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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선교사들 코로나19 위험에 노출 심각    세계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그동안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소명에 따라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오고 있는 사례들이 많았다. 최근 들어 코로나19가 세계로 확산되면서 대유행되었다. 최근에는 델타 변이 바이러스 감염이 심상치 않게 세계 각처를 엄습하고 있다. 거기다 백신 접종자까지도 감염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모든 나라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급속한 확산의 이유가 있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양이 1000배 이상 많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델타 변이 플러스 바이러스까지 등장한 상황에 처해했다.  이런 상황 속에 많은 선교사들이 코로나19 (COVID- 19) 감염이나 백신 접종 후 사망하는 경우들이 늘고 위독한 선교사들까지 많아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 지옥이라고 하는 속에서도 중단할 수 없는 선교를 위해선교사들이 코로나와 사투를 벌리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랍 중동 오만의 수도인 무스카트에 무스카트한인교회서 뒤늦게 이 교회 담임목사인 최상운 선교사(파송/시드니주안교회 담임목사 진기현)도 지난 2021년 7월 13일 코로나19로 인해 사망하게 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현지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던  허윤정 사모도 함께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치료 중 많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허윤정 사모의 의하면 최 선교사가 한국에 잠시 귀국하기 위해서 백신을 접종을 하게 됐고, 이후 그날 저녁부터 오한과 근육통과 두통이 심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검사 결과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기 전 이미 최상운 선교사와 허윤정 사모 두 사람 모두 코로나19에 이미 감염된 상태에서 백신을 접종하게 됐다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최 선교사는 입원한지 사흘 만인 지난 7월 13일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허 사모는 치료받고 회복된 상태라고 전했다  파송교회 진기현 목사는 “무슬림 국가인 중동 오만 무스카트에서 통계에 따르면 이슬람 신자가 대부분인 정부의 허가로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한국어 예배를 드려왔고 무슬림 국가인 오마 무스타트에 말씀과 찬송이 올려퍼지고 맘껏 기도할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럽고 감사했는데 최상운 선교사 소천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상운 선교사의 유해는 지난 7월 16일 오만에서 오만한인회가 비용을 부담해서 화장했으며, 장례식은 파송교회인 시드니주안교회에서 추모식을 가진 후, 중동선교회 홍계현 목사의 집례로 8월 7일 한국 서대전 추모공원(선교사 지역)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허윤정 사모는 “최 선교사는 코로나19에 걸린 것도 모르고 마지막까지 힘들게 설교하였는데...다시 회복되지 못했지만 복음의 열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심금을 울렸다.   고 최상운 선교사의 약력과 순직 선교사 명단은 다음과 같다.    <최상운 선교사 약력>  1963. : 1.13 출생   1981. 3. : 군산 수산대학 입학, 1983년 졸업  1984 :  중동의 오만(OMAN)과 아랍 에미리트(UAE) 에서 원양어선 항해사로 근무  1992. : 온누리교회(고 하용조목사)에서 세례받고 청년부 활동 중 선교사로 헌신   1995. 1.14 : 결혼과 동시 호주로 이민  1996. : 호주 YWAM(Youth With a Misson)에서 훈련받고 스텝으로 사역.  1999.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  2007. 7.24 :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사역 시작  2014. 9. : 자택에서 두 가정과 함께 오만 무스카트 한인교회 개척(가정교회)  2018. 7. : 오만 정부에서 인가받은 종교 부지 건물에서 입당 예배드리며 오만 무스카트 한인교회 출범.  2021. 2. : 시드니주안교회 선교사로 파송  2021. 7.13 : 코로나로 인해 사망권순형|본지 발행인  

  17/09/2021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의 주역 ‘데스데모나’ 역 맡아                               글/주경식사진/권순형명실공히, 한국은 이제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기생충’에 이어 ‘미나리’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어디 이뿐인가? BTS(방탄 소년단)는 미국 빌보드 차트 7주 연속 1위에 랭크되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심지어 호주 맥도날드에서 BTS버거까지 팔리고 있어 한국인인 것이 요즘만큼 자랑스러운 때가 없다.  한국인이 노래를 잘하는 것은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국인만큼 평균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 중에서도 특히 성악이나 오페라는 어렵다.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카라손  오페라 같은 경우는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언어적인 부담이 있어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해도 한국인들이 오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한국인 오페라 가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들을 하고 있다.   카라손(Karah Son, 손현경)도 한국인으로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다. 카라손은 이미 호주 오페라 하우스에서 두 차례나 주인공으로 공연(2019년 나비부인, 2020년 라보엠)을 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호주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부터이다.  2017년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보수 공사로 인해 시티의 ‘캐피탈 시어터’에서 ‘나비부인’을 공연했다.  올해 그녀는 네 번째 시드니를 방문했다. 바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7월 16일부터 29일까지 공연될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Otello)의 여자 주인공 ‘데스데모나’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카라손은 지난 5월 31일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다음 2주간 격리 기간을 마치고 난 후 6월 15일부터 컨디션을 조절하며 공연 준비로 하루하루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카라손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접한 기자 일행은 인터뷰를 위해 6월 25일 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홍보담당 매니저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오페라 홍보담당 매니저인 리자(Lisa)로부터 답변이 왔다.   지금 시드니에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고 카라손 일정이 바쁘니 추이를 지켜보며 인터뷰 일정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락다운으로 인해 공연이 지장은 받겠지만 아예 공연이 취소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 다음 날인 6월 26일 오후 6시를 기해 7월 9일 자정까지 광역 시드니 전역에 2주간 락다운이 실시된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럼에도 공연이 7월 16일 시작하니까 당연히 공연은 무사히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자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계속 락다운 추이를 지켜보면서 카라손과의 대면 인터뷰를 날짜를 조정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엎친데 덥친격으로, 오페하 하우스에서 일하는 직원이 델타 바이러스 확진을 받는 바람에 오페라 하우스에서 간접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 검사를 받고 대기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로 인해 오페라 가수들을 포함 오케스트라 연주자들까지 오페라 하우스에 들어갈 수 없고 공연 연습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드니 락다운으로 공연 취소 사태  아무래도 대면 인터뷰는 어렵다고 판단한 편집진은 더 미룰 수 없어 권 발행인이 7월 13일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사진을 먼저 촬영하고 기자는 다음 날 줌(ZOOM)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때까지 오페라 하우스 공연이 영원히 취소되리라고는 카라손도 기자도 생각하지 못했다.   줌 인터뷰가 끝나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그날 저녁 카라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녀가 속한 이태리 ‘스테이지 도어’(Stage Door)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이번 시드니 공연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취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7월 14일 저녁이었다. 그날은 아직 7월 31일까지 2주 동안 락다운이 추가로 연장된다는 보도를 접하기 전이었다. 공식적인 락다운 연장 소식은 7월 16일 발표되었다. 그런데도 오페라 하우스측에서는 정부의 락다운 추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2021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오텔로’ 공연은 취소가 되었다. 일부러 격리기간을 감수하면서까지 호주에 와서 공연 준비를 하던 카라손도 아쉬움을 접고 7월 15일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공연이 취소되어 많이 아쉽다. 그러나 기자보다도 당사자인 본인은 누구보다도 아쉬운 마음이 컷으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공항에서 밝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편집국장님, 취소가 확정되어서 이렇게 갑자기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에 꼭 다시 뵙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시고 주님의 은혜 가득 누리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대면으로 인터뷰를 하기 원했지만, 사정상 줌 인터뷰를 하게 되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젊은 세대이기도 하고 테크놀로지에 익숙해서인지 오히려 화상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다음은 카라손과 일문일답이다.  오페라 매력에 흠뻑 빠져 이태리 유학 - 간단히 본인 소개 및 가족을 소개해 주시지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오페라 ‘오텔로’의 여주인공 ‘데스데모나’역을 맡은 소프라노 카라손입니다. 원래 한국 이름은 손현경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태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보니 이태리식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태리어로 카라는 까라(Cara)라고 표기하는데 ‘귀여운’ ‘사랑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하기 쉽게 이태리에서는 ‘까라’로 부르고, 이것을 영어로 바꾸어 ‘카라(Karah)’로 부르고 있습니다.  가족은 프로듀서인 남편과,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있습니다. 남편도 원래 대학 때 성악을 전공했는데 방송일을 배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은 프로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성악을 전공하게 된 동기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배울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클래식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무렵에 예술중학교를 한번 가볼까 생각하고 성악 레슨을 한 달 정도 받았습니다.   그때 제 소리가 확 트인 것 같아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크고 발성이 좋다고 했지만 예술중학교에는 진학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6학년 말에서야 성악 레슨을 몇 번 받았고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아 포기하고 그냥 일반 중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대학 진로를 결정할 무렵 음악 선생님께서 실기시간에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시고 넌 꼭 성악을 전공해야 한다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성악을 공부했고 오페라를 한번 접한 뒤 오페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아, 나의 길은 바로 이 길이다’라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음에도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열심히 연습해서 운좋게 연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 성악을 전공한다고 다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나요?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99%의 꿈은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내는 음의 성향에 따라 가곡을 부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악 전공자들은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는 것이 그들의 장래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연대 성악과에 진학한 후 이태리 오페라 가수 ‘미렐라 프레니’를 알게 되었는데 제가 그분의 팬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계 3대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친구이기도 한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미렐라 프레니’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싶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가 있는 이태리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바로 ‘미렐라 프레니’ 밑에 가서 사사를 받을 기회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태리 콘소바토리에 가서 석사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아에서도 언어와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제가 프로로 데뷔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때는 결혼도 해서 아들도 생긴 상태였고, 그냥 귀국해야 하나 갈등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마침 ‘미렐라 프레니’ 선생님이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귀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도전해 보자 하고 그분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해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행히 제 소리를 인정해 주시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자기랑 같이 공부하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미렐라 프레니 선생님께서 이태리 주정부에서 인정받은 미렐라 프레니 아카데미아(Mirella Freni Academia)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저를 장학생으로 받아 주셔서 그 학교에서 3년 동안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분 밑에서 3년간 공부하고 난 후 프로로 데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적 성악가 ‘미렐라 프레니’ 제자로 발탁  - 그동안 많은 무대에서 공연하고 상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지요.   “한국에서는 중앙콩쿠르 1위, 음협 콩쿠르, 이대웅 콩쿠르 상위 입상 등을 했습니다. 그 후 이태리로 건너가 베르첼리의 G. Viotti 콩쿠르,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G. Vinas 콩쿠르, 프랑스 마르세유 'Opera de Marsellie'에서 입상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아무래도 2008년 저의 데뷔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베로나 극장에서 열린 ‘투란도트’ 오페라였는데, 제가 ‘리우’역으로 유럽 무대에 첫 발을 딛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전에 여러 콩쿠르와 졸업 무대에도 서봤지만, 제 생애 첫 번째로 하는 프로 데뷔 무대인지라 관객들도 많고 얼마나 긴장되고 떨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렐라 프레니 선생님께서 극장까지 직접 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데뷔 선물까지 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용기를 얻어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 이후에 많은 극장들로부터 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당히 유럽 프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이지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유학 중 아기를 낳고 몇 년간 노래를 하지 못하면서 음악 생활을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권유로 다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포기하고 귀국하려고 할 때 극적으로 세계적인 성악가 ‘미렐라 프레니’ 선생님의 제자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3년 동안 전통적인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과 언어를 깊이 있게 지도받으면서 현지 음악인들과 나란히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나비부인 여주인공  ‘초초상’역 3백 번 이상 공연  - 많은 오페라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와 가장 자신 있는 배역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는 푸치니의 ‘토스카’입니다. 드라마틱한 소리와 연기로 극의 재미뿐 아니라 음악의 아름다움이 너무 매력적인 오페라라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도 여러 차례 여주인공 ‘토스카’역을 맡아 연기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녀가 연기한 ‘토스카’역이 가장 뛰어난 연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 가장 자신있는 오페라는 역시 푸치니의 ‘나비부인’입니다. 여주인공 ‘초초상’의 역할은 아마 제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한 사람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3백 번 이상은 공연한 것 같습니다.  자다가 바로 일어나서도 부를 수 있는 그런 역할입니다.  특히 여주인공 ‘초초상’은 극중 일본 게이샤로 나오기 때문에 저도 같은 동양인으로 적합한 배역이기도 합니다. 제가 푸치니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고 ‘나비부인’의 ‘초초상’ 역할은 워낙 많이 공연해서 가장 자신있는 배역입니다.”  - 오페라 가수 인생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사건)이 있었다면 이야기 해주십시오.   “공연을 통해 관객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오페라 가수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대에 서기 전에 항상 기도를 하면서 무대에 올라갑니다.  스웨덴에서 ‘나비부인’을 공연할 때였습니다. 10회의 공연이 잡혀 있었는데, 보통 가수들은 첫 공연에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부터는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웬일인지 첫 공연보다 계속 더 신경을 쓰고 열심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열 번의 공연 중 다섯 번이나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였는데 ‘나비부인’ 공연을 처음 관람하고 너무 행복하고 감동받아서 그 다음 공연에도 계속 표를 사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특히 저의 연기와 노래에 감동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제 노래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보람되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오페라 가수가 되기를 너무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페라 공연 위해 다섯 번째 호주 방문  - 호주는 몇 번째 오셨나요? 그리고 이번에 오텔로 공연이 이루어지게 된 경위와 과정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네 번 왔습니다. 제가 여러나라를 다녀 보았지만, 저는 호주 공연이 가장 즐겁고 좋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극장 분위기도 너무 편안한 곳입니다.   호주 사람 대다수가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해 줍니다. 아마도 호주의 특성상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2017년부터 호주에 와서 공연을 다섯 차례 했습니다.  보통 올 때마다 짧게는 두 달에서 세 달 정도 머무는 데 호주의 인상이 참 좋습니다. 2017년에 처음 시드니에 와서 그때는 오페라 하우스가 보수 중이어서 시티에 있는 캐피탈극장에서 ‘나비부인’공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에는 못오고 2019년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비부인’ 그리고 멜번에 가서 ‘투란도트’를 공연했습니다. 2019년에는 거의 일 년의 반을 호주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다행히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1월에 시즌 오프닝 공연으로 ‘라보엠’을 공연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2021년에 다섯 번째 호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올해 ‘카르멘’ 과 ‘아이다’로 인사드릴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스케줄이 전면 수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운 좋게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역할을 하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특히 이번 공연은 보통 저에게 익숙한 푸치니의 오페라가 아니고 베르디의 마스터 피스라고 할 수 있는 ‘오텔로’이기 때문에 연기며 소리적인 부분에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하게 남녀 두 주인공이 모두 한국인이어서 색다른 케미를 보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남자 주인공도 한국인 테너 이용훈이다).”  - 마지막으로 호주 교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세요.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오페라 ‘오텔로’를 통해 여러분들 만나 뵙고, 또 삶의 희망과 즐거움을 전해드리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어려운 락다운 기간이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품으시고 이 어려움을 같이 극복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수한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이 세계의 문화를 잘 선도해 나갈 수 있는 민족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리 해외 동포들도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해외에서도 문화의 역군으로 자기 자리들을 잘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에필로그  아쉽지만, 2021년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녀의 ‘오텔로’공연은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현재 그녀는 한때 소프라노 조수미 씨도 소속되어 있던 이태리 유명 에이전시인 ‘스테이지 도어’(Stage Door)의 전속 가수로 유럽 전역의 극장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유럽뿐만 아니라 호주에서도 인정받아 2017년 이래 매 해 호주를 방문하고 있다. 체구는 작지만 현지 언론으로부터 이태리 전통 벨칸토 창법을 완벽히 구사하는 ‘푸치아나’(Pucciniana), ‘동양의 별’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녀가 세계를 누비며 ‘한국인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동안 시드니에 와서 네 차례나 공연을 했지만 많은 교민들이 모르고 있었다. 다음번에 그녀가 시드니에 온다면 반드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갈 것이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질 그날을 기대해 본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권순형|본지 발행인

