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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이스터 쇼 햇수로 200주년을 맞이하다                                 글/주경식사진/정성택 호주는 원래 농업국가였다. 1788년 영국의 식민지이자 죄수의 유배지로 시작되었지만 1820년대에 들어서서 자유민들의 이민 숫자가 증가되었다.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 NSW) 주 이름은 영국에 있는 웨일즈(Wales)를 모델로 해서 지도상으로 영국보다 남쪽(south)에 있는 신생(new) 웨일즈(wales)주라는 의미에서 뉴 사우스 웨일즈(NSW) 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뉴 사우스 웨일즈 주는 호주의 첫 번째 영국의 식민지 주정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죄수의 유형지로 호주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1820년 이후부터 자유민의 이민숫자가 증가되었고, 죄수와는 별도로 1830년 이후부터는 영국정부의 지원을 받은 자유 이민자들이 영국에서 보다 더 나은 삶의 희망을 품고 호주로 이민오기 시작했다.  뉴 사우스 웨일즈 왕립농업협회(Royal Agricultural Society of NSW, RAS) 자유 이민자의 정착 초기 가장 큰 이슈는 뉴 사우스 웨일즈 주 식민지 정부의 식량 공급과 자립이었다. 영국 정부는 먼 거리에 있는 호주 죄수들과 식민지 정부에게 식량들을 보내는 데에는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호주 정착 초기부터 식민지 정부 관리들은 자체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 데 큰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초창기 죄수들과 군인들은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었고, 농사를 지어 그 결실로 식량을 해결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가능한 한 자유민 농부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어 새로운 땅 호주로 이민을 올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1820년대부터 자유민 이민자의 이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초기 정착민들은 영국과 다른 새로운 환경과 농사를 짓기 위해 직면한 농작물 품종 개발, 농사 환경 적응 등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고, 농부들끼리 힘을 합하고 서로 도움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 결과 관심있는 농업가들이 의견을 모아 ‘각종 경연대회를 통하여 호주의 농업산업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NSW 농업협회(Agricultural Society of NSW)를 1822년 7월 5일에 결성했다.   이처럼 NSW 농업협회는 식민지내 가축을 늘리고 농사의 다양한 정보와 기술을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23년 NSW 농업협회는 가축 및 농산물들을 전시하고 우수한 농산품과 가축들을 선별해 시상을 하는 등 식민지 정착민들이 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참가할 수 있도록 이스터 쇼를 개최했다.   초창기 이스터 쇼는 식민지 사람들에게 농사를 교육하고 농사의 다양한 정보들을 나누는 등 농촌산업의 선진화와, 함께 모여 사업을 하고 농사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는 비지니스의 기회였다. 그리고 아울러 더 나은 농산품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농작물 대회가 열렸고, 시상과 심사가 대중 앞에서 진행되었다.   현재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져 이스터 쇼에서는 축산물과 농산물에 대한 각종 경기, 대회, 심사가 진행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뉴 사우스 웨일즈 왕립농업협회(RAS)는 여전히 이벤트와 각종 농산물 대회를 조직하고 뉴 사우스 웨일즈주의 농업유산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이스터 쇼는 각종 탈 것들과 어린이 쇼백 쇼핑등 다양한 볼거리 탈거리 먹거리들이 추가되었지만 초창기 이스터 쇼의 목적은 호주 농업을 장려하고 뉴 사우스 웨일즈주의 지속 가능한 농업개발과 농촌 지역사회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뉴 사우스 웨일즈 왕립농업협회는 농업의 우수성을 촉진하고 농촌지역 커뮤니티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매년 7백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고 있다. 이스터 쇼의 수익금은 이처럼 뉴 사우스 웨일즈주 농촌산업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뉴 사우스 웨일즈 농업협회”에 “Royal”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NSW 주의 농업발전과 그간의 공헌을 격려하기 위해 1891년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이 특별허가를 내주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891년 NSW 농업협회(Agricultural Society of NSW)는 “NSW 로열 농업협회”(Royal Agricultural Society of NSW, 이하 RAS)로 이름이 바뀌었고 같은 해 이스터 쇼는 “시드니 로열 이스터 쇼”(Sydney Royal Easter Show, SRES)로 이름을 바꾸어 열리게 되었다. 시드니 이스터 쇼의 역사1823년 맨 처음 시작된 이스터 쇼는 시드니 시티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파라마타 공원(Parramatta Park)에서 열렸다. 파라마타는 초기 식민지 시대에 가장 먼저 건설된 도시이다. 파라마타의 땅이 기름지고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이유였다.   그리고 파라마타 강이 시드니 시내 록스(Rocks) 지역까지 이어져 있어 강을 따라 이동하기에 적합했다. 이스터 쇼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말, 소, 양, 돼지 및 가금류들을 선보였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파라마타 공원에서 45년 진행되던 이스터 쇼는 1869년 프린스 알프레드 공원(Prince Alfred Park, 현 Chalmers St, Surry hills)으로 옮겨져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881년 뉴 사우스 웨일즈 정부가 무어 공원(Moore Park)의 토지를 NSW농업협회에 제공했다.   그래서 이스터 쇼는 188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115년 동안 무어 공원에서 진행되어 왔다. 1997년 이전에 호주로 이민 온 분들은 자녀들과 함께 무어 공원에서 열렸던 이스터 쇼를 관람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이스터 쇼의 관람객들이 무어 공원의 시설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1994년 뉴 사우스 웨일즈 정부는 이스터 쇼가 홈부시의 시드니 올림픽공원으로 이전하는 것을 승인했다.   올림픽공원의 새로운 부지에서의 첫 번째 쇼는 1998년에 열렸다. 지금까지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24년 동안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되어 온 것이다.   1823년에 시작된 이스터 쇼는 올해로 햇수로는 200년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9년 스페인 독감이 창궐하던 해에 이스터 쇼가 취소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도 코로나 19로 인해 이스터 쇼가 취소되었다. 여기에 더해 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1942년부터 1946년까지 5년간 전쟁으로 인해 이스터 쇼가 열리지 못했다.  1823년에 시작되었으니 햇수로는 올해가 200주년인데, 그동안 전염병으로 취소되거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기간들을 감안한다면 정확하게 올해를 이스터 쇼 20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제외하고는, 20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이스터 쇼가 매해 계속해서 열릴 수 있었다는 것은 RAS에 경의를 표할 일이다.올해 200주년을 맞이하는 뉴 사우스 웨일즈 왕립농업협회는 2022년 로열 이스터(Sydney Royal Easter show)를 4월 8일부터 19일까지 12일 동안 올림픽 공원안에 있는 쇼 그라운드(Sydney Show ground)에서 개최했다. 2022년 시드니 이스터 쇼 공식 개장 행사자이언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스터 쇼 공식 개장행사는 먼저 그랜드 퍼레이드로 시작했다. 그랜드 퍼레이드는 이스터 쇼의 상징적인 행사라 할 수 있다. 1907년부터 시작된 그랜드 퍼레이드는 가축들의 행진쇼이다. 다양한 종류의 가축 그룹들이 기품 있는 말에 탄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청지기들에 의해 숙련된 행동으로 질서정연하게 커다란 운동장을 행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행진하는 각종 가축들(말, 망아지, 다양한 종류의 소들, 양, 염소, 돼지, 알파카 등)은 시드니 로열 대회(Sydney Royal Competitions)에서 심사를 거쳐 상을 수상한 우승자들이다. 이 다양한 가축 그룹들이 음악에 맞춰 질서있게 행진하는 모습을 통해 그동안 호주 농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고, 관중들은 시드니 로열 대회에서 우승한 잘생긴 가축들과 농부들에게 한껏 박수를 보냈다.   가축들이 스타디움을 행진한 후 곧 이어 가축들을 잘 키워 우승자가 된 농부들, 우드춉(통나무 자르기) 우승자들, 호주 농업을 이끌고 갈 미래의 지도자들이 다양한 종류의 마차들을 타고 입장하였다.    공식 개장행사인 그랜드 퍼레이드 쇼는 이스터 쇼가 초기에 뉴 사우스 웨일즈주 농업발전을 위해 시작되었다는 취지를 새기게 할 만큼 농업과 목축을 강조하는 퍼레이드로 개장행사를 장식했다. 영국 왕실 앤 공주가 2022 로열 이스터쇼를 열다마차 퍼레이드와 각양 가축들의 퍼레이드가 스타디움을 빠져나가자 곧이어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해군, 육군, 공군의 의장대가 순서대로 절도있게 초록색 잔디 위 넓은 스타디움으로 입장했다. 동시에 하늘에서 제트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년에는 개장식 때 예정되었던 공군 곡예 비행이 취소되었는데 올해는 곡예 비행은 아니지만 공군 비행기가 자이언트 스타디움 하늘을 몇 차례 빠르게 지나가며 개장식을 축하했다.   육·해·공 의장대의 질서정연한 사열 준비가 끝나자 갑자기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영국 왕실의 앤 공주((Princess Anne)가 마차를 타고 입장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호주 미디어의 기사 제목들을 확인해 보니 문장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한 목소리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딸 앤 공주가 로열 이스터쇼의 개장행사를 열다”로 집약되었다.   NSW주 왕립농업협회 200주년 기념 2022년 로열 이스터 쇼를 위해 영국에서 앤 공주가 참석한 것이다. 크림색 정장에 영국 정통문양의 여성모자를 쓴 앤 공주는 71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멀리서도 의젓하고 기품있게 보였다.   의장대의 군인들을 한명 한명 꽤 오랜시간을 들여 사열하는 것도 모자라서 많은 군인들에게 인사도 건네고 몆 명의 군인들에게는 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며 격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비쳐졌다.   앤 공주는 사열을 마치고 농작물이 전시되어 있는 울워스 프레쉬 푸드 돔(Woolworths fresh food Dome)으로 이동해 전시되어 있는 농작물들을 둘러보며 농부들을 격려했다.   4월 9일 첫 번째 취재는 주로 자이언트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한 이스터 쇼 개장행사를 위주로 했다. 저녁에는 ‘화려한 과거’(spectacular past)라는 주제로 환상적인 엔터테인먼트가 진행되었다. 오토바이 마차와 웅장한 열기구로 메인 스타디움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광경을 구경했다.두 번째 방문앞서 설명한대로 시드니 로열 이스터 쇼는 NSW 주의 농업발전과 농촌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로열 이스터 쇼에는 각종 농산물, 각종 가축 등 일차 산업과 관련된 이벤트와 경쟁대회가 이스터 쇼 기간내내 열린다.   이러한 다양한 각종대회와 이벤트 또한 여러 날 동안 나누어 진행되기 때문에 하루에 다 관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주인의 많은 경우 이스터 쇼 기간 동안 페밀리 멤버쉽 카드를 구매해 행사기간 내내 여러 번 방문하며, 행사 시간표별로 계획을 세워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기자 일행도 취재를 위해 4월 14일 오전에 서둘러 입장하여 농업 생산품을 관람하기 전에 자이언트 스타디움에서 진행되는 오토바이 곡예 운전을 관람했다.   세 대의 오토바이가 점프하여 공중에서 차례대로 회전하며 트럭 위 갑판에 착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곡예 비행처럼 보여졌다. 오토바이 곡예 운전이 끝나자 호주의 영원한 자동차 라이벌인 홀덴 자동차와 포드 자동차의 랠리 시합이 이어졌다.   8기통 엔진이 굉음을 내며 자이언트 흙길을 시속 100km 이상 빠른 속도로 달려 누가 더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가 하는 경기이다. 빨간색 홀덴이 먼저 굉음을 내고 운동장 반바퀴를 돈 다음 기록을 재고, 파란색의 포드가 이어 반 바퀴를 돌고 기록을 재는 형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날은 전통의 빨간색 홀덴이 아쉽게도 포드에게 밀리고 말았다. 호주의 농업 역사를 보다두 번째 이스터 쇼 취재 날은 작년에는 관심을 많이 두지 못했던 농업과 축산을 둘러보려는 계획을 세웠다. 기자 일행은 농산물 경기 대회가 열리고 있는 울워스 프레쉬 후드 돔(Woolworths fresh food dome)으로 이동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농작물들이 이미 짐을 꾸려 이동해서 돌아간 듯이 농작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자이언트 호박대회에서 우승을 한 호박과 그 호박을 생산한 농부를 만날 수 있었다. 무려 호박의 무게가 237kg이나 나가는 대형 호박이었다. 웬만한 남자 둘이서도 들기가 어려운 무게였다. 이 호박을 경작한 농부를 호박과 함께 사진에 담았다.   마리안 번스와 그의 딸이 올해 호박 크기 시합에서 우승한 호박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마리안 번즈는 시드니 동남쪽 베가(Bega town)마을에서 엘름그로브 농장(Elmgrove Farm)을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가축들을 경험하기 위해 가축 전시관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말 전시관(Horse Pavilion), 소 전시관(Cattle Pavilion), 양 전시관(Sheep Pavilion), 돼지와 염소 전시관(Pig & Goat Pavilion) 심지어 알파카 전시관(Alpaca Pavilion)도 만들어 놓았다.   이처럼 알파카 전시관을 따로 전시 해놓은 것을 보고서 기자는 알파카가 호주에서는 주요한 농업생산품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알파카에서 생산되는 털이 주요한 호주의 농업 생산품이자 수출 품목이었던 것이다.  가축 전시관을 돌며 기자에게 인상깊게 느껴졌던 두 가지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하이스쿨 여학생들로 보였는데 아마도 이번 이스터 쇼 기간 동안 자원봉사자로 봉사하는 듯 보였다. 커다란 소들을 목욕 시켜주는 일을 재미있게 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기자는 약간 떨어져 있었는데도 냄새가 진동을 했는 데 그 여학생들은 자연 친화적인 모습으로 웃고 떠들며 재미있게 소들을 씻겨주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이것이 살아있는 교육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양, 염소, 닭, 칠면조 등 여러 종류의 가축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가축 전시장에 들어섰는데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그 가축들에게 직접 먹이도 주고 동물들을 만질 수 있는 전시관이었다. 15분 정도 지켜보았는데 이 전시관이 인기가 많았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했지만 언제나 전시관을 빽빽하게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가축들과 뒹굴고 먹이도 주고, 같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장려하는 호주의 부모들과 호주의 시스템이 부럽게 느껴졌다. 호주 농업이 200년 동안 꾸준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린 시절부터 동물들을 만지고 농산품들을 들여다보며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 이스터 쇼가 분명 큰 공헌을 했으리라. 우드 초핑 대회(Wood Chopping competition) 우드 초핑대회는 이스터 쇼의 단연 인기있는 볼거리이다. 마스터 쉐프 우드 촙 스타디움(Master Chef Wood Chop Stadium)에서 진행되는데 언제나 이 스타디움안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기자 일행이 방문했던 4월 14일에는 발 아래 놓고 통나무 자르기 준 결승전과 나무 밟고 올라가 벌채하기 종목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우드 초핑 대회는 NSW주를 넘어서 호주 전역에서 참가하는 선수들과 함께 경쟁한다. 심지어는 해외에서 참가하는 선수들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시드니 로열 우드초핑 대회가 100년이란 전통을 가지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권위 있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시드니 로열 우드초핑 대회의 한 종목에서 우승하면 그 종목의 세계 우승자가 된다는 말이다. 