수 있는 비자입니다. 비자 비용은 무료이며, 이민국에 내는 비자 신청 온라인 서비스 비용은 $20입니다. 관광 스트림 임시 비자: 이 비자는 관광 비자의 일환으로 부모님께서 3개월에서 12개월 동안 머물 수 있는 비자입니다. 3개월 이상 머물고자 한다면 본 비자를 권고해 드립니다. 비자 신청 비용은 $145입니다. 현재 비자 처리 시간은 신청된 비자의 90%를 10개월안에 결정하고 있습니다. 가족(family) 스폰서 임시 비자: 이 비자는 가족 스폰서 비자이며 12개월 동안 머물 수 있는 비자입니다. 신청 비용은 $145이지만, 비자 스폰서가 본드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비자처리 시간은 신청된 비자의 90%를 12개월 안에 결정하고 있습니다. 부모 스폰서 임시 비자: 본 비자는 3년에서 5년 동안 부모님께서 호주에 머물 수 있는 비자이며 3년 비자의 경우 비자 신청 비용은 5천 불이며, 5년 비자의 경우 1만불입니다. 스폰서가 필요하지만 이 비자는 두 번째 신청시에는 10년 비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비자 처리 시간은 현재 신청된 비자의 90%를 5개월 안에 결정하고 있습니다. [면책공고] 위 내용은 법률자문이 아닌 일반적인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정확한 법률 상담을 위해서는 본인의 특정 상황에 따라 반드시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십시요.” 박정호|호주 웬워스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

  12/05/2021

어머니의 날 매년 5월 둘째 주일은 Mather’s Day입니다. 올해는 5월 9일을 어머니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을 기념한다는 것이 단순히 자녀들로부터 편지와 선물, 함께 식사하는 날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부모라는 이름은 오히려 가볍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많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성공에 대한 관심으로 교육열은 높을지 모르지만, 정작 바쁜 일정 속에서 대화는 사라져가고, 가정의 정서와 하나됨이 깨어지는 것을 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희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정 안에서 건전한 인격체로서의 관심과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자녀들은 어머니의 날 혹은 교회에서 가정의 달로 지키는 것에 대해서 참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의 연례행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나의 자녀가 다른 자녀들보다 수학 공식을 하나 더 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교육이 무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크리스찬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앙의 유산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과 만족감이 결코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영적인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루어지는 주일학교 교육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나이에 맞는 관심을 따라 천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하셔야 됩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의 실재와 사랑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꼭 껴안아 주고, 그들을 보고 미소 지으며,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네 살 가량만 되어도, 부모가 어떤 기도를 드리는지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익히기 전에, 가능한 한 자주 그들이 듣는 데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기도 시간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더라도, 개의치 말고 그날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에 관해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열 살 정도 되면, 보다 많은 사실을 이해하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며, 인생의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부모가 성경을 읽는 모습을 꾸준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상의 신앙교육을 함에 있어서 강제로 신앙 지식으로 주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아이들이 관심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즉, 부모인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자녀들 또한 하나님을 알고 그 놀라운 은혜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의 날 어머니의 날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은 학창시절 선생님들입니다. 한국에서는 5월 15일이 바로 스승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특별하게 기억되는 선생님이 있습니까? 학창시절을 보내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수많은 선생님을 만났을 텐데 그중에서 우리 인생에 중요하게 영향을 끼친 선생님이 모두 있을 겁니다. 선생님들 가운데서는 뛰어난 학자도 있고, 명문대학을 졸업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가르치는 기술이 뛰어나신 분도 분명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선생님의 지식, 학벌, 기술이 저에게 감동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제 삶에 영향을 끼친 분들을 기억하면, 모두 겸손하신 분들입니다. 지식을 드러내거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섬기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을 우리에게 가장 잘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예수님이십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비가 적고,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주인은 손님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중요한 접대 중의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종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발을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입니다. 