  04/09/2021

일과 영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말씀과 자연을 통한 하나님과의 회복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성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 8:9)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다. 우리가 '성전'인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부패하는 세상의 방부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4),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일터가 선교지요 목회지다. 그리스도인은 일터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하나님의 부름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이번 달은 과수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고 있는 이성수 목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선교와 비지니스 이 목사는 학사장교(ROTC)로 출신으로 제약회사에 근무하다가 지인의 소개를 받아 석제 회사에서 일을 했다. 1993년에 호주로 파견을 받아 근무하다가 1995년에 독립하여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시드니제일교회 장로로 시무하면서 사업과 선교를 동시에 할 수 없어 내적인 갈등에 빠졌다. 이때쯤 아이합(IHOP)을 알게 되어 미국을 건너가게 되었다. 2011년 아이합(IHOP, 국제기도의집)에서 일 년간 교육을 받고 호주로 돌아와 알파크루시스(AC)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기도 중 선교와 비즈니스가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일과 영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말씀과 자연을 통한 하나님과의 회복’이란 비전을 가지고 빌핀(Bilpin)의 과수원을 계약하였다. 2018년 5월 6일 가계약 후 2018년 8월 15일에 정식계약을 하면서 일 년 안에 잔금을 치르기로 하였다. 농장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무모한 도전 같았다. 매주 이 목사는 과수원을 찾아 주인에게 과수원의 ABCD부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38년간 과수원 지기인 주인은 과수원의 노하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전수하여 주었다. 소유하고 있던 집이 팔리지 않아 마음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2019년 8월 15일에 잔금을 치르고 소유권을 이전 받았다. 그후에도 주인은 가까운 곳에 살면서 몇 개월을 더 도와주었다. 목사와 과수원 지기 한국교회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일과 믿음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교회 따로, 일터 따로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일터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으로 조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다. 일터의 관점에서 성경을 묵상해보면 일터는 크리스찬들이 살아야 할 삶의 현장이다. 크리스찬들이 일터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한다. 크리스찬의 신앙적인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전도의 열매를 맺기도 어렵다. “제가 장로로 시드니제일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일과 선교를 분리하여 생각하다 보니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하는 중에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이웃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일터가 곧 선교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경작하고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일터는 삶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사역의 현장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의 나라를 전파했듯이 크리스찬 역시 일터에서 크리스찬으로 살면서 주님이 부탁하신 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꿈을 꾸는 숲 구입한 땅에는 과수원보다 넓은 숲이 있다. 전 주인은 쓸모없는 땅이라 생각하고 38년간 방치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이곳에 꿈을 심었다. 숲 안에서 복음 길을 보았고, 팔복 계단을 보았고, 기도의 처소를 보았고, 힐링 캠프도 보았다. 그는 숲속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과 높은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 바위는 기도의 처소입니다. 이 계단은 팔복 계단입니다. 이 길은 복음의 길로 만들 예정입니다. 숲속을 걸으며 기도를 하고, 팔복 계단에서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길을 걸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을 만들 겁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사랑을 체험하는 캠프장도 만들어 체험 학교도 운영할 예정입니다.” 기자의 눈에는 나무와 바위 그리고 거친 나무숲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 숲 속에 12개의 기도처를 만들어 각 기도처마다 말씀이 있고 말씀에 맞는 환경을 조성하고 ‘8복 계단’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아가서 동산’ 조성하여 사랑을 회복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월트 디즈니가 생각이 났다. 그는 딸아이와 함께 공원에 놀러갔다가 주변이 매우 위험한 것을 발견하고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5년 뒤 그 꿈을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개장을 얼마 앞두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개막식 때 사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디즈니 씨가 이 아름답고 멋진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남편을 대신하여 부인이 단상에 올랐다. “사회자는 남편이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깝다고 했습니다만, 남편은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빌핀 보타닉 오차드 우리가 일찍 일어나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 7:12) 과수원은 빌핀(Bilpin)에 있다. 빌핀(Bilpin)은 사과가 유명해 ‘Land of the Mountain Apple’로 불리기도 한다. 1816년 원주민 가이드였던 펄핀(Pulpin)의 이름을 따 빌핀(Bilpi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농장과 함께 사과 등 과수원으로 유명하며, 블루마운틴의 마운트 토마(Mount Tomah)에 있는 ‘Tomah Botanic Garden’은 이곳에서 승용차로 15분 거리이다. 블루마운틴의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는 여러 전망대가 있으며, 트레킹 코스도 소요 시간별로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사과로 유명한 지역답게 애플파이는 이곳의 대표적 먹거리가 되어준다. 2020년의 산불과 홍수로 인하여 빌핀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지난 번 홍수로 시드니에서 오는 길은 물이 범란하여 교통이 차단되었고, 블루마운틴에서 오는 길은 산사태로 차단되어 고립되었습니다. 사과는 풍년이었는데 길이 차단되어 팔수가 없게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부뿐 아니라 구세군에서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길이 다시 열리자 엄청난 손님들이 몰려왔습니다. 38년간 과수원을 경영했던 전주인도 이렇게 손님이 많이 온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농장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95% 이상의 일을 하십니다. 저는 다만 이곳을 돌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방법은 초자연적입니다. 전 주인을 통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고, 산불을 통해서 자녀들의 마음을 바꾸어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이제는 저희 아이들이 주말에 와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사과 밭으로 우리 일행들을 안내했다. 사과의 품종은 7백여 종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4가지 품종의 사과나무들이 있다. ‘Fuji, Pink Lady, Red Delicious, Granny Smith’ 등이다. 나는 홍조를 띠고 있는 핑크레디 사과 하나 따서 한입 베어 물었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때 그 맛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달콤새콤하고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맛은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Father's Love Retreat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이 목사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의 문을 연다. 주일에는 오전 9시와 11시에 영어로 예배를 드린다. 처음에는 가족끼리 예배를 드렸지만 지금은 동네 사람들도 참석한다. “시드니에서는 전도하러 사람을 찾아 갔지만,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옵니다. 더 감사한 것은 동역자로 하나님께서 영어를 잘하는 윤장학 목사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행동하는 사역자입니다. 매 주일 오셔서 예배를 돕고 있습니다. 금요기도회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정식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Father's Love Church’를 지역 신문에 광고할 예정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선한이웃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있었습니다. 수요예배 때 아가서 말씀을 강의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Father's Love’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는 ‘일과 선교’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일터는 일을 하고 있는 곳이고 교회는 선교하는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고민을 했지만, 지금은 주님의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곧 선교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제는 ‘비즈니스가 선교’(BIM, Business is Mission)이고, ‘선교로서써 비즈니스’(BAM, Business as Mission)란 용어가 점점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너희는 교회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했다. 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보다(avodah)인데 이것은 예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와 어근이 같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 또는 ‘service’라고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Service)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이 목사는 꿈을 꾸고 있다. 잠을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꾸는 꿈이다. 일과 영성을 통해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꿈꾸고 있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고, 말씀과 자연을 통해 하나님과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꿈꾸고 있다. 이 목사는 일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다. “방문자들이 말씀과 기도와 자연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충만케 하소서” “방문자들의 기도제목이 공유되고, 중보기도가 활성화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소서” “힐링 캠프와 말씀트랙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올바르게 조성되게 하소서”〠 *홈페이지(문의): fatherslove.com.au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03/06/2021

잊혀진 전쟁, 잊혀지는 호주 참전용사들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지난 4월 21일 기자 일행은 시드니한국문화원(원장 김지희)에서 개최한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였다. 가평전투는 6.25가 발발한 후 다음 해인 1951년 4월 23일, 유엔 연합군으로 참가한 호주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가평에서 3일 동안 격렬히 맞붙은 전투였다. 특히 가평전투는 물밀듯이 내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서울 탈환을 막은 호주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호주군은 그해 10월 첫째 주에 마량산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엔군 사령부가 중공군의 연속되는 반격으로 위기를 당할 때 임진강부터 마량산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냈다. 이 두 전투는 한국 전쟁 중 호주 육군이 보여준 가장 뛰어난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주시드니총영사관은 가평전투와 마량산 전투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에서 싸웠던 호주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1951, the critical year of the Korean War)을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하였고, 이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 일행이 참석, 행사에 참석한 6.25 때 공군 조종사(pilot)로 한국전에 참전한 레이 시버(Ray Seaver, 90) 씨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 전쟁이 레이의 인생을 바꾸다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오프닝 행사에서 만난 레이 시버(Ray Seaver) 씨는 90세의 연세에도 정정하게 보였다. 이 행사에 세 명의 한국전 참전 호주 베테랑이 참석하였다. 왕립호주공군(Royal Australian Air Force, RAAF) 출신 레이 시버, 왕립호주연대 3대대 소속이었던 조니 비네함(Johny Bineham), 해군제독 이안 크로포드(Ian Crawford) 등이다. 이 세 분 중 해군제독 이안 크로포드 씨는 이미 크리스찬리뷰 2005년 6월 호에 소개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왕립호주공군(RAAF) 소속 전투기 조종사였던 레이 시버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흔쾌히 수락을 해주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고든(Gordon)에 살고 있었다. 레이는 1931년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6시간 떨어져 있는 뉴사우스 웨일즈 주 포브스(Forbes)라고 하는 조그만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인이었는데 그 당시 특이하게 호주로 이민을 온 케이스이다.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심했던 시기여서 호주도 살기가 넉넉치 않았다. 레이가 6살 때, 가족은 아버지의 직업을 찾기 위해 시드니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제2세계대전이 막 끝난 즈음 그의 가족은 다시 블루 마운틴이 있는 카툼바로 이사를 했다. 레이는 카툼바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기공 직업훈련을 받았다. “제가 카툼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전기공 직업훈련과정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직업 때문에 그 과정에 들어갔지만 제 적성에도 안 맞고 너무 지루했어요.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조종사들이 많이 부족하게 된 거에요. 호주 조종사들이 유엔 연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젊은 조종사들이 많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그 덕분에 제가 조종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만약 한국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조종사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전기기사 직업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호주가 유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자 호주 공군 조종사들이 대거 한국전쟁에 투입되는 바람에 젊은 공군 조종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살 이른 나이에 호주 공군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고 운 좋게 호주 공군 조종사 훈련과정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공군 조종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전쟁이 저의 인생을 바꾼 거죠.” 미티어(Meteor) 전투기 조종사가 되다 레이에게는 한국전쟁이 그의 인생을 전투기 조종사로 바꾸게 한 운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레이는 1951년 2월 호주 공군 소속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1년 6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거쳐 일반적인 공군 항공기 조종술을 배운 후 그가 희망했던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또 다시 6개월간의 다른 종류의 거친 전투비행 훈련을 연마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1953년 1월에 한국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때 일본에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던 전투기는 미티어(Meteor)라는 전투기였다. 미티어는 영국이 만든 첫 번째 쌍발 제트엔진의 전투기였다. 미티어는 당시 미국의 전투기 머스탱(Mustang)과 함께 한국전의 주력 전투기였다. 레이는 일본에서 미티어 전투기 실전연습을 거친 후 1953년 2월 김포 공군 기지로 배속받았다. 레이중사(sergeant)는 왕립호주공군(RAAF) 77비행대대에 편성되었다. 당시 김포는 이미 전쟁으로 건물들이 파괴되고 반듯한 건물이 없을 때였다. 레이 중사는 임시 천막 막사에서 지내며 임무를 수행했다. “제가 1953년 2월 김포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어요. 한국의 겨울은 특히 막사에서 보내는 겨울은 지독히 추웠습니다. 그래도 군인이기 때문에 불평할 수 없고, 전투를 수행했죠. 한국전 동안 101번의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레이가 한국에 왔던 1953년 2월은 한국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김포에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해 특별히 조립된 임시 천막 막사에서 생활하며 전쟁을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레이는 2월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되었던 7월 27일까지 하루걸러 비행을 나갔다. “매일 눈을 뜨면 새로운 미션이 도착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미션들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작전 회의를 하고 비행준비를 하고 거의 하루걸러 비행을 나갔어요. 그래서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갔는지도 몰랐죠. 그리고 저희 비행대대가 김포에 있었어요. 