자료에 의하면 많이 참석할 때는 69개 클래스에 걸쳐 전 세계 250명 이상 참가자들이 참가하는 세계적 경기로 보도된다.   더욱이 호주는 많은 직업에 있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 우드초핑 대회도 여성끼리 경쟁하는 경기도 펼쳐진다. 이것은 호주가 정착 초기부터 여성들도 남성들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역할들을 담당해 온 것을 말해준다.   이날 발 아래 놓고 통나무 자르기 준결승 전에서 뉴사우스 웨일즈 팀에서 출전한 선수가 우승을 했다. 신기했던 것은 이 선수는 다른 주에서 출전한 선수보다 몸집이 크지도 않고 근육질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몸집이 더 큰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것은 도끼질은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닉과 요령이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것 같이 보인다.    에필로그이번 이스터 쇼에는 17세 소년이 칼에 찔려 죽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했다. 작년에도 코로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8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이스터 쇼의 엄청난 가치를 증명했다. 그런데 올해는 무려 92만 2천827명이 방문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스터 쇼가 열리는 올림픽 공원내 쇼 그라운드에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숫자가 8만 명이다. 이스터 쇼가 열리는 12일 동안 92만 명이 방문했다면 하루 평균 7만 6천 명이 방문한 것이다. 평균적으로 매일 쇼그라운드 수용 최대 숫자에 근접하게 사람들이 방문한 것을 알 수 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이스터 몬데이인 4월 18일 오전에 벌써 티켓이 매진되었고 호주인이 좋아하는 5만 개의 스콘(Scones) 빵이 동이났다고 특필했다.   시드니 로열 이스터 쇼는 호주를 상징하는 또 다른 랜드마크의 문화행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단순히 어린이들을 유혹하여 엔터테이먼트나 상거래만을 조장하는 값싼 문화행사로 비쳐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터 쇼 본연의 목적인 농촌 산업을 장려하고, 다양한 대회를 통해 미래의 농촌 지도자들을 키우고 이스터 쇼의 수익금으로 실제적으로 농촌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시드니 로열 이스터 쇼가 올해 햇수로 200년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한 지역에서 한 행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해온 행사는 흔치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묵묵히 감당하는 호주인들의 끈기와 성실성에 경의를 표한다.   아직도 이스터 쇼를 관람하지 못한 한인들이 있다면 내년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각종 가축 전시관을 둘러보고 농산품 전시관도 둘러보고 가축 퍼레이드를 관람하며 호주가 왜 농업 국가인지를 꼭 확인해 보기를 권면한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정성택|본지 디자인실장

02/06/2022

자기 비움Kenosis박성남남산이다. 반평생,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온 듯! 막상 와서 보니 애오라지 감개무량이다. 색깔 고운 잎새 사이로 나뭇가지들은 여전히 살갑게 공기를 흔들며 우리를 반긴다. 새 단장한 조경은 뜨문뜨문 건물들을 이어주며 어릴 적 내 기억을 새롭게 훔쳐낸다.   물오른 미루나무 줄기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강원도 양구 미석예술인촌을 출발해서 세 시간 남짓, 우리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 작고 아늑한 진입로는 제법 편안한 풍치를 준다. 화접도 부채 든 선비 같다.   아들 진흥이와 나는 드디어 문학의 집·서울에 안착했다. 숨 돌릴 틈없이 화가의 눈으로 꼼꼼히 더듬어 보아야 한다.   창신동 유년 시절, 이곳은 한치 건너 두치보다 더 가까웠던 나의 안방 아랫목이었다. 어린 나를 유년답게 해줬고 청년답게 자라게 해주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여기는 나만의 다짐을 고스란히 담아두었던 타임캡슐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행이다.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나는 스스로 안도하며 의연해진다.   나의 기억으로는 전차가 다니던 서울 사대문 밖은 뒷간 배설물들이 길을 더럽히곤 했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끔찍했다. 나는 야경꾼 방망이 소리에 곤한 잠을 밀치고 일어나 집 마당부터 쓸곤했다.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듣고부터는 신이 나서 온 동네를 안방 치우듯이 단숨에 씩씩하게 쓸어내곤 했다.   아직 어둠이 묻은 싸리 빗자루에 오물이 걸리는 날이면 나는 질겁하며 투덜대곤했다.  “으씨, 난 언능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나 같은 아이한테 상을 꼭 줄 거야.”    아버지 초상화 같은, 전래동요 같은 우리집이었다. 장마철이면 온통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세간들은 난리법석이었다. 철모르는 세숫대야며 흥이난 장독들이 수양버들 늘어지듯 얼씨구절씨구 넘실넘실 둥둥 떠다녔다. 뒤집어질세라 온 식구는 그것들을 부둥켜안고..., 그야말로 댄스 교습소가 따로 없었다.   장마가 걷히면 나는 냇가 모래를 세숫대야로 끙끙거리며 날랐다. 부엌과 마당에 있는 오물을 아버지가 걷어내시면 나는 그 자리에 모래를 부었다. 아버지가 성큼성큼 밟아내시면 모래톱 높이만큼 우리집은 전래동요처럼 새집이 되곤했다.   이 모두는 우리가 살았던 창신동 저자거리의 자아철 풍경이다. 나의 눈에 비친 한 편의 아픈 바를 조각들이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남산 위의 집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하늘을 나는 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며칠이고 빠져 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당시 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애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동경과 감사와 귀소본능이 또한 샘솟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괜스레 겸연쩍고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그때 성남이가 나는 자랑스럽고 지금도 나의 전부가 오도카니 깃들어 있는 그때가 매우 그립다.   “성남아, 제비가 알을 까면 풍년이 온단다.”   아버지 음성이다. 여백 같은 자리에는 아버지 그림이 늘 위치해 있다. 아버지 그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신다. 그림 그리기에 난처해질 때면 나는 아버지 그림을 본다. 이럴 때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을까?   “성남아! 봄을 그리면 겨울 냄새가 니야 되지 않겠니?”  투박한 듯 따뜻한 음성으로 오히려 나에게 물어 오신다. 같은 길을 가는 나에게는 스승이자 바이블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찾고 지금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내 아들에게 같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고파 몸부림친다. 대문이 없다. 새하얗게 단장한 문학의 집·서울은 금새라도 한 편의 시가 될듯 나를 뭉클케 한다. 입구에 서있는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 ‘서울미래유산’ 안내 문구 외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그때 그 모습은 찾을 길 없다.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 했는데 새털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참새 몇 마리 옹기종기 한가롭기까지 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남산에서 아들과 함께 그림 전시를 하다니.... 진흥이가 힘들면 찾아갔던 국현 할아버지와 손자 그림이 문득 떠오른다. 혹시... 아버지 오늘 이곳에 오시려나?  어머니 무쇠 손과 우람한 아버지 손이 우리에게 ‘괜찮아, 괜찮아’하시면 다가오신다.〠 박성남|화가, 본지 아트디렉터

26/04/2022

호주 개척 초기 가장 존경받았던 기독여성 목축업자 엘리자베스 맥아더 여사    정지수엘리자베스 맥아더(Elizabeth Macarthur, 1766-1850)는 백인들이 호주에 정착하던 개척 초기에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1766년 영국 데본 (Devon)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6살 때 사망했다.   이후 그녀는 교회에서 신앙 교육과 일반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그녀의 신앙은 이 시기에 크게 성장했다. 1788년 그녀는 육군 장교이자 목축업자였던 존 맥아더 (John Macarthur)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큰 아들이 태어났고, 그들은 호주에 이주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에서 출발한 그들은 긴 항해 후, 1790년 6월에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당시 새로운 개척지였던 시드니에서 그녀는 위대한 개척자로, 목축업자로, 어머니로,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그녀는 호주에 도착한 최초의 교육받은 백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성의 비율이 더 높았던 죄수 정착촌에서 우아함과 그리스도인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가끔씩 열리는 파티에 그녀는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참석해 사람들과 친절히 대화를 나누었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과 태도와 말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위대한 여인이라고 칭송하며 존경했다. 그녀는 개척지였던 시드니에서 헌신적인 아내, 어머니, 목축업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1793년에 그녀의 남편인 존 맥아더는 정부로부터 파라마타(Parramatta)에 있는 100에이커의 땅을 받아 농장을 만들었는데, 이 농장을 ‘엘리자베스 농장’이라고 불렀다. 이 농장에서 두 부부는 약 40년을 살았고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낳아 키웠다.   존 맥아더는 자신의 농장에 양들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양모를 생산에 영국에 수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양모 사업을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영국으로 떠난 이후 농장에 남아 농장을 돌보고 자녀들을 키웠다. 그녀는 바쁜 농장생활 중에도 자녀들의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주일마다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참 신앙인의 삶을 가르쳤다. 이후 자녀들을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녀는 농장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농장에는 양들이 건강하게 자랐고, 사과나무, 배나무, 살구나무, 아몬드 나무가 잘 자라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녀의 농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농장의 풍성한 열매들을 보며 감탄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하게 자란 양들과 풍성한 열매들은 그녀에게 많은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 그녀는 세븐 힐즈 농장(Seven Hills Farm)을 구매했고, 캠든 파크(Camden Park)의 땅을 샀다. 1820년에 그녀는 총 9천600에이커의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소와 돼지를 4천 마리 이상 사육할 수 있었다.   그녀가 소유한 농장이 커지면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약 90명의 죄수들을 고용해 그들과 함께 농장 일을 했다. 사람들을 감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꾼들 대부분이 영국에서 건너온 죄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움이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 건강과 용기와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했다.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호주 원주민들이 그녀의 농장 주변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해 그녀는 위험을 느꼈다. 무섭고 두려울 때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용기를 내어 농장을 지키고, 양떼들을 지켰다.  양모 사업을 하느라 영국에서 머물던 그녀의 남편인 존 맥아더는 아내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을 칭송하며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 특히, 그는 그녀가 양의 품종을 개선하고 양모 생산량을 크게 늘린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한편, 개척정부의 주지사도 그녀의 수고와 노력에 감탄했고, 그녀가 개척지의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을 인정해 파라마타 (Parramatta)의 땅 600에이커를 그녀에게 상으로 주었다.  1816년에 그녀는 1만 5천 파운드의 양모를 생산해 팔았다. 엘리자베스의 성공적인 양모 생산은 호주 양모 산업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양들을 돌보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 양모 생산을 극대화할 때, 그녀의 남편은 영국에서 양모를 수입해 판매했다.   또한 그는 영국 정부가 호주의 양모 사업이 더욱 성장하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영국에서,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호주에서 양모 사업의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그 결과 1821년에 존 맥아더는 호주에서 수입한 최고급 양모로 영국의 양모 품질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엘리자베스의 수고와 노력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들 부부는 멀리 떨어져 사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또한 그들은 함께 양모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당시 개척지의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부를 존경했으며, 이 부부처럼 살기를 소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불행히도 존 맥아더는 나이 들어 정신이 이상해졌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의심했고 그녀가 불성실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의 비난을 참고 견디었다.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돌보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 헌신했다. 그녀는 어려움과 환란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견뎌냈다.   그녀 안에 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녀에게 용기와 인내를 준 것이다. 그녀의 남편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위기 가운데서도 그녀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정신이 이상해진 남편을 끝까지 돌보았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가정을 지켰고, 모든 가족들이 그녀를 믿고 따르며 존경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던 개척초기에 엘리자베스 맥아더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고,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삶에 복을 주셨고,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위대한 여성,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녀는 1850년 사망했고 남편 옆에 묻혔다.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보여준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호주인들 마음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26/04/2022

