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광고 |

미디어는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김환기영상은 움직이는 사진이다. 최초로 영상을 만든 사람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다. 1891년 에디슨은 '키네토그래프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 관람 상자'를 만들었다. '키네토(kineto)'는 ‘움직인다’는 뜻이다. 키네토스코프는 혼자밖에 볼 수 없어 영상이지 영화는 아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이 볼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를 만들어 최초의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시네마토그라프’라는 말은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케네토스코프‘처럼 한 번에 한 사람만 감상할 수 있었던 기존 방식과는 달리, ’시네마토그라프‘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영화는 대중과 교감하는 매체이므로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사용하는 ‘시네마’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최초의 영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영화사인 고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상영된 세계 최초의 영화는 ‘열차의 도착’이라는 50초의 짧은 내용의 작품이었다. 당시의 기술로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90초였다.   이 영화는 아무런 스토리도 없이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영화는 다음 해인 1896년에 베를린,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영화 필름은 대부분 정적 화면이지만, 촬영 기사들의 독창성이 아주 뛰어나 최초로 줌이나, 정지 카메라 상태에서 파노라마 화면으로 편집하는 영화 촬영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최초의 장편 영화  1906년 찰스 타이트 감독이 제작한 세계 최초 장편영화로 19세기 후반 호주의 ‘로빈 후드’로 불렸던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작품이다.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는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호주에서 만들어졌다.   1880년 25살의 나이로 사형당한 악명 높은 갱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이 영화는 개봉 이후 9년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을 돌며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약자들의 영웅이었던 그의 범죄를 모방한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자 한동안 상영이 금지됐을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1906년 첫 상영시 67~70분 가량의 분량이었으나, 당초 제작되었던 필름이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었다. 이후 개인 소장가와 영국 국립기록보존소 등에서 발견된 필름 조각들을 호주 국립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복원을 통해 총 18분 분량의 필름을 완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초의 멀티미디어 공연   1900년 9월 13일 멜번 시청에서 ‘십자가의 군병들’ (Soldiers of the Cross)이 공연되었다. 호주 구세군의 라임라이트(Limelight) 부서에서 공연하였다. 초기에는 최초의 장편영화라는 칭호까지 받았지만,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함께 연출되어 인정되지 않았다.   2천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90초짜리 16편의 영상을 비롯하여, 2백 장 이상의 매직-랜턴 슬라이드 필름, 오케스트라와 찬양대 그리고 호주 구세군 사령관인 ‘허버트 부스’(Herbert Booth)의 감동적인 강연까지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공연을 하였다.   ‘십자가의 군병들’은 로마 병사에게 쫓기어 어린아이를 안고 도망하는 크리스찬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가 개울을 연결한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는 동료가 빨리 강을 건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때 다리를 건너려는 병사가 달려오는 속도와 몸의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관객들은 가난한 크리스찬 여인의 탈출과 당황하는 로마 병사를 보며 긴장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공연 내내 숨을 죽이고 영화와 슬라이드 필름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은 소리를 높여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구세군은 호주 최초의 영상 스튜디오를 만들어 호주정부가 출범한 1901년 1월 26일에 등록하고 30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호주 구세군의 영상 사역은 조셉 페리(Joseph Perry) 사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페리 사관은 ‘Ballarat Prisons Gate Brigade Home’에서 출소자를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다. 1891년 멜번 본영에서 근무하던 프랭크 배릿(Frank Barritt) 사관이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페리 사관이 매직 랜턴 프로젝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페리 사관은 매주 토요일 밸러랫(Ballarat)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홍보하고 있었다. 구세군 본영으로 돌아온 배릿 사관은 페리 사관에게 프로젝트와 함께 멜번으로 오라고 하였다. 배릿 사관은 특별 부서를 만들어1891년 9월에 호주를 방문할 구세군 대장인 윌리엄 부스를 홍보할 계획이었다.    이때 구세군의 영상을 담당하는 라임라이트 부서가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페리 사관은 ‘이스마엘의 딸’이란 내레이션이 들어 있는 랜턴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1895년까지 라임라이트부서는 2중 렌즈의 프로젝트를 소유하게 되어 6백 개 이상의 유리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당시 페리 사관은 프로젝트를 가지고 호주와 뉴질랜드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총 522회의 공연을 했고, 469명이 구원받았으며, 선교를 위한 1천784 파운드의 모금도 했다.     1896년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아들인 허버트 부스가 호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필름 사역에 관심이 있는 허버트 부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서 제작한 여행용 필름을 수입하였다. 1897년 라임라이트 부서는 필름을 여러 지역을 다니며 상영하였다.   허버트 부스 사령관은 페리 사관을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체적으로 필름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1898년 5월 구세군 멜번 시티 교회에서 뤼미에르 필름과 랜턴 슬라이드 그리고 구세군 음악이 연합한 공연이 있었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선교는 구세군 교회는 물론 구세군 사회사업과 사관학교에서도 사용되었다.  1900년대의 사회는 단순하였다. 당시에 멀티미디어로 선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이다. 구세군은 창조적인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였다. 길가의 건물에 슬라이드를 비쳐 가로전도를 하기도 했다. 구세군 사람들에게 교회로 모이라고 하는 대신, 사람들을 찾아 거리로 나가는 적극적인 선교를 하였다.   1901년 1월 1일 구세군은 호주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나라의 역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 역사가 크라이스트 롱(Christ Long)은 그날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속적인 필름의 프레젠테이션, 길고 중요한 내용,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많은 산업에 영향을 끼쳤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구세군은 호주에서 만드는 80% 이상의 필름을 제작하였다. 필름은 구세군의 복음전도와 사회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헤이(James Hay) 새로운 호주 사령관이 1909년 9월 부임하면서 구세군의 영상사업은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1910년에 라임라이트 부서는 문을 닫고, 장비는 팔리고 필름들은 사라졌다.   제임스 헤이 사령관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구세군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우리를 진정한 구세군에 합당하지 않은 사악한 길과 가벼움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사업을 완전하게 끝낸다.”   미디어와 관련된 구세군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시대를 선도하는 창조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고, 슬프다는 것은 필름사업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오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더구나 코로나 시대는 미디어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미디어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미디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이 될 수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18/09/2021