허리에는 수건을 두르고, 물을 받아다가 제자들의 먼지 가득한 더러운 발을 정성껏 씻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미천한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솔직히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에 대해서 수없이 들어왔지만, 막상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섬김이 얼마나 나타났는지를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섬김이 없으면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진짜 나를 어렵게 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가족과 이웃, 동료, 성도를 섬기시면 좋겠습니다. 섬김은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선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하여 믿음의 선한 영향력이 나타날 수 있다면, 스승의 날은 우리에게 더욱 값진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삶으로 증명하십시오 이처럼 좋은 부모, 좋은 선생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삶을 통해서 증명되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부담을 가지지 말 것은, 부모의 자격을 갖추고 부모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부모가 되기 위해서 시험을 봐야 되고, 부모로서의 자격시험을 합격한 사람만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솔직히 부모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물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부모로서의 합당한 자격과 조건을 갖출 수 있다면 왜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부하는 것과 실제의 삶을 다를 수밖에 없고, 진짜 부모가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고 배우게 되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아이를 잘 양육하기 위해서 인내하고, 가르치고, 사랑으로 품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눈물과 아픔 속에서 진짜 부모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키우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울고 웃는 것이 부모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 함께 밤잠을 설치고, 아이의 문제는 세상 그 어떤 아픔보다 크게 다가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부모라는 존재는, 그래서 위대한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가정과 학교, 직장, 교회 등에서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여러분이 속한 그 곳에서 흘리는 눈물과 기도, 인내, 사랑으로 품어내는 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부모, 좋은 선생으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분명히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실수가 있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함을 확인하게 될지라도, 포기하지 마시고 그러한 믿음의 삶을 증명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백종규|히스교회 담임목사

  30/04/2021

벌 받지 뭐 엄상익 아침부터 하루 종일 나는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입안에 침이 마르고 깔깔했다. 나를 업무상배임죄로 고소한 여자가 자신의 변호사와 함께 검사 앞에서 나를 욕하면서 공격하고 있었다. 모멸감이 피어올랐다. 젊은 검사와 서기는 처참해지는 내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 잔인성이 표정 이면에 숨어 있었다. “우리 부부가 돈 벌어서 산 오층 빌딩에 대한 재산 분할을 저 변호사가 자기 마음대로 포기해서 받아내지 못하게 했어요.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재산을 포기하죠?” 필요에 따라 포기할 권한도 위임받았다. 위임장에는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검사는 위임의 내용이 적혀 있는 그 핵심 증거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죄인을 만드는 쪽에 신경이 가 있기 때문이다.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죠?” 검찰 서기가 일부러 변호사였던 나에게 ‘피의자’라고 강조하면서 물었다. 옆에서 검사가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태도는 비둘기같이 유순하게 해도 대답은 뱀같이 지혜로울 필요가 있었다. “변호사는 이혼소송에서 재산분할을 받게 하면 그 성공보수로 큰 돈을 받을 수 있는데 왜 내가 포기했을까요?” 내가 검사와 서기를 향해 되물었다. 그 말에 검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성공보수로 변호사에게 얼마를 주기로 약정했어요?” “그런 거 없었어요.” 검사가 나를 보고 물었다. “왜 성공보수를 정하지 않았죠?” “부부 간 결혼 중에 땀 흘려 벌어서 산 재산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확인해 보시죠.” 그 점은 자명했다. 팔십 년도면 한강변의 고급 아파트를 이천오백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스물세 살이었고 남편은 대학 복학생으로 스물일곱 살이었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뻔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검사나 검찰 서기는 그녀가 나를 욕하고 모욕을 주게 놔두면서 즐기는 것 같았다. 잡아내고 싶다는 사냥꾼의 집요한 눈빛이 검사의 눈에서 이글거렸다. 검사가 그녀에게 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변호사를 어떻게 보세요?” “전부 엉터리예요. 