기도가 상식처럼 응답 받는 곳 글/김환기 사진/권순형“이민자의 삶이란 나그네의 삶이요 주변적 인생을 사는 삶이다. 성경에서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나그네 길이며, 험악한 세월임을 고백하듯이 이민생활을 하는 이민자들에게 가슴에 와닿는 말이기도 하다.   주변인으로 나그네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이민자들이 마음을 붙일 곳은 동일한 언어로 한문화 속에서 자란 한민족 동포들과의 만남일 것이다. 이민생활 속에서 이런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장소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이민교회들의 현실이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 교회건물이 없어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아 목회하는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 간의 문제,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이나 삶 속에서 갈등하는 문제가 이민교회의 현실이다.   교회들이 자기 예배당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가 10% 도 안되어서 호주인 교회를 빌려 오후에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예배시간은 이상적이지 못하고 교육시설과 특별집회시의 제약 등으로 교회의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점도 없지 않다.   그리고 교인들은 자기 교회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건물이나 시설에 애착심이 적고 청소나 가꾸는 일에 창의적이지 못하며, 봉사정신도 잘 길러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호주 이민교회의 문제점을 볼 때 목회자 교육 공동 프로그램을 장소제공과 중보기도로 섬길 때 기도원 특수 사역은 재정적인 부족과 제한적인 장소 때문에 힘든 이민교회의 회복과 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역 공동체 협력의 장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기도원의 특수적인 여건에서 다시 한번 영성을 재점검하면서 말씀과 기도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민교회의 현주소와 사명감 회복에 전심할 수 있는 영성 회복과 자질향상의 역할 감당도 필요하다.”   시드니 응답기도원 원장인 윤영화 목사의 석사 논문 중 일부이다.   기도의 사람 윤영화 목사  윤영화 목사는 명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서울장신대학를 졸업하고 명성교회에서 개척한 교회의 전도사로 사역을 하였다. 1998년, 윤 목사는 뜻을 정하고 시드니로 유학을 왔다. 서던크로스 신학교(현, 알파크로스 대학교)에서 Advance Diploma 코스를 마친 후, 웨슬리 신학대학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윤 목사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명성교회를 섬기는 이규현 목사였다. 윤 목사는 명성교회에 다닐 때 교구 목사였다. 그는 윤 목사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윤 목사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윤 전도사는 기도하는 사람이니 시드니에 기도원을 개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윤 목사가 할 수 없다고 하자, 지금 당장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준비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2006년 6월 19일 윤 목사와 남편인 김정수 장로는 그레노리 사슴농장(31 Harrisons Lane Glenorie)에 상주하면서 기도원 개원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기도하러 왔던 변상균 목사를 만나게 되어 함께 동역하게 되었다.   시드니 응답기도원 개원   2007년 8월 4일, 드디어 7년간의 기도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교계의 원로인 홍관표 목사를 모시고 시드니 응답기도원의 개원 예배를 드렸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호주에는 교회의 자체기도원은 몇 개 있지만, 초교파 기도원은 처음이다. 시드니응답기도원은 호주에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모두에게 문이 열려 있는 유일한 기도원이다.   기도원의 사역을 통해서 이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는 위기는 언제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러 오신 분 중에 40일 동안 실종이 되었습니다. 경찰이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당일 다니엘 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날이었습니다. 버우드 경찰서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3시간 동안 진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대답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며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분은 시드니에 사시는 분인데 너무 낙심되어 차로 4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오렌지에 갔다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경찰은 오렌지에 온 이유를 물어서, 시드니에서 살집이 없어서 오렌지까지 왔다고 했답니다. 그 후 일 주일 만에 시드니에서 정부주택이 나오고, 지금은 그곳에서 잘 살고 계십니다.”   시드니응답기도원은 시드니를 넘어 열방을 품고 기도하고 있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국제결혼한 사람이 가정의 문제로 찾아왔다. 호주 남자가 부인되는 일본 여자를 데리고 왔다. 상담과 기도 후 문제는 해결되어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번은 네팔의 목회자에게 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윤 목사는 당황을 했다. 네팔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겠다고 결단한 것 자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도원에 올라와 상담을 했다. 폴 목사는 네팔에서 한국 선교사에 의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브라만 계통의 아버지에 의하여 집에서 쫓겨나 인도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드니에서 네팔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었다.   폴 목사는 한국인 지인을 통해서 응답 기도원에 알게 되고, 금식기도를 결심했다고 했다. 금식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윤 목사는 일단 10일간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10일 동안 윤 목사는 매일 3시간씩 같이 기도해 주었다.   폴 목사는 10일 금식 기도 후 응답을 받고, 지금은 네팔 교회를 개척하여 성도가 약 100여 명이 된다. 윤 목사는 폴 목사의 초청으로 네팔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네팔 선교를 두 번이나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시드니 응답 수양관 개원   2010년 8월 6일, 개원 3주년 및 응답수양관 개관기념 성회를 가졌다.  응답수양관은 30베드 규모의 숙박시설과 함께 각종 수련회, 기도회, 세미나, 소규모집회를 할 수 있는 편리한 시설들을 갖추게 되었다.   윤 목사가 꿈꾸는 기도원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교회와 유기적 관계로써의 기도원이다. 목회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하여 정기적인 말씀 사경회와 기도회, 세미나 등을 개설하여 함께 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정기집회로 철야기도회를 열어 기도가이드 역할과 절기에 따라 교회와 함께 신년축복성회와 6월 구국기도회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폭 넓은 기도로 온 교회가 연합하고, 교역자들의 중보기도회 등으로 교회와 연합하여 말씀과 기도운동을 하는 건전한 기도원이다.   둘째, 말씀 읽기와 기도 사역에 집중하는 기도원이다. 목회자의 고충에서 나타났듯이 헌신된 성도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말씀 읽기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읽지 않고 있는 사람이 많다. 말씀은 신앙생활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데 말씀 없는 신앙생활은 향방 없이 가고 있는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심령에 든든히 서 있을 때 그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할 때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읽기와 더불어 기도 또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셋째, 쉼터의 공간을 제공하는 기도원이다. 가정과 일터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여유를 가지고 쉬면서 가족 간의 대화의 장을 열기도 하여 부모와 자녀 간의 상처와 단절되고 갈등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기도와 대화 가운데 치유되고 회복하는 화해와 회복의 장이다.  또는 교인들과 집단 구성원들의 교제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장소로써 공간적인 특성상 서로 섬기며, 기도하면서 마음의 자유와 여유를 가지면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상담자로써 역할을 감당하는 기도원으로 쉼터의 공간제공을 제공하는 기도원이다.   시드니응답기도원 이전   처음 기도원을 개원할 때 윤 목사는 기도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떠나라면 떠나겠습니다.” 기도원 건물 주인이 필요하면 언제나 떠나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2020년 코로나가 창궐하던 어느 날 윤 목사는 떠나야만 했다.   윤 목사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이사할 곳을 찾았다. 이곳은 시드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기도원을 찾는 분들이 조금 불편하여, 오래 전부터 윤 목사는 이곳에서 시드니 쪽으로 30분 정도 가까운 곳으로 기도원을 이사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윤 목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정확하게 30분 가까운 곳으로 이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윤 목사는 차로 30분 가까운 거리를 생각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걸어서 30분 가까운 거리에 기도원을 허락해 주셨다. “아! 내가 기도할 때 30분이란 말만 했지 ‘차로’라는 말을 빼먹었구나”   2020년 6월 5일, 기도원은 1471 Old Northern Rd Glenorie로 이전하였다.   응답기도원의 금요 철야 기도회   응답기도원은 수시로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이는 기도 그룹도 있고, 영적인 갈급함으로 기도원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 사태로 잠시 주춤거렸지만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얼마 전에 다시 시작된 금요철야기도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러 사정으로 직접 올 수 없는 사람들은 줌(ZOOM)으로 연결하여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매주 원로 목사님들이 오셔서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도가 쌓였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원로 목사님들은 이민 사역을 너무 잘 알고 계시고, 이민 교회와 성도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에 많은 은혜가 됩니다.   김종규, 한영근, 조진호 목사님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해주시고, 또한 송상구 목사님, 김강산 목사님, 옥태호 전도사님 등이 여러 모양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기도원은 특별한 목적으로 기도를 하거나, 신앙심을 단련하도록 시설을 갖춘 장소입니다. 일상적으로 다니는 교회와 달리 복잡한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위치하여, 하나님과 자신과의 만날 수 있어 목적만 놓고 보았을 때 중세 시대 수도원과 유사하지만 수사, 수녀들만 이용할 수 있는 수도원과 달리 기도원은 누구든지 일반 신도들도 이용할 수 있는 곳입니다.   녹녹치 못한 이민 사회에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매주 금요일 저녁 기도의 동산에 모여 뜨겁게 찬양하고 말씀으로 충전한 후 부르짖는 기도회입니다.”  응답기도원의 비전?  “호주에 있는 목사님들을 다시 기도의 불이 붙어서 일어나기 원합니다. 응답기도원이 영적인 발전소가 되어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이 새 힘을 얻고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응답기도원이 기도의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호주 땅에 기도의 불을 붙일 수 있는 기도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체건물이 없어서 여러 가지 활동에 제약이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뿐 아니라 치료와 회복, 친교와 나눔 그리고 영혼의 쉼터의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일 년 전부터 이곳에 오기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오셔서 모든 근심 걱정 없이 영육의 강건함을 회복할 수 있는 기도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응답기도원 사역을 돕고 있는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는 “목회자가 살아야 성도가 삽니다. 하나님 앞에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돕는 응답기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응답기도원이 기도의 그루터기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윤 목사는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온라인 기도회에 참여하여 기도로 하루를 마감한다. 다음날은 세계 선교사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여 기도로 하루의 문을 연다. 윤 목사는 네팔, 피지, 바누아투 등에 선교를 갔고, 얼마 전에는 온라인으로 인도 신학교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도 있었다.   윤 목사는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윤 목사는 열방을 품고 영적 발전소인 시드니응답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있다.〠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구세군라이드교회권순형|본지 발행인

10/04/2022

가평 전투, 가평 길, 가평 프로젝트                                글/주경식사진/권순형 호주에 한국 지명인 가평 길(Kapyong Road)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아는 동포들은 많지 않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지금까지 찾아낸 곳만 무려 10곳이나 된다. 시드니에 3곳(Belrose, Bardia, Macmasters Beach), 캔버라에 1곳(Campbell), 콥스하버에 1곳, 브리즈번에 2곳(Caboolture, Witheren), 골드코스트에 1곳(Arunde), 타운스빌에 1곳, 퍼스에 1곳(Karrakatta)이다.   뿐만 아니라 가평 다리(Kapyong Bridge)도 2개나 된다. 아들레이드와 멜번에 있다.   본지 권순형 발행인은 “가평 길(Kapyong Street)은 분명히 한국전에 참전했던 호주 참전용사들이 붙인 이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국 전쟁시 호주군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가평전투’ (Kapyong Battle)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호기심과 취재 열망으로 가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작년, 권 발행인은 호주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주위에 혹시 가평 길(Kapyong St, Rd, Lane 등)들이 있으면 본지로 알려 달라고 광고를 했다. 그렇게 해서 호주 전역에 무려 10군데나 가평 길(Kapyong St)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10개이다. 앞으로 더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앞으로도 혹시 주위에 Kapyong 지명이 사용되고 있는 곳이 있으면 알려 주기를 바란다).   작년 6월 호 크리스찬리뷰의 가평길(Kapyong St) 기사가 나가자 연합뉴스, JTBC, KBS 등 한국의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권 발행인을 인터뷰하고 ‘호주의 가평길’(Kapyong Street)에 대한 많은 관심들을 보여 왔다.   또한 다음 포탈 사이트에 올려진 기사에는 6월 25일 하루 동안 365개의 댓글과 함께 ‘감동’이란 클릭 숫자가 1천4백여 개에 달했다. 고국에 있는 많은 동포들이 그 기사를 보고 ‘감동’에 젖어 호주를 생각하고 특히 한국전에 참전한 호주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들을 전해온 것이다.   이런 뜨거운 반응들을 보고 ‘크리스찬리뷰’는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을 구성하고 호주에 있는 ‘가평 길’(Kapyong Street)을 취재하고 ‘가평전투’에 참전했던 호주 참전용사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일었다.   2023년이면 한국전쟁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하고 가평전투에 헌신한 참전용사들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내년 4월까지 살아 계신 가평전투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또 그들로 말미암아 조성된 호주에 있는 ‘가평 길’(Kapyong St)을 취재하고 한국전 사진전을 개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작년 12월 일차적으로 콥스하버, 골드 코스트, 브리즈번 지역에 있는 가평길 취재를 다녀온 것이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이번에는 뉴사우스 웨일즈 울릉공 인근 불라이(Bulli) 지역에 살고 있는 가평전투 참전용사인 조셉 베즈고프 옹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가평대대(Kapyong Battalion)를 아시나요?