한국문화원, 개원 10주년 기념 ‘제주 해녀’ 전시 호주국립해양박물관에서 개최 주시드니한국문화원(원장 김지희, 이하 ‘문화원’)은 올해 문화원 개원 10주년을 맞아 호주국립해양박물관과 공동으로 ‘제주 해녀, 바다의 여인들(Haenyeo - The sea women of Jeju Island)’ 전시를 3월 8일부터 6월 13일까지 해양박물관에서 선보인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제주 해녀 문화와 가치를 알리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 협력으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사진작가 김형선이 예술적 감각으로 담아낸 제주 해녀 사진 작품 12점을 비롯하여 해녀들이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영등굿에 사용되는 ‘짚배’ 외 물질 도구인 ‘테왁’, 전통 해녀복 ‘물소중이’, 전복을 따는 도구 ‘빗창’ 등 해녀들이 직접 사용하는 물품 8점과 관련 자료들이 함께 전시된다. 김형선 작가의 해녀 사진 작품은 2012년부터 작가가 직접 제주에서 촬영한 해녀 사진으로 막 물질을 마치고 돌아온 젖은 얼굴과 충혈된 눈, 바닷속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거친 피부의 해녀 모습이 무색 바탕과 대비되어 관객들에게 더욱 강렬히 다가온다. 2016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첫 해외 전시 후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영국 가디언 지 등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인 3월 8일에 개막하여 일제강점기 시대 가정경제의 주체로 성장하며 일제의 경제 수탈에 저항하는 등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던 해녀들의 강인한 개척 정신을 되새기고 한국의 특별한 여성 공동체 문화를 기념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제주 해녀 문화(Culture of Jeju Haenyeo-Women Divers)'는 독립적인 여성인 해녀의 가치 및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상징성, 공동체를 통해 지식과 기술을 전승하는 점, 자연 친화적인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김지희 문화원장은 “문화원 개원 10주년을 맞아 바다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현지 대표기관 호주국립해양박물관과 함께 제주도와 해녀 문화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게 되어 뜻 깊다”라며, “김형선 작가의 인상적인 해녀 사진 작품과 해녀 관련 물품들을 통해 소개될 한국의 독특한 해녀문화와 공동체 정신은 바다를 사랑하는 호주 현지인들에게 큰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개최 소감을 밝혔다. - 일정: 2021년 3월 8일~6월 13일 (매일 10시30분~16시) - 장소: 호주국립해양박물관(2 Murray Street, Darling Harbour) 내 Tasman Light Gallery - 무료 관람 - 웹사이트: www.koreanculture.org.au/haenyeo

  12/03/2021

시드니의 달동네 록스가 역사와 관광의 도시로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시드니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록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정치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지고 왔다. 산업화로 인하여 농촌 인구의 대부분이 도시로 몰리면서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공해 문제, 위생 문제, 주택 문제, 범죄 문제, 빈민가 문제 등 도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비참하였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작업 환경도 열악하였다. 자본가들은 임금이 비싼 숙련된 성인 노동자 대신 임금이 싼 부녀자나 아동을 고용하여 노동을 착취했다.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도시 빈민, 실업자,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 등의 예상치 못한 많은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죄수들이 차고 넘쳐 이들을 자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대안으로 해외에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를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초창기에는 미국으로 보냈으나, 1776년 미국이 독립을 하면서 더 이상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 없게 되었다. Down Under로 향한 필립 총독 1787년 아더 필립(Arthur Philip) 총독의 지휘 하에 11척의 배에 778명의 죄수(192명 여자, 586명 남자)를 포함한 약 1천500명의 인원을 탑승한 첫 함대가 8개월의 항해 끝에 ‘보타니 베이’(Botany Bay)에 1788년 1월 18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필립 총독은 ‘보타니 베이’가 정착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어서 근처 지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1788년 1월 21일, 필립 제독은 맨리(Manly)로 갔다. 그리고 그는 원주민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자신감과 남자다운 행동으로 그곳 이름을 '맨리 코브'로 지었다. “Their confidence and manly behavior made me the name of Manly Cove to this place” 맨리 선착장 바로 옆에 “1788년 1월 21일 맨리에 온 최초의 백인”이라고 새겨진 필립 총독의 기념비가 있다. 1788년 1월 26일, ‘Jackson Port’ 지금의 'The Rocks' 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고, 영국 땅임을 선포하였다. 그는 이곳을 '영국 내무부장관'(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였다. 1788년과 1792년 사이에 3천546명 남자 죄수와 766명의 여자 죄수가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문직 범죄자’(professional criminals)로 정착하는데 적합한 기술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팠고 일하기에 부적절했으며 심한 노동으로 죽어갔다. 1790년에는 음식 문제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그해 6월에 도착한 사람들은 ¼이 병들어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함 ‘Guardian’은 식민지에 도착하기 전에 남아프리카에서 난파되었고, 해군 함정 ‘HMS Sirius’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노퍽 섬에서 난파되었다. 필립 선장은 식량 생산을 위하여 농장을 개간하고,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1791년부터는 조금씩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1793년 2월 16일에 최초로 죄수가 아닌 '자유 정착민'(free settlers)이 도착하였다. 1868년 마지막 죄수 호송선인 ‘Hougoumont’가 서호주(West Australia)에 도착할 때까지 80년 동안 약 16만 2천여 명의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록스 (The Rocks) 지난 1월 8일 목요일,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는 날 ‘록스’(The Rocks)를 찾았다. 록스에는 하루에 두 번씩 'The Rocks Walking Tours'가 있다. 가격은 성인이 $32, 90분 동안 유서 깊은 거리를 걸으며 시드니의 살아 있는 역사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관광코스이다. 우리는 브라이언(Brian) 부부와 함께 동행했다. 브라이언은 1977년 ‘리버플’에서 배를 타고 호주로 이민왔다. 영국에서 호주까지 배로 한 달 정도 걸리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배를 탔다고 한다. 대부분의 죄수 호송선은 항구도시인 ‘리버플’에서 출발했다. 브라이언은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당시 죄수 호송선은 약 8개월이 걸렸다. 가이드는 중년의 여성인 앤(Anne)이 담당했다. 그녀는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우산을 가지고 갈 것을 권했지만 그냥 출발하였다. 그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길을 걸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록스 광장에는 사암(Sandstone)으로 만든 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탑에는 초기 정착을 대표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그려져 있다. 첫 번째로 죄수들이다. 초기 죄수들은 마치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종일 노동을 하고, 특별한 잠자리도 없었다. 1820년에 주정부는 스탬프가 찍힌 노란색 옷을 지급해 주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호주는 죄수가 개척하였고, 뉴질랜드는 간수가 개척하였다.” 그래서 호주를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라고 한다. 호주는 6개 주(state)와 2개의 준주(territory)로 구성되었다. 이중 남호주(South Australia)와 빅토리아(Victoria)는 자유 식민지(free colony)이다. 죄수가 아닌, 자유인이 개척했다고 해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쪽은 병사이다. 첫 번째 함대는 211명의 해병대가 왔다. 이들의 의무는 정착을 도와주고 죄수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영국은 상주하는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1790년 두 번째 함대에 강력한 군사 1백 명을 더 파견하였다. 당시 영국 식민지 중에 가장 큰 부대가 조지 스트리트에 있었다. 1793년, 장교들은 땅을 분할 받아 농지를 만들었다. 병사들은 정착민들과 같은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또 다른 한쪽은 정착민이다. 필립 총독은 계속해서 영국에 경험있는 농부와 기술자 그리고 감독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드디어 1793년에 11명의 자유 정착민이 도착했다. 필립 총독은 해방된 죄수와 병사 그리고 정착민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었다. 1788년부터 1830년 사이에 6만 3천 명의 죄수와 1만 4천 명의 자유 정착민이 호주에 왔다. 죄수들도 정착민이나 병사들과 결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남녀의 비율은 약 8:2였다. 여자들은 금값이었다. 앤은 호주 지폐 20불짜리 두 장을 꺼내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주는 1966년까지 화폐 단위가 ‘파운드’였으나 1966년 2월 14일에 파운드에서 ‘달러’로 바꾸었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는 화폐에 ‘Commonwealth of Australia’로 사용하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 점진적으로 ‘Australia’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주 지폐는 5불 지폐를 제외하고 양면 모두 인물이 있어 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특히 20달러 지폐는 더 그렇다. 20불의 앞면은 호주의 여성사업가인 메리 레이비(Mary Reibey: 1777~1855)이다. 메리는 13살 때 남장을 하고 말을 도둑질하다가 체포되어, 1792년 호주에 왔다. 17살 때 그녀는 준 장교(junior officer)와 결혼했다. 