당시 김포는 북한쪽 경계선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비교적 빠른 시간에 날라가서 목표물들을 공격하고 빨리 돌아올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레이는 그의 비행 로그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비행 로그북 안에는 그가 한국전 동안 수행했던 작전수행 숫자들과 비행시간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로그북 안에는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끼워 있었다. 바로 그가 한국전 당시 탔던 미티어 전투기 앞에서 찍은 21세 때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니 그가 얼마나 젊은 날 한국전에 참전했었는지 실감나게 와닿았다. 왕립호주공군(RAAF) 77 대대 레이는 호주 공군 조종사 가운데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공군에는 여러 조종사들이 있다. 수송기 조종사, 헬리콥터 조종사, 전투기 조종사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국전에 참전할 때 전투기 조종사로서 안 무서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보병부대 군인들에 비하면 저희가 훨씬 안전한 편이었고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맡은 임무를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 급해서 그 목표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속한 RAAF 77비행대대에는 30명의 조종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참전하는 기간 동안 제 동료 중 6명이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격추되어 한 명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1953년 한국전 당시 공군 전술 배치를 보면 김포비행장은 횡성 비행장과 함께 가장 전방에 배치된 유엔 연합군 비행부대였다. 이 김포 비행부대에 왕립호주공군(RAAF) 77비행대대가 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호주 비행대대가 조종하는 미티어 전투기는 고공비행보다는 저공비행에 유리해 낮게 날아가 적의 부대나 보급물자들을 찾아 폭격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는데 낮게 비행하다 보니 적의 포격에 맞아 격추될 위험이 컸었다. 그가 한국전에 참전한 7개월 동안 그는 동료 6명을 잃는 것을 가까이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감하게 전투에 임해 큰 공을 세웠다. “저희의 임무는 적의 군기지를 찾아 폭격하기도 하고, 도로 정찰을 나가 적의 보급트럭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도 낮에는 저희 전투기들이 와서 공격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주로 밤에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 새벽에 출격하여 아직 숨지 못한 보급품 트럭들을 공격하거나 오후 늦게 나가 막 이동을 시작한 트럭들을 발견하여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고 출격했는데 원산 근처에서 1백 대쯤 되는 보급 트럭을 발견하여 그 군수물자 트럭 1백 대 가량을 거의 다 폭파시켰습니다. 지금 제가 달고 있는 이 공군훈장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훈장인데 그때 세운 공으로 받은 훈장입니다.” 왕립호주공군(RAAF)에는 많은 비행대대가 편성되어 있다. 그중 레이가 속해 있는 왕립호주공군 77비행대대는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호주공군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되었다. 레이는 한국전쟁이 정전된 후 1953년 8월에 호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54년 새해가 되자마자 남극으로 파견되어 남극에서 남극지형을 사진 촬영하고, 남극을 항해하는 배들을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남극에서 돌아온 후 왕립호주공군 항공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소위(pilot officer)로 제대한 후 1956년부터 1983년까지 콴타스 항공사에서 민간항공기 조종사로 27년간 근무를 했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전기기사를 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전은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젊은 날 한국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호주는 한국의 혈맹 호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이어 영국과 함께 두 번째로 연합군을 보낸 한국의 혈맹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한지 이틀 후 6월 27일 곧바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정되었다. 그 후 호주 정부는 한국과 수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이 안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곧바로 병력을 파견한다. 호주는 먼저 6월 30일 영연방 극동해군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던 2척의 구축함을 파견하였고 그리고 뒤이어 7월 1일 왕립호주공군(RAAF)소속 제77전투비행대대를 미 극동공군 사령부로 급파하였다. 호주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한 한국으로서는 고마운 동맹국가라 할 수 있다. 육군, 해군, 공군 등 전군에 걸쳐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였고, 한국전에서 3백4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1천216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다. 실종자 수도 상당하다. 그 당시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와서 젊은이들이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한국을 도운 것이다. 레이는 가지고 있던 자료 가운데 10년도 넘는 신문 스크랩을 하나 보여주었다. 제목은 “실종된 공군 조종사의 마지막 출격”이었다. 이 신문 스크랩에는 실종된 조종사 피터 찰머스(Peter Chalmers)의 조카 잔 오스틴(Jan Austin)이 60년 전 한국전쟁 중 실종된 삼촌의 수수께끼가 마지막 출격기록을 통해 밝혀지게 될 것을 믿는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었다. “피터는 저보다 연배가 다섯 살 많았지만 저랑 친한 77 비행대대 동료였어요. 그런데 1953년 3월 26일 출격을 나갔다가 원산 근처에서 적에게 격추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은 6.25 한국전쟁을 일컫는 별칭이다.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쟁에 비해 전쟁기간도 짧았고, 미디어들을 통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2차대전 이후 가장 많은 연합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6.25 한국전쟁은 세계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우고 있다. 1950년 당시 호주에서도 많은 호주 국민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내고, 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빨리 군인들을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호주 국민들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한국에 전쟁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많은 젊은이들은 전혀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은둔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한국을 구했다. 레이 시버 씨도 한국을 위해 열심히 싸운 숨은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가 8개월 만에 호주로 다시 돌아오니 친구들이 그랬어요. 너 어디 갔다 왔니? 그동안 너 안 보이더라, 몇 개월 동안 뭐하느라 코빼기도 안보였니? 그래서 제가 한국전에 참전해서 열심히 싸우고 돌아왔다고 하니까 그런 일이 있었니? 하고 오히려 신기한 듯 쳐다보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한국전쟁은 호주에서도 한마디로 ‘잊혀진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한국에 세 번째로 많은 군인들을 파견한 혈맹의 국가이다. 당시 세계 각국 인구 비율로 따져볼 때 호주가 한국에 베푼 인도적 호의는 어느 나라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2000년에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군인 1만 7천 명 중 현재 2천5백 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젊은날 한국전쟁에 참전해 피를 흘리고, 기꺼이 한국을 도운 호주의 숨은 용사들이 이제 하나둘 지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71주년이나 되었고 한국전에 참전한 그들의 나이가 평균 90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지만 호주에 사는 동포들은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가오는 현충일(6월 6일)에 한국전 참전 호주 용사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잊혀진 전쟁, 잊혀지는 호주 참전용사들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지난 4월 21일 기자 일행은 시드니한국문화원(원장 김지희)에서 개최한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였다. 가평전투는 6.25가 발발한 후 다음 해인 1951년 4월 23일, 유엔 연합군으로 참가한 호주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가평에서 3일 동안 격렬히 맞붙은 전투였다. 특히 가평전투는 물밀듯이 내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서울 탈환을 막은 호주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호주군은 그해 10월 첫째 주에 마량산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엔군 사령부가 중공군의 연속되는 반격으로 위기를 당할 때 임진강부터 마량산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냈다. 이 두 전투는 한국 전쟁 중 호주 육군이 보여준 가장 뛰어난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주시드니총영사관은 가평전투와 마량산 전투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에서 싸웠던 호주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1951, the critical year of the Korean War)을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하였고, 이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 일행이 참석, 행사에 참석한 6.25 때 공군 조종사(pilot)로 한국전에 참전한 레이 시버(Ray Seaver, 90) 씨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 전쟁이 레이의 인생을 바꾸다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오프닝 행사에서 만난 레이 시버(Ray Seaver) 씨는 90세의 연세에도 정정하게 보였다. 이 행사에 세 명의 한국전 참전 호주 베테랑이 참석하였다. 왕립호주공군(Royal Australian Air Force, RAAF) 출신 레이 시버, 왕립호주연대 3대대 소속이었던 조니 비네함(Johny Bineham), 해군제독 이안 크로포드(Ian Crawford) 등이다. 이 세 분 중 해군제독 이안 크로포드 씨는 이미 크리스찬리뷰 2005년 6월 호에 소개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왕립호주공군(RAAF) 소속 전투기 조종사였던 레이 시버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흔쾌히 수락을 해주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고든(Gordon)에 살고 있었다. 레이는 1931년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6시간 떨어져 있는 뉴사우스 웨일즈 주 포브스(Forbes)라고 하는 조그만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인이었는데 그 당시 특이하게 호주로 이민을 온 케이스이다.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심했던 시기여서 호주도 살기가 넉넉치 않았다. 레이가 6살 때, 가족은 아버지의 직업을 찾기 위해 시드니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제2세계대전이 막 끝난 즈음 그의 가족은 다시 블루 마운틴이 있는 카툼바로 이사를 했다. 레이는 카툼바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기공 직업훈련을 받았다. “제가 카툼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전기공 직업훈련과정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직업 때문에 그 과정에 들어갔지만 제 적성에도 안 맞고 너무 지루했어요.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조종사들이 많이 부족하게 된 거에요. 호주 조종사들이 유엔 연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젊은 조종사들이 많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그 덕분에 제가 조종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만약 한국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조종사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전기기사 직업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호주가 유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자 호주 공군 조종사들이 대거 한국전쟁에 투입되는 바람에 젊은 공군 조종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살 이른 나이에 호주 공군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고 운 좋게 호주 공군 조종사 훈련과정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공군 조종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전쟁이 저의 인생을 바꾼 거죠.” 미티어(Meteor) 전투기 조종사가 되다 레이에게는 한국전쟁이 그의 인생을 전투기 조종사로 바꾸게 한 운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레이는 1951년 2월 호주 공군 소속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1년 6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거쳐 일반적인 공군 항공기 조종술을 배운 후 그가 희망했던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또 다시 6개월간의 다른 종류의 거친 전투비행 훈련을 연마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1953년 1월에 한국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때 일본에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던 전투기는 미티어(Meteor)라는 전투기였다. 미티어는 영국이 만든 첫 번째 쌍발 제트엔진의 전투기였다. 미티어는 당시 미국의 전투기 머스탱(Mustang)과 함께 한국전의 주력 전투기였다. 레이는 일본에서 미티어 전투기 실전연습을 거친 후 1953년 2월 김포 공군 기지로 배속받았다. 레이중사(sergeant)는 왕립호주공군(RAAF) 77비행대대에 편성되었다. 당시 김포는 이미 전쟁으로 건물들이 파괴되고 반듯한 건물이 없을 때였다. 레이 중사는 임시 천막 막사에서 지내며 임무를 수행했다. “제가 1953년 2월 김포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어요. 한국의 겨울은 특히 막사에서 보내는 겨울은 지독히 추웠습니다. 그래도 군인이기 때문에 불평할 수 없고, 전투를 수행했죠. 한국전 동안 101번의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레이가 한국에 왔던 1953년 2월은 한국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김포에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해 특별히 조립된 임시 천막 막사에서 생활하며 전쟁을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레이는 2월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되었던 7월 27일까지 하루걸러 비행을 나갔다. “매일 눈을 뜨면 새로운 미션이 도착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미션들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작전 회의를 하고 비행준비를 하고 거의 하루걸러 비행을 나갔어요. 그래서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갔는지도 몰랐죠. 그리고 저희 비행대대가 김포에 있었어요. 당시 김포는 북한쪽 경계선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비교적 빠른 시간에 날라가서 목표물들을 공격하고 빨리 돌아올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레이는 그의 비행 로그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비행 로그북 안에는 그가 한국전 동안 수행했던 작전수행 숫자들과 비행시간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로그북 안에는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끼워 있었다. 바로 그가 한국전 당시 탔던 미티어 전투기 앞에서 찍은 21세 때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니 그가 얼마나 젊은 날 한국전에 참전했었는지 실감나게 와닿았다. 왕립호주공군(RAAF) 77 대대 레이는 호주 공군 조종사 가운데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공군에는 여러 조종사들이 있다. 수송기 조종사, 헬리콥터 조종사, 전투기 조종사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국전에 참전할 때 전투기 조종사로서 안 무서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보병부대 군인들에 비하면 저희가 훨씬 안전한 편이었고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맡은 임무를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 급해서 그 목표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속한 RAAF 77비행대대에는 30명의 조종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참전하는 기간 동안 제 동료 중 6명이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격추되어 한 명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1953년 한국전 당시 공군 전술 배치를 보면 김포비행장은 횡성 비행장과 함께 가장 전방에 배치된 유엔 연합군 비행부대였다. 이 김포 비행부대에 왕립호주공군(RAAF) 77비행대대가 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호주 비행대대가 조종하는 미티어 전투기는 고공비행보다는 저공비행에 유리해 낮게 날아가 적의 부대나 보급물자들을 찾아 폭격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는데 낮게 비행하다 보니 적의 포격에 맞아 격추될 위험이 컸었다. 그가 한국전에 참전한 7개월 동안 그는 동료 6명을 잃는 것을 가까이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감하게 전투에 임해 큰 공을 세웠다. “저희의 임무는 적의 군기지를 찾아 폭격하기도 하고, 도로 정찰을 나가 적의 보급트럭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도 낮에는 저희 전투기들이 와서 공격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주로 밤에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 새벽에 출격하여 아직 숨지 못한 보급품 트럭들을 공격하거나 오후 늦게 나가 막 이동을 시작한 트럭들을 발견하여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고 출격했는데 원산 근처에서 1백 대쯤 되는 보급 트럭을 발견하여 그 군수물자 트럭 1백 대 가량을 거의 다 폭파시켰습니다. 지금 제가 달고 있는 이 공군훈장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훈장인데 그때 세운 공으로 받은 훈장입니다.” 왕립호주공군(RAAF)에는 많은 비행대대가 편성되어 있다. 그중 레이가 속해 있는 왕립호주공군 77비행대대는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호주공군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되었다. 레이는 한국전쟁이 정전된 후 1953년 8월에 호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54년 새해가 되자마자 남극으로 파견되어 남극에서 남극지형을 사진 촬영하고, 남극을 항해하는 배들을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남극에서 돌아온 후 왕립호주공군 항공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소위(pilot officer)로 제대한 후 1956년부터 1983년까지 콴타스 항공사에서 민간항공기 조종사로 27년간 근무를 했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전기기사를 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전은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젊은 날 한국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호주는 한국의 혈맹 호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이어 영국과 함께 두 번째로 연합군을 보낸 한국의 혈맹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한지 이틀 후 6월 27일 곧바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정되었다. 그 후 호주 정부는 한국과 수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이 안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곧바로 병력을 파견한다. 호주는 먼저 6월 30일 영연방 극동해군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던 2척의 구축함을 파견하였고 그리고 뒤이어 7월 1일 왕립호주공군(RAAF)소속 제77전투비행대대를 미 극동공군 사령부로 급파하였다. 호주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한 한국으로서는 고마운 동맹국가라 할 수 있다. 육군, 해군, 공군 등 전군에 걸쳐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였고, 한국전에서 3백4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1천216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다. 실종자 수도 상당하다. 그 당시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와서 젊은이들이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한국을 도운 것이다. 레이는 가지고 있던 자료 가운데 10년도 넘는 신문 스크랩을 하나 보여주었다. 제목은 “실종된 공군 조종사의 마지막 출격”이었다. 이 신문 스크랩에는 실종된 조종사 피터 찰머스(Peter Chalmers)의 조카 잔 오스틴(Jan Austin)이 60년 전 한국전쟁 중 실종된 삼촌의 수수께끼가 마지막 출격기록을 통해 밝혀지게 될 것을 믿는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었다. “피터는 저보다 연배가 다섯 살 많았지만 저랑 친한 77 비행대대 동료였어요. 그런데 1953년 3월 26일 출격을 나갔다가 원산 근처에서 적에게 격추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은 6.25 한국전쟁을 일컫는 별칭이다.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쟁에 비해 전쟁기간도 짧았고, 미디어들을 통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2차대전 이후 가장 많은 연합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6.25 한국전쟁은 세계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우고 있다. 1950년 당시 호주에서도 많은 호주 국민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내고, 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빨리 군인들을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호주 국민들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한국에 전쟁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많은 젊은이들은 전혀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은둔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한국을 구했다. 레이 시버 씨도 한국을 위해 열심히 싸운 숨은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가 8개월 만에 호주로 다시 돌아오니 친구들이 그랬어요. 너 어디 갔다 왔니? 그동안 너 안 보이더라, 몇 개월 동안 뭐하느라 코빼기도 안보였니? 그래서 제가 한국전에 참전해서 열심히 싸우고 돌아왔다고 하니까 그런 일이 있었니? 하고 오히려 신기한 듯 쳐다보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한국전쟁은 호주에서도 한마디로 ‘잊혀진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한국에 세 번째로 많은 군인들을 파견한 혈맹의 국가이다. 당시 세계 각국 인구 비율로 따져볼 때 호주가 한국에 베푼 인도적 호의는 어느 나라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2000년에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군인 1만 7천 명 중 현재 2천5백 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젊은날 한국전쟁에 참전해 피를 흘리고, 기꺼이 한국을 도운 호주의 숨은 용사들이 이제 하나둘 지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71주년이나 되었고 한국전에 참전한 그들의 나이가 평균 90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지만 호주에 사는 동포들은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가오는 현충일(6월 6일)에 한국전 참전 호주 용사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03/06/2021