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호주는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한국 전쟁에 우방국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육·해·공군 전군에 걸쳐 1만 7천164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사리원 전투, 가평전투, 마량산 전투 등에 참전해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가평 전투는 호주군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4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전략적으로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 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다.    대공세를 펼치며 남하하던 중공군은 4월 23일 밤 10시경, 6사단을 격파하고 중공군 118사단 선두 연대는 가평을 신속히 점령할 목적으로 가평 계곡을 따라 진격하던 중 호주군의 방어에 기세가 꺾였다. 왕립 호주연대 3대대가 가평 504 고지에 배치되어 5배가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주춤했던 중공군은 이튿날인 24일 새벽 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해왔다. 그 후 밤새 호주군 3대대와 중공군의 밀리고 밀치는 전투는 24일 아침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급히 철수했다.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 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호주군 1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을 이틀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는, 전쟁 역사에 믿기 어려운 전과를 올린 것이다. 한국 전쟁사에서는 당시 왕립 호주연대 3대대가 가평에서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로 가평 전투에 참여한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훈장을 받았다. 이후로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는 ‘가평대대’(Kapyong Battalion)라는 별칭이 붙었다(올 4월에는 타운스빌로 옮긴 왕립호주연대 3대대 가평대대를 취재할 계획 중에 있다).   그리고 적어도 호주 참전 용사들에게는‘가평’ (Kapyong)이 한국인들보다 더 생생하고 잊지 못할 이름이 된 것이다.  가평전투 참전용사 조셉 베즈고프 옹  조셉 베즈고프(Joseph Vezgoff, 93) 옹(翁)은 가평전투 참전용사이다. 현재 뉴사우스 웨일즈주 울릉공 근처 불라이(Bulli)에서 아내 트리쉬(Trish Vezgoff)와 함께 살고 있다. 트리쉬는 울릉공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였고 최근까지 결혼 주례사와 장례 지도사의 일들을 하기도 했다.   크리스찬리뷰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은 2월 말 불라이에 사는 가평전투 참전용사 조셉 베즈고프 옹을 인터뷰하기로 논의했다. 그리고 인터뷰와 촬영 약속을 잡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   기자가 연락처에 표기된 대로 로컬 번호로 전화를 했고 다행히 조셉 옹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귀가 어두운 관계로 정상적인 통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부인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다시 전화를 하기로 하고 끊었다.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상황에서 인터뷰를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이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인터뷰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고, 인터뷰어의 사정에 맞게 취재 날짜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날 오후 다시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조셉 옹의 아내 트리쉬가 전화를 받았다. 자초지종 설명을 한 후 인터뷰 요청을 했다. 처음에는 요즘 사기 전화들도 많이 오는 터라 경계를 하는 듯 보였지만, 인터뷰 취지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니 경계를 풀고 흔쾌히 인터뷰 요청을 허락했다. 하지만 조셉 옹이 연세가 높아 청력과 시력에 문제가 있어 인터뷰할 때 조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인터뷰 날짜가 3월 19일(토) 12시로 잡혔다.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은 다른 때와 달리 시나리오를 짜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번 인터뷰는 조셉 옹의 인터뷰를 크리스찬리뷰지에 기사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할 영상녹화를 염두해 두고 진행하는 일이라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권 발행인은 시나리오를 짜기 위해 조셉 옹 자택과 인근 공원과 바닷가 등 사전 답사할 목적으로 불라이를 한 주 전에 다녀오기도 했다. 마침 울릉공에 거주하는 이기범 씨 부부가 취재 당일 날 BBQ 점심 준비를 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이번 인터뷰의 컨셉은 조셉 베즈고프 옹을 단순 인터뷰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 팀이 조셉 베즈고프 옹 자택을 방문하는 장면부터 조셉 옹 가족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걷기도 하는 등 내러티브가 있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콘티를 잡았다.   그래서 식사를 포함, 모든 준비는 가평 다큐 팀이 준비하고 최대한 조셉 옹 가족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했다.  인터뷰와 촬영을 위해 총 4개 팀이 움직였다.Team 1 : 정성택 감독과 김신일 목사가 11시쯤 먼저 도착해서 BBQ 준비를 한다.Team 2 : 울릉공에 거주하는 이기범 씨 부부가 11시쯤 도착해 식사준비를 돕는다.Team 3 : 기자와 오페라 가수 테너 김재우 씨가 11시 40 분쯤 도착해서 조셉 옹 자택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인터뷰 준비를 한다.Team 4 : 권순형 발행인 부부는 촬영장비와 불고기, 잡채 등 식사와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고 전체 일정을 조율한다.  처음 조셉 옹의 부인 트리쉬 씨와 연락할 때 조셉 옹이 참전용사 유니폼을 입고 촬영에 임해주면 고맙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군복도 없고 남편이 입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메일을 받아서 내심 걱정했는데 고맙게도 당일 조셉 옹이 참전용사 복장을 하고 우리 팀을 영접해 주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촬영과 인터뷰를 위해 이렇게 협조해 주는 것에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이번 인터뷰는 단순 인터뷰는 아니다. 말그대로 스토리가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래서 연출을 위해 시나리오도 작성했고 플랜 A, 플랜 B도 세워놓고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촬영을 준비했다.   BBQ를 위해 불피우는 장면, 조셉 베즈고프 옹의 집안 스케치, 조셉 옹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테너 김재우 씨의 즉흥 연주 그리고 인터뷰 후에 여건이 되면 조셉 옹을 모시고 근처 불라이 해변에 가서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화면에 담을 계획을 세웠다.  연출한 대로 조셉 옹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집안에 들어가는 장면, 점심을 준비하고 조셉 옹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 인터뷰하는 장면, 조셉 옹의 특별한 요청으로 테너 김재우 씨의 즉흥 연주 장면,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로 조셉 옹의 화실에서의 대담 장면 등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그는 은퇴 후에 미술활동을 해왔는데 그의 그림 실력은 취미활동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울릉공 전통 예술 협회(Wollongong Traditional Arts Society)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불고기 BBQ가 요리되자 준비해간 김치, 잡채, 각종 전들을 펼쳐 놓았다. 김치도 혹시 매워 못 먹을 수 있어, 백김치까지 준비하는 섬세함을 잊지 않았다. 부페식으로 원하는 만큼 가져온 후 모두 식탁에 앉아 한국식으로 식사를 했다.   아마도 부인 트리쉬와 아들 폴은 처음 한국요리를 접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아들 폴은 아버지 조셉이 보통 점심식사 후 낮잠을 자기 때문에 졸려 할 수 있으니까 빨리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서두른다.   자리를 정돈하고 촬영 장비를 셑팅 한 후 조셉 옹 부부가 중앙에 앉았다.   가평전투에 대해 듣다  인터뷰는 김재우 씨가 진행했다.  “제 이름은 조셉 베즈고프입니다. 저는 1928년 뉴카슬의 위컴(Wickham)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 21살에 호주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때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10월경으로 추정하는데 저는 왕립호주연대 3대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맨 처음 일본에 도착해서 몇 주간 훈련을 받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왕립호주연대 3대대는 11월경 북한쪽 지역에서 중공군과 맞닥트린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그때 저희 부대는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중국 국경 80km 지점에서 숲속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당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 트럭에 타고 있었는데, 한 트럭당 30여 명 정도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머리 위로 총알이 휙휙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자 순간적으로 트럭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총에 맞은 전우도 있었습니다. 놀라서 고개를 숙이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몸을 피했습니다. 적을 향해 총을 쏴야 하는데,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두려움에 저의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는데, 순간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그때 이후로  전투에서 그런 현상은 없었습니다. 빗발치는 총성과 함께 저희 중대는 흩어지게 되었고 최전선에서 중공군을 맞닥트린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조셉 옹은 당시를 회상하는 듯 잠시 숨을 골랐다. 한참 혈기 왕성한 시기인 21세 청년기 때라도 전장에서 갑자기 머리 위로 지나가는 총성을 들었을 때 그 놀람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셉 옹은 이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이때의 순간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조셉 옹은 한국전쟁 후에도 말레이시아 전투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 말 그대로 노련한 베테랑 용사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해 중공군으로부터 처음 공격을 받았던 이 때의 기억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가평전투에 대해 이어갔다.  “저희 왕립 호주연대 3대대는 1951년 4월 가평 7km 북쪽 지역에 위치한 곳에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야 했습니다. 인해전술로 내려오던 중공군은 중부전선을 방어하던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하고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 제9 군단장 윌리엄 호지(Wiiiam M. Hoge)소장은 영연방 제27여단에게 가평지역을 중심으로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영연방군에 속해 있던 저희 왕립호주 연대 3대대는 가평지역 504고지를 포함한 북동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저는 그때 찰리 중대(C중대)에 속해 있었는데 다행히 찰리 중대는 예비 중대로 알파 중대(A 중대) 서남쪽 1 Km에 예비 진지를 파고 본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저희는 몇 차례 이동을 하며 적당한 곳에 진지를 구성했습니다. 이동하는 중에 돌맹이들을 주웠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중공군의 동태를 살피는 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진지를 파고 숨 죽이며 적의 동태를 살피는데, 너무 어두워 10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이 가까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저희는 돌맹이를 던졌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중공군을 확인하기 위해 돌맹이를 던지면 중공군이 수류탄인 줄 알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중공군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A중대나 D중대에 비해 다행히 저희는 아주 치열한 전투는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504 고지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은 D중대는 희생이 많았습니다. 또 앞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A중대도 중공군과 맞닥트려 치열한 전투를 했습니다. 대신 저희는 D중대나 A중대에 병력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전쟁터라 총알이 날라다니고 옆에서 포탄이 터지고 무섭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저는 그때 병장 계급이었는데 9명의 분대원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저희 C 중대는 부상자들을 호송하고 다른 중대에 탄약과 장비들을 보충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중대는 방어선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23일 밤새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소리를 들으며 살아남았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저희 C중대는 그 때 막바지에 도망가는 중공군 포로들을 많이 생포했습니다.”  조셉 옹은 가평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다섯 배나 많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꽹과리를 두들기며 공격해 올 때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아마도 기도가 저절로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렇게 가평전투에서 승리한 3대대는 그해 10월에 호주군이 수행했던 또 하나의 탁월했던 전투인 마령산 전투를 치르게 된다.   조셉 옹은 가평전투뿐만 아니라 마량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호주군 가운데 가평전투와 마량산전투 두 전투를 다 참전한 군인은 많지 않다. 계속해서 마량산전투에 대해 들어보자.  마량산 전투에도 참전하다  “마량산 전투는 그해 10월경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저희 왕립 호주연대 3대대는 중부전선 휴전선 부근 전곡지대에서 10km북쪽 마량산을 공격하는 임무를 하달 받았습니다. 그때 저희 3대대는 마량산 고지 중앙을 맡아 공격했고, 영국군은 좌측을 맡아 공격했습니다. 저희가 중앙 정면을 맡아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죠. 마량산은 높고 험준한 산입니다. 그때도 저희 C중대는 예비중대였지만 나중에는 D중대를 앞질러 마량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저희 C중대는 마량산고지를 뺏기 위해 희생이 많았습니다.   저희 중대장도 부상을 당했고 저희 중대원 대다수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상자들을 적의 폭격으로부터 피신시키는 일을 수행하면서, 저도 그때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중공군은 후퇴하면서 박격포를 쏘아댔는데 그 박격포에 많은 저희 중대원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그때 MA 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이동식 야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일본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다가 1951년 12월에 호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올해 93세인 조셉 옹은 휠체어를 의지하지는 않지만 걷는 것도 불편하고 청력과 시력 모두 약해져 조셉 옹을 모시고 근처 불라이 해변가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테너 김재우 씨가 그의 멋진 목소리로 조셉 옹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즉석에서 오페라곡 ‘금단의 노래’(Música Proibita)를 열창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부인 트리쉬 씨와 조셉 옹은 내심 흐믓한 듯 감사의 표시를 했고 답례로 조셉 옹은 자신의 작품 한 점을 마음껏 골라 가지라고 선심을 베풀었다.   에필로그  조셉 옹은 2002년, 5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바로 한국정부가 한국전쟁 정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에 초청을 받아 30여 명의 한국전쟁 참전 호주 베테랑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을 방문해 눈부신 한국의 발전상을 보았고, DMZ을 방문했다. 이때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조셉 옹은 한국에서의 경험이 그의 인생에 중요한 경험이 되었고 이때 얻은 자신감은 그의 남은 인생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실제 그는 전역한 후 다양한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후 미술에 심취하여 울릉공 전통 예술협회의 회장직도 오랫동안 수행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린 작품들로 몇 차례 작품 전시회도 가졌다.    촬영과 인터뷰를 마친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은 불라이 비치에 앉아 멀리 보이는 울릉공 바다를 감상했다. 비록 조셉 옹 가족들과 함께 오지 못해 아쉬었지만 그 분들이 보여준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특히 오늘 조셉 옹을 인터뷰하는 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생각을 갖는 시간이 되었다.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의 앞날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다시 한 번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희생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권순형|본지 발행인