남편한테서 돈을 받아먹고 저에게 불리하게 소송을 했을 거예요. 저 사람 벌 받아야 해요.” 그때 검사실로 그 사건을 송치한 경찰서 담당 형사가 들어왔다. 그는 검사 앞에서 나와 그녀가 대질하는 걸 보면서 히쭉 웃으면서 내뱉었다. “두 분 다 엔간하시네요. 서로 원만히 합의하시고 끝내세요. 좋게 사셔야죠.” 나는 오물을 뒤집어쓰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나를 남편과 내통한 업무상 배임범이라고 속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증거를 찾을 수 없을 뿐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었다. 그냥 보면 보이는 너무 뻔한 사실을 외면하는 검사나 형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 속에 오래 있으면 그 악취가 영혼에까지도 배어드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여름의 오후 여섯 시가 넘자 검찰청의 에어콘이 중단되고 찜통 속 같은 열기가 검사실에 가득했다. 야구르트를 배달하는 여자가 검사실에 와서 검사와 서기 책상에 야구르트를 한 병씩 놓고 갔다. 그들은 내 앞에서 그 야구르트를 맛있는 듯 홀짝 마셨다. 그들에게 나는 잡혀 온 하나의 짐승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실 좁은 쪽창으로 밤하늘에 뜬 별이 하나 보일 무렵이었다. 시계가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검사가 나를 보고 말했다. “저는 지금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의 업무상배임죄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고의를 입증하려면 고소인의 남편을 수사해야 합니다. 앞으로 그 남편을 소환하고 검찰에 오지 않으면 지명 수배할 겁니다. 그때 다시 조사할 겁니다.” 한 번 나를 문 검사는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였다. 나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과거 부부였다. 남편의 거짓말 하나면 나는 깊은 함정에 빠질 것 같았다. 사법적 현실에서는 진실보다 두 명 이상의 일치된 거짓말이 위력을 발휘하곤 했다. 검사는 이미 그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무렵 고교동기인 재경부 국장이던 변양호가 구속된 게 신문에 났다. 외환위기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럴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으로 가는 것 같았다. 진실하다고 잘못이 없다고 바로 무혐의나 무죄가 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담당검사실에서 사건을 종결할 시간이 넘어갔는데도 통지가 없었다. 검찰청에서는 사건처리를 결정하면 바로 관계자에게 통지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검사를 하는 고교후배를 통해 나의 사건 처리결과를 확인해 보았다. 담당 검사의 무혐의 처분이 이미 나 있었다. 그걸 내게 통지하지 않은 것이다. 담당 검사는 면죄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당사자의 애타는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마음을 추스르고 난 후 서울중앙지검 사백십삼호 검사실로 찾아갔다. 나는 더 이상 피의자가 아니었다. 당당한 변호사였다. 담당검사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검사실로 들어섰는데도 그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나는 투명인간인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서서 말했다. “나 기억해요?” “기억을 하다마다요. 왜 못하겠습니까?”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건 처리결과를 통지받지 못해서 왔는데 말이죠.” “어? 그거 벌써 무혐의처분을 했는데 아직 통지를 못받으셨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구석에 있는 검찰청 여직원에게 소리쳤다. “김 양아 여기 이분 사건 피의자 통지 절차가 되지 않았다는데?” “그건 사건과에서 해요.” 검찰청 여직원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신들의 실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의 남편을 철저히 수사했습니까? 업무상 배임죄라고 생각한 제 고의가 입증되지 않습디까?” 내가 물었다. “그 남편을 불러서 조사했죠. 자기 부인이 원래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툭하면 남을 고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아버지 빌딩 중에 자기 이름으로 있는 걸 노리고 그런 짓을 했답니다. 그런 뻔한 거짓말을 검사님은 믿느냐고 반문하더라구요.” 그냥 보면 보이는 거짓말을 검사는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검사와 그녀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그 검사는 지금 중진 정치인이 되어 활약을 하고 있다. 아마 대통령이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가 야망이라는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27/03/2021

후배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던 사이다. “엄 선배, 나 백혈병에 걸려 강원도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있어요.” 얼핏 병원의 무균실의 백혈병 환자들이 떠올랐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그들은 균이 없는 방에 격리해 놓고 문 앞도 투명비닐로 차단해 놓은 걸 본 적이 있었다. 환자는 유리박스 속의 동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네. 병원의 무균실에 감금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위로했다. “나도 중환자실에 오랫동안 있었죠. 그러다 골수이식을 받고 나서 이 정도 자유의 몸이 됐어요. 그런데 말이죠, 병실에 있을 때 느낀 건 중환자에게도 24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 시간은 거의 정지된 채 아주 느릿하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는 평소에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모임도 잘 만들고 교회에서는 장로로 일을 거의 혼자했다. 그는 백혈병인데도 목소리에 침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생한 사람에게는 나도 그랬소 하는 게 위로의 말이다. 