당시에 죄수와 자유인이 결혼할 수 있었다. 메리의 남편인 토마스는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1811년 그가 일찍 죽고 그녀는 사업을 이어받아 당시 가장 부자이고, 성공적인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자선사업가가 되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서 주민들의 존경을 받아 20달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큰아들은 후에 목사로서 정치가가 되어 타스마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이민사’의 ‘사진 신부’가 연상되었다. 사진 신부 (Picture Brides) 2014년 8월, 월미도에 있는 ‘한국 이민사 박물관’을 방문했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해외 활약상과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재외 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 2008년 6월 13일에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이민사는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에 시작된다.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은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하여 일본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이중 19명은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102명 만이 이민선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하와이로 향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May Flower)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한 102명의 청교도 숫자와 동일하다. 그들은 1903년 1월 13일, 갤릭호(S.S. Gaelic)로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당일 '하와이안 스타지'는 한국 이민 노동자들의 하와이 도착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결혼은 초기 이민자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였다.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 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약 700여 명의 ‘사진 신부’는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하다 보니 평균 나이 차이가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대거 입국한 동기는 다양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여성들도 있었으며,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도 있었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전통적인 인습에서 탈피하여 자신들의 꿈을 펼칠 새로운 지평을 찾고자 한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이유로 ‘사진 신부’는 하와이행 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록스의 역사 록스는 ‘시드니 코브’(Sydney Cove) 서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동네이다. 조지 스트리트 (George Street)와 서큘러 키 (Circular Quay) 해안을 따라 천문대 언덕 높이까지 가파르게 솟아 있다. 1788년부터 그곳에 집을 지은 죄수들에 의해 ‘The Rock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호주 원주민인 에버리지니 Cadigal 부족은 이곳을 ‘탈라울라다(Tallawoladah)라고 불렀다. 삼 면이 물로 둘러싸인 록스는 항해, 해상 노동자 및 해양 무역과 관련이 있다. 더 넓은 세계, 새로운 아이디어, 바다의 사람과 물품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다. 죄수들의 마을 1788년에 제1함대가 도착한 후 록스는 죄수들이 사는 지역이 되고, 정부 관리와 민간인 그리고 병사들은 주변환경이 좋은 동쪽 비탈에 살았다. 그들은 초가 지붕, 나중에는 목재 지붕널로 지붕을 덮고 주변의 잔해 돌로 전통적인 토착 주택을 지었다. 정원과 마당을 만들고, 사업을 시작하고, 빵 오븐과 단조를 만들고, 상점과 술집을 열고, 가족을 키웠다. The Rocks의 험준한 지형에서 격자무늬의 거리는 불가능했고, 사람들은 주로 도보로 이동했고 도로도 나무 벽돌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 지역에는 Church Hill (현재 Lang Park)의 남쪽 주변에 석조로 만든 성공회 최고(最古)의 교회인 세인트 필립스교회(St. Philip’s church)가 있다. 나중에 George Street가 된 The Rocks 기슭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과 마을 최초의 병원이 있었다. 물가 맞은편에는 공공 및 개인 부두, 초기 시드니 상인의 창고와 저택이 밀집되어 점차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1792년 죄수로 도착한 역동적인 ‘Mary Reibey’는 록스의 작은 집에서 시작하여 무역과 해운으로 많은 돈을 모아 시드니에 멋진 집을 많이 지었고 대가족을 키웠다. 시드니 페리 중 그녀의 이름을 가진 배도 있다. 록스의 확장 및 통합 1823년까지 약 1천200명의 사람들이 록스에 살았는데, 대부분은 죄수와 조건부로 사면을 받은 사람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1820년대와 1830년대는 상인과 선주들의 주택, 상점, 부두가 생겼다. 1840년 죄수 운송이 끝나고, 1851년에 금이 발견되자 이민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주택 수요가 급증했다. 록스는 이민자들이 첫 번째 발판을 마련하는 곳이다. 개발자와 주민들은 오래된 마당에 작고 평범한 테라스 주택을 지었고, 마구간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었다. 급격한 지역의 변화로 상수도, 쓰레기 및 하수 처리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1843년에 죄수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록스 중심부의 능선을 통과하는 절단 작업에 투입되어 시드니 코브와 달링하버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아가일 스트리트(Argyle Street)를 확장했다. 1840년 이후 더 이상 죄수 수송선이 오지 못하게 되어 노동력이 줄어들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으나, 1859년에 유급 노동력과 화약을 사용하여 결국에는 완성하였다. 시드니의 달동네 록스 록스는 산등성이에 있는 인상적인 주택의 부자에서부터 선장과 상점 주인, 노동자와 표류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고향이다. 그러나 1870년 이후, 이곳에서 돈을 번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록스는 점점 더 노동자들만이 사는 지역이 되었고, 외부인에게는 두려운 우범지역이 되었다. 록스는 시드니의 달동네였다. 록스에는 아일랜드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록스 기슭의 '조지 스트리트'는 시드니 최초의 ‘차이나 타운’이 형성된 곳이다. 이 지역에는 전 세계에서 선원들이 몰려왔고, 그 중에 일부는 이곳이 좋아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정착했다. 록스는 독특한 바위와 가파른 지형과 뺨을 맞대고 있는 것과 같은 비좁은 집들은 지역 주민들에게는 친숙하고 편안했지만, 시드니가 발전하면 할수록 문제의 지역이 되었다. 전염병의 도래와 록스 1900년 시드니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모든 시선은 록스로 향했다. 전염병은 배를 타고 해안으로 온 쥐벼룩에 의해 전염되었기에 록스를 전염병의 근원지로 생각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염병은 지역 발전의 촉매제가 되었다. 주정부는 1900년 달링하버 주변 지역 전체를 개선하였고, 주민들은 공공 세입자가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주정부는 해안가 전체를 철거하고 재건하였다. 주거 지역에서도 수백 채의 집이 철거되어 부두 근처에 거주해야 하는 물가 노동자 가족을 위한 숙소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주정부는 오래된 집과 거리를 쓸어버리고 새롭게 개발하려고 했다. 1920년대에 시드니 ‘하버브리지’(Harbor Bridge) 건설이 진행되면서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지고, 록스를 연결하는 거리가 사라지면서 평생 록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1932년 ‘하버브리지’의 완성으로 교통의 흐름이 우회되면서 The Rocks는 잊혀진 지역이 되었다. 하버브리지를 건설할 당시 세계는 대공항의 늪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공공 사업 프로그램을 확장하는 뉴딜 정책으로 공항을 극복하였다. 미국의 랜드마크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931년), 후버댐(1935년), 금문교(1937년) 등은 뉴딜 정책의 산물이다. 사관학교 동기 중에 ‘Norman Grainger’ 사관이 있다. 그는 영국의 ‘Middlesbrough’ 출신이다. 그를 통해서 ‘하버브리지’의 철제 구조물이 그의 고향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버브리지는 대공황 시대의 승리로 간주되어 ‘철폐’(Iron Lung)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0년에는 동부 지역의 전체 철거 계획이 나오면서, 록스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록스 지역의 존폐를 두고 지역 주민과 정부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주정부는 록스를 시드니의 자존심에 대한 얼룩이라 생각했고, 테라스 하우스는 슬럼 건물이라 낙인을 찍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슬럼 거주자로 간주하였다. 1960년 12월에 주정부는 ‘뉴욕 타임즈’에서 록스 지역의 판매를 광고하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록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Rocks) 1970년, 록스는 맥기(McGee) 대령이 이끄는 시드니 코브(Sydney Cove) 재개발 당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맥기 대령은 주민들을 시드니 외곽 서부 지역으로 효율적으로 이전하고, 이 지역을 고층 상업 구역으로 재개발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록스 사람들은 이사를 원하지 않았고, 또한 록스가 파괴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일치단결하여 ‘Rocks Residents Action Group’을 결성하였고, BLF (Builders Labourers Federation)의 도움으로 1971 년과 1974 년 사이에 ‘Green Bans’의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폭력 투쟁까지 불사했다. 