10/04/2022

호주의 여성 자선사업가, 캐롤라인 치점정지수호주에서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자선 활동을 펼친 캐롤라인 치점(Caroline Chisholm)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준다.   그녀는 1808년 5월 30일, 영국의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돼지를 판매하는 상인이었는데 세 명의 아내들이 모두 출산과 질병으로 사망했고 네 번째 아내인 사라(Sarah)와 결혼해 캐롤라인을 낳았다.   캐롤라인은 12번째 자녀로 집안에서 막내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캐롤라인이 여섯 살되던 1814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유산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남겨 주었다.  1830년에 캐롤라인은 22살이 되었고, 가톨릭 신자인 아치볼드 치점(Archibald Chisholm)과 결혼을 했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소속인 마드라스 군대(Madras Army)에 속한 장교로 나이가 캐롤라인보다 10살이 많았다.   그들은 노샘프턴(Northampton)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캐롤라인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에 다녔지만,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자녀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웠다.  결혼 후에 아치볼드는 먼저 인도로 돌아갔고, 캐롤라인도 1년 6개월 후에 남편이 있는 인도로 갔다. 군부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군인 가족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본 그녀는 군인들의 딸들을 위한 교육 시설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1834년에 ‘유럽 군인들의 딸들을 위한 기술학교’(Female School of Industry for the Daughters of European Soldiers)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서는 군인의 딸들에게 읽기, 쓰기, 종교, 요리, 가사, 간호에 관련된 과목들을 가르쳤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딸들을 이 학교에 보냈다. 한편, 인도에 사는 동안 캐롤라인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1838년에 그녀의 남편인 아치볼드는 건강이 나빠져 2년 동안의 휴가를 신청했다. 아치볼드와 캐롤라인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주에서 2년 동안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캐롤라인 가족은 1838년 10월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곳곳을 여행하면서 캐롤라인은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영국과 유럽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캐롤라인은 젊은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매춘을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캐롤라인은 젊은 여성들을 도와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젊은 여성들이 머물 수 있는 여성 보호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2년 후에 남편 아치볼드는 호주에서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인도로 돌아가면서 그녀에게 호주에 남아서 자선 활동을 계속하라고 격려했다.   캐롤라인은 호주에 남아서 젊은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를 시드니에 세웠고, 시드니 외각 지역에도 여러 보호소들을 설립했다. 그녀의 자선 사업이 크게 확장되어 여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민자들도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1842년 3월, 캐롤라인은 이스트 메이트랜드(East Maitland)에 있는 주택을 임대해 숙소로 개조했다. 그녀는 이 곳을 일자리를 찾아 메이트랜드까지 온 가난한 이민자들을 위해 숙소로 제공했다. 이 숙소는 캐롤라인 치좀 코티지(Caroline Chisholm Cottage)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 숙소를 통해 우리는 1800년대 호주 노동자들의 숙소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캐롤라인은 7년 동안 호주에 살면서 자선 사업을 펼쳤는데 그녀의 자선 사업을 통해 약 1만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숙소를 제공 받거나 일자리를 얻었다. 그녀는 자선 활동을 하면서 종교 단체나 사회활동 단체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개인적인 후원만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른 단체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선 활동을 펼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선 사업이 점점 크게 성장하자 의회에서는 그녀에게 자금의 출처를 밝힐 것을 두 번이나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캐롤라인을 존경했고 그녀의 자선 사업에 동참했다.  캐롤라인은 자신의 자선 활동 내용을 중심으로 한 책을 1842년에 출판했다. 이 책의 제목은 ‘시드니의 이주민 가정을 통해 본 여성의 이민’(Female Immigration, Considered in a Brief Account of the Sydney Immigrants' Home)이었는데 이 책은 호주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책이었다.한편, 그녀의 남편은 1845년에 인도에서의 군생활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와 캐롤라인의 자선 사업을 도왔다. 두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NSW 전 지역을 방문했다. 그들은 여러 마을들을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정착해 살고 있는 6백여 명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로 남겼다.   그들은 1846년 영국으로 돌아갔고 이 메모들을 바탕으로 호주에서 어렵게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유럽 이민자들의 삶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인 찰스 디킨슨 (Charles Dickens)이 이 소책자에 실린 이야기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캐롤라인과 아치볼드는 의회에 출석해 호주로 이주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며 영국에 남아 있는 호주로 이주한 죄수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호주로 가는 이주 비용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영국 의회는 이들의 의견을 지지했다.  두 부부는 1849년에 여러 정치인들과 상류층 인사들의 도움으로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경비를 빌려 주는 대출 회사를 설립했다(Family Colonization Loan Society).  이 회사는 호주로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주 경비의 절반을 대출해 주었는데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호주에 살면서 2년 안에 대출금을 상환했다.캐롤라인은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녀는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이주민들이 안전하게 배를 타고 호주로 갈 수 있도록 선박의 숙박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고 영국 의회에 강력히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져 영국 의회는 해상 여객법을 개정하였다.  한편, 그녀의 회사는 호주로 가는 이주민들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직접 배를 빌려 운행하기도 했다. 이 회사를 통해서 약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호주로 이주했다.   그녀는 영국 전역에서 호주 이민에 관한 강의와 연설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피오스 9세(Pope Pius IX)로부터 자선 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메달(papal medal)을 수여받았다.  1854년에 캐롤라인은 호주로 돌아왔다. 그녀는 빅토리아 주에 금광이 있는 발라랏(Ballarat) 지역을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대부분의 광부들의 집이 금광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광부들과 광부들의 가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숙소를 금광 근처에 건립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제안했다. 정부는 캐롤라인의 제안을 받아드려 지원해 주었다. 그녀는 멜번과 발라랏을 오가며 자선 사업을 펼쳤다.  하지만, 1858년에 그녀의 건강이 나빠져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다. 일 년 정도 시드니에서 휴식을 취하자 캐롤라인의 건강이 좋아졌다.   한편, 그녀는 시드니에서 네 번의 강의를 했는데 그녀는 강의에서 이주민 가족들이 작은 농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토지를 할당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러한 토지 분배를 통해서 부의 양극화 현상을 막고 많은 이주민들이 극빈자로 전락하는 상황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그녀는 1866년 영국으로 돌아갔고 1877년 3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남편인 아치볼드는 같은 해 8월에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영국과 호주에서 그녀의 이름으로 된 학교들이 세워졌고, 캔버라에서는 그녀의 이름으로 된 행정구역이 생겨났다.   또한, 호주에서 1967년에 발행한 5달러 지폐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졌다. 그녀의 헌신적인 자선 활동과 삶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13/11/2021

자 떠나자, 고래잡으러...!                                글/주경식사진/권순형혹등 고래는(Humpback Whale) 모든 고래 가운데 가장 장난을 좋아하고 쾌활한 편이어서, 다른 어떤 고래보다 더 경쾌한 거품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킨다. - 모비 딕  -지난 10월 11일, 장장 17주간의 광역 시드니 지역의 락다운이 해제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평생 처음 당해보는 가택 연금 수준의 일상을 지난 3개월 넘게 생활해 온 것이다.   멜번은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합치면 장장 6개월의 락다운을 경험하고 있다. 3개월도 힘든데 6개월이라니 멜번 시민들이 겪는 어려움은 훨씬 더 클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멜번 교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시드니 하버 고래 관찰원래 계획으로는 지난 7월부터 시드니 하버 고래 관찰 및 인터뷰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덜컥 락다운이 되는 바람에 계획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락다운이 해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자 일행은 시드니 고래 관찰 크루즈(Whale Watching Sydney)를 예약했다.   웹사이트(www.whalewatchingsydney.com.au)를 방문해 보면 알겠지만 첫 화면에 큰 혹등 고래가 점프하는 모습이 보이고 그 밑에 “25년 이상의 고래 여행 경험을 가지고 있고 가장 빠른 맞춤형 배 군단을 통해 고래 구경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문구가 보인다.    고래 관찰 크루즈를 클릭하자 세 가지 옵션이 소개된다. ‘2시간짜리 익스프레스 크루즈’ ‘3시간짜리 디스커버리 크루즈’ ‘2시간짜리 와일드 어드벤쳐 크루즈’ 약간의 가격 차이들이 있다.   현재는 코로나 때문인지 ‘2시간짜리 익스프레스 크루즈’만 운영되고 있는데 NRMA 회원에게는 20% 할인 혜택을 주고 있고, NSW주에서 발행한 Dine & Discover 바우처도 사용할 수 있다.   바우처를 이용하여 주말에 가족과 함께 오랜만에 배를 타고 나가 탁 트인 시드니 하버도 만끽하고 고래 구경도 한다면 일거양득이 될 듯 싶다.  기자도 시드니에 2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시드니 하버 고래 투어는 이번이 처음이다.  고래 사냥1970년대 중반 한국에서 유행했던 가요 가운데 송창식이 불렀던 ‘고래사냥’이 있다. ‘고래사냥’은 응원가로도 인기가 높았고 크고 작은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불렸던 노래였다. 가사 내용이 지면에 언급하기에는 부적절해 옮기지는 못하지만 젊은이들이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가요가 먼저 나왔는지 아니면 영화가 먼저 나왔는지 모르지만 김수철과 안성기, 이미숙이 주인공으로 나온 ‘고래사냥’ 영화도 대종상을 탔던 수작이었다.   기자도 젊은 시절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전체 줄거리는 자세하게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주인공들이 여자를 악당들에게 구해내어 도망 다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들이 향했던 곳은 바다였다. 극중 주인공이자 정의감 넘치는 김수철은 여자를 데리고 고래를 보고 싶은 열망으로 바다로 향했다.   이 영화에서 상징했던 고래는 그들의 젊은 날의 이상과 꿈을 고래로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래를 보러 간다니까 전날 뜬금없이 ‘고래사냥’ 가요와 ‘고래사냥’ 영화가 떠오르며 설레었다.   드디어 10월 16일(토) 오후 3시 서큘러키(Circular Quay) 6번 부두에서 고래 관찰(Whale Watching) 크루즈를 탔다. 홈페이지를 보니 고래 관찰 크루즈는 서큘러키 외에도 달링하버와 팜비치에서도 출발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코로나 여파인지 현재는 서큘러키에서만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주중에도 매일 고래 관찰 크루즈가 운행되어 왔지만, 락다운 기간 동안에는 운행이 중지되었고 지금은 락다운이 해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래가 시드니를 떠나는 11월 중순까지 주말에만 운행되고 있다. 아마도 관람객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락다운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고래 관찰에 나선 관람객들은 많지는 않았다. 약 40여 명의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배에 올랐다. 관광객들이 많을 때에는 큰 배가 운행되지만 관광객이 적을 때에는 100명 정도 승선할 수 있는 작은 배가 운행된다. 