아픈 사람에게도 내가 아팠던 얘기를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도 마흔다섯 살 때 암이라는 의사의 통보를 받고 눈앞이 캄캄해져 집에 누워 천정만 가만히 바라본 적이 있지. 사흘을 그렇게 누워 있으니까 등이 쑤시고 못견디겠더라구. 갑자기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 같고 말이야. 그래서 일어났어. 죽기 전 날까지 하던 일 하다가 죽어야겠더라구. 백혈병 환자로 그 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 내가 되물었다. “예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도해봤죠. 그런데 내 몸으로는 너무 무리예요. 그 다음으로 역사를 공부했어요. 중앙아시아나 베트남의 역사까지 섭렵했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떠오른 게 단편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특징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나름대로 내가 느낀 삶을 소설 한 편으로 만들어 놓고 죽었으면 좋겠어.” 병이란 죽음을 생각하는 기회인 것 같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순간에야 삶을 자각한다. 나도 그랬다. 얼마 안 남은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고 허둥댔다. 그런 자각이 있기 전에는 욕망에 빠지고 세상에 미혹됐었다. 돈에 정신이 팔리고 높은 지위가 부럽기도 했다. 헛된 명예욕으로 들뜬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젊음은 영원할 것 같았고 시간은 무한대라는 착각 속에 있었다. 병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중환자실의 침대 위에서 의료기계에서 나오는 파란 불빛을 보고 규칙적인 희미한 소리를 들으면서 인간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나도 수술대 위에서 후회했었다. 가족에게 사랑의 말을 하지 못했다. 돈보다는 관계를 그게 아니면 예술을 추구했어야 했다. 좀 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봤어야 했다. 지구호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인생이었는데 금고 속에 들어가 여행을 한 셈이다. 바닷가로 밀려오는 하얀 파도를 본 게 언제지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병은 그런 걸 깨닫게 해 주는 소중한 손님이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후배가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나를 찾아왔다. 그를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데려가 점심을 잘 먹이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살아 온 걸 단편소설로 써 봤는데 그게 도대체 써지지 않아요. 법률적인 글만 써와서 그런지 너무 딱딱해요” 변호사 후배의 말이었다. 그는 내용보다 어떤 틀에 더 매몰되어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한 소설가들은 좋은 문장을 위해 한평생 구도자 같은 수행을 한다. 소설 속의 아름다운 묘사들은 불가마 속의 도기처럼 고통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의 내공이 있어야 마침내 득음의 경지에 오른다. 표현 자체만 해도 그렇게 땀과 시간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게 예술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나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기성 소설가들이 만든 어떤 틀 속에 들어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나만의 소리로 정직하게 써 보는 게 어떨까.” 변호를 하다가 무식한 부모가 재판장에게 올리는 진정서에 더러 감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받침도 틀리고 삐뚤빼뚤한 한글이지만 그 글자에서 거칠었던 삶과 진한 사랑이 물큰하게 배어 나오곤 했다. 내가 말을 계속했다. “정직하게 마음을 쓴 글이 보통 사람들의 넓은 공감을 얻는다면 그게 문학이 아닐까. 기성 소설가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수사학적 경지나 그들이 설정한 문학적 틀을 기웃거릴 필요가 있을까?” 세상은 주술을 걸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묶어 놓는다. 믿음 자체보다 목사나 장로 같은 형식이 앞설 때가 있다. 인간보다 자격증으로 상징되는 스펙이 앞서기도.〠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19/03/2021

꼭 필요한 광야 훈련 강승찬 일상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누구나 일할 수 있었고, 예배드릴 수 있었는데 이젠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불편해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이젠 마음 놓고 모여서 예배드릴 수도 없다. 선교 여행도 맘대로 할 수가 없다. 마음 먹은 대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꼭 낯선 광야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뉴노멀 시대로 변화되어가는 길목에서 모두 불안한 마음 가득하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가슴 조아리며 우리의 건강과 일터와 자유를 잃어버릴까봐 긴장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칠흙 같은 어둠이 깔린 광야에 서 있는 느낌이 더해진다. 광야는 우리에게 어떤 곳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반석에서 나오는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로만 먹고 살수 있는 곳이다. 종살이했던 이집트에서는 조금만 노력하면 내 맘대로 먹고 마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내 맘대로 먹고 살 수가 없다. 100%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만을 바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으로만 살아내야 하는 장소가 바로 광야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시고 메마른 광야에서 생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참된 목자가 되신다. 광야는 훈련의 장소이다. 불순종을 순종으로 훈련하는 장소이다. 불평을 감사로 훈련하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노예근성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다. 