후에 이를 ‘록스의 전투’(The Battle of The Rocks)로 알려지게 되었다. Green Bans 운동의 목적은 기존의 건물과 환경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불도저로부터 역사적인 장소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지불해야 했다. 이제 록스는 노동자 계급이 사는 지역이 아닌, 역사와 관광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록스 사람들이 고령화되어 사망함에 따라 주택은 상점, 카페 및 갤러리가 되었다. 오래된 ‘Argyle Bond Stores’는 이미 수제 가죽, 비누 및 양초의 향긋한 향기와 함께 ‘Argyle Arts Centre’로 전환되었다. 거의 2백 년 동안 무시당했던 록스는 1974년에야 지명위원회에 ‘The Rocks’로 등재되었다. 오늘날의 록스 록스는 국가유산이 되었다. 인근 지역사람들을 말할 것도 없고, 역사와 쇼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지역이 되었다. 매년 9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대부분은 쇼핑, 식사, 산책을 하러 오는 관광객과 당일치기 여행자이지만 일부는 순례자이며 록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록스의 주요 활동은 상업 개발, 마케팅 및 관광이며, 가끔 비평가들은 의미없는 '유산 테마파크'로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관리자인 ‘Sydney Harbour Foreshore Authority’는 유산 복원과 고고학 연구 및 역사적 해석 등의 중요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주택, 창고, 술집, 상점, 몇 개의 공장 등 남아있는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건물과 가파른 계단과 좁은 길 등도 정비하고 있다. 록스는 시드니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와 관광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21/02/2021

시드니의 관문인 Q Station의 발자취를 찾아서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52년 동안 검역소 운영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시드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브라질의 ‘리오데자이네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이다.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하얀 조가비 같은 오페라 하우스와 시드니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옷걸이 같은 하버브리지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시드니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1788년 1월 18일에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ip)이 11척의 배에 죄수 788명을 포함한 1천500여 명과 함께 1770년에 '쿡 선장'(Captain Cook)이 다녀갔던 ‘보타니 만’에 도착했다. 그곳이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이동한 곳이 지금의 ‘록스’(Rocks) 지역이다. 아서 제독은 1월 26일 록스에 영국 국기를 높이 올리어 영국령임을 선포하고, 당시 '영국 내무부장관' (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고 NSW 주 1대 총독이 되었다. 시드니 항으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들은 노스 헤드(North Head)와 사우스 헤드(South Head) 사이를 지나야 한다. 시드니 항은 바다의 수심이 깊을 뿐 아니라, ‘노스헤드와 사우스헤드’가 천연의 방파제 역할을 해서 마치 거대한 호수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노스 헤드 (North Head) 2020년 11월 17일 11시, 노스헤드 검역소를 찾았다. 가이드인 질(Jill)은 안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땅의 주인인 에버리지니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간단한 예식을 치렀다. 노스 헤드는 에버리지니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여자들은 이곳에 올 수가 없고, 부족의 치유 의식과 매장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1788년 1월 29일 John Hunter 대위와 William Bradley 중위가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조사하였다. 원주민 부족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쿠링가이 지역의 일부였다. 맨리(Manly)란 이름은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lip)에 의하여 지어졌다. 인근 지역을 조사하러 배를 타고, 1월 21일 맨리에도 갔다. 그곳에 그는 처음 접하게 되었다. 아서 제독은 "그들의 자신감과 남자다운 행동이 그곳을 '맨리 커브'라고 이름 짓게 하였다."(Their Confidence and Manly Behavior made me the name of Manly Cove to this place)라고 했다. 초대 총독이 된 아서는 에버리지니의 언어와 풍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88년 12월 아서 총독은 맨리에 사는 Arabanoo라는 청년을 잡아와 시드니의 Lemsi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였다. 1789년 11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Bennelong과 Colebee를 납치해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탈출했다. 다음 해에 아서 총독은 Bennelong의 친구인 Willemering을 만나, Bennelong에게 시드니에 와서 살 것을 권유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 사이는 가깝게 되었다. 아서 총독은 현재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지역의 이름을 Bennelong Point로 명명하였다. 1792년 베네롱은 아서 총독과 함께 영국을 방문하여, 1795년에 호주로 돌아와 1813년에 죽었다. 아서 총독은 에버리지니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쿼런틴 (Quarantine) 시드니 항 입구의 오른쪽에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인 맨리(Manly)가 있다. 맨리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노스헤드(North Head)로 올라가다 보면 중턱에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차를 입구에 세우고 15분 정도 걸어가면 Q Station이 나온다. 과거에는 검역소(Quarantine Station)였으나, 현재는 Q Station이라 부른다. 이곳은 1832년 8월 14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시드니로 입항하는 선박들을 격리하고 검사했던 곳이다. 쿼런틴(Quarantine)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검역(檢疫)이란 의미로 사용되지만 차단 혹은 격리(隔離)라는 뜻이기도 하다. 방역이라고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방역 기간도 쿼런틴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40일을 뜻하는 라틴어 Quadraginta에서 유래되었다. 단어의 어원은 당시 해양 강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였던 라구사의 항구 도시 두브로브니크에서 시작되었다. 1377년에 이탈리아의 라구사에서는 페스트 발생지역에서 오는 모든 선박과 여행자들을 항구 인근의 섬에서 30일 동안 격리시켰다. 1448년 유럽에 또 다시 페스트가 창궐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페스트 확산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 항구로 입항하는 무역선에 탑승한 선원들을 40일 동안 배에 격리(Quarantine)하였다. 40일의 격리 기간은 의학적인 숫자가 아니라 성경적인 숫자이다. 기독교가 국교였던 유럽에서 40은 의미있는 숫자이다. 노아의 대홍수에서 폭우는 40일 동안 비가 내렸고, 요나는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을 지내고,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고, 엘리야는 40일을 걸어 호렙산에 올라갔고, 예수도 세례를 받은 후 40일을 광야에서 머물며 단식했고, 부활 후에도 40일간 세상에 머무른 후 승천하셨다. 당시에는 격리 기간이 무조건 40일이었지만, 현대는 전염병에 따라 격리 기간이 다르다. ‘코로나 19’의 경우는 2주(14일)이다. 검역소 (Quarantine Station) 의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전염병에 대처하는 최상의 방법은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1788년 1월 26일 영국의 식민지가 된 호주에는 계속해서 유럽 인구가 유입되었다. 오랜 항해 중 병든 사람들을 따로 격리할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1828년 Bussorah Merrchant호가 항해 중에 천연두가 발생하자 노스 헤드(North Head)에 정박하여 격리하였다. 5년이 지나고 1833년 2월, 노스 헤드는 공식적으로 검역 장소가 되었다. 이후로 항해 중 병이 발생된 선박은 이곳에 격리하여 조사하고, 의사의 완치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머물러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무리없이 진행되었으나 상선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상선은 시간이 곧 돈이다.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데 만약 격리를 당하게 되면 재정적으로 엄청난 소실이 발생한다. 선장은 병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고하지 않고 바로 입항하기도 했다. 1832년 NSW 주 정부는 1832년에 검역법을 통과시켜 배의 책임자는 반드시 보고를 의무화하였다.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자를 탄 ‘Lady MacNaghten’호는 10주간 격리되었다. 1837년 2월 Lady MacNaghten 호는 항해 중 54명이 죽었고, 최소한 90명의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되었다. 병든 사람은 배에 남아 있고, 건강한 사람들은 육지에 올라와서 텐트에 머무르게 하였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3월 셋째 주가 되어서야 육지로 갈 수 있었다. 오랜 격리 기간으로 인해서 손해 배상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자, 1837년 10월 빠른 검역을 위하여 시설을 보완하고 확충하였고 다음 해 5월에 완공하였다. 해변은 승객과 짐을 상륙하여 통과하는 곳, 산 쪽은 두 곳으로 분리하여 해변이 보이는 쪽은 건강한 사람, 반대쪽인 남쪽 비치가 가까운 언덕에는 환자를 배치하였다. 건강한 사람들을 위하여 4개의 목조 집이 있는데 한 집의 수용 능력은 25명이었다. 근처에 환자 32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지었다. 감역 지역은 12 혹은 13개의 원추모양의 돌에 의하여 구분이 되었다. 