배를 타기 위해 줄서 있는 관광객들을 보니 주로 가족 위주로 온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모두들 마스크들을 쓰고 있지만 오랜만의 외출로 들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크루즈 승선은 오후 2시 50분부터 진행되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줄서 있는 관광객들에게 백신 증명서를 준비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크루즈 승무원들은 백신 증명서를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모두 QR 코드를 통해 선박출입을 체크하게 했다.   다행히 인원이 많지 않아서 10분도 안되어 관광객들의 승선이 끝났다. 승선시 크루즈 승무원들은 관광객들이 1층 내부 선실에 앉아서 승무원의 안내가 있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참가자 전원이 승선한 것이 확인되자 크루즈는 정각 오후 3시에 출발했다. 출발과 동시에 선실 앞에 있던 승무원이 나와 선박이 비상시 대처해야 할 사항과 안전규칙 등 오늘의 일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1층 선실에서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오픈되어 있는 2층 데크에 올라가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안내했다. 안내가 끝나자마자 서로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2층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기자 일행도 오픈되어 있는 2층 데크로 올라갔다.   10여분 정도 항해를 했을까 크루즈가 얼마나 빠른지 서큘러키에서 출발한 배는 어느새 왓슨스 베이(Watsons Bay)와 노스 헤드(North Head) 사이의 바다를 지났다. 안내자(tour guide)의 설명을 듣고 왼쪽으로 보이는 절벽이 노스 헤드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절벽이 사우스 헤드, 왓슨스 베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드니 해안선을 뒤로하고 다시 10분 정도를 더 달려 제법 태평양 바다로 나왔다고 생각하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배가 멈추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배 위에서 안내자가 계속 설명을 해주었지만 바람도 많이 불고 뒤에 앉는 바람에 안내자의 말소리가 잘 안 들렸다. 안내자의 설명를 듣기 위해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중에 안내자의 설명을 기록하기 위해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고 안내자의 설명을 녹음했다.   배가 멈추자 안내자는 이곳이 혹등 고래(Humpback Whale)가 나오는 포인트니까 주위를 잘 둘러보라고 설명했다(편집자주, 5월에서 11월까지 시드니 해안선에 볼 수 있는 고래의 99%는 혹등 고래이다).와, 고래다!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어서 혹시 이런 날은 고래가 안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배 앞쪽과 좌우를 살피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 고래다!”   사람들이 소리치는 곳에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이미 고래는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안보였다. 짧은 순간에 혹등 고래가 점프하고 재빨리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잠시 후 몇 마리의 어미고래와 새끼고래들이 점프를 했지만 동작도 크지 않고 고래와 배가 서 있는 장소가 제법 떨어져 있는 바람에 원하는 사진을 촬영하기는 어려웠다.   그 후 이곳에서 10-15분여를 기다려도 고래들이 나타나지 않자 선장은 다른 장소로 배를 움직였다. 거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파도가 크게 출렁거림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크루즈를 빠르게 운전했다. 덕분에 롤러 코스터 마냥 배 선두가 높은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뱃멀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꽤 한참을 가서 또 다른 포인트에 다다르자 배가 멈추었다. 가는 동안 바람소리와 배 엔진소리 그리고 파도소리에 묻혀 안내자의 설명이 잘 안 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안내자는 쉬지 않고 설명을 해주었다.  시드니의 고래 투어는 5월부터 시작된다. 남극지역에 있던 고래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시드니를 지나가는 것이다. 이 고래들은 브리즈번까지 갔다가 거기서 새끼들을 낳고 다시 남극을 향해 내려온다고 한다. 남극을 떠난 고래의 수는 처음 며칠 동안은 적지만 매일 빠르게 증가하여 6월 말 7월 초가 되면 하루에 수백 마리의 고래가 시드니를 지나가면서 북부 브리즈번 지역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해마다 남극을 출발하여 시드니를 지나가는 고래의 수는 4만 마리가 넘는다. 엄청난 숫자이다. 그리고 8월중순이 되면 마지막 고래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시드니를 지나 북쪽의 번식지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 중순까지는 대부분의 고래는 북쪽을 향해 시드니를 지나가고 이때 이미 일찍 북쪽으로 갔던 고래들은 짝짓기를 통해 새끼들을 난 후 새끼와 함께 다시 남극을 향해 내려오는 고래들을 시드니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월 중순에는 이렇듯 양방향으로 지나가는 고래들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계절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차하는 고래들 사이에 흥미로운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8월 말에서 9월까지 정기적으로 매우 호기심 많은 혹등 고래와 마주치며 몇 시간 동안을 고래 관찰 크루즈 주변을 헤엄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10월과 11월에는 많은 어미고래와 새끼고래가 브리즈번에서 시드니 해안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취재팀은 10월 16일 고래구경을 갔으니 이 고래들은 브리즈번까지 갔다가 새끼를 낳고 시드니로 내려오는 고래들을 보고 온 것이다.   이때 어미고래들은 새끼 고래들이 수영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이동할 뿐 아니라 어미 고래들은 새끼 고래들에게 점프하는 법과 사냥하는 법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두 번째 멈춘 포인트에서는 인내자의 설명대로 제법 많은 어미 혹등고래와 새끼고래들이 점프하며 크루즈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11월 호 표지에 게재할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어미고래가 점프하고 나면 조금 있다가 아니면, 동시에 새끼 고래들이 점프하는 것이 신기했다. 15미터나 될 정도로 크고 30톤이 넘는 고래가 물을 박차고 나와 점프를 하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큰 혹등 고래는 18미터에 육박하고 40톤 가까이 되는 고래도 있다고 한다. 이런 고래들이 왜 점프를 해대는지 궁금해서 안내자(Mr Chris Gates)에게 물어보았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점프합니다. 산소를 들이마신 후 이 산소를 자기 근육에 공급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몸에 붙어 있는 조개류 등 해조물들을 떼어 내기 위해 점프를 합니다. 세 번째는 점프가 다른 고래 그룹과의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라고 고래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을 새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래의 종류가 수십 가지 있지만 5월에서 11월까지 시드니 해안선에서 볼 수 있는 고래의 99%는 혹등고래(Humpback)이다. 아주 드물게 서던 라이트(Southern Right)고래를 8월과 9월에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드니 해안선에서 발견되는 고래의 대부분은 혹등고래이다.   혹등고래는 매우 유순할 뿐 아니라 위험에 빠진 다른 고래종을 위험에서 구해주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혹등고래를 보니 웬지 더 정감이 느껴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혹등 고래가 북쪽 브리즈번으로 올라 갈 때는 하루에 1톤 이상씩도 먹어 치우지만 새끼를 낳고 브리즈번에서 내려올 때는 축적된 지방을 태우면서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어미는 하루에 많게는 4백 리터 이상의 모유를 새끼에게 먹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북쪽 열대지방으로 올라가면서 상당한 양의 지방을 축척했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보통 암컷이 수컷보다 크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보통 고래가 남극에서 북쪽 브리즈번까지 이동하며 왕복하는 거리는 10,000km에 이른다. 고래들이 남극지방에서 열대바다인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회유하는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장성한 고래들은 피하지방이 두꺼워 남극의 차가운 바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갓 태어난 새끼들은 극지방의 차가운 수온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열대 지방으로 올라가 새끼를 낳고 내려온다는 것이다.고래를 발견하는 방법첫 번째 포인트에서는 큰 재미를 못 봤지만 두 번째 배가 멈춘 포인트에서는 제법 많은 고래들이 점프하고 꽤 오랜 시간 고래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 넓고 넓은 망망한 바다에서 고래가 있는 곳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소나(Sonar)같은 음파탐지기로 고래를 찾나요?”  “아니요, 저희는 음파탐지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선장의 5%의 경험과 나머지 95%는 그날의 운(luck)입니다.”  웃으면서 대답을 하길래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을 알았다. 물론 선장의 경험이 5%보다는 높을 것이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고래 관찰 크루즈를 운전한 선장들은 시드니 해안선을 다니며, 고래 투어를 안내했기 때문에 고래들이 즐겨 다니는 길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날의 운도 따르는 게 분명 맞는 말이다.  “오늘 크루즈 상황은 어떤가요? 다른 날에 비해 고래들이 많이 나타난 편인가요?”  “글쎄요, 보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지도 않고, 만약 오늘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면 더 많은 고래들을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선장이 배를 세우고 나면 안내자가 둘러보다가 11시 방향을 보라고 알려 주거나 3시 방향을 보라고 알려 준다. 그러면 백발백중 그곳에서 고래가 점프를 한다.   물론 오랫동안 고래를 관찰한 노하우가 있겠지만 고래가 내뿜는 물보라를 보고 발견하는 것이다. 고래가 있는 곳에는 고래들이 숨쉴 때 내뿜는 물줄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혹등고래의 점프를 만끽하다 보니 어느덧 1시간 30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이제 다시 서큘러키로 돌아간다고 안내를 한다.   돌아가는 시간까지 정확히 2시간 코스이다.  안내자의 설명을 녹음하랴 사진 찍으랴 정신없이 챙기다 보니 정작 고래를 충분히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돌아와서 홈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고래 개런티’ (Whale Guarantee)란 표시가 있어 클릭해 보았다. 고래 개런티는 만약 그날 투어시 고래를 보지 못했다면 같은 해 언제든지 다시 크루즈를 탈 수 있는 티켓을 재발행해 준다는 안내였다.   지난 25년 동안 고래 관찰 크루즈의 고래 찾는 성공률은 무려 99%이다. 고래를 가까이서 보기 원한다면 고래 관찰 크루즈를 타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에필로그고래를 볼 수 있는 시드니의 베스트 장소배를 타고 나와 가까이에서 고래를 구경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시드니 해안에서 고래를 볼 수 있는 베스트 장소들이 있다.   첫 번째는 시드니 교민들에게 잘 알려진 장소로는 맨리의 노스 헤드 페어팩스 전망대(Fairfax Look out, North Head, Manly)이다. 망원경을 가지고 간다면 노스헤드의 높은 페어팩스 전망대에서 가깝게 고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추천 장소는 왓슨스 베이, 사우스 헤드의 갭 블러프 전망대(Gap Bluff, South Head, Watsons Bay)이다. 이곳에는 긴 산책로가 있는데 산책도 하고 고래도 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장소이다.  세 번째 추천 장소는 시드니에서 가장 유명한 바닷가로 유명한 본다이 비치(Bondi beach)이다.  본다이 비치 해변에서 왓슨스 베이로 가는 산책길이나 본다이 비치에서 쿠지 비치(Cooge Beach)로 가는 산책길에서 종종 고래들을 볼 수 있다.  네 번째 추천 장소는 팜비치의 바렌조이 헤드랜드(Barrenjoey Headland, Palm Beach)이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혹스베리 강(Hawkesbury River)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피츠워터(Pittwater)의 물길이 있다.   스머글러 트랙(Smuggler Track)을 따라 등대로 올라가면 팜비치와 피츠워터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장관이고 이곳에서 고래를 감상할 수 있다. 부시워킹도 하고 고래도 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다섯 번째 추천 장소는 케이프 솔랜더 드라이브, 커넬(Cape Solander Dr, Kurnell)이다. 교민들에게는 생소하고 처음 들어보는 장소일 수 있다.   위치는 크로눌라(Cronulla)에서 카메이 보타니 국립공원(Kamay Botany National Park)으로 들어가면 솔랜더 곶이 나온다. 이곳에서 산책도 하고 고래를 관람할 수 있다.   한편 이곳은 제임스 쿡이 시드니에 처음 도착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섯 번째 추천 장소는 번디나 로얄 국립공원(Bundeena, Royal National Park)이다. 시드니 남쪽의 캠벨타운 근처 지역에 살고 있다면 고래를 구경하기 위해 북쪽까지 올 필요가 없고 번디나 지역에서 고래 구경을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주소는 67 Beachcomber Ave, Bundeena에 주차를 하고 해안 산책로를 따라 기암절벽도 관람하고 고래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권순형 |본지 발행인  

25/10/2021

코로나 델타변이 사태가 아니었으면, 원래 지난 9월 4일이 NSW주 지방정부(Local Government, or Council) 선거 날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NSW 주 지방정부 선거가 9월 4일에서 12월 4일로 연기되었다.   이번 선거는 코로나 상황을 감안하여 우편투표와 함께 처음으로 온라인 전자투표를 도입했다. 온라인 전자투표 시스템인 iVote 앱을 이용하여 투표를 할 수도 있다. (https://www.elections.nsw.gov.au  참조)   현재 NSW에는 128개의 지방정부(LGA, Local Government Area)가 있으며, 이 가운데 한인 밀집지역으로 꼽히는 라이드 웨스트 워드(West Ward) 선거구에서 한인 시의원 후보 3인이 각 정당별로 나와 도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지난 8월 25일 줌(Zoom)을 통해 라이드시 시의원 후보 3인과 온라인 좌담회를 가졌다. (편집자 주)•참석자 : 김상희 후보 (피터김, 무소속), 송강호 후보 (노동당), 한정태 후보 (자유당)  *가나다순 •사회자 : 주경식 (본지 편집국장)  •사진 : 권순형 (본지 발행인)사회자 : 안녕하세요?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지요.  송강호 : 저는 라이드시 지방선거에 노동당 후보로 나온 송강호라고 합니다. 현재 아내와 7살 된 딸과 함께 버큼힐에 살고 있습니다. 1992년, 한국 나이 15세 때 호주로 이민을 왔고요. 원래는 건축학을 전공해 건축일을 조금하다가 법률공부를 한 뒤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종법률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고 지난 30대 한인회에서 한인회 고문 변호사 겸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한정태 : 이번에 자유당 후보로 나오게 된 한정태입니다. 저도 비슷한 시기인 1993년에 14세 때 이민을 왔고요. 시드니 약대를 졸업하고 이스트우드에서 약사로 7년간 근무를 하다가, UTS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후 현재 라이드 고등학교에서 10년째 과학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에서 2020년까지 부모님께서 하시던 월간 비즈니스 발행인으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시드니 한인회에서 31대부터 33대까지 운영위원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피터김 : 제 이름은 피터김이고, 이번에는 무소속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호주는 1986년에 이민을 왔는데 현재 저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최근에 법을 또 공부해서 얼마 전 졸업을 했는데 지금은 연수 중에 있습니다. 이제 2주 후면 연수가 끝나고 올해 말 정도에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라이드시 부시장입니다.   사회자 : 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라이드 시의원 선거에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떠한 이유로 출마하게 되었는지요? 