불순종과 불평이 몸에 배인 그들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시며,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며 순종훈련과 감사훈련을 시키셨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 순종과 감사이다. 지성이 발달하고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사는 이 시대에 남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높은 연봉과 탁월한 실력이 있어도, 재산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어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이요,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이다. 실패를 반복하거나 가난과 배고픔의 처절한 시간을 보내거나 누명을 쓴 억울함의 광야 인생을 지내 본 사람만이 먼 훗날 과거를 추억하며 오늘 내 삶에 대해 감사할 수가 있고, 나보다 못한 직장의 리더에게도 순종하며 협력할 수가 있다. 광야는 내 자아가 깨어지는 곳이다.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고 승승장구했던 다윗도 13년 동안 사울왕에게 쫓기며 도망해야 했던 광야 인생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은 다윗의 자아가 깨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인격으로 빚어져가는 시간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왕을 걸코 죽이지 않았으며, 소외되고 버림받은 인생들과 함께 지내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 광야였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다윗에게 광야인생이 없었다면 다윗은 죄 앞에서 회개할 줄 모르고 자기가 주인된 실패자의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광야는 사역을 준비하는 곳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님은 예수님을 도시에 있는 학교로 인도하지 않고 광야로 인도하셨다. 40일 동안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공적인 사역을 준비하셨다. 광야훈련을 통과하신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멋지게 사역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해 주셨으며 우리의 구세주와 주님이 되어 주셨다. 우리 인생에도 반드시 광야 훈련이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직장을 잃었다고 불안해하거나 염려 가득한 미래를 앞두고 낙심하지 말고 이 시간을 광야훈련으로 여기며 잘 이겨내야 한다.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도록 우리의 믿음을 키워가며 불완전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강승찬|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목사

  25/02/2021

인간의 세 종류의 관계 김환기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간(間)은 ‘사이와 관계’라는 뜻으로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3종류의 관계가 있다. 위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옆으로는 사람과 수평적 관계, 안으로는 나와 내면적 관계이다. 하나님과 관계는 대신관계, 인간과 관계는 대인관계, 나와의 관계는 대아관계이다. 1. 대신 관계(對神 關係)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창 1:27)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영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life)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이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성결이다.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하나님과 대화는 기도이다.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온 것은 우리에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주기 위해서 오셨다.(요 10:10) 풍성한 생명이란 생명을 받은 자가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살 수 있는 성결을 의미한다. 2. 대인 관계(對人 關係) 인간은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이다. 사회적 존재는 너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십계명의 1-4계명은 대신관계에 이어서 5-10계명은 대인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바울 서신의 구조를 보면 전반부는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후반부는 생활에 대하여 설명했다. 대신관계가 신앙이라면 대인관계는 신앙생활이다. 하버드대학에서 724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75년간 '행복의 비결'에 대하여 연구했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인 ‘로버트 왈딩어’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좋은 관계이다. 첫째 좋은 관계는 행복도를 높이고, 수명도 길다. 둘째 좋은 관계는 양보다 질이다. 셋째 좋은 관계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두뇌도 보호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었다. 사람과 관계의 단절은 불행이고, 관계의 회복은 행복이다. 3. 대아 관계(對我 關係) 인간은 '심리적 존재(psychological being)'이다. 한문에 나를 뜻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다. 오(吾)와 아(我)이다. 조선시대 이덕무라는 사람의 호는 오우아(吾友我)였다. 내가 나를 벗 삼는다’는 뜻이다. 성경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에서 인간을 영-혼-육의 삼중 구조로 나누었다. 여기서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푸쉬케(ψυχὴ)가 영어로 ‘혼’(psyche)이다. ‘혼’이란 용어를 '마음(mind)' 혹은 '정신'(soul)이라고 한다. 심리학(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마음. 정신, 혼이고, ‘logos’는 지식. 