호주 국민 기업, 콜스 이야기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호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콜스 슈퍼마켓(Coles Supermarkets)에서 구입하는데, 콜스 슈퍼마켓은 조지 제임스 콜즈 경(Sir George James Coles, 1885~1977)에 의해 1914년에 설립되었다. 조지 콜스는 1885년 3월 28일에 빅토리아 주 머토아(Murtoa) 근처의 중중(Jung Jung)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1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조지 콜스가 첫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1번째 자녀를 낳고 사망했다. 조지 콜스는 빅토리아 주에서 운영하는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비치워스 고등학교(Beechworth College)를 다닐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멜번과 지방에서 다양한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1910년에 빅토리아 주 세인트 제임스(St. James) 타운에 있는 자신의 작은 가게 (6.1m x 5.5m)를 장남인 조지 콜스에게 4천500파운드(£)에 팔았다. 조지 콜스는 3년 동안 이 가게를 운영했다. 이후에 그는 소매업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미국과 영국을 방문했다. 미국에서 그는 당시 유행했던 ‘5센트 매장’과 ‘10센트 매장’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다. ‘5센트 매장’에서 파는 모든 제품들은 가격이 5센트를 넘지 않았고, ‘10센트 매장’에서 파는 모든 제품들은 가격이 10센트를 넘지 않았다. 호주로 돌아온 그는 사업에 대한 큰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본 것들을 기초로 해서 소매업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먼저 그는 동생들과 함께 자본을 모았다. 그리고 1914년 4월 9일에 빅토리아 주에 위치한 콜링우드(Collingwood)의 스미스 거리(Smith Street)에 소매 매장을 열었다. 그는 매장을 열기 전에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매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해야 매장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에게 매장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한편, 조지 콜스는 제1차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1917년 6월 18일 호주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1918년 4월에 치러진 치열한 전투 중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후송되었고 이후 호주로 돌아와 1919년 3월 1일멜번에서 제대했다. 한편, 그와 함께 군에 입대한 동생들 중에서 짐(Jim)과 데이빗(David)은 전사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조지는 그동안 운영해왔던 매장을 삼촌에게 팔았다. 그리고 1919년 6월에 동생 아써(Arthur)와 동업해 좀 더 큰 건물을 얻어 다른 매장을 열었다. 이 매장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고, 매출은 점점 늘어갔다. 한편, 조지 콜스는 1920년 2월 7일, 멜번 큐(Kew)에 위치한 성삼위교회 (Holy Trinity Anglican Church)에서 마가렛 허버트(Margaret Herbert)와 결혼을 했다. 조지와 마가렛은 결혼 후에 5명의 자녀를 낳았다. 조지 콜스는 1921년 7월 1일에 동생과 함께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이름은 G. J. Coles & Co. Pty Ltd였다. 1924년에는 조지 콜스의 형제들인 에드가(Edgar)와 케네쓰 (Kenneth) 등이 사업에 동참하였다. 같은 해에 조지 콜스는 멜번의 중심가인 버크 거리 (Bourke Street)에 새로운 매장을 열면서 사업을 조금씩 확장해 나갔다. 새롭게 문을 연 매장에는 호주 최초로 셀프 서비스 카페 (Self Service Cafe)가 운영되었다. 콜스 회사는 점점 더 성장했고, 1927년에는 매장이 9개로 늘어났으며, 매출액도 84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1928년에는 멜번 버크 거리 (Bourke Street)에 위치한 아케이드(Coles Book Arcade)를 구입했고, 미술용품을 파는 매장도 열었다. 1929년부터 호주에 경제 공황이 불어 닥쳤다. 하지만, 조지 콜스는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했고, 콜스 회사는 나날이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콜스 회사는 전국에 86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많은 매출을 올렸다. 1931년도에 조지 콜스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이다. 조지 콜스는 모든 경영을 자신의 동생인 아써(Arthur)에게 넘기고 자신은 회장직만 유지했다. 운영 일선에서 물러난 조지 콜스는 1933년부터 알프레드 병원(Alfred Hospital)에서 명예 회계사로 일했다. 그는 병원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병원의 확장을 위해서 10,000 파운드(£)를 병원에 기부했고, 병원 증축 위원장이 되어서 병원 증축에 큰 공헌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멜번 지역 간호협회(Melbourne Dis- trict Nursing Society)에도 많은 기부금을 내었다. 또한 그는 지역 사회를 섬기기 위해서 1934년에 멜번 로타리 클럽(Melbourne Rotary Club) 회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1935년도에 그의 동생들이 조지 콜스를 회장직에서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지만, 조지 콜스는 회장직을 굳건히 지켜냈다. 세계 제2차 대전은 콜스 회사의 판매 전략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많은 기혼 여성들이 직장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기혼 여성들은 요리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콜스 매장에서 가공된 식료품들을 더 많이 구입하기 시작했다. 콜스 회사는 이러한 소비자들의 욕구를 깨닫고 더 많은 가공된 식료품들을 판매해 매출을 늘렸다. 1946년부터 콜스 회사는 다리미와 토스터 같은 가전 제품들을 매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1948년부터는 화장품 판매를 시작했다. 1950년대는 콜스 회사가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였다. 콜스 회사는 다른 소매 매장들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면서 콜스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또한 매장의 숫자를 늘릴 뿐만 아니라, 물류, 창고, 유통 시스템 등에도 적극 투자해 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중요한 슈퍼마켓 체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조지 콜스는 회장직을 사임하고 이사직만 유지했다. 회사의 일에서 벗어난 그는 지역 사회의 모임에 적극 참여하거나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투락 (Toorak)에 위치한 성 존스교회 (Saint John’s Anglican Church)의 운영위원으로 섬기면서 교회의 성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그는 1946년부터 68년까지 호주 내셔널 은행 (National Bank of Australasia)에서 임원으로 일했으며, 1966년부터 1968년까지는 부회장으로 섬겼다. 조지 콜스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기부를 많이 한 것이 알려져 1957년도에 기사 작위를 받게 되었다. 기사 작위를 받은 후에도 조지 콜스는 기부를 많이 했는데, 1963년에는 멜번대학에 많은 기부금을 내었다. 그의 기부금은 멜번대학 내에 의료학부 건물을 건축하는데 사용되었다. 1977년 12월 4일, 그는 투락(Toorak)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한편, 콜스는 1960년대에도 계속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매장 수가 많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호주 최초로 주차장을 갖춘 독립 건물에 콜스 대형 매장을 열었다. 콜스는 이때부터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제품들과 식료품들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콜스 회사는 할인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약 7천 개 품목의 가격을 획기적으로 인하했다. 1980년대에는 호주 달러가 강세였던 시기인데 이때 콜스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1982년부터 콜스는 전자 스캐너를 도입해 항목별로 구입한 물건들을 분류한 영수증을 인쇄해 주기 시작했다. 1985년도에는 마이어(Myer) 회사를 인수해 합병했다. 회사 이름도 콜스 그룹(Coles Myer Ltd)으로 변경했다. 1987년에 본사 건물을 신축했는데 밥 호크 (Bob Hawke) 호주 수상이 완공식에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1990년대에는 컴퓨터와 바코드를 통한 물류 관리로 비용이 많이 절감되었다. 콜스 회사는 이 절감된 비용을 제품 가격 인하에 적용하였고, 1993년부터 플라이 바이스(Flybuys)라는 고객 보상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일 년 만에 약 350만 명이 플라이 바이스 회원으로 등록했다. 또한 1999년부터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콜스는 주유소 사업을 시작했다. 콜스는 2004년부터 전국적으로 콜스 주유소를 열고 휘발류 판매와 편의점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콜스는 대표적인 호주 국민 기업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콜스 그룹은 1922년부터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다. 이 기부금들은 병원과 양로원의 발전을 위해 쓰여졌고,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조지 콜스는 “지역 사회에 기부하는 것은 사업체들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했다. 이러한 조지 콜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 날에도 콜스는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조지 콜스가 시작한 콜스는 호주 국민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렸고, 신뢰도가 높은 회사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기업가가 이룬 놀라운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04/05/2021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는 예수전도단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교회를 잘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을 받았다.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우리 아버지를 데리고 가셨을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선다싱 전집을 읽다가 선다싱과 같이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어서, 집안 어른들에 의하여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이는 자라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1983년 어느 날, 하태식 전도사는 광화문을 걷는 중에 우연히 노방전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사무실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예수전도단의 창시자인 오대원 선교사(Rev. David E. Ross)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하태식 전도사의 운명을 바꾸었다. 하 선교사는 1983년부터 1993년까지 10년 동안, 예수전도단의 간사로 시작하여 본부 사무실 행정 책임자를 역임했다. 하태식·정선 선교사 가족은 호주 예수전도단의 초청을 받고 1994년 1월 1일 호주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28년 동안 호주 내 한국인 책임자로 사역하고 있다. 예수 전도단과 YWAM 오대원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1961년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 이름을 갖기를 원했다. 마침 함께 살던 한옥집 주인인 오복교 장로의 성인 ‘오’와 'Ross' 비슷해서 ‘오’씨로 하기로 하고, 이름을 ‘대원’이라고 했다. 대원군은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자신은 기독교를 잘 전파하겠다는 의미의 역설적인 이름이다. 오대원 선교사의 사역은 젊은 층, 특별히 대학생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선교는 1967년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사역으로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오히려 말씀으로 돌아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 뜨거운 열정을 주께 돌이키면 좋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1972년 예수전도단의 출발이 되는 화요기도모임을 시작했다. 1973년에 YWAM과 관련없이 오대원 선교사가 한국에서 ‘예수전도단’(Jesus Evangelism Team)을 발족하였다. 당시 국제 YWAM의 리더인 로렌 커닝햄과 로렌 커닝햄과 함께 YWAM의 근간을 마련했던 조이 도우슨은 오대원 선교사에게 YWAM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지만, 남장로교 선교사의 직임을 갖고 있던 오대원 선교사는 이를 거부했다. 예수전도단은 1979년에 기존의 사역을 대학 사역, 직장인 사역, 청소년 사역으로 분할했다. 1979년 하와이에서 오대원 선교사가 안식년 중 코나의 열방대학에서 CDTS를 받으면서, 9월 28일에 예수전도단 사역을 YWAM과 연합하기로 결심하였고, 이에 따라 1979년 말에는 남장로교 선교사 직분을 사임하였다. 이후 1980년초 태국 치앙마이 봄 선교대회에서 통합이 이루어졌고, 오대원 목사가 한국 대표로 임명되었다. 정식 한국어 이름은 ‘예수전도단’으로, 영어 이름은 YWAM Korea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오늘날 국제 YWAM은 전 세계 180개국에 1천여 개의 지부를 두고 1만 8천여 명의 전임 사역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세계선교를 위한 공동체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YWAM은 180개 국을 3지역으로 나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아프리카 유럽, 남미 북미 지역이다. 2년에 한 번씩 정기 총회를 갖는다. 호주에는 25개의 지부가 있다.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에 본부가 있고, 열방대학도 있다. 일 년에 두 차례씩 돌아가면서 정기 총회를 갖고 있다. “저는 정기 총회가 기다려집니다. 총회에서는 6개월간의 한 일과, 6개월간의 할 일을 보고합니다. 지역 사정이 다르다 보니 사역도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레노리(Glenorie) 시대를 열다 예수전도단은 Faith Mission을 한다. 본부에서는 재정지원을 따로 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스스로 재원을 만들어서 사역해야 한다. 하 선교사는 호주에 도착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모험과 기적의 연속이었다. 6년 가까이 유랑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지금의 사역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물론, 돈이 있어서 구입한 것은 아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하 선교사에게 비전을 보여 주셨고, 믿음으로 아무런 경제적 대책도 없이 50만 달러에 계약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때는 누굴 만나든지 돈을 줬어요. 수표도 끊어주시고 만 불도 선뜻 주시고 천 불도 주시고 20불도 주시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기간에 하나님께서 15만 불을 채워주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렇게 기도했거든요. 이 센터가 호주를 위한 거니까 호주에서 하나님이 돈을 주셔야 됩니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렇게 해야 이 땅이 축복되고 이 땅이 다음 세대에게도 축복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 은행 돈을 빌리고 보태서 지불하고 1999년 12월 18일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1999년 12월 매입할 때에는 황량한 언덕에 달랑 작은 붉은 벽돌집 한 채였다. 사역이 확장되면서 그는 성전과 숙소가 필요했다. 2000년 믿음으로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지만 재정 문제와 건축법 문제로 진행이 더디었다.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다. 시드니 318 베이스 호주에 오면서 하 선교사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다. 창세기 14장 14절 말씀이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는 1년에 30명 정도의 제자를 배출하게 되면 10년 후에는 318명 정도의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가 일어날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캠프 이름을 시드니 318로 지었다. 시드니 318에서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예수제자훈련학교(DTS 12주 강의와 10주 선교여행), 선교영어마을학교(ESLM), 청소년 영어와 문화, 영성캠프(YEC), 총체적 선교학교(SOFM 12주간), 사역자훈련학교(SOM 12주), 귀납적 성경연구학교(BCC, 12주), 예배, 중보기도, 영적전쟁학교(SOWIW 12주),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BEDTS) - 왕의자녀들(KiING'S KIDS)과 화요 찬양 예배를 대신하여 목요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모든 프로그램의 기초는 DTS(Disciple Training School)이다. 이 과정은 하와이에 본부를 두고 있는 열방대학(University of Nations)의 1학년 1학기 과정이다. 국가마다 베이스마다 혹은 대상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3개월의 강의와 3개월의 전도여행으로 이루어진다. 한 기수가 모두 공동생활을 하며, 내부 커리큘럼에 따라 강연과 특강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주 골자다. 새 성전과 기도실 시드니 318은 호주내의 한인들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오고 있다. 아웃리치로 갔었던 동남아에서도 예수를 믿고, 호주에서 훈련 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드니 318에서는 영어권과 한국어권으로 이원화 체제로 구축이 되어 언어 문제는 전혀 없다. 다만 훈련 공간이 부족하여 2010년부터 성전과 기도실의 건축을 시작했다. 건축을 시작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인내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올해 안에 건축을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지금까지 온 겁니다.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를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벽돌 몇 장을 보내 주시면 쌓고, 시멘트를 주시면 바르며 하나님의 은혜로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사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완공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사기간이 길어진 것은 특별히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이 자비량으로 하는 탓이다. 지금도 건축은 진행형이다. 여기저기 건축 자재들이 쌓여있었다. 기자는 5년 전 시드니 318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공사 중이었는데, 여전히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하 선교사 가정은 1994년 호주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한 주에 일인 당 100불씩 거두어 최소한의 경비로 생활하고 있다. 예수 전도단의 생활양식은 ‘Keep is simple and small’이다. 이제 코로나의 사태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시드니 318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함께한 부인인 정선 선교사는 담대하게 선포한다. “올해 안에는 반드시 새 성전을 건축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숨겨둔 누군가를 통해서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기자는 정 선교사의 강력한 믿음의 선포에 고무되어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드니 318 베이스를 떠날 수 있었다.〠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30/04/2021