특별한 동기 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송강호 : 라이드시 시의원에 특정하게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변호사 일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있는데 특히 이스트우드나 라이드쪽에 사시는 분들 가운데 제 고객들이 많이 계세요. 그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오면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때부터 정치에 대해 관심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나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30대 한인회에서 고문변호사 겸 운영위원을 하면서 호주 사회에서 한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저를 추천해 주신 분이 라이드시 지방선거에 출마하라고 권면해 주셔서 제가 흔쾌히 수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터김 : 제가 성형외과 의사가 되어 열심히 일하던 중 건강에 이상이 생겨 쉬고 있을 때, 우연히 2016년경 노무현 대통령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간 노무현과 인권, 그리고 참여정부의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를 계기로 다시 법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앞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각오로 4년 전 시의원 선거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재선을 하게 된 계기는 지금껏 이스트우드 주차장을 비롯해서 제가 라이드 시에서 벌여놓은 일들을 잘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한정태 : 제가 처음에 정치와 라이드 시의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피터김 부시장님이 처음 시의원에 나올 때 제가 옆에서 선거를 돕고, 경험을 같이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정치에 전혀 뜻이 없었는데 그냥 친한 형들이 정치를 하니까 돕다 보니 이나라 정치 시스템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한인회와 한호문화재단, 월드옥타 등 여러 단체장들과 함께 봉사도 하고 코리안 페스티벌 등을 협력해서 개최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행사들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주 양당의 정치인들과 친분도 쌓이게 되었고 그분들도 저에 대해 알게 되면서 2019년경 라이드 자유당쪽에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라이드시 시의원 후보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당 생활도 배우고 시의원 출마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 이번에 라이드시 시의원에 한국인 후보가 3명이나 출마하는 경사가 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 분 모두 다 당선되면 좋겠습니다. 만약 시의원이 된다면 라이드시를 위해 가장 추진하고 싶은 계획을 알려 주시지요.  피터김 : 제가 라이드 시의원으로서 시작해 놓은 일은 많은데 마무리지은 게 많지 않아요. 4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트우드 주차장 완공 사업이에요. 원래 계획으로는 작년에 완공됐어야 하는데 코로나 사태도 있고 다른 변수들도 생겨서 금년 12월이 되어야 완공될 것 같아요. 외부공사가 완공되어도 내부공사도 남았고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도 5층에 완공되면 좋겠어요. 이일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스트우드 한인상가 쪽에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자주 생깁니다. 그래서 홍수에 견딜 수 있는 하수도 공사를 하기 위해 250만 불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올해부터 공사가 시작될 계획입니다. 이 공사도 마무리짓는 것을 보고 싶고요.   그리고 세 번째는 코리안 타운을 만드는 계획을 추진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라이드시 안에 한국인 직원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이스트우드 도서관 증축하는 일도 추진해 보려고 합니다. 그외에 한인축제, 경로잔치, 한인 야외공연 등 이런 일들을 자주 추진하고 싶습니다.  한정태 : 저는 일단 선생이다 보니 차세대 젊은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선생으로서 이미 1세대와 2세대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해서 차세대들이 정체성을 가지고 잘 설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저도 이스트우드 한인상가에서 비즈니스를 했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스트우드, 웨스트 라이드 지역 상권을 좀 더 활성화할 수 있는 대책들과 한인타운이라는 개성이 부각될 수 있는 방안을 세워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인회 행사와 한인가든을 설립할 장소를 모색해서 유치하고 싶습니다. 시드니에 중국 정원, 일본 정원은 있지만 한국 정원이 없기 때문에 꼭 라이드 지역 안에 한국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송강호 : 코로나 때문에 지방선거가 1년 연기되었기 때문에 새 시의원들은 당선되더라도 임기가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당선을 위한 공약보다는 저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인이 많은 다른 커뮤니티인 스트라스필드에는 그래도 플라자나 다른 시설들이 있는데 반해 웨스트 라이드나 이스트우드에는 시설들이 낙후되어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의 소상공인들이 마음 놓고 그곳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이나 여러 가지 환경이 나아질 수 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호주 교민사회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라이드시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이스트우드나 웨스트라이드를 중심으로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과 비전은 어떠신지요?  한정태 : 2016년에 호주 전체 센서스를 했는데 그때 라이드 LGA에 살고 있는 한인 인구 분포가 전체 라이드 대비 8%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올해 실시한 센서스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약 10% 정도로 늘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제 생각에는 소수민족 커뮤니티 중에서는 중국 커뮤니티 다음으로 큰 커뮤니티일 것 같은데 정치계 안에서 한인을 대표하는 리더들이 나와야 하고 정치계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많은 한인들이 지역사회 일에도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라이드 지역 안에서 한인 시의원 후보들이 세 명이나 나왔다는 것 자체가 라이드 지역 안에서 한인들의 입지와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우리보다 더 젊은 사람들이 한인 커뮤니티일에 관심을 갖고 봉사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중간 입장으로 그들을 잘 키우고 격려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강호 : 저도 한정태 후보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제가 30대 한인회에서 일을 했었고, 웨스트라이드 베네롱 라이온스 클럽에서도 일을 했던 경험과 그리고 정치모임에 나가보면 젊은 분들이 정말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인회 어르신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정치계에 한인들을 대변할 젊은이들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한인타운 건설이라는 큰 포부도 좋지만 실제적으로 한인들이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한인 커뮤니티와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을 만드는 일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저희보다 더 젊은 일꾼들을 키우는 것이 제일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터김 : 현재 라이드시 안에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시의원이 되었을 때 한인 사물놀이패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도록 라이드 시 커뮤니티 센터를 빌려 쓸 수 있도록 도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14개 한인 단체들을 소개해서 라이드시 커뮤니티 센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는 한인타운을 비롯, 라이드시 안에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특별한 공간들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또한 라이드 지역 안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 한인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 공간들을 개발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을 위한 공연과 도서관을 증축해서 한인 섹션을 넓히려고 합니다.   지금 한인들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데 라이드시 안에 한인 문화공간을 만들어서 제2의 고향같이 푸근하게 느끼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들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특히 델타변이는 광역 시드니를 락다운으로 몰고 갔고 라이드시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락다운으로 인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바라보는 시각과 라이드시(한인들을 포함) 시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지요?  피터김 : 제가 작년에 라이드시에 코로나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첫 번째, 상가 주민들이 비지니스를 못하니까 렌트비를 내는 게 어렵습니다. 그들을 위해 락다운이 끝날 때까지 렌트비를 유예해 주어야 하고요. 펜셔너들도 어려워요. 그래서 펜셔너들에게 작년에 4백 불씩 올해는 5백 불씩 지원해 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트우드 소상공인들에게 2천 불씩 격려금을 드렸고, 스몰 비즈니스 그란트도 도와드렸습니다. 또한 라이드 카운슬 자산의 빌딩을 빌려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는 렌트비를 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최종으로 했던 행사가 시드니성시화운동본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음식나누기 행사를 했었는데 거기에도 도움을 드렸습니다.  송강호 : 현재 모두가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많은 분들과 얘기도 하고 전화도 많이 받는데 코로나와 관련하여 제정된 법률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한인들이 전화하시는 이유가 이렇게 매일 바뀌고 업데이트 되는 규정들에 대해 잘 모르세요. 그래서 제가 느끼기에는 이런 정보와 규정들이 매일 업데이트되는데 홍보가 너무 늦거나 없더라고요.   그리고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정보가 부족하거나 그런 신청을 하는 게 어려워서 못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제가 라이드 상공연합회 카톡방에도 들어가서 그런 분들을 단체적으로 개인적으로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한정태 : 저는 특별히 상인들이 많이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한인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뉴스도 많이 돌아다니고, 요즘은 이런 정보가 알고리즘으로 인해 한 번 가짜 정보에 노출되면 한쪽 방향의 정보만 받을 수 있는 헛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신을 맞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락다운에서 이제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면 지역상권들을 많이 이용하고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컬 상권들을 이용할 때도 너무 잘되는 가게 위주보다는 어려운 가게들을 찾아가서 이용하고 도와주면 서로서로 상생하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자 :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한인 동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자유롭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정태 : 이번에 라이드시 시의원 후보에 세 명이 나온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셋이 선의의 경쟁을 해서 누가 되든 먼저 정치계에 입문하신 분이 자기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잘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인 동포들께서는 지역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도 해주시고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피터김 : 모두 코로나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꼭 백신들을 맞으시라고 권면드립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희 셋 모두 카운슬에 앉아 정책을 토론하고 의견들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한인들께서 한인 커뮤니티와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송강호 :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 명이 나왔다는 것은 한인들의 입지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이고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을 떠나서 누가 되어도 한인커뮤니티에 경사로 생각되고요. 분명히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번에 세 명이나 시의원 후보로 나왔는데 앞으로 젊은이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한인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정치와 지역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회자 :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줌 인터뷰에 응해 주신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12월 4일에 있을 선거에서 좋은 결과가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07/10/2021