두 지역 사이에는 군인들이 경비를 섰고, 격리된 사람들은 돌 선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1838년 한 해에만 이민선 5척이 격리되면서 수용 인원이 차고 넘치자 영국 정부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1838년 말부터 모든 이민자들은 반드시 건강진단을 받고, 천연두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법을 공포하였다. 법이 실행되고 검역소의 일은 현저하게 줄었다. 1840년 1840년 죄수 수송선이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식민지의 경제 불황은 1841년 말부터 1847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검역소는 거의 폐쇄된 상태였다. 1853년 1월 문제의 Beejapore호가 입항하면서 활동이 재개되었다. 2층인 배는 항해 중 홍역과 성홍열로 56명이 죽었고, 도착 후 검역소에서 62명이 죽었다. 1천여 명의 승객은 90여 개의 텐트에 나누어서 배치되었다. 숙식과 의료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자 검역소는 대대적으로 시설을 확충하게 되었다. 이때 제2의 묘지가 개발되었다. 증기선이 발명되어 호주까지의 항해 시간이 짧아지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호주로 이민 오게 되었다. 검역소에는 사회적 계급의 구분이 없었지만, 1등석 승객들의 항의로 정부에서는 1873년부터 1876년까지 1등석 승객을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하였다. 1881-1882년 천연두가 성행할 때는 천연두에 걸린 시드니 주민 104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열악한 시설로 인하여 올바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자, 1882년 1월 보건당국에서는 ‘건강위원회’(The Board of Health)를 설치하여 격리를 포함한 다양한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이때 1881년에 제3의 묘지가 개발되었다. 1901년 1901년 호주 연방정부가 탄생하면서 검역과 이민 등은 연방정부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1909년 7월이 되어서야 연방정부는 호주 전역의 검역소의 업무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유 중의 하나는 NSW 주 정부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검역을 연방정부로 이관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연방정부의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은 검역소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인종차별을 당했을 뿐 아니라, 병의 원인을 중국인에게 돌렸다. 흑사병 때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된 것처럼, 천연두(Smallpox)를 ‘Chines fox’라고 부르며 중국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필자가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공포의 불주사’를 맞은 경험이 있다. 어릴 때 맞은 불주사의 흔적이 어깨에 남아 있다. 불주사는 하나의 주사기로 여러 명을 접종하기 위해서 알코올 램프의 불로 대충 바늘을 소독하고 다시 접종해서 ‘불주사’가 된 것이다. 불주사는 천연두와 BCG라고 불리는 결핵 백신주사이다. 최근 코로나가 발생되면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BCG 결핵 백신 접종과 코로나19의 사망률과의 연관성을 검증하기 위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일부 나라에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연구 내용에 따르면, BCG 접종을 시행 중인 55개 국가는 100만 명당 사망자 수는 0.78명에 그친 반면, BCG 접종을 하지 않는 5개국(이탈리아, 미국, 레바논, 네덜란드, 벨기에)은 16.39명으로 상대적으로 무려 21배나 높게 나타났다. 검역소가 연방정부로 이관이 되고, 1913년 천연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14년 1월까지 1천42명이 검역소에 수용되었고, 1912년과 1920년 사이에 검역소는 세계적인 기준에 맞추어 시설 및 장비 그리고 숙박 시설들을 근대식을 바꾸었다. 검역소는 직원을 포함하여 1천208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거듭났다. 1918년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세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독감이 뉴질랜드에 상륙한 것을 알고 호주는 입항하는 모든 배는 반드시 검역소에서 7일간 격리해야 함을 공포하였다. 1918년 10월 RMS Niagara 호가 첫 번째로 격리되었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3월까지 110척의 승객 1만 2천 명 이상이 노스 헤드 검역소에 격리되었다. 동시에 13척이 격리된 적도 있었다. 당시 15척의 배가 감염되었고, 70명이 죽었으며 이 중에 검역소 직원도 있었다. 검역소에서 일하던 27세의 Annie Egan 간호사도 죽었다. 백신을 접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 다음 날 Medic호의 병사들을 돌보다가 1918년에 11월에 전염되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기 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연방정부는 감염 위험 가능성 때문에 신부가 검역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고,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12월 10일에 허락을 하였다. 하지만 12월 3일,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919년 1월 스페인 독감은 검역소를 넘어 시드니 지역 주민도 감염되었다. 가족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검역소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신문을 통해서만 검역소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919년 1월 초 1차 대전 종전 후 귀국하는 병사들 중 2천500명이 격리되었다. 격리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검역소의 질서를 위해서 경찰은 물론이고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집으로 갈 수 없는 병사들은 답답한 하루하루를 그곳에서 보내야만 했다. 참고로,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교전국들은 병사들이 독감으로 죽어도 사기 저하가 될까 두려워 서로 침묵하고 있었다.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은 독감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독자들은 독감이 마치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처럼 착각하여, 독감을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1920년 의학의 발전으로 1920년 이후로 검역소는 아주 다른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스페인 독감을 마지막으로, 1921년부터 1975년까지 단지 55척만 격리되었고, 1925년에 결핵 걸린 선원 한 명과, 1962년간에 문제가 있었던 승객 한 명이 죽은 것이 전부였다. 검역소는 낚시, 수영, 레크리에이션 등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1930년 Aorangi호의 선원 한 사람이 천연두 증세로 배가 격리되었을 때 승객 중 Archibald Howie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곳은 정말 좋은 곳입니다. 우리가 격리되었다는 사실만 잊고 있다면, 휴가를 지내기에 딱 좋은 장소입니다.” 1935년 1월 Aorangi호가 다시 격리 당했을 때, 승객 중 Elaine Reid는 “우리는 매일 춤을 추고 테니스도 치고 비취에서 수영도 하고, 아들의 생일 잔치도 있었고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고 했다. 2차 대전 동안 이곳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건물은 낡아지고 전쟁 동안 건물은 파괴되었지만, 물자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시설을 개선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단지 12척의 배만 격리되었다. 예방 의학과 치료 의학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대부분의 승객들은 건강하게 시드니 항에 도착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설은 낙후되어 가고 정부는 축소운영을 하게 되었다. 1970년 초기에 검역소 직원은 8명으로 감축되고, 격리된 사람도 한두 명뿐이었다. 정부는 엄청난 비용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1974년 성탄절 때 다윈에 닥친 태풍으로 집을 잃은 213명의 피난처로 사용하였고, 1975년에는 3개월부터 10살까지의 베트남 고아 215명 중 115명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77년 정부는 멜번 페어필드에 전염병 전문 병동을 세울 것을 결정하고, 마침내 1984년 3월 16일 검역소를 폐쇄하고 검역소의 소유권은 연방에서 주 정부로 이전되어 시드니 하버 국립공원의 일부가 되어, 국립공원 및 야생동물서비스(NPWS)가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Q Station 1984년, 시드니 하버 국립공원으로서 이전되고 첫 10 년 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물과 주변 문화 경관이 파손되었다. Q Station의 목조 건물들은 19세기, 벽돌 건물은 20세기에 지은 것이다. 1990년대에 NPWS는 쇠퇴를 막을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창의적으로 지역을 개발할 수 있는 민간 투자를 유치하였다. 2006년 ‘Mawland Group’은 NPWS와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마우랜드 그룹은 기존의 건물을 훼손하지 않고 개발하여 원래 건물을 현재 4.5 등급의 숙박시설로 개발하고, 5명에서 18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 Boilerhouse Restaurant & Bar의 고급 식당과 방문자 센터와 역사 전시관을 열었다. 드디어 2008년 4월 25일 Quarantine Station 대신 Q Station이란 이름으로 교육과 휴식의 장소로 거듭나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21/02/2021