연구를 뜻한다. 심리학(psychology)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아가 행동을 예측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심리학의 아버지는 독일의 심리학자 겸 철학자인 ‘빌헬름 분트’(Wundt)이다. 그를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은 분트로부터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하여 과학의 영역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심리학을 배울 때는 인문학 분야였고, 딸이 시드니 대학교 심리학과에 입학했을 때는 Art와 Science로 2원화되어 있었다. 그후 시드니대학은 심리학과를 Science Faculty로 통합하였다. 세 종류의 관계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때 전인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창 1:27),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사랑하셨다.(요일 4:9)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구세군라이드교회

  25/02/2021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마음으로 이태형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코로나19 이후의 교회와 목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바꿔 놓았다. 지금 경험하다시피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모임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교회 사역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가 새로운 방식의 목회를 펼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외면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일시에 멈추게 한 것 같다. 예배당이라는 공간에서의 예배는 멈춰지거나 위축됐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건물은 닫혔어도 예배는 살아 있다! 오히려 앞이 깜깜한 상황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빛이 보인다. 어쩌면 지금 목회자들의 심정은 1885년 부활절 조선 땅에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마음과 비슷할지 모른다.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에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자신들이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조선의 복음화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미지의 환경을 하나하나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이 땅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고귀한 통로가 되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교회, 특히 작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물론 성도들의 이탈, 헌금 감소 등 여러 문제점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튜브나 화상회의 앱 ‘줌(ZOOM)’ 등 현대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예배와 모임은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대부분 헌금은 감소했지만 각종 교회 행사들이 축소되거나 열리지 않기에 교회 운영비 역시 줄어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은 그동안 교회에서 행한 많은 일이 ‘주의 일’이라기보다는 ‘교회 일’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의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일은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일들이 적지 않다. 온라인 예배가 지속되면서 성도들은 출석하는 교회뿐 아니라 평소 눈여겨본 다른 교회의 예배에도 참석하고 있다. 교회를 오가는 시간에 한 번의 예배를 더 드릴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뉴노멀 시대에 더 이상 그런 생각만 할 수 없다. 온라인 예배에 대한 목회적·신학적 정립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한다. 온라인 예배는 개교회성을 뛰어넘어 공교회성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교단과 교파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어디에나 도달할 수 있기에 선교적으로도 아주 유용하다. 성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비대면 모임을 할 수 있다. 유튜브를 활용해 전 세계의 저명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설교와 강의를 접할 수도 있다. 탁월한 신약학자인 NT 라이트의 바울 신학을,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기독교 변증을 직접 들을 수 있다. 수많은 좋은 내용이 번역되어 있기에 영어를 못 해도 시청이 가능하다. 목회자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내려놓으면 훌륭한 편집자가 되어 유튜브상에 있는 최고의 강의를 성도들에게 연결해줄 수 있다. 목적이 교회 운영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와 성도들의 영적 성숙이라면 지금의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효과적인 사역이 가능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끝나기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우리 모두 19세기 후반, 조선 땅에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마음으로 21세기 뉴노멀의 신세계에서 미지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 주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찬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이태형|현 기록문화연구소 소장, 고려대 사학과 및 미국 풀러신학대학원(MDiv) 졸업, 국민일보 도쿄특파원,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역임.