집단적 부흥에서 개인적 부흥으로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안필립 베트남 선교사를 지난 지난 2월 9일, 시드니주안교회에서 만났다. 그는 삼성 전산실에게 근무하다 호주로 이민왔다. 웨스트팩, 텔스트라에서 근무하다 1990년에 호주 중앙은행인 Reserve Bank IT 메니저로 입사했다. 2007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베트남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성결교신학대학원을 마친 후 20년 이상 근무한 중앙은행을 그만두고 2012년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의 상사가 사직 이유를 물었을 때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간증했다. 상사도 감동을 받고 과거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지만 결단을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베트남으로 떠나고 얼마 후 상사도 직장을 그만두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50살이 넘어서 부름 받은 자신을 포도원에 늦게 부름 받은 일꾼과 비교한다. 늦은 시간에 부름 받았지만 하나님의 포도원 일꾼으로 불러주심에 감사하고, 시간에 관계없이 굳이 일꾼을 모으시는 수확기에 처한 포도원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야간근무 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금년 1월 초에 건강 이상이 발견되어 치료차 시드니로 돌아와 치료 중이다. - 안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언제 시드니에 오셨나요? “베트남에서 10여년 동안 선교사로서 사역하다가 치료받을 곳이 있어 코로나 속에서 1월 초에 힘들게 입국했습니다. 오랜만에 시드니를 찾으니 저를 맞이하는 것은 코로나로 인한 삼엄한 경계 태세와 격리, 죄수처럼 취급하는 경찰들과 군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10년간 안식년을 갖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몸의 연약함을 보시고 강제 안식년 갖게 하시는 듯합니다. 코로나로 당분간 베트남으로의 하늘 길이 막혀 기다리는 일 외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본인 소개를 해 주시죠? “저는 1984년에 시드니로 이민와서 벨필드(Belfield)에 있던 시드니중앙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부터 동교회의 선교위원회를 섬기며 미전도종족 선교(AAP: Adopt A People Group)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태국 및 동남아 지역의 미전도 종족 리서치를 여러 차례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한 입양 대상 종족을 찾아내어 교회에 영적으로 입양할 종족으로 추천했고, 2000년 6월 25일 베트남의 Taidam족(Black Tai)을 공적으로 입양하는 입양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홍관표 목사님과 온 성도들이 이 타이담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모든 가능한 지원과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교회를 세워 나가고, 그들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의 지원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약속하였습니다. 그 후 이 미전도종족 선교사역이 지속되던 중에 2007년 베트남 선라 현지에서 저도 풀타임 선교사로 부름 받게 되었습니다. 선라지역 현지 상황을 살펴보던 중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더 파송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어떻게 선발하여 보낼까 생각하던 중에 “Why not you?”라는 강한 도전을 깊이 받았습니다. 남을 보낼 생각에만 몰두해 있던 제게 주신 이 느닷없는 질문이 선교에 대한 저의 반응과 태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한 저는 이를 주님의 부르심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나가는 것에 대해 아내와 기도하며 주님께 매달린 후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곧바로 신학을 시작했고(Sungkyul Theological Seminary in Sydney), 2010년 말에 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2011년 베트남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1990년부터 20여년 동안 호주중앙은행에서 IT 메니저로 일하며 안정된 생활을 했고 그 직업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길이 없어 순종하였습니다. 당시 시드니중앙교회(담임목사 오성광)와 시드니선교교회(담임목사 김은옥)의 공동파송을 받고 베트남 북서부 선라지역으로 파송되었습니다. 중앙장로교회와는 후원과 파송 관계가 끊어질 때까지 함께 선교사역을 진행했습니다. 몇 년 후에 제가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선라 현지에서의 선교 활동이 현지 정부로부터 금지되었기에 중앙장로교회와의 관계가 부득이 단절되었습니다. 시드니선교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합병이 일어나 파송 관계가 끊어졌고, 제가 소속된 성결교단인 시드니주사랑교회(담임목사 진교식)와 인천 사랑비전교회(담임목사 어희준)가 파송교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이것도 더 큰 사역을 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뒤늦게 하나님의 포도원에 부름 받은 품꾼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많은 주님의 일꾼들은 아침 8시나 9시, 혹은 12시에 부름 받아 온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신실한 일꾼들입니다. 이런 분들께 늘 죄송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해가 뉘엿뉘엿져 가는 오후 5시에 불림을 받아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말미에 선 무익한 종입니다. 그러나 추수할 것이 많고 시기를 놓치면 아니되기에 굳이 늦은 오후에라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일꾼을 들여보내는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 여겨져 오후 늦게나마 하나님의 포도원의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야근근무를 시켜 달라고 주님께 조르고 있습니다.” - 선교사로서의 10년 간의 삶을 요약해 본다면...? (선교사로서 문화의 벽을 넘어 다른 곳에서 사역한다는 것은...?) “▶우선, 불편함을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시드니 문명사회에서 베트남 산골에서 초기 몇 년을 살다보니 모든 부분이 불편했습니다. 수도, 화장실, 전기, 먹는 것, 언어 소통, 문화 차이, 먼지, 기후 등 모든 면이 불편하고 답답했습니다.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살던 곳, 정든 곳을 떠나 모든 것이 다른 소수민족 지역에 살다 보니 외로움이 깊숙이 찾아왔습니다. ▶가난함을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선교후원자들을 통한 공급에만 의존하고 10의 10조를 드리는 삶을 살다 보니 우리 자신을 위한 가난한 삶이 늘 곁에 있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이런 혼란이 초기 시절에 더했습니다. 새벽 2시에 문득 일어나 내가 어디에 있지? 왜 이곳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맞나? 이 닫힌 지역 오지 산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럴 때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손 내밀어 도움 청할 곳이 없는 광야에서의 갈등과 고뇌의 시간들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오해받고 판단받고 비난받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이었습니다. 현장의 상황을 고려치 않은 무분별한 판단과 비난과 평가는 현지 선교사를 죽이는 일입니다. 파송 교회, 선교 단체, 교회 내에서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이 쉬운가 봅니다. 현장 방문과 영적인 필요, 현황 등을 무시한 채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돋보이고 스스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줄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현지 선교사의 최고 관심사와 우선 순위는 현지인들에게 어떻게든 복음을 전하고 섬기고 가르쳐 하나님의 백성을 삼는 일이며 하나님께 쓰임 받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현장 중심, 현장의 상황을 배려하고 함께해 주는 후방교회가 참 드뭅니다. ▶위기의 시간, 벼랑 위의 시간들을 견뎌내는 일입니다. 현지 공안들의 핍박, 추방의 두려움, 질병의 위험, 수시로 나타나는 위기의 순간들을 피해가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들이 많았고 지금도 지속됩니다. ▶끝없는 자기성찰,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한 깊은 영성을 스스로 유지하는 일입니다. 선교사는 격리된 시간이 많아 시간이 지날수록 영성과 지식과 input이 메말라 갑니다. 주로 영육 간 공급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자칫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늘 주의하고 자신과 복음의 좋은 본질과 가치에 집중하고 끄집어내는 영적 각성이 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소중이 여기는 절대 가치인 복음을 대하는 태도와 집중력과 행동과 추진력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받고 매일 공급받아야 합니다. 매일 복음을 누리고 자신에게 선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 베트남의 코로나 대처 상황은 어떤가요? “2020년 코로나의 회오리 속에서 베트남도 많은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코로나 록다운(lockdown)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상당기간 교회 모임이 중단되었고 모든 음식점과 상점, 커피숍, 공장, 회사 등 사람들의 모임이 금지됐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의 단호한 조치로 코로나가 종식되어 5월 말부터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고 비대면 예배에서 대면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8월에 다낭의 전염 사태로 3-4주 동안 록다운을 겪었지만 신속하고 단호한 대처로 2020년 말까지 거의 정상적인 국내 활동이 허락됐습니다.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제2의 모범방역국가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과의 항공편은 철저히 막히고 통제되어 이에 따른 큰 불편이 있었습니다. 여행업, 요식업, 호텔업 등에 종사하던 많은 한인들의 업소가 문을 닫았고 한국으로의 귀국 행열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은 지속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 코로나와 싸우는 고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교회개척도 더 늘어났으며 세례자도 늘어나는 영적인 복이 임했습니다. 2021년 1월 변종바이러스가 베트남에 다시 퍼져 감염자가 늘어 강력한 록다운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2월 현재 각종 모임과 집회, 예배가 전혀 허락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식당과 유흥시설도 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국경 단속은 더욱 심해져서 호주와 베트남의 비행기 편이 무기한 막혀버렸습니다.” - 베트남의 선교사역을 요약하신다면...? “제게 주신 베트남의 선교사역을 요약하면 가르치고전도하고 구제하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델을 자연스레 담당케 하셨습니다. 선교의 사령관이신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순종하며 수종들다 보니 이 3가지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첫째, 가르치는 사역(teaching)입니다. 지난 수년간 해오던 성경공부 방식의 모임을 신학교로 승격시켰습니다. 작년 5월에 46명의 학생들을 모아 차세대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시작했습니다. 6개 종족들이 모여 공부를 시작했으나 소수민족 출신들의 베트남어 실력과 학습능력이 저조하여 16명의 학생들을 1학기 후에 탈락시켰습니다. 30여 명의 학생들이 남아 학업 중에 있고, 2021년 3월 새학기 시작시 20여 명의 신학생들을 추가로 모집할 예정입니다. 이 학교를 시작할 때 시드니의 몇몇 목사님(진기현, 김석원, 진교식 목사 등)들께 자문을 구하고 좋은 코칭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들을 길러내는 좋은 학교로 발전하기 위해 기도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베트남 교수진 5명이 함께 섬기고 있으며, 향후 계절학기 등을 통해 호주나 한국에서 교수들을 초청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합니다. 저는 선교지의 양육의 단계를 3단계로 정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1단계는 복음 전도와 결신 단계이고, 2단계는 양육 단계로써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도록 키워내는 단계이고, 마지막 3단계는 동역의 단계입니다. 동역의 단계가 되면 모든 선교 사역의 동반자로서 함께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미 3단계 동역의 동반자 차원으로 성장한 현지 지도자들이 상당수가 있어 선교사 한 개인의 영성과 능력을 뛰어 넘는 부흥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둘째, 복음 전도 및 교회 개척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양육된 제자들과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금년 한 해만 북부 지역에서 3개, 남부 지역에서 3개의 교회가 새로 개척되었습니다. 세례자도 급증하여 예년보다 1.5배가 넘는 새신자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며 열매입니다.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베트남은 닫힌 지역이기에 복음전파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늘 관계기관의 추적과 감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통한 전도가 그나마 안전합니다. 외국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많아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가족, 이웃, 친구, 동료, 자기 종족들에게 스스로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베트남엔 9천600여 만의 인구가 있고 곧 1억을 돌파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54개 소수민족들이 베트남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의 총 숫자는 인구의 1%가 좀 넘는 120만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셋째, 구제와 치유사역입니다. 우선 고아원을 열어 23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일 년에 버려지는 아이들의 총 숫자가 1만 명이나 된다는 정부의 공식발표가 있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부나 관련단체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 중 23명의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고 복음을 전하고 예배와 기도로 자라게 합니다. 제자들 몇 명이 상주하며 보모 역할을 합니다. 말씀 가운데 지혜롭게 성장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세계경영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노이 북부 여러지역과 남부지역에 마약재활원(Drug Rehab Centre)을 열어 마약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재활을 돕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으로 인해 폐인이 돼가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마약에 손을 대서 몸과 정신이 황폐해져 버렸습니다. 하노이 부근에만도 1만여 명의 마약자들이 감금돼 있거나 버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숫자가 날마다 늘고 있어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의 앞날에 큰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초기에 마약자 단속을 하지 않고 처벌도 약했던 것이 빠른 확산의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다행히 최근에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제재하고 강력한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약중독자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베트남 팀들이 나서서 재활을 돕고 있으며 복음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사람이 되도록 돕고 있습니다. 마약은 절대 약물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만지심과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저희들의 경험입니다.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힌 사납고 폭력적이고 고통으로 울부짖는 마약자들을 각 재활센터로 데려다 재활을 하게 합니다. 이미 마약재활을 마친 형제들이 자원봉사하며 이들을 안아주고 같이 울고 기도하며 이겨내도록 도와줍니다. 빠듯한 하루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대부분의 시간들이 기도와 찬양, 성경 읽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3년 정도 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실한 신앙인이 되어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따릅니다.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졸업하여 정상적인 사회인이 됩니다. 온 가족과 동네의 경사이며 기쁨입니다. 재활을 마친 형제들의 가족들 대부분이 감사와 기쁨으로 교회에 함께 출석합니다. 버려진 아들, 포기할 정도로 처참했던 아들을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고난과 아픔이 있는 낮은 자리로 먼저 흘러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현장입니다. 또한 각 곳의 가정교회와 소수 부족 마을에 다양한 구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학금 지원, 옷과 생필품 지원, 병든자 수술 및 의약품 지원, 쌀과 각종 먹을거리들을 모아 시급한 곳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는 한국회사들이 많아 재고품이 생길 때 기증받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분들로부터 쓰던 물건들을 제공받아 모아서 필요한 곳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금년에 베트남 중부지방에 태풍이 여러 차례 들이닥쳐 많은 마을들이 초토화됐습니다. 수재민들이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당장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들을 돕고 생필품을 공급하며 고난에 동참해주는 일들에 신속하게 반응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이 일에 많은 가정교회 성도들을 동원하고 격려하여 참여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에게 더 큰 기쁨과 행복감과 격려를 주셨습니다. 이 모든 사역들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보여주시고 감당케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저희 선교 사역엔 선택과 집중이라는 특별한 전략적 구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최종 사령관이시기에 현지 사정과 선교적 필요에 의한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며 따라갈 뿐입니다. 선교지는 어떤 프로젝트와 타겟을 정해 그것에만 집중하는 곳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을 치는 목양이 필요한 곳입니다. 즉 전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고 구제하고 치유하고 돌보는 통전적인 목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선교지의 백성들이 선교사와 선교단체들의 피교육지이거나 그들의 선택과 집중의 대상이 되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역사가 짧은 곳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살피고 영적으로 케어하는 목자로서의 통전적 목양의 역할에 충실할 때 성도와 교회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는 걸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류는 보이지 않는 전쟁 중 - 선교지에서 드리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온 세계는 지금도 코로나로 인해 붕괴돼 가고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전쟁 중입니다. 이 못된 바이러스가 많은 생명을 빼앗고 공포와 절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랑해 오던 인류문명과 과학, 의학, AI 주도의 4차 산업혁명이 코로나 앞에서 철저히 무능하고 초라해졌습니다. 코로나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는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이나 의료 시스템도 보이질 않습니다. 고비용 저효율의 국제기구들도 무능과 부패의 극치였습니다. 인류를 비웃고 있는 코로나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졌습니다. 저항도 못하고 쓰러지는 인류문명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전쟁 앞에 서 있는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코로나 펜데믹은 인류에게 많은 변화와 위기를 주었습니다. 겉만 요란했던 이 시대 선진 시스템의 총체적 무능과 부패를 깨닫는 서늘한 각성입니다. 교회 안에도 동일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주로서의 권위가 훼손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혈을 통한 죄용서와 구원과 같은 믿음의 내용이 조롱받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인 예배, 기도, 교제, 모임, 전도와 선교라는 믿는 자들의 존재방식과 믿음의 방법이 심각한 도전에 처해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무능하고 무력한 이 시대 믿는 자들의 민낯을 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어두운 미래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 이 시대에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참 의미는...? “이러한 도전 앞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회복하고 취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예수님 편에 서서 주님을 시인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0:32-33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길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주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시인한다는 말은 삶의 4가지 영역에서 예수님 편에 서야함을 뜻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삶 속에서 다양한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동료들의 압박이라든지, 가정에서의 제사문제와 우상숭배, 여러 유교적 관습 속에서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둘째는 교회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사회나 국가체제로 부터의 박해가 왔을 때 이를 견뎌내는 겁니다. 