시드니 최고의 휴양지, 북부 해변의 관문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많은 여행객들과 피서객들이 일년 내내 즐겨 찾는 맨리 해변(Manly Beach)은 시드니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 중하나이다. 맨리 해변에는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있고, 주변에는 환상적인 카페들과 맛있는 식당들이 있으며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점들도 많이 있다. 맨리 해변 주변에는 고급 호텔들을 비롯해서 많은 숙박시설들이 있다. 생활필수품을 구입할 수 있는 콜즈(Coles) 슈퍼마켓도 있다. 주말에는 야시장도 서고,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는데, 최근에는 코비드-19 때문에 취소되어 많이 아쉽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맨리를 방문해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또한 유명한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을 걸으며 맨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해양도시인 맨리시는 비슷한 환경을 가진 부산에 있는 해운대구와 1994년 7월 자매결연을 체결했으나 그동안 특별한 교류 활동은 없었고, 2009년 5월 맨리시와 영도구는 우호도시(Friend Cities) 협정 체결을 맺고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교류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다. 영도구와 맨리시는 격년제로 양국 직원들의 교환 파견 직무 훈련을 실시해 오고 있으며, 2010년 영도 구청장 방호시에는 최초로 맨리시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갖기도 했다.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 (Manly North Head Walk) 맨리를 방문해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은 환상적인 바다 전망을 제공하고, 시드니의 군사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숲 지대를 탐험하고, 검역소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는 훌륭한 둘레길이다.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하는 이 둘레길에는 높은 언덕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또한 5월과 10월 사이에 방문한다면 맨리 바다에서 고래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잡을 수 있다.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의 총 길이는 약 12km이고, 높이는 약 121미터이다. 둘레길 난이도는 보통이다. 둘레길을 완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시간 정도이고, 중간에 카페에 들려 식사를 할 경우 1~2시간을 더 추가하면 된다. 시드니 시내(Circular Quay)에서 페리(ferry)를 타고 맨리를 방문한다면 맨리 선착장부터 둘레길 걷기를 시작하면 된다. 둘레길 중간마다 카페들이 있기 때문에 음료수나 음식물을 일부로 구입해서 들고 다닐 필요는 없다. 하지만, 둘레길 중간마다 아름다운 해변들이 있기 때문에 수영복과 수건을 가져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빠른 시간 내에 둘레길 완주가 목표라면 짐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 서퍼들의 천국, 맨리 비치 맨리(Manly)란 이름은 아더 필립 선장(Captain Arthur Phillip)에 의하여 지어졌다. 호주에서는 1월 26일을 ‘Australia Day’로 지킨다. 일반적으로 필립 선장이 11척의 배를 이끌고 호주에 도착한 날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처음 도착한 날은 1788년 1월 18일 보타니 베이(Botany Bay)이다. 필립 선장은 도착 후 며칠 동안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1월 21일 그는 맨리에도 갔다. 그곳에서 그는 원주민을 만나게 된다. 필립 선장은 "그들의 자신감 넘침과 남자다운 행동이 그곳을 '맨리 커브'라고 이름 짓게 하였다."(Their Confidence and Manly Behavior made me the name of Manly Cove to this place) 라고 서술했다. 맨리에 가면 선착장 바로 옆에 필립 선장이 ‘1788년 1월 21일 맨리에 온 최초의 백인’이라고 기록된 기념비가 있다. 필립 선장은 여러 곳을 탐사하다, 1월 26일 영국령 식민지로 선포하고 지금의 Rocks 지역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그는 당시 '영국 내무부장관'(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였다. 맨리(Manly)는 시드니의 동북부 해안에 위치해 있다. 맨리 비치는 시드니 시내에서 페리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지만, 번잡한 시드니 도심과 마치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다. 시드니 하버 국립공원(Sydney Harbour National Park)의 '노스 헤드(North Head)'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시드니 하버'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고, 펭귄 코브(Penguin Cove)에는'꼬마 펭귄(little penguin)' 서식지도 있다. 맨리 선착장에서 맨리 해변으로 걸어가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많은 서퍼(surfers)들이 맨리 바다에서 즐겁게 서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64년에는 세계 최초로 서핑 대회가 이곳 맨리에서 열렸다고 한다. 이후에 맨리는 서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고 서핑 보드를 포함해 서핑에 관련된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과 서핑 클럽과 서핑 스쿨이 생겨났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맨리 해변에 위치한 맨리 서핑 스쿨을 통해 서핑을 배우고 있다. 쉘리 해변 이제 해변을 따라 쉘리 해변(Shelly Beach)쪽으로 걸어가면 페어리 바우어 바다 수영장(Fairy Bower Rock Pool)이 나온다. 어린이들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수영을 하며 놀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바다 수영장 앞은 해상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어서 많은 물고기들을 포함한 다양한 해상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해상 생물들과 아름다운 바다 속을 구경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거나 스노클링을 한다. 바다 수영장 근처에 스쿠버 다이빙 교실이 있어 원하면 스쿠버 다이빙을 배울 수도 있다. 또한, 이곳에 보트 하우스라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는데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쉘리 해변은 비교적 파도가 세게 치지 않아서 어린이들이 물놀이 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말이면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쉘리 해변에 나와서 물놀이를 하거나 해변에 누워서 선텐(suntan)을 한다. 쉘리 해변을 지나 조금만 걸어가면, 쉘리 헤드 전망대(Shelly Head Lookout)가 나온다. 이곳에 올라가 정면을 바라보면 넓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고, 옆면을 바라보면 맨리 해변의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진다. 한편, 만약 자동차를 타고 맨리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쉘리 해변 뒤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좋다 (Bower St, Manly). 전망대에 내려와 주차장을 건너 블루 피시 길(Blue Fish Track)로 걸어가면, 숲길이 나온다. 숲길을 걷다 보면 간간이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약 300미터를 걸어가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다. 전망대에서 출발해 약 100미터를 가면 구멍 뚫린 돌담이 나온다. 이곳부터는 강아지 출입이 금지된다. 돌담에 뚫려진 구멍을 지나면 옛날에 사용되었던 군사 구역으로 들어가 계단을 통과하면 멋진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나온다. 계속 걷다 보면 옛날 군사 시설물들이 보일 것이다. 노스 헤드 페어팩스 전망대 이 시설물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을 지나 몇 백 미터 더 걷다 보면 다양한 새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을 지나면, 오래된 군대 건물에 도착하게 된다. 건물 안으로 들어 갈 수는 없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며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군대 건물을 지나 곧바로 정상에 있는 전망대로 갈 수 있지만, 옆에 있는 샛길로 가 늪지대를 경험할 수도 있다. 이 샛길을 걷다 보면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약 400미터 정도 늪지대를 걸으면, 다시 자갈 길이 나온다. 이곳에는 총 터널(Gun Tunnels)이라 불리는 터널이 나오는데, 이곳은 가이드 투어를 신청할 경우에만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호주 참전 용사 기념길이 나온다. 이 길에 깔려 있는 블록에는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속해서 포장된 도로를 따라서 맨리 노스 헤드의 가장 높은 전망대인 페어팩스 전망대로 걸어 가면, 왓슨스 베이의 절벽이 보이고, 하버 브릿지를 포함한 시드니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페어팩스 전망대는 시드니 최고의 전망대로서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곳 주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전망대 입구에 있는 벨라 비스타 카페(Bella Vista Café)에서 식사를 하거나 음료수를 마시면 좋을 것 같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다 풀릴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페어팩스 전망대(Fairfax Lookout)와 호주 참전 용사 기념길(Memorial Walk) 등은 지난 10월 17일 밤 산불로 인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 가는 길에 샛길로 접어 들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방문해 볼 수도 있다. 카페를 지나 버스 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Hole in Wall Track)을 따라 가면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할 수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나와 조금 내려 가면 왼쪽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은 노스 헤드 검역소(Quarantine Station)로 가는 길이다. 노스 헤드 검역소 Q-Station은 호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검역소는 현재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시드니 하버 국립 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Q-Station에는 즐길 거리가 너무 많다. 수영, 스노클링, 카약, 수풀 산책을 하고 간단히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가족과 함께 호주 수풀의 상쾌하고 회복력있는 아름다움과 바닷물 공기를 경험하기에 완벽한 장소이다. Q-Station은 광대하고 역사적인 환경으로도 유명하다. 