  25/02/2021

중환자에게도 24시간은 있는 거에요 엄상익 후배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던 사이다. “엄 선배, 나 백혈병에 걸려 강원도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있어요.” 얼핏 병원의 무균실의 백혈병 환자들이 떠올랐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그들은 균이 없는 방에 격리해 놓고 문 앞도 투명비닐로 차단해 놓은 걸 본 적이 있었다. 환자는 유리박스 속의 동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네. 병원의 무균실에 감금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위로했다. “나도 중환자실에 오랫동안 있었죠. 그러다 골수이식을 받고 나서 이 정도 자유의 몸이 됐어요. 그런데 말이죠, 병실에 있을 때 느낀 건 중환자에게도 24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 시간은 거의 정지된 채 아주 느릿하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는 평소에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모임도 잘 만들고 교회에서는 장로로 일을 거의 혼자했다. 그는 백혈병인데도 목소리에 침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생한 사람에게는 나도 그랬소 하는 게 위로의 말이다. 아픈 사람에게도 내가 아팠던 얘기를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도 마흔다섯 살 때 암이라는 의사의 통보를 받고 눈앞이 캄캄해져 집에 누워 천정만 가만히 바라본 적이 있지. 사흘을 그렇게 누워 있으니까 등이 쑤시고 못견디겠더라구. 갑자기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 같고 말이야. 그래서 일어났어. 죽기 전 날까지 하던 일 하다가 죽어야겠더라구. 백혈병 환자로 그 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 내가 되물었다. “예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도해봤죠. 그런데 내 몸으로는 너무 무리예요. 그 다음으로 역사를 공부했어요. 중앙아시아나 베트남의 역사까지 섭렵했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떠오른 게 단편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특징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나름대로 내가 느낀 삶을 소설 한 편으로 만들어 놓고 죽었으면 좋겠어.” 병이란 죽음을 생각하는 기회인 것 같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순간에야 삶을 자각한다. 나도 그랬다. 얼마 안 남은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고 허둥댔다. 그런 자각이 있기 전에는 욕망에 빠지고 세상에 미혹됐었다. 돈에 정신이 팔리고 높은 지위가 부럽기도 했다. 헛된 명예욕으로 들뜬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젊음은 영원할 것 같았고 시간은 무한대라는 착각 속에 있었다. 병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중환자실의 침대 위에서 의료기계에서 나오는 파란 불빛을 보고 규칙적인 희미한 소리를 들으면서 인간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나도 수술대 위에서 후회했었다. 가족에게 사랑의 말을 하지 못했다. 돈보다는 관계를 그게 아니면 예술을 추구했어야 했다. 좀 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봤어야 했다. 지구호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인생이었는데 금고 속에 들어가 여행을 한 셈이다. 바닷가로 밀려오는 하얀 파도를 본 게 언제지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병은 그런 걸 깨닫게 해 주는 소중한 손님이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후배가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나를 찾아왔다. 그를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데려가 점심을 잘 먹이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살아 온 걸 단편소설로 써 봤는데 그게 도대체 써지지 않아요. 법률적인 글만 써와서 그런지 너무 딱딱해요” 변호사 후배의 말이었다. 그는 내용보다 어떤 틀에 더 매몰되어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한 소설가들은 좋은 문장을 위해 한평생 구도자 같은 수행을 한다. 소설 속의 아름다운 묘사들은 불가마 속의 도기처럼 고통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의 내공이 있어야 마침내 득음의 경지에 오른다. 표현 자체만 해도 그렇게 땀과 시간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게 예술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나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기성 소설가들이 만든 어떤 틀 속에 들어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나만의 소리로 정직하게 써 보는 게 어떨까.” 변호를 하다가 무식한 부모가 재판장에게 올리는 진정서에 더러 감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받침도 틀리고 삐뚤빼뚤한 한글이지만 그 글자에서 거칠었던 삶과 진한 사랑이 물큰하게 배어 나오곤 했다. 내가 말을 계속했다. “정직하게 마음을 쓴 글이 보통 사람들의 넓은 공감을 얻는다면 그게 문학이 아닐까. 기성 소설가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수사학적 경지나 그들이 설정한 문학적 틀을 기웃거릴 필요가 있을까?” 세상은 주술을 걸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묶어 놓는다. 믿음 자체보다 목사나 장로 같은 형식이 앞설 때가 있다. 인간보다 자격증으로 상징되는 스펙이 앞서기도.〠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25/0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