셋째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할 때 그것들이 믿음의 길과 충돌하면 기꺼이 욕망을 포기하는 겁니다. 넷째 영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과 복음을 정직하게 나타내는 일입니다. 특별히 이단, 동성결혼, 진화론과 첨단과학이론,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시류의 압박과 세속적인 가치관과 정의롭지 못한 정치권력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정직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도전이지만 이 4가지 영역에서 떳떳하게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교회를 핍박하는 권력 앞에서, 혹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과 이익 앞에서, 또 과학적 주장이나 이념과 사조, 정치권력 앞에서 예수님 편에 서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를 정직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믿음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 개인적 부흥의 필요성은...? “이 시대는 교회나 국가적 차원의 부흥에 편승하여 그 대열에 참여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처럼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고 주님의 제자로 일꾼으로 하나님께 세움 받아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비대면 예배, 거리두기, 모든 모임과 함께함이 부정되고 있는 이 시기에 반드시 하나님과 독대하고 매일 복음을 자신에게 선포하고 누림은 물론, 복음이 주는 가치와 본질에 집중할 때입니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에 모든 신자들에게 필요한 개인적 부흥입니다.” - 준비하고 계신 ‘시드니 에스겔 선교기도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죠? “저는 연초에 치료차 시드니에 오게 됐고 하늘 길이 막혀 7월까지 여기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개인적인 부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눈물의 기억하는 기도회를 섬기려 합니다. 이 기도회를 통해 우리의 삶과 믿음을 선명하게 하고자 합니다. 이 시대가 주는 정보의 홍수와 지식의 무정부 상태로부터 자발적 고립의 시간을 갖습니다. 스마트폰, 각종 SNS, 메신저, 인터넷, 유튜브 등에 빼앗기고 점령당한 소중한 삶의 시간들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 믿음과 삶의 선명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른 영성을 세워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좋은 영성이란 좋은 본질에 집중하는 영적 각성입니다. 내 안의 가치, 복음의 가치에 집중하고 적용하고 이끌어내는 영적 각성이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능력입니다. 영적 방황과 갈등 속에 있는 이 시대의 성도들이 복음의 본질적 가치에 집중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복음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죄용서, 회개와 눈물, 구원, 영생, 거룩과 의의 100%가 내게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열정이란 단어가 조롱받고 천시받는 풍조가 교회 내에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정은 내가 원하는 것, 품은 것, 소망하는 것에 대한 나의 태도이자 행동이며 실천력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가야할 최선의 길에 대한 집중력이자 추진력입니다. 인간의 감정에 의한 치기 어린 열심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킬 것(요 2:13-22)이고,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사 9:7). 로마서 14장 23절에 보면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갈 길을 잃은 것이 죄입니다. 목적 상실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함께 바라보고 따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날마다 나를 감동시키는 사명, 나의 위대한 상상력을 발휘케 하는 건강한 열정을 회복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는 시드니에서 있는 동안 작은 기도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를 원하고 있다. 2월 14일, 베트남 소수민족의 집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첫 번째 ‘선교기도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코로나 사태로 모임 자체를 꺼려하는 시기에, 특별한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이 함께 했다는 것은 철야근무를 마다하지 않는 안 선교사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 그는 집단에 편승하여 개인의 영적 성장을 기대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단독자의 관계로 시대가 악하면 악할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을 마치며, 안 선교사를 통해 시드니에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하여 본다.〠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07/04/2021

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가 1월 21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9천7백만 명을 넘어 1억 명에 달하고 있으며, 치명률이 2.14%, 220개 국가에서 발생했다. 호주나 한국과 비교하면 국내보다 해외가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는 모든 해외의 의료체제는 매우 열악해서 진단 자체를 받기도 어려운 실정이며, 감염이 되어 병원에 입원한다고 해도 치료가 될지 의문이다. 선교를 후원하고 있는 교회들 사정도 어려워 선교비도 줄어들어 전력적인 철수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신년 초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에서 보내온 선교사들의 목소리가 담긴 편지를 소개한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 안쪽 복숭아뼈 골절, 이제 막 걷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 주시는 사랑하는 동역자님~ 새해에는 기쁜 일과 감사한 일만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랜만에 치과 선교 보고를 드립니다. 헤브론병원이 코로나 사태 중에도 중단없이 진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놀라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처음엔 환자가 많이 줄어 걱정했는데 거의 80%정도 회복이 되었고, 특히 치과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양한 환자가 찾아오고, 캄보디아에서는 치료가 어려운 케이스의 환자들도 많아 보람도 느끼고 있지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저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성품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셔서, 우리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사역하게 하소서." 또 모든 수술 전 기도로 시작하며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의 손이 직접 움직이고 계심을 느끼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이라고 합니다. 헤브론병원 내과의 닥터 홍텐은 사랑니 발치를 위해 6년 전부터 여기저기, 왕립대 구강외과 교수까지 찾아갔으나 뿌리가 신경관과 붙어있어 너무 위험해서 해줄 수 없고 거절을 당해 고생하는 중이었는데 그동안 어려운 사랑니 발치를 몇 번 어시스트한 치과의사 보페악 선생이 자랑을 했는지 찾아왔습니다. 산부인과 닥터 소말리, 소아과의 닥터 릴리까지 동행해서 왔습니다. 헤브론병원엔 치과용 CT가 없어 외부에서 찍어 오라 했더니 겹쳐 보여서 그렇지 붙어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 가까워 수술 시 신경을 건드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 후 1시간 반에 걸친 난발치를 성공적으로 했습니다. 닥터 홍텐이 너무 놀라워하며 사진을 친구들인 동료의사들과 공유해서 명의(?)로 떠오르는 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현지 의사들이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 현지 치과의사들 사이에는 소식이 얼마나 빠른지 어떤 수술을 한 명 해주고 나면 같은 케이스의 환자들이 자꾸 온답니다. 닥터 홍텐은 자기 고향에서 온 거라며 과일도 가져다 주고 많이 친해졌죠. 특히 선교사가 후원해서 전문의까지 된 친구라는 얘기를 들어서 크리스찬 의사들이 리더그룹이 되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비전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아 더욱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개인치과에서 하기엔 난이도가 있는 수술이 있다고 기도를 부탁하더군요. 어시스트도 걱정되고... 전에 다른 수술을 해 준 환자인데 치아를 만드는 세포에 이상이 생겨서 치아를 계속 만드는 치아종양과 엉뚱한 곳, 상악 앞니 뿌리쪽에 누워 매복한 송곳니까지 제거해야 하는 수술이라 구강외과가 있는 종합병원인 러시안병원에 가라고 해도 여기서 해달라고 계속 조르고, 닥터 보페악도 해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해서 하게 되었는데, 종양 밑의 치아를 살리느라 2차 수술까지 해서 어렵게 성공했습니다. 사실 러시안병원에 가면 2주 정도 입원도 해야 하고 치아를 살리지 못하면 임플란트나 브릿지를 해야 하니 비용이 너무 커질 뻔 했을 텐데 수술이 잘 되어서 참 기뻤고, 아직 어린 16세 소녀가 치아를 보존하게 되었고 또 암이 아니라고 설명해줘도 종양이라니까 놀라서 이는 뽑아도 좋으니까 제발 종양만 제거해 달라던 보호자를 안심시킨 것도 참 보람이었습니다. 이 소녀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평생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12월 초, 한국에서 한 임플란트가 부러졌다며 시아누크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찾아왔습니다. 현지 치과에 갔더니 임플란트 자체를 제거하는데 3천500불 정도 든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던 중에 헤브론치과에 가보라는 소개를 받았답니다. 일단 있는 도구로 나사를 제거해 보고 만약 안되면 한국서 나사 제거용 키트를 구해와서 다시 시도해 보자고 설명을 했는데, 다행히 어렵게 부러진 나사를 제거해서 임플란트를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께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았다며 너무 좋아하시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요즘은 한국에 나가기 어려워진 선교사들이 많이 오십니다. 선교사들을 제대로 치료해 주는 것도 선교라는 저희의 비전을 기쁘게 받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닥터 보페악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처음 보는 장면이 많으니 놀라기만 하다가 이젠 부끄러워 하지 않고 용감하게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많이 발전한 거라네요. 일방적인 설명이 아니라 제대로 된 케이스 컨퍼런스가 시작된 거죠. 자기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현지 의사들에게 되도록 많이 전해 주고 싶어하는 마음도 주님이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실은 제가 사고가 좀 있어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10월 5일(월) 병원에서 퇴근하다 빗길에 미끌어졌는데, 오른쪽 다리 안쪽 복숭아뼈가 골절되었어요. 한국의 의사는 당장 들어와 핀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부위라 하고, 현지 의사는 어긋나지는 않았으니 8주 캐스트하면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당장 치과에 치료 중인 환자도 많고, 같이 근무하는 약사도 한국에 나가 약국을 비우기도 힘들어서 일단 기브스하고 누워서 다리를 45도 각도로 받쳐서 올려놓고 침대 옆에 컴퓨터를 놓고 팀뷰어로 약국을 원격조정, 재택근무를 했습니다. 누워서도 사역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세상이더군요. 약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과 그동안 마음과 손발을 잘 맞춰 두었더니 팀뷰어와 카톡으로도 별 지장없이 약국이 돌아가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남편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치과 일도 많은데 집안 일과 환자 수발까지 드느라... 감사하게도 뼈가 잘 붙었고 6주 통 기브스, 4주 보조기 착용을 마치고 이제 막 걷기 시작했어요. 아직 한쪽 목발은 떼지 못했지만, 후유증 없이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해 주세요~ *치과 사역이 주신 비전대로 더욱 든든히 서 가도록. *영육 모두 강건하게 하셔서 건강이 모자라서 사역이 지장받지 않도록.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분별의 은사를 부어 주시기를 *주님께 맡기고 나온 노부모님들과 자녀들을 늘 보호해 주시기를. 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박양제 선교사(치과의사), 유미 선교사(약사)

  29/03/2021

민간 외교의 길을 넓힌 한·호 축구 홍보대사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지난해 12월 중순 캔버라를 다녀왔다. 캔버라 출장은 이미 지난 호에 보도한 ACT 자유당 당대표인 이슬기(Eliz- abeth Lee)의원 인터뷰(2021년 1월 호 참조) 및 캔버라 교민사회에서 한·호 축구 홍보대사로 민간외교의 길을 넓혀온 이갑순(Keith K. S. Lee, Gungahlin Anglican Church) 선생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이갑순 선생을 기자 일행이 묵고 있는 파빌리온 호텔(Pavilion Hotel)에서 만났다. 그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가 민주평통자문위원(호주협회)이기도 한 까닭에 기자와도 민주평통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났던 것이 기억났다. 필립스 전자 평사원에서 이사까지 그는 한국에서 전자공학과가 몇 개 없던 시절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 필립스전자에 1976년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 덕으로 ㈜ 필립스 전자의 이사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후에 ㈜ 카본 로렌 코리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 필립스-대신그룹 합작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왔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지금은 ㈜ 송원자동자 조명으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 제가 ㈜ 필립스-대신그룹 합작회사 부사장으로 일할 때였어요. 그때 제가 부천공장으로 출근할 때였는데 대신그룹쪽 공장장이 얼마나 까칠하게 굴고 텃새를 부리던지 제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 공장장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매일 오전 7시면 출근해서 공장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다그치는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사실 사람들이 거기에 토를 달기도 힘들었죠. 저도 부지런한 사람인데 도무지 그 사람을 당해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결심했습니다. 네가 7시에 출근하면 나는 6시 반에 출근한다. 그래서 한 일 년을 별을 보면서 새벽 6시 반에 출근했습니다. 그때 제가 서울 서초동에 살 때인데 부천까지 가려면 집에서는 새벽 5시 반에는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최소한 4시 반에서 5시에는 매일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꼬박 일 년을 하고 나니까, 그 공장장이 저한테 ‘부사장님은 못 당하겠습니다.’ 하고 손을 들더라고요.” 이렇게 열심히 일한 덕에 그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 곳의 큰 회사에서 이사 및 대표이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50대 중반인 2000년 호주 ACT 주정부의 초청을 받아 캔버라에 정착했다. 호주 이민 및 캔버라 정착 호주에서 사신 분들은 알겠지만, 나이가 들어 이민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호주에서 필요한 인력이 아니면 쉽게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신청하는 독립기술이민은 제일 중요한 점수 포인트가 나이와 영어여부 그리고 호주가 필요로 하는 직업군이다. 이 세 가지를 합하여 점수를 환산하여 이민성에서 이민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50대 중반이 넘은 사람들은 투자이민이나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면 호주로 이민을 오기가 쉽지 않다. 이갑순 선생은 처음에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희망하여 필립스 뉴질랜드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뉴질랜드는 인구가 적어 한국사람이 적응하기가 쉽지 않고 ㈜필립스 뉴질랜드는 ㈜ 필립스 호주가 관장한다고 호주의 필립스를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립스 호주는 그때 다른 회사에 매각되어 기회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호주의 모든 주정부에 자기의 경력을 정리하여 편지를 보냈다. 주정부 초청 이민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2000년 호주 ACT 주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그가 그동안 다국적 기업인 필립스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것이 인정되어 ACT 주에서 개발하는 비공공분야(Private Sector), 비즈니스 분야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인정되어 이민을 허락한 것이다. 그리고 캔버라에 정착한 그는 2000년에서 2003년까지 컴퓨캣(Compucat) 회사에서 GPS를 상용화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GPS를 운동선수들에게 적용시켜 운동량을 측정하는 연구를 하는 GP Sport 회사의 경영 컨설던트겸 투자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호주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을 만나는 기회가 늘었다. 호주 캔버라 축구협회 회장과의 만남 “제가 2000년 호주에 막 왔을 때 스티브 도즈폿(Steve Doszpot) ACT 주의원이 저를 인터뷰했어요. 그때 이분이 한·호 경제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저를 인터뷰하면서 한국의 산업과 경제계 소식을 물어와서 제가 알려주고 나이도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분이 호주 캔버라 축구협회(Capital Football-ACT Football federation) 회장이었던 겁니다. 그때 제가 비즈니스로 한국에 출장을 많이 가니까 그분이 저에게 여기 호주에 국제청소년 축구대회, 캉가컵(Kanga Cup) 대회가 있는데 한국에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2004년에 캉가컵 홍보대사(ACT 축구협회 명예대사)로 위촉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호주 축구홍보대사가 된 것입니다.” 그는 2004년 캉가컵 홍보대사가 된 후 바로 그 이듬해인 2005년, 한국에 있는 신곡초등학교 축구팀을 호주 캉가컵에 참가시키는 것을 성사시켰다. 캉가컵 청소년 축구대회는 호주 국가 축구연맹(FFA)과 아시아 축구연맹(AFC)에서 공인하고 있는 전 세계가 참여하고 있는 국제적인 토너먼트 축구대회이다. 9세부터 18세까지 연령별, 남녀 팀으로 구성되어 한 해에 보통 200~250개 팀이 참가하는 대규모 축구대회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캉가컵이 열리면 보통 캔버라에 4~5천 명 가량이 운집하여 5일 동안 약 7백~1천여 경기가 진행되는 명실공히 남반구 최대 청소년 축구대회라 할 수 있다. 더구나 2015년 아시안 컵을 호주가 개최한 이후에는 참가 팀이 350팀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 규모면에서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큰 규모의 청소년 축구대회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개최하면 호주 ACT주와 캔버라에 커다란 경제적, 문화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 캉가컵(Kanga Cup) 홍보대사 이 캉가컵은 우리가 잘아는 캔버라 꽃축제(Floriade), 다문화축제 등과 함께 호주 수도 캔버라의 3대 명물 행사로 손꼽히고 있다. 이 캉가컵의 목적은 “세계의 청소년들을 축구를 통해 단합시키는 것”이다. 그는 2004년 캉가컵 홍보대사가 된 후 그해 한국 대한축구협회를 방문해서 호주 캉가컵을 소개하고 호주 캉가컵에 참여할 수 있는 청소년 축구팀을 소개받았다. 그때 대한 축구협회에서 추천해준 축구팀이 바로 의정부에 있는 ‘신곡초등학교 축구팀’이었다. 신곡 초등학교 축구팀은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캉가컵 12세 이하 토너먼트 대회에 무려 13회를 참가하여 11번이나 우승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외에도 서울지역 초등학교 축구 연합팀인 Seoul U12 Boys가 2015년부터 4회 참가하였고, 그외 포항 스틸러스 유소년팀, 충북 예성여중고, 14세, 16세, 18세 이하팀 그리고 대구 동부여고 18세 이하팀이 참가하였다. 이 모든 팀들이 참가하는 데 이갑순 선생 부부의 안보이는 헌신과 봉사가 있어왔다. 한국의 초등학생들이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에 와서 적어도 2주 이상 머물면서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손길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을 공항에서 픽업하고, 숙박하고, 먹고, 이동하고 따라다니면서 통역하는 것까지 15년 동안 일일이 뒷바라지를 다해왔다. 이러한 안 보이는 섬김의 공로를 인정받아 ACT 축구협회(Capital Football)로부터는 2008년 공로상 (Award of Distinction)을 수상했다. 부부의 헌신 “사실 아내의 도움과 협조가 없었다면 본인의 홍보대사 역할은 그리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내는 한국에서 아이들이 오면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과 함께 이동하며 안내하고 보살피고 갖가지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호주의 가정에서 홈스테이 할 수 있도록 호주 부모와의 가교역할을 해주고, 아이들이 집 생각하지 않고 외지에서 지낼 수 있도록 현지 엄마 역할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호주 축구협회에서도 이를 잘 알기에 본인이 초청받는 축구관련 행사에 함께 초청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아내도 캉가컵과 아시안컵 홍보대사로 같이 위촉해 주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어떻게 보면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홍보대사 역할들을 오래 하기가 힘들었지도 모른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캉가컵 결승전이 끝나면 그 다음 날 1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한국 선수들과 동행 임원들과 홈스테이 호주가정)을 집에 초청하여 한국 음식으로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러한 초대를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수반되었겠는가? 그랬더니 거기에 감동을 받고 당시 호스팅클럽 회장이었던 모나로 팬더(Monaro Panthers) FC의 존 바릴라로(John Barilaro, 현 NSW주 부수상) 씨가 자기 집에서 하겠다고 인수해 갔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매년 캉가컵 참가 후 선수단이 한국으로 떠나기전 전날에 스포츠 클럽 등에서 송별연이 끊이지 않고 거행되고 있다. 민간 외교 대사 호주는 스포츠가 일상화되어 있는 나라다. 흔히 생활체육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이상 스포츠를 배우도록 장려하며 스포츠를 통하여 사회와 인간관계를 배울 수 있도록 스포츠맨십이 강조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를 통한 일반인들의 교류는 삶의 가장 깊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화교류인 동시에 민간외교라 할 수 있다. 지난 15년 동안 이갑순 선선 부부는 캉가컵 홍보대사로 한·호 축구교류를 통하여 한국을 호주에 알리고 한국 청소년들에게 호주문화를 체험하게 했다. 어디 이뿐인가? 2008년부터는 호주 팀도 한국에 가서 한국 가정에 홈스테이 할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 한국의 문화를 호주에 소개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고 나면 한국을 좋아하게 된다. 이것은 국위선양과 최전선에서 민간외교를 감당하는 일인 것이다.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하여 민간외교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의 외교는 국가와 정부주도의 외교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국외 거주동포들이 민간외교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지난 15년 동안 민간외교의 최전선에서 한국을 알리고 소개한 이갑순씨 부부의 봉사와 섬김은 사실 정부가 나서서 격려해 주어야 할 일이다. “상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그리고 호주 사람들 만나면 자연 한국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국 문화도 소개하고 한국 역사와 한국 전통에 대해 알려 주고 이렇게 한국을 알리는 것도 제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호주 구석구석에서 민간외교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 많아 지길 소망해 본다.〠 주경식|본지 편집국