이 건물은 1984년까지 질병에 걸린 초기 이민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1832년에 세워졌다. 오늘날까지도 Q-Station은 여전히 ​​호주에서 가장 유령이 많은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밤에 잠을 자고있는 사람들에게 유령 투어를 제공한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검역소이지만, 방문할 수 있다. 이곳 검역소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창간 31주년 특집으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검역소에서 나와서 맨리 선착장으로 내려 가다가 콜린스 비치 로드(Collins Beach Road)로 걸어가면 콜린스 플랫 길(Collins Flat Track)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콜린스 해변이 나온다. 콜린스 해변과 이스트 맨리 코브 해변 작은 해변이지만, 주변이 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경치가 아름답다. 이 해변에는 강아지를 데려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곳에 서식하는 펭귄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 해변은 일출부터 일몰까지만 이용이 허락된다. 펭귄을 보호하기 위해 밤에는 출입이 제한된다. 콜린스 해변 옆에는 리틀 맨리 해변(Little Manly Beach)이 있다. 이곳도 규모가 작은 해변이지만, 안전하게 수영할 수 있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맨리 선착장으로 걸어 오면, 이스트 맨리 코브 해변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만이어서 파도가 낮아 안전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다. 이 해변 바로 옆이 맨리 선착장이다. 이렇게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을 완주하고 페리를 타고 시드니 시내로 돌아갈 수 있다. 이번 여름 휴가 때 시드니에 위치한 맨리 해변으로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해변에서 시원한 물놀이를 하거나, 맨리 노스 헤드 둘레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역사적 시설물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해산물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번 여름에는 맨리 해변에서 추억을 만들어 보자.〠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21/02/2021

주말에 역사 여행을 떠나 보세요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이번 호는 시드니 근교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나 개척자 마을’(The Australiana Pioneer Village)과 217년 전에 세워진 에벤에셀교회(Ebenezer Church)를 소개하려고 한다. 또한 티자나 포도원(Tizzana Vineyard) 과 쥬블리 포도원(Jubilee Vineyard)도 소개하려고 한다. 1 오스트레일리아나 ‘개척자 마을’ (The Australiana Pioneer Village) 시드니에서 윈저 로드(Windsor Road)로 계속 직진하면 혹스베리 강을 건널 수 있는 뉴 윈저 다리 (New Windsor Bridge)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후 라운드 어바웃 (Roundabout)에서 우회전을 해 윌버포스 로드 (Willberforce Road)를 따라 가면 오스트레일리아나 ‘개척자 마을’이 나온다. ‘개척자 마을’의 역사 ‘개척자 마을’이 위치한 땅은 호주 개척 초기인 1797년에 윌리암 맥케이(William MacKay) 씨가 소유했었다. 그 이후, 1809년에 조슈아 로즈(Joshua Rose)씨가 이 땅의 일부를 구입해서 소유하게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150여년 동안 이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마지막 로즈의 후손 인 존 로즈(John Rose) 씨는 1961 년에 사망했고, 앤드류 맥라크란(Andrew McLachlan)씨가 이 땅을 구입해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는 혹스베리 지역의 역사적 유산들과 유물들을 보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 땅을 구입했다. 1967년에 그는 ‘개척자 마을’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을 자신의 ‘개척자 마을’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여러 건물주들과 많은 사람들이 ‘개척자 마을’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브라이언 부쉘(Brian Bushell) 씨는 오래된 건물의 철거와 이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맥그라스 힐(McGraths Hill)에서 작은 상점을 이전해 왔다. 다른 사람들은 리버스톤 가게(Riverstone General Store)와 잭 그린트리(Jack Greentree)의 차고를 ‘개척자 마을’로 옮겨 왔다. 한편, ‘개척자 마을’은 정식으로 NSW 정부에 등록이 되었고 1970년 11 월 29 일에 문을 열었다. 이날 열린 개장 행사에는 주 정부 교육부 에릭 윌리스 (Eric Willis) 장관이 참석했다. 한편, ‘개척자 마을’을 세운 앤드류 맥라크란(Andrew McLachlan) 씨가 54세로 1971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해는 ‘개척자 마을’에 있는 교회 건물 주위에 뿌려졌고 부인과 함께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그의 꿈을 지지하기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2년에 그들의 도움으로 트로피카나 호텔(The Tropicana Hotel)과 리버스톤 경찰서(Riverstone Police station) 건물도 ‘개척자 마을’로 옮겨졌다. 1984년 12월에 혹스베리 시의회는 ‘개척자 마을’을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개척자 마을’의 땅과 모든 시설물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혹스베리시 차원에서 ‘개척자 마을’을 관리하고 보수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혹스베리시는 ‘개척자 마을’의 운영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혹스베리시는 1995년부터 2000년 사이에 여러 민간 단체에 ‘개척자 마을’을 임대해 운영했지만, 재정적 손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2002년부터 ‘개척자 마을’은 문을 닫게 되었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주로 자원봉사자들이 관리를 하게 되었다. 한편 2002년도에 ‘개척자 마을’이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의 공동 재산으로 존속되도록 돕고, ‘개척자 마을’에 있는 모든 건물들과 물건들을 관리하기 위한 ‘오스트레일리아나 개척자 마을을 위한 지역사회 단체’(The Australiana Pioneer Village Ltd)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개척자 마을’을 돌보고 있으며, 2010년도에 이 단체는 혹스베리시 정부로부터 정식적으로 ‘개척자 마을’ 운영권을 임대 받았다. 이 단체는 2011년 1월 26일에 ‘개척자 마을’의 문을 다시 열었고, 교육 프로그램 등을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개척자 마을’에 있는 건물들 ‘개척자 마을’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다. ‘미첼의 작은 집’(Mitchell Cottage)은 1899년에 건축된 목재 건물이다. 어언 미첼(Ern Mitchell) 씨의 이름을 따서 ‘미첼의 작은 집’이라고 부른다. 그는 ‘개척자 마을’ 주변의 도로들을 건설하는데 많은 수고를 했다. ‘개척자 마을’에는 은행 건물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나 은행’(Bank of Australiana)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1800년대의 ANZ 은행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 건물 안에는 오래 전에 은행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건물들 이외에도 19세기에 지어진 간이역, 우체국, 상품점, 여관, 학교, 경찰서, 대장간, 마구간, 헛간, 농장 건물 등이 있다. 또한 1890년에 세워진 성 마태 교회 (St. Matthews Church) 건물도 있다. 자녀들과 함께 200여년 전의 ‘개척자 마을’로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관람 요일: 매주 주일, 공휴일 (Anzac Day 제외), 학교 방학 때 화요일과 수요일 (1월은 제외)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4시 △관람료: 어린이 $3, 성인 $5, 5세 미만 무료 가족(성인2명, 어린이 2명) $15 △기타: 간이 기차와 마차 승차 비용은 별도임 △주소: 10 Rose Street, Wilberforce △문의: (02) 4575 1777 △이메일: contact@theapv.org.au △홈페이지: www.theapv.org.au 2 에벤에셀교회 (Ebenezer Church) 호주 최초로 세워진 에벤에셀교회는 1803년에 영국에서 호주로 온 사람들이 혹스베리 지역에 농장을 개척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 초기부터 매 주일마다 큰 나무 아래에 모여서 야외 예배를 드리다가 안델(Arndell)과 오웬 카바노우(Cavanough) 박사의 집에서 5년 동안 예배를 드린 후 7명의 다른 가족들과 함께 1808년 9월 22일에 성약을 맺었다. 그들은 그들은 선교단체를 조직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청소년들에게 성경 교육을 실시했으며 교회와 학교를 짓고 그들의 신앙을 촉진하기 위해 목사를 부르기로 동의했다. 1809년에 그들은 영국에 있는 런던 선교회에 목사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1824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소속인 존 던모어 랑 (John Dunmore Lang) 목사가 이 교회를 방문해 성찬 예배를 진행하였다. 또한 이때 앤드류 존스톤(Andrew Johnston) 씨가 장로로 선출되었다. 에벤에셀교회에 처음으로 부임한 목사는 존 맥가아비(John McGarvie) 목사이다. 그동안 교회를 돌보아온 평신도 지도자들은 모든 권한을 맥가아비 목사에게 이양했다. 당시 약 15개의 개척자 가정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장로교로 시작한 이 교회는 170년 가량을 호주장로교단 소속으로 있다가 1977년 호주연합교단이 창설될 때에 연합교단에 가입했다. 교회 건물은 두 개의 커다란 공간으로 분리되어 하나는 기숙사 학교와 또 하나는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한편, 에벤에셀교회는 지난 2009년 6월 22일 설립 2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다. 이때 많은 지역 주민들이 200년 전의 복장을 준비해 입고 나와 예배를 드리며 개척 초기의 모습을 재연했다. 에벤에셀교회를 방문해 호주 개척 초기 시절에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운 믿음의 선배들의 자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주소: 95 Coromandel Rd, Ebenezer NSW △문의: 0438 777 215; 02 4579 9235 △이메일: tdbrill@ebenezerchurch.org.au △홈페이지: ebenezerchurch.org.au 3 티자나 포도원 (Tizzana Vineyard) 에벤에셀교회 인근에 위치한 티자나 포도원은 토마스 피아스치(Thomas Fiaschi) 박사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피아스치 박사는 1853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자랐고, 22세에 호주로 이주해 외과 의사로 명성을 쌓았다. 1876년부터 혹스베리병원에서 외과 의사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1년 육군에 군의관으로 입대해, 1896년부터 1900년까지 남아프리카의 야전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많은 수술들을 집도했다. 피아스치 박사는 의술뿐만 아니라 포도 재배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포도 재배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윈저(Windsor) 지역에 땅을 구입해 포도 농사를 짓기도 했다. 1887년에 그는 티자니 포도원 땅을 구입해 포도를 심고 양조장을 건설하였다. 피아스치 박사는 외과 의사로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자로 명성을 떨쳤고, 포도주 관련 대회에서도 수상을 많이 했다. 1927년 피아스치 박사가 사망한 이후에도 25년 동안 포도원이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포도원과 양조장이 폐허처럼 변했다. 1969년에 피터(Peter)와 카롤린(Carolyn) 씨가 다시 포도원과 양조장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고품질의 포도주가 이곳에서 생산되어 판매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포도원 숙소를 빌려주기도 한다. △주소: 518 Tizzana Road, Ebenezer △운영시간: 월~금: 예약 필수/주말, 공휴일 12시~오후 5시 △문의: (02) 4579 1150 △홈페이지: http://tizzana.com 4 쥬빌리 포도원 (Jubilee Vineyard Estate) 쥬빌리 포도원은 티자나 포도원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호주 개척 초기인 1821년에 벤자민 커완 (Benjamin Kirwan)씨는 이 땅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는 이 땅을 개척해 옥수수와 밀을 재배하는 농장을 만들었다. 1825년에는 옥수수와 밀을 제분하기 위해 방앗간도 세웠다. 1835년에는 증기기관으로 운영되는 새로운 방앗간을 건축했다. 그는 새로운 방앗간을 건축하기 위해 이 땅의 돌들을 걷어 내고 땅을 잘 정비했다. 1882년 후반에 피아스치 박사가 이 땅을 구입해 포도원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으로 쥬빌리 포도원에서 많은 포도가 재배되었고, 양질의 포도주가 생산되었다. 1955년에는 포도주 저장소에 화재가 났고, 1960년에 발생한 산불로 포도원의 대부분이 타 폐허로 변했다. 2001년 쥬빌리 포도원은 이 땅을 정비하고 다시 포도를 심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곳 포도원에서 향이 풍부하고 짙은 보라색의 양질의 포도주가 생산되고 있다. △ 주소: 519 Tizzana Road, Ebenezer △운영시간: 주말 정오 12시~오후 5시 △문의: 0473 535 325 △홈페이지: www.jubileevineyard.com.au/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21/02/2021

아름다운 해변과 바렌조이 등대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지난 호에서 소개 했던 웨스트 헤드 전망대(West Head Lookout)에서 약 25분 정도 자동차로 이동하면 쳐치 포인트(Church Point)에 도착한다. 맥카스 크릭 로드(Mc Carr’s Creek Raod)와 피트워터 로드(Pittwater Road)가 만나는 곳에 우체국이 있다. 그 우체국 건너편 언덕 위에는 19세기에 세워진 교회의 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1872년 감리교회 건물이 세워졌다. 이 교회 건물은 목조 건물이었고 이 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이 감리교회 건물의 크기는 가로 7.6미터, 세로 5.5미터였다. 1881년부터는 이 교회 건물이 학교 건물로도 사용되었는데, 당시 22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1884년부터는 이 학교를 피트워터 (Pittwater) 공립학교라고 불렀다. 1888년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베이뷰 로드(Bayview Road)에 공립학교가 건축되면서 이 교회 건물은 더 이상 학교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감리교회 건물은 1882년까지 맨리(Manly)부터 고스포드(Gosford)사이에서 바닷가에 세워진 유일한 교회 건물이었다. 이 교회 건물이 건축되기까지 조지 맥킨토시(George McIntosh)와 헨리 맥코엔(Henry McKeown)씨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다. 그들은 교회 건물이 건축되기 이전부터 바다가 보이는 이곳 나무 그늘 아래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윌리엄 올리버(William Oliver)씨는 이들의 헌신과 신앙에 감격해 교회 건물을 건축할 땅을 기부하였다. 1871년 11월 8일에 작성된 토지 문서에는 여러 명의 이름이 이 땅의 소유주로 기록되었다 (George McIntosh, William Oliver, James Jones, Thomas Oliver, John Alderton, William Baker, William Henry McKeown). 드디어 1872년에 이곳에 교회 건물이 세워졌는데, 건축비는 약 60파운드가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지역을 채플 포인트(Chapel Point)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쳐치 포인트 (Church Point)라고 불렀다. 이 교회가 건축되면서 당시 센인트 레나드(St. Leonard)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에드워드 로드 목사(Rev. Edward J. Rodd)가 이 교회에서도 목회 사역을 감당하였다. 이 교회 건물에서 매주 예배를 드렸는데, 1908년 모나 베일(Mona Vale)에 감리교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나서는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이 교회 성도들이 모나 베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교회 건물은 빈 건물로 방치되어 있다가 1932년 4월 6일 철거되었다. 피트워터 구청(Pittwater Council)에서는 교회 건물이 있었던 터와 주변의 묘지들을 유적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한편, 쳐치 포인트에는 유명한 식당 (Pasadena Sydney, The Waterfront Cafe & General Store, The Marina Cafe)들이 전망 좋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데 주말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쳐치 포인트에서 가까운 거리에 스코틀랜드 섬 (Scotland Island)이 있다. 이 섬은 아주 작은 섬으로 직경이 약 1km 되고 높이는 약 120미터 정도된다. 이 작은 섬에 650여 명이 살고 있다. 쳐치 포인트에서 페리를 타고 이 섬에 갈 수가 있다. 이 섬의 대부분은 숲으로 우거져 있고, 350여 채의 주택들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섬에 처음 정착한 앤드류 톰슨 (Andrew Thompson)은 소금 채취 사업을 했다. 그의 고향은 스코틀랜드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고향을 따라 이 섬의 이름을 스코틀랜드 섬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금 채취 사업뿐만 아니라 배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 섬은 19 세기에 여러 차례 섬의 소유주가 바뀌었고, 1906년부터는 섬의 땅이 세분화되어 매각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테니스 부두(Tennis Wharf)로 알려진 곳에서 소금을 채취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매주 약 90kg의 소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한편, 1967년에는 섬에 전원이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상업적인 건물이 없다. 단지 섬 주민들을 위한 유치원과 커뮤니티 홀 (Community Hall)과 소방서가 있다. 이제 쳐치 포인트를 떠나 팜 비치 (Palm Beach)로 가보자. 팜 비치는 시드니 북쪽 해변 끝에 위치한 해변으로 아름다운 해변 경치와 바렌조이 등대(Barrenjoey Lighthouse)와 등대원의 아담한 집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자동차를 주차하고 등대로 올라가는 길은 2개의 코스가 있는데, 거리는 약 2.5km이고 왕복 35-40분 정도 소요된다. 등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면, 쿠링가이 체이스 국립공원(Ku-ring-gai Chase National Park), 브로큰 베이(Broken Bay) 및 센트럴 코스트(Central Coast)의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등대 아래에는 최초의 등대지기였던 조지 무할(George Mulhall)씨의 무덤이 있다. 팜 비치는 호주의 유명한 TV 드라마 홈 앤 어웨이(Home and Away)의 촬영장으로 알려져 있다. 서머 베이 서핑 클럽(Summer Bay Surf Club), 알프스 베이트 숍(Alf’s Bait Shop), 서머 베이(Summer Bay)의 주요 촬영 장소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한, 팜 비치에 위치한 보트 하우스 (The Boathouse)에는 수상 비행기 회사(Sydney Seaplane)가 있다. 이곳에서 수상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 시내에 위치한 로즈 베이(Rose Bay)로 날아갈 수 있다. 한편, 팜 비치에서 배를 대여해 낚시를 하거나 주변 경관을 살펴 볼 수 있다. 팜비치 부두에서는 혹스베리 강(Hawkesbury River)까지 다녀오는 크루즈 배도 있다. 시드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당일치기로 다녀 올 수 있는 거리에 팜 비치가 있어서 여름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가족들과 함께 팜 비치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고, 등대가 있는 곳까지 산책할 수도 있다. 또한, 배를 빌려 타거나 크루즈 배를 타고 시원하게 바다를 누빌 수도 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팜 비치가 아주 유명한 낚시터이다. 팜 비치 가장 북쪽에 차를 세워두고, 최대한 등대 쪽으로 가깝게 걸어가서 낚시를 하면 다양한 큰 물고기들을 잡을 수가 있다. 팜 비치는 따뜻한 봄날에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한번 다녀올 만한 곳이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21/0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