  27/03/2021

고추 농사 풍년일세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한국사람의 식탁에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고추이다. 오죽하면 해외여행을 갈때에도 따로 고추장을 챙겨 갈까? 고추는 김치에도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재료이다. 어디 이뿐인가? 한국인의 밥상에는 고추 양념이 안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다. 이처럼 고추는 한국인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국산 고추를 이제 호주에서 제법 큰 규모로 농사하는 곳이 있다. 바로 시드니에서 1시간 20분 거리, 센트럴 코스트(Central Coast) 지역에 있는 스완 수경재배(Swan Hydroponics) 토마토 농장 옆에 있는 고추농장이다. 이곳에서 김창흥 장로(열린문교회)는 3천여 평의 땅에 한국산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한국산 고추 그는 한국에서 원래 목장을 운영하던 목축업자였다. 그러나 호주로 이민 오고 나서는 수경재배 토마토농장을 일구어 일 년에 천 톤이 넘는 수확량을 거두는 농사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수경재배 토마토농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3년 전부터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첫 해는 시험적으로 해보았는데 시행착오가 있어서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약 2백kg 정도 수확을 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첫 해의 경험도 살리고 한국에 나가 전문적인 고추농사에 대해 교육도 받은 턱에 기하급수적으로 수확량이 늘었다. “고추를 원래 한초(旱草)라고 해요. 가물 한(旱)자를 써서 물이 많이 없어도 농사지을 수 있는 작물이죠. 어떻게 보면 호주 기후에도 맞는 작물입니다. 깨끗한 호주 공기에 이곳 센트럴 코스트 지역의 온도는 아무리 추워도 영상 4도를 내려가지 않고 평상시 온도가 20°~30° 정도로 고추농사에 딱 적합한 온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 올해는 가물지도 않고 비도 적당히 와서 풍년이 들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500kg 정도 생산했는데 올해는 약 1.5톤(1,500 kg)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추씨를 한국에서 수입해 온다. 땅만 호주에서 자랄 뿐이지 씨앗은 한국산 토종 씨앗이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호주의 땅이 한국땅보다 훨씬 건강하고 영양이 많다고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농지는 오랫동안 쉬는 해 없이 농사를 지어왔고 게다가 화학비료와 농약들로 거칠어졌지만 호주 땅은 농사를 짓지 않은 땅이 많기 때문이다. “더보나, 탐워스 지역 그런데 한번 가보세요, 땅이 시커멓습니다. 그 시커먼 땅 보셨어요? 그 속에 얼마나 각종 미네랄과 영양소가 들어 있겠습니까? 호주는 땅이 넓어서 인간이 경작한 땅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땅에 온갖 좋은 무기질과 영양소가 그득합니다. 이런 땅에다 농약을 치지 않고 천연퇴비를 이용해 농작물을 경작하면 그야말로 인간에게 좋은 농산물이 안나오겠습니까?” 무공해 청정 고추 그의 고추농사의 특징은 바로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그가 직접 만든 무공해 퇴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인이 운영하는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만들고 난 후 나오는 콩비지를 얻어온다. 그리고 그 얻어온 콩비지에 목재소에서 얻어온 우드칩(나무를 가공하고 남은 부스러기)과 그가 직접 키우는 닭들에게서 나온 닭똥을 함께 섞어 일 년동안 발효시켜 만든 천연 퇴비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인간이 한 번도 경작하지 않은 살아있는 땅에 무공해 천연 퇴비를 먹고 호주같이 깨끗한 청정공기에서 자란 식물이 얼마나 영양이 많고 건강하겠습니까? 오히려 한국산 고추보다 질적으로는 더 경쟁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지론대로라면 그럴 것 같다. 한국의 좁은 땅에서 세대를 쉬지 않고 경작해온, 그것도 근대에 와서는 화학비료들을 사용하여 거칠어진 한국 땅에서 자란 농작물보다 이곳 호주의 처녀 경작지에서 청정한 공기와 천연퇴비를 먹고 자란 농작물이 훨씬 영양가도 높고 건강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번에 수확량이 몇 배나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그는 한국에서 고추세척기까지 들여왔다.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따서 깨끗한 물에 일일이 세척하는 것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 고추 세척기를 들여와서 일손을 줄이게 되었다. 깨끗한 물에 세척된 고추는 자연 태양 밑에서 건조된 후 태양초 고춧가루로 만들어진다. 작년에 500kg 정도 생산되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입소문만으로 고춧가루가 동이 났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고추는 고춧가루뿐만 아니라 물고추와 건고추로도 생산되어 팔려 나간다. 농사는 하나님과의 동업입니다 김창흥 장로는 농사꾼이다. 그가 목장에서 일한 햇수까지 합친다면 40년이 넘는 생활을 흙과 함께 생활해온 흙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흙에 대해서,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웬만한 농사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다. 그는 특히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많이 배운다고 강조한다. “저의 농사에 대한 철학은 애정과 집중입니다. 제가 목장을 할 때도 그랬고, 토마토 농장을 할 때도 그렇고 모든 농사의 기본은 애정입니다.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 보답을 합니다.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괜히 이것저것 분산하지 않고 농사를 할 때는 그 일에만 저의 온 관심과 사랑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룻밤에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생명을 다루는 산업은 하나님과 동업해야 합니다.” 그는 농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그가 아는 지인들에게 틈만 나면 은퇴하고 나면 골프만 치러 다니지 말고 와서 농사를 지으라고 권면한다. 농사를 무료로 가르쳐 드립니다 “제가 센트럴 코스트를 참 좋아합니다. 여기 공기 깨끗하죠. 기후 좋죠. 바닷가 가깝죠. 땅의 토질도 얼마나 좋습니까? 은퇴하고 나서 골프만 치러 다니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 와서 자기가 원하는 작물을 농사 지으면, 자기 손으로 지은 무공해 농작물도 먹고 건강에도 좋고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땅도 무료로 빌려 드리고 농사도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귀가 번뜩였다. 농사 지을 땅도 무료로 빌려주고 농사짓는 법까지 가르쳐 준다기에 정말이냐고 반문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럼요, 정말 관심있고 실제 와서 하려는 분들은 제가 농사 지을 만큼 필요한 땅을 무료로 빌려드리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농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과 진리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기 원하는 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김창흥 장로는 현대인들이 흙을 멀리 해서 병이 생긴다고 강조한다. 흙을 가까이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또 자기가 직접 땀 흘려 일한 수고로 얻은 오가닉 농작물을 수확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산 무공해 청정고추와 비빔밥 나물 기자 일행은 그날 투박한 비빔밥을 대접받았다. 비빔밥 재료는 고추농장에서 딴 고춧잎과 돌미나리, 비듬나물, 망토나물, 참나물 등 고추 농장 근처에서 수확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무공해 산나물들이었다. 거기에 호박과 양파, 당근 그리고 오가닉 달걀을 얹어 고추장을 한 숱가락 넣고 비빈 비빔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김창흥 장로는 여기서 채취한 무공해 산나물들을 시드니에 공급할 계획도 갖고 있다. 아는 지인들이 방문할 때마다 여기서 딴 나물들로 비빔밥을 해주는데 인기가 여간 아니라는 것이다. 고추 농사를 짓는 한 고춧잎은 무한정 나올 것이고, 돌미나리며, 비듬나물, 망토나물, 참나물 등 농장 근처에서 채취할 수 있는 산나물들도 그는 틈틈히 관리하고 있다. 이억만리 호주에 살아도 한국인은 밥과 고추장과 김치를 먹어야 한다. 한국인의 힘은 바로 고추장과 밥과 김치에서 나온다. 한국인이 농사한 한국산 무공해 청정고추를 이곳 호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축복과 같은 일이다. 김창흥 장로의 고추 농사가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가 고추 농사뿐만 아니라 마늘 농사, 참외 농사 등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토종 한국 농작물을 이곳 호주에서 더 많이 생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무공해 청정 고추가루 구입 및 농사를 짓기 위한 농지 무료 대여와 농사 짓는 방법 배우기를 희망하는 독자들은 아래 연락처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문의 : 0433 924 410(김창흥 장로)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27/03/2021

건물 중심의 예전적 교회가 아닌, 사람 중심의 가정교회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대양주가정교회 사역원 출범감사예배가 지난 9월 28일 오전 11시 시드니수정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예배는 참석 인원의 제한으로 모두 다 참석할 수 없어 대면과 비대면으로 드려졌다. 이날 강승찬 목사는 취임사를 통해 “여호와 이레, 임마누엘의 주님을 찬양하며 동역자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며 더욱 열심히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정교회란? (The House Church) 가정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이다. 신약성경의 모든 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였다. 가정교회는 가정에서 교회의 사역인 예배, 교육, 교제, 전도와 선교 등 모든 일을 하는 교회이다. 가정교회를 처음 시작한 국제가정교회사역원 원장인 최영기 목사는 가정교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집에서 6~12명이 매주 한 번 이상 모여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예배, 교육, 교제, 전도와 선교)을 다하는 공동체” 가정교회의 기초 공동체는 각 가정에서 모이는 ‘목장’이다. 목장을 책임지는 사람을 ‘목자’라고 부르고, 목자의 아내를 ‘목녀’라고 부른다. 몇 개의 목장을 묶어서 ‘초원’이라 부르고, ‘초원’의 목자를 ‘초원지기’라고 부른다. 각 목장이 합쳐지면 ‘연합예배’가 된다. 가정교회는 주중에 모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를 드리지만, 주일에는 모든 성도가 연합예배로 모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예배를 드린다. 일반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사역이 가정교회에서 이루어지지만, 성찬, 세례, 권징은 연합예배에서만 이루어진다. 가정교회의 핵심가치는 3축과 4기둥이다. 3축이란? ‘목장모임’을 통해서 정적인 부분을 만져주고, ‘삶의 공부’를 통해서 지적인 면을 만족시켜 주고, ‘연합주일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결심과 결단을 통해서 의지적으로 행하게 한다. 3축을 통해서 인간의 지정의를 균형있게 만족시켜 온전한 회심과 영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네 기둥의 첫째 기둥은 ‘교회의 존재의 목적’으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이다. 가정교회의 존재의 목적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에 있다. 둘째 기둥은 마가복음 3:14~15절의 말씀의 예수님의 ‘제자훈련방식’이다. 예수님은 가르치기보다는 보여주는 제자 훈련을 하셨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지만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셋째 기둥은 ‘교회사역분담’으로 에베소서 4:11~12의 말씀을 근거하고 있다. 말씀에는 세 가지 사역이 기록되어 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해서 그들이 목양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 넷째 기둥은 마가복음 10장 43~45절의 말씀을 의지한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 주는 종의 리더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셨다. 으뜸이 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가정교회는 기존 신자들을 받지 않는다. “영혼 구원해서 제자 삼는다”는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 기신자들에게 다른 교회에 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가정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이들을 VIP라고 부른다. 영어 문자 그대로 ‘가장 중요한 사람(Very Important Person)이다. 가정교회의 시선은 한결같이 VIP에 가 있다. 가정교회와 일반교회의 다른 점 가정교회는 신약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약교회는 집에서 모였다. 예수님의 교회 그림은 가정교회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하였다. 신약교회는 건물 중심의 예전적인 교회가 아니라, 사람중심의 가정교회이다. 일반교회의 구역과 가정교회의 목장은 조금 다르다. 구역이 관리 차원의 조직이라면, 목장은 교회의 역할을 하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이다. 목자는 ‘삶 공부’를 마쳐야 한다. ‘삶공부’는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삶으로 연결된 성경공부이다. 교안은 일반 책자와 큰 차이가 없지만 삶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생명의 삶, 기도의 삶, 경건의 삶 등으로 각 교재는 3개월 코스로 만들어져 있다.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2년 정도의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이 코스를 마치면 목자로서 안수를 준다. 가정교회는 보고 배우는 교회이다. 가정교회 목회를 먼저 시작한 선후배 목사들이 경험한 것을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경대로 해보는 것이 가정교회 정신이기에 모여서 가정교회 목회 현장의 삶을 나누면서 실질적이고 유익한 내용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개척하고 처음 3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2007년에 개척하고 3년간은 토양을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토양을 바탕으로 4년째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출석하는 교인의 70-80%는 우리 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 강승찬 목사 강승찬 목사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성자 예수님’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도는 물론이고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목사이다. 그는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40일 기도 후에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강 목사는 2남 3녀 중 장남이다. 강 목사는 부모님을 닮아 풍채가 좋다. 그는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같이 사진 찍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그의 옆에 서면 나는 갑자기 작아진다. “목사님, 남동생과 여동생들이 다 목사님과 같이 키가 크고 잘 생겼습니까?” “아, 네 그렇죠”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그의 대답을 듣고, 더 이상 외모에 대하여 질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 목사는 한국에서 1999년 2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10월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2000년 10월 동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목사로 사역하던 중 2001년 6월 서부호주 퍼스로 유학 및 이민을 오게 되었다. 처음엔 유학을 목적으로 왔지만 호주에서 45일 만에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당시 사이버 처치에 관심이 있어서 서부호주 Curtin University에서 IT를 공부하면서 청년들을 집에 초대하여 밥을 먹고 함께 축구, 골프, 테니스 등 운동을 하면서 영혼구원의 열매를 거두었다. 강 목사는 2004년 4월, 이규현 목사의 초청으로 시드니새순장로교회 부목사로 청빙 받아오게 되었고, 새순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제자훈련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2005년 대양주목회자 세미나 강사 및 새순장로교회 제자훈련 15주년 집회 강사로 옥한흠 목사가 왔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뭔지 모르겠지만 제자훈련의 한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30년 목회의 마지막이 옥한흠 목사의 한숨이 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사도행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2006년 7월 강준민 목사와 미국 OM선교회 이사 목사 12명이 시드니에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박동서 목사(아틀란타한인장로교회)로부터 ‘가정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07년 1월말 휴스턴에 사는 여동생 가족을 방문할 겸 휴스턴서울교회에서 주최한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13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강의 첫 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강의 첫 시간에 ‘바로 이거야!’ 하고 아내와 함께 무릎을 쳤습니다. 최영기 목사의 강의를 통해 그간 해답을 찾지 못해 답답하던 가슴이 확 뚫린 기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 믿고 7개월 만에 대행 목자로 헌신했다는 목자 부부의 섬김을 받고 5박 6일을 그들의 집에 묵으면서, 그리고 목장 탐방을 통해 영혼 구원에 힘쓰는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미나를 마칠 때는 가정교회를 통해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나의 목회 인생을 걸어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확신은 다시 목회에 대한 의욕으로 이어졌습니다.” 강 목사는 시드니로 돌아와 40일 작정기도를 하던 중 ‘로마서 6장 4절’ 말씀의 ‘새생명’이란 단어가 그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New Life)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는 ‘새생명’이란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하기 결심했다. 이규현 목사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세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이규현 목사는 “주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냐?”고 질문했을 때, 그렇다고 하니 사직서를 받고 교회 개척을 허락해 주었다. 2007년 5월 27일, ‘시드니새생명교회’가 가정교회로 출범한 역사적인 날이다. 설립 감사예배를 대양주예수교장로회 호주 노회 주관으로 드렸다. 이규현 목사는 ‘주의 핏값으로 세운교회(행 20:23~28)’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고, 성도 5백여 명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강 목사는 2008년 11월 휴스턴 서울교회에서 주최한 평신도 세미나에 4명의 평신도들을 데리고 참석했다. 당시 환율 때문에 항공료가 시드니에서 휴스턴까지 왕복 $2,800 정도 했다. 모두 자비량으로 참석하여 2박 3일 동안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변화되어 돌아왔다. 그때 최영기 목사는 강승찬 목사에게 왜 컨퍼런스에 참석하지 않느냐? 하고 질문했고 강 목사는 컨퍼런스가 있는지 몰랐기에 다음 해 3월 한국에서 열린 대부도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여기서 강 목사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대양주목회자세미나를 주최해 보았기 때문에 3백여명이 모인 2박 3일 컨퍼런스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다. 특히 둘째 날 오후 체육대회 시간이 4시간 정도 있었는데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같이 응원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소심한 사람, 적극적인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한 가족처럼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지고 목말라 하면 물을 떠다 주고... 3등을 해도 큰 박수, 2등을 해도 큰 박수, 1등을 해도 큰 박수, 참가상은 더 큰 박수 … 여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크리스찬리뷰지에 컨퍼런스 참석 후기를 보냈고 그 기사를 보고 강 목사에게 김진수 목사가 전화하게 된다. 그래서 첫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역 모임이었다. 시드니 목회자 지역모임 시작 2009년 5월, 첫 시드니 가정교회 목회자 지역모임을 강승찬 목사 가정에서 시작했다. 세 가정(강승찬 목사, 김진수 목사, 박경수 목사)이 모여서 목회현장에서 감사와 기도제목을 나누었다. 지역모임 보고를 하자 5월25일자로 강승찬 목사는 시드니지역 초대 지역목자가 되었다. 매월 한 번씩 모여서 삶을 나누고 감사와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한 가정, 두 가정 목회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2012년 2월 9일자로 강승찬 목사가 인도하는 시드니 지역에서 쌍둥이 분가(시드니성서침례지역 김진수 지역목자, 시드니사랑샘지역 박경수 지역목자)를 하여 총 3개 지역으로 분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드지 지역모임보다 지역목자 교회이름이 지역모임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2010년 5월 최영기 목사(당시, 국제가정교회사역원 원장, 휴스턴서울교회 담임)가 시드니새생명교회 가정교회 부흥회 강사로 초청되어 에핑로드에 있는 스템포드 호텔에서 목회자와 선교사를 대상으로 가정교회 일일 특강을 했다. 이때 시드니, 멜번, 브리즈번, 퍼스, 뉴질랜드 등에서 80여 명의 목회자 부부가 참석하였다. 지역모임은 적게는 10가정 많게는 20가정까지 모이게 되었다. 2014년 9월 13일자로 시드니새생명지역은 CMI All Nations 지역(민이삭 목사)으로 분가했고 민이삭 목사가 잘 섬겨서 2016년 2월 8일자로 송영민 목사가 지역목자로 섬기는 시드니 수정지역이 시작되었다. 2014년 4월 14일, 김진수 목사가 섬기는 시드니성서침례지역은 이완우 목사가 섬기는 시드니 함께 가는 지역으로 분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7일에는 이완우 목사가 섬기는 함께가는 지역에서 박종호 목사가 지역목자로 섬기게 되는 시드니 새장지역으로 분가되었다. 이렇게 가정교회 목회는 목회자들의 지역모임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신약교회 회복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성경적인 교회에 대한 열정 속에서 영혼구원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었고 비신자 전도의 열매를 시드니새생명교회뿐만 아니라 가정교회를 시작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맛보게 되었다. 2017년이 되었을 때 시드니 지역은 6개의 지역이 있었고 가정교회가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시드니새생명교회가 시작된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현재는 대양주 전 지역에서 56교회가 가정교회 지역모임에 참여하고 있으며 255차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한 14교회 목사들까지 포함하면 70여 교회들이 가정교회로 전환하거나 가정교회로 개척하는 중에 있다고 본다. 대양주가정교회 사역원 출범 강 목사는 3국 대표로 3년을 섬기면서 한국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각 선교지마다 가정교회가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양주 대표는 이민교회 중심의 사역을 섬기고, 선교이사를 뽑아서 선교 간사들을 지원하고 선교지를 후원하게 했다. 강 목사는 대양주 대표로 4년간의 임기로 섬기게 되었다. 국제가사원 정관에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지역 가사원 설립: 지역에서 가정교회 사역이 활발하여 목회자 세미나, 평신도 세미나, 목회자 컨퍼런스, 목자 컨퍼런스 등 4가지를 주최할 수 있을 때에는 가사원으로 승격시킨다.” 그래서 최영기 목사는 한국과 북미는 지역대표가 아니라 가사원장을 선출하게 되고, 대양주도 가사원 승격 조건을 만족시키지만, 대양주 대표 임기를 1년 연장하여 4년으로 만들고 4년 후에 가사원으로 승격시키기로 하였으며 2020년부터 한국, 북미, 대양주 가사원장을 같은 해에 선출하게 되었다고 국제가사원이사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가사원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하였다. 2020년 8월초에 실시된 투표에서 강승찬 목사는 대양주 초대 가정교회사역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양주가정교회 사역원 원장으로 선출된 강 목사는 인사말을 통하여 감사와 각오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인사드립니다. 대양주 가사원 출범과 함께 초대 원장으로 임명받은 강승찬 목사입니다. 대양주는 지금 한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영향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더 춥고 배고프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대양주 지역에서 '대양주가정교회사역원'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대양주 가정교회는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연합’과 ‘없는 것으로 섬기는 열정’이 있고, 문제 앞에서 뒷걸음지치 않고 돌파하는 ‘영적 야성’이 있습니다. 봄의 희망, 여름의 열정,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안식 같은 4계절처럼, 매월 모이는 목회자 지역모임에서 3축 4기둥에 기초한 건강한 가정교회를 꿈꾸며 가정교회 현장의 치열함과 치밀함, 집중과 반복, 섬김과 희생, 열정과 돌파의 은혜, 금식과 풍성함, 성장통과 쉼표, 배신과 회복 등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지난 7년 동안 3국 대표(3년 임기), 대양주 대표(4년 임기)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교회가 대양주에 확산되었고 국제가사원 정관에 따라서 2020년 9월 1일부터 대양주가사원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첫 가사원장은 저보다 인격과 성품이 좋으시고, 저보다 더 지혜롭고 교회 사이즈도 더 크고 목회 경력이 더 있으신 분이 세워져서 어려운 대양주 교회를 품고 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도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투표 결과는 제 생각과 달라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국제가사원장이신 이수관 목사님의 이메일을 받고 나서 ‘하나님 아버지~ 왜 접니까? 왜 접니까?...’ 질문하면서 기도하던 중에 최영기 목사님이 대양주 가사원장 선출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고 하고, 3주간 대양주 가정교회 목회자 밴드에 가사원장 투표에 대해 공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투표한 결과이기에 주님의 뜻인줄 알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2013년 3국 대표 후보가 되었을 때 저는 최 목사님께 사퇴의 뜻을 보냈습니다. 그때 최영기 목사님의 짧은 이메일이 제가 사퇴하는 것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3국 대표는 감투가 아니라 팔 걷어 부치고 섬기는 종의 자리이다.’ 그래서 3국 대표 후보로 수락했었고 투표 결과는 제가 3국 대표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목회 상황은 힘들었지만 순종하고 기도로 섬겼더니 대양주 가정교회는 확산되었고, 선교지에서도 가정교회가 확산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2016년에는 시드니에서 선교포럼까지 주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2013년부터 지난 7년 동안 국제가정교회사역원 이사회 회원으로서 최영기 목사님을 비롯하여 신실하신 여러 이사님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워 왔습니다. 매년 있는 국제가사원 정기 이사회를 통해 ‘목회학 박사 학위’를 해도 배우지 못할 엄청난 목회 노하우들을 최영기 목사님과 여러 이사님들과 함께 하며 ‘보고 배울 수가 있었고’ 대양주 목회 현장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보고 배운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날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주시는 소원만큼 순종하여 대양주에 가정교회가 잘 확산되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행복해지는 가정교회 목회현장이 되도록 기도하며 섬기겠습니다. 가정교회를 생각하면 제 안에 ‘설레임’이 있습니다. 그 설레임을 오늘 목자 분가식에서 있었던 싱글 목자의 고백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오늘(8월 23일) 주일예배 시간에 106번 째로 (대행)목자로 임명받은 싱글 목자가 있었습니다. 아기 때 부모님께 버림받고 혼자 자라서 사람을 믿지 못했던 자매님이 목장에 와서 목자목녀의 섬김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목자목녀의 행복한 가정을 목격하면서 가정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고, 독신주의자의 삶을 청산하고 믿음의 가정을 꿈꾸게 되었으며, 싱글 목자로 헌신하게 된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싱글목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목장에 와서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사랑을 처음 느꼈고… 앞으로 저의 섬김을 통해 주님이 일하셔서 1만 번 목장 분가를 하고 싶습니다. 저와 같이 인생이 꼬인 불행한 삶을 살았던 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주고 싶습니다.’ 저도 싱글 목자와 같은 마음입니다. 제가 받고 누린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크기에 목회 현장에서 가정교회로 개척하거나 가정교회 목회로 전환하다가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가정교회 목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목회자가 되도록 함께 고민하고 섬길 수 있는 부분은 섬겨드리고 싶습니다. 대양주가사원이 잘 세워져 가도록, 부족한 제가 팔 걷어 부치고 주님이 마음껏 부리는 종이 되어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늘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만남의 축복 강 목사는 가정교회를 통해 신실한 목사들을 멘토로 두게 되었다. 최영기 목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재철 목사, 이경준 목사, 최경학 목사, 조근호 목사, 김명국 목사, 심영춘 목사, 박창환 목사 등과 미국의 김인기 목사, 정영민 목사, 안관현 목사, 원종훈 목사, 이수관 목사들과 교제하고 있다. 또한 각 선교지의 선교간사(중앙아시아의 주민호 선교사, 인도네시아의 하호성 선교사, 일본의 조남수 선교사, 중남미의 추기성 선교사, 아프리카의 정명섭 선교사와 이원준 선교사)들과 만남을 통해 선교하는 교회로 아름답게 세워져 가기 위해 매년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강 목사는 크리스찬리뷰지에 매월 기고한 글들을 모아 크리스찬리뷰 30주년 기념으로 ‘묵상이 있는 만남’ 칼럼집을 출간도 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감동을 받은 글들은 물론 금식과 말씀묵상 기도 중에 쓴 글이다. 기도 속에 있는 설레임과 하나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에 포커스를 둔 글이기에 읽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와 기쁨을 주는 글들이었다. 목회 현장의 봄의 희망, 여름의 열정,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안식과 쉼이 느껴지는 묵상이 있는 글이다. 강 목사는 만날 때마다 필자는 많은 것을 배운다. 그는 언제나 교회와 교인들을 칭찬한다. 마치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추천장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강 목사에게는 시드니새생명교회 성도들이 추천장이다. 교인들이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면서 건강한 목자, 목녀로 세워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새생명교회는 전 세계 가정교회의 개척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없는 것으로 섬기는 교회, 영혼구원의 열정이 있는 교회, 신약교회 회복을 위한 특공대 같은 교회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현재 34개 목장의 목자, 목녀들이 한마음으로 영혼구원에 집중하며 섬기고 있다. 강 목사의 대양주가정교회사역원 원장 취임사 내용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종이 되고 싶습니다. COVD-19 재난시대에 대양주가정교회사역원 출범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뒤돌아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개척할 필요도 없었던 상황에서 기도 중에 주님께서 감동을 주셨고 작고 연약했지만 건강한 가정교회 그림을 그리며 대양주의 교회들이 건강한 신약교회를 추구하도록 주님께서 수많은 목회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는 최영기 목사님의 축사처럼 그저 엔진 역할을 한 것 뿐입니다. 앞으로 각 지역마다 가정교회 허브 교회들이 세워지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기댈 수 있고 삶을 나눌 수 있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더 많아 지길 소망합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기여하며, 섬기는 종이 되어 주님 앞에서 성공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19/03/2021

ABC뉴스는 한국 전쟁 70주년을 맞아 아들레이드에서 태권도장(Lee’s Taekwon-do)을 운영하고 있는 6.25 피난민인 이춘봉 장로(아들레이드장로교회)를 인터뷰했다. 이에 ABC 뉴스 기사를 본지 영문편집위원인 정지수 목사가 번역하여 게재한다. 거의 70년 전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 당시 7세였던 이춘봉과 그의 가족은 북한 공산주의의 심장부였던 평양을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아니 한국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그의 가족 일부를 이미 잃어버렸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버지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가족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감옥으로 끌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의 가족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 교회 관리를 돕는 장로교회 성도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인으로 각인되어 현지 경찰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목사님이셨던 아버지와 다른 목사님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와 다른 목사님들을 감옥에 투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들(북한 정부)은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교회는 북한 정부의 말을 들어야 만 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는 곧 곤경에 처했을 것이고 감옥으로 끌려 갔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10월에 유엔군이 북한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승리는 짧았다. "그들은 모두 떠났다. 우리는 유엔 군인들을 보지 못했다. 다음 날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50만 명이 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왔고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고, 결국 북한과 남한은 분리되었다. 이 씨의 어머니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다른 북한 사람들도 함께 도망을 쳤다. "너무 많은 물건을 포장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약간의 쌀과 약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을 가로 질러 전쟁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엔군은 평양을 대동강 남쪽과 연결된 교량을 파괴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국군의 진격을 늦추었지만, 동시에 한국의 춥고 추운 겨울에 북한을 탈출하려는 수천 명의 절박한 탈북자의 발걸음을 늦추었다. "(대동강)은 너무 깊고 얼음이 떠다녀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집사님들 중 한 분이 돈을 내고 보트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이 씨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북한 남서 해안의 해주 지역으로 가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기다라는 동안 민주주의가 승리한 평양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했었다. "우리는 그곳에 3-4 주 정도 머물렀습니다.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북한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탈출했던 그곳에서 피 튀기는 전투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날 밤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도처에 제트기가 날아 다녔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이 씨와 그의 가족들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만 했는데 이미 피곤하고 많이 지쳐 있었다. 그들은 북한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종종 밤에 들판과 산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만약 잡히면, 죽게 된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씨와 그의 가족들은 결국 남한의 공주지역까지 무사히 내려왔다. 그의 어머니는 공주에서 교회를 세우고 피난민의 삶을 꾸려나갔다. 호주 전쟁 기념관에 따르면, 340명의 호주 군인들이 한국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약 1천2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0명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고 전했다. 이 전쟁은 약 2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이 씨 가족과 같은 많은 한국인들이 노숙자가 되거나 피난민이 되었다. 호주의 SA지부 참전용사회 존 자렛 (Jan Jarrett) 회장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1만 7천 명의 호주 군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서울에서 일했다. 자렛은 자신이 전쟁의 최전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서울에 있는 동안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음식을 얻기 위해 자매를 파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불쌍했습니다." 아들레이드에 있는 그의 집에서 존 자렛 회장은 한국인들이 호주인들에게 "관대하며" 전쟁에 대한 그들의 희생에 대해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전쟁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났지만, 호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과 아들레이드 한국인 공동체는 일 년에 여러 번 만나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아들레이드 한국인 공동체는 호주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과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자렛 회장은 호주 참전 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너무 친절히 우리를 대해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들을 위해 네 번의 여행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참전 용사들을 위해,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실종된 사람들을 위해,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을 위해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여행 경비를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마치 신처럼 대해 주었고, 때로는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른 국가들 중에 이렇게 참전 용사들 잘 대접해주는 국가는 없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은 1953년 7월 휴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아직도 평화 협정에 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전투는 하고 있지 않지만 남한과 북한은 아직도 전쟁 중인 것이다. 이 씨는 남한 군대에 입대해 병역의 의무를 마쳤고, 이후에 한양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태권도에 몰두했고, 1973년에 한국인 태권도 강사를 찾는 호주 대사관에 연이 닿아 호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아들레이드 시내에 있는 하이드 스트리트 위치한 체육관에서 태권도 교육을 시작했고, 수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현재 76세인 이 씨는 그의 모든 성공은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노력과 인내와 동정심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돈을 버시는데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조슈아 보스카니(Joshua Boscaini) ABC 방송 기자

  19/0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