코로나가 삼킨 유명 관광지 사람 발길 '뚝'글/김명동사진/권순형세상이 몇 달 사이에 많이 달라졌다.  마스크로 중무장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마트와 빵집, 약국 등을 제외한 상점과 시설은 모두 문을 굳게 닫았다. 약방이든 슈퍼마켓이든 어딘가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입구에서 QR 코드를 찍어야 한다.   체온계에 이마를 내밀어 열이 있는지 확인받을 땐 심장이 쪼그라든다.   관광객은 물론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이동 제한령 지침에 따라 자택에서 5km 넘어 외출을 위해선 통행증(permit)을 필수로 지참해야 한다. 그러나 통행증을 지참했다고 하더라도 외출이 모두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경찰의 불시검문에 따라 외출사유가 적절하지 않으면 5천 달러의 벌금이 부과된다.  도시 전체가 한산하다. 재난 영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장면이 일상이 됐다.   코로나 여파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디 앤트런스(The Entrance) 지역을 찾았다. 앤트런스는 시드니에서 불과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NSW 주의 대표 관광지 중 한 곳으로 관광과 휴양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코로나19로 봉쇄 국면에서도 기자의 활동재량은 예외적으로 허용돼 NSW주 정부에 여행 등록(COVID-19 Travel Registration, Service NSW)을 하고 직접 취재길에 나섰다.  어쩌면 기억 속, 예전의 앤트런스 지역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코로나 속 현재의 모습을 취재를 통해 자료로 남긴다.   코로나는 딴 세상 얘기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퀸즐랜드 주(Queensland State) 브리즈번까지 이어지는 퍼시픽 하이웨이는 호주의 남북을 잇는 주요 도로이다. 이 길 오른쪽으로 펼쳐진 해안을 통 털어 센트럴 코스트(Central Coast)로 부르는데, 퍼시픽 하이웨이를 따라 빼어난 절경을 지닌 관광지들이 무수하다.   시드니 광역권의 봉쇄조치가 12주째 접어든 지난 9월11일 센트럴 코스트로 향했다. 낮 수은주가 섭씨 30도까지 치솟았다. 이날 본다이비치와 쿠지비치를 비롯한 동부해안가에는 봉쇄조치 규정을 비웃듯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이에 경찰은 순찰 병력을 동원해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 수칙 그리고 봉쇄조치 규정 준수 여부를 감시했다. 본다이비치는 이번 변이 사태가 최초로 발생한 지역이다.   앤트런스 해변가에도 물놀이 나온 수영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확진자가 계속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시드니 사람들의 바닷가 사랑은 참 유별난 듯하다.    펠리컨 먹이 주기  이날 찾은 앤트런스는 썰렁한 적막감이 나돌았다.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나던 유명 관광지였다. 하지만 하늘길이 막히며 관광객도 사라졌다. 평소였다면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로 빽빽했던 식당가도 문을 굳게 닫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면서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을 먹던 방문객들이 모두 모습을 감췄다. 모든 여행지마다 보물 하나씩은 숨겨져 있는 법, 앤트런스에서의 보물은 바로 펠리컨 먹이 주기이다. 펠리컨 먹이 주기는 일 년 내내 매일 오후 3시 30분에 시작된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로 폐쇄됐다.   어떻게 아는지 펠리컨들은 먹이 시간이 되면 하나 둘씩 날아와 자리 선점에 열을 올린다. 이윽고 떼 지어 착륙하는 장면은 장관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탄성과 웃음소리, 비록 먹이를 매개로 한 펠리컨과 인간의 만남이지만 그 모습은 감동이다.   생선 박스가 들어오면 펠리컨들은 눈빛이 변하고 군기 바짝 들어간 군인이 되어 차례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이때 자원봉사자들은 먹이를 주면서 건강상태를 주시한다. 부상당한 펠리컨을 찾아내 치료해주고 부상이 심하면 데리고 가서 입원시켜 치료해준다. 앤트런스에는 낚시꾼들이 많아 펠리컨들이 낚시 줄과 바늘에 자주 부상을 당한다.   펠리컨 먹이 주기는 1979년 크리포드(Clifford) 피쉬앤칩스 가게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짐보스(Jimbo's Quality Seafoods)에서 이어 받았고, 1996년 앤트런스 활성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앤트런스 타운 센터에서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날 오후 3시 30분, 먹이 시간이 되었는데도 펠리컨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몇 펠리컨들이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스트레스 탓일까, 많이 야위어 보였다. 코로나가 단숨에 바꿔놓은 앤트런스의 풍경이 피부에 와 닿는다.  펠리컨들은 매일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왔다. 일각에서는 먹이를 줘서 야생성을 잃는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사람과 새가 어울려 공존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번도 자연과의 친화력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사람도 바로 펠리컨이 내 옆에 날아들어 먹이를 홀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자연에 속하는 존재임을 뜨겁게 자각하게 되리라.   펠리컨과 친구가 되는 그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난 뒤라면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착해져 있을 터이고 우리의 일상도 자연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터이니 말이다.   낯선 곳에 와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  헛기침만 해도  쏘아보는 눈초리  인적 줄어든 거리  사람이 오지 않아 두렵고  사람이 오면 더 두려운 하루하루  ‘백년 동안’의 고독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파수꾼 역할을 해오고 있는 노라헤드 등대(Norah Head Lighthouse) 주변은 깨끗한 에메랄드빛 청정바다와 수려한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다. 경사도 완만하고 기암절벽과 풍광이 아름다워서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앤트런스에서 승용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노라헤드 등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많던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노라헤드 등대 주변은 텅 비다 못해 황량해 보이는 상황이 됐다.   굳게 닫힌 출입문은 쓸쓸함을 자아냈고, 텅텅 빈 주차장은 시간이 멈춘 듯 정적만 남았다. 그 많던 낚시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03년 세워진 노라헤드 등대는 NSW주에서 생겨난 최초의 등대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평면상에서 보면, 이곳에 등대가 꼭 필요한 이유를 금세 이해하게 된다. 노라헤드는 NSW주의 유명한 철강도시인 뉴카슬(Newcatsle)과 시드니 중간쯤에 자리한다.   문제는 노라헤드 마을이 마치 반도처럼 육지에서 동떨어져 튀어나와 있으며, 육지와 연결되는 부분이 마치 병목처럼 좁게 이어지다가 넓게 퍼진다.   노라헤드 앞 바닷길은 시드니와 뉴카슬을 잇는 주요 항로였다. 하지만 노라헤드의 이런 지리적 요인으로 (바다 쪽으로 크게 튀어나와 있는) 예로부터 짙은 안개와 파도가 사나워 선박들은 노라헤드 앞을 운항할 때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NSW주에서 가장 먼저 등대가 설치된 이유는 이런 배경이다.  무려 100년이 넘는 고독 속에서 바다를 지켜온 등대와 등대지기가 머물렀던 코티지(cottage)는 현재 보호시설(heritage)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노라헤드를 찾는 방문객들이 늘어나면서 노라헤드 등대 사무소에서는 방문객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고 등대를 찾는 이들에게 등대지기가 되어보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등대 투어는 주말(토, 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가능하며 투어 소요시간은 대략 30분 걸린다. 또한 학교 방학기간(school holidays)에는 화요일과 금요일에도 투어가 가능하다.   등대 꼭대기까지는 총 96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꼭대기에서 보는 태평양의 짙푸른 바다와 인근의 절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가을이면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이듬해 봄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고래의 이동을 관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다. 언제 문이 다시 열리는 걸까? 아직 기약이 없다.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   롱제티(Long Jetty)로 향했다. 가는 길이 예뻤다. 롱제티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로망의 여행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마주하는 아름다움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인생사진’을 남길 정도로 설렘이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도 다르지 않았다. 쥐죽은 듯 적막하기만 했다.  롱제티는 말 그대로 긴 둑이다. 1915년 투게라 호수(Tuggerah Lake)의 수심이 낮아서 배가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호수 중간까지 3개의 긴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조금 허술해 보이는 다리는 351미터나 된다.   나무다리 위를 걸으면서 호수를 바라보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면서 왜 여길 사람들이 찾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다양한 풍경(마을, 호수, 수로, 바다)을 통과하기 때문에 산책하기에도 좋고, 지붕이 덮인 피크닉 테이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가족끼리 가벼운 바비큐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글거리는 석양에 넋을 잃고 만다.    “검사 받으세요” 문자 한통에 ‘화들짝’  본지 권 발행인이 지난 9월 22일 느닷없이 “코비드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올 때까지 자가 격리하고 혹시 시간이 다르면 이 메시지는 무시하라”는 문자를 통보받고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NSW Health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  상황은 이렇다. 권 발행인은 취재를 위해 Service NSW에 여행 등록을 하고 앤트런스(The Entrance)를 찾았다. 지난 9월 11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오전 11:50~오후 12:20 사이에 앤트런스 Jimbo's Quality Seafoods에서 코비드 양성 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시간에 있던 사람들은 코비드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올 때까지 자가 격리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그곳에 점심을 사기위해 갔었다. 그렇지만 몇 시에 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촬영해 놓은 사진파일을 찾았다. 12시 16분에 롱제티(Long Jetty)에서 마지막 촬영을 하고 앤트런스로 갔으니 그 시간대에는 그곳에 없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그런 후 확인(COVID Safe Check-in, Service NSW)해보니 12시 42분에 체크인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2차 접종까지 마쳤지만 그래도 ‘만약에 감염됐으면 어떡해야 하나’ 하는 걱정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권 발행인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각지도 못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체험하고 나니 더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많이 보고 싶겠지만  봄이다. 파란 하늘, 신선해진 공기, 따뜻한 햇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이런 날씨에 마스크라니, 답답하다. 언제까지 마스크를 써야할까. 길어지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피로감은 쌓여간다. 자영업자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위드 코로나란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확진자 억제보다는 위중증 환자 관리에 집중한다는 방역 체계를 뜻한다. 코로나를 독감 같은 것이라 여기고 궁극적으로는 카페와 식당 등의 영업 제한을 풀고 모임 인원 제한도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백신 접종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난 몇 달간 고강도의 봉쇄에 나선 정부도 위드 코로나로의 방향 전환에 나섰다. 정부는 16세 이상 주민의 70%가 백신 2차 접종을 하면 시드니 등에서 진행 중인 봉쇄를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백신 접종 완료율(9월 24일 기준)은 57%로 10월 중순쯤 이 기준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10월 25일부터 시드니의 학교가 수업을 재개할 전망이다. 식당 등은 학교보다도 먼저 문을 연다. 글레이즈 베르지클리언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리는 “코로나19와 함께 산다는 건 백신 접종이 높은 가운데 조심스럽고 단계적으로 재개방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봉쇄조치 해제 이후 발병이 증가할 경우 부분적으로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부는 ‘코로나 제로’를 목표로 지난 6월 26일부터 시드니 등을 대상으로 봉쇄를 시행했지만 통제 불능 상태가 지속되자 백신 접종을 끌어올리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젠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에 결단까지 내리게 됐다.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  나쁜 일이 지나고 나면   좋은 일이 한꺼번에 오는 일도 있더라고요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  조금만 더 견뎌보자  우리 같이 기다려요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테지만, 인간이 쉽게 지지도 않을 것이다.〠김명동|본지 편집인권순형|본지 발행인

06/10/2021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주경식세계는 지금얼마 전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벌겋게 타오르는 산불 사진과 함께 기도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가 사는 동네 15km까지 산불이 번졌다는 소식과 함께 비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2년 전 호주의 산불이 기억난다. 불과 2년 전인 2019년, 호주에서는 9월부터 장장 6개월 동안이나 꺼지지 않던 산불로 인해 코알라를 비롯 약 10억 마리의 야생동물이 죽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피해액은 천문학적 숫자였다.   지금 델타변이 바이러스로 온 관심이 코로나에 쏠려 있어 그렇지, 북반구의 올 여름은 유난히 다른 해보다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해 때문에 종말론적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서부에 번진 산불은 미국 캘리포니아 경우만 해도 지난 7월 26일까지 무려 5천566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강우량이 줄고, 50°C까지 육박하는 이상 고온 때문이다. 세계 초강국이라는 나라들이 산불을 진화하지 못하고 숲은 계속 타들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과 캐나다 서부에 이어, 그리스, 터키 등 남유럽지역에서도 대규모 산불이 2주 넘게 진행되면서 수천 명의 이재민을 낳았고 ‘불타는 유럽’이라는 기사가 연일 쏟아졌다.   더 심각한 것은 영구 동토라 불리는 시베리아의 산불이다. 늘 나던 산불이지만, 여름 평균 기온이 18°C이던 곳이 올해 최고 기온 39°C에 육박하면서 산불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번졌다.   시베리아 산불은 미국, 캐나다,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산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16만km2 (남한의 크기가 10만 km2이다)의 산림이 잿더미로 변하는 손실을 내었다.   시베리아는 원래 여름이 빨리 오고, 6월에는 눈이 오는 곳인데 작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수많은 탄저균과 나쁜 균들이 나오면서 생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Death Valley)에서는 한낮의 기온이 54.4°C를 기록하는 최고의 이상 기온현상 벌어졌다. 이름대로 이 지역에서는 열사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54.4°C는 열려진 공간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기온이다.   보통 사우나 실내온도가 50-70°C 정도이다. 그런데 이 지역의 한낮의 기온이 54.4°C는 지구상 가히 세계 최고 기온이라 할 수 있다.   어디 이뿐인가? 추운 나라로 알려진 캐나다도 역대급 폭염이 몰려와 캐나다 리튼 지역에서는 6월 30일 49.6°C를 기록해 캐나다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 중동지역보다 더 뜨거운 고온의 이 기록은 어쩌면 수천 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수준의 높은 고온이라는 것이다.   불을 가열하지 않고 햇볕 아래 두었던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뜨리자 바로 계란 후라이가 되는 장면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불볕 더위로 7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갑자기 돌연사하고 10억 마리 이상의 해양생물이 죽었다.   어디 이뿐만인가? 한쪽에서는 이상고온과 산불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이상기후로 인해 쏟아진 폭우로 독일과 벨기에를 포함한 서유럽에서 8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산 사태 ‘천 년 만의 폭우’라 할 정도로 가히 ‘물 폭탄’의 집중 호우가 쏟아져 산사태가 일어나고 제방과 둑이 무너지고 홍수가 일어나는 등 최첨단의 테크놀로지로도 손쓰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서유럽에 이어 오스트리아 체코 등 중유럽까지 번지고 있는 폭우는 피해 복구비만 6조 원을 넘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중국 쓰촨성에서도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인해 홍수가 나서 72만 명이나 집을 잃었다.   이 모든 일은 지난 한 달 사이에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문명과 첨단기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극한의 폭염과 폭우, 대형산불 등의 자연재해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났다.   왜 갈수록 이러한 극한의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것일까?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기후 변화가 있다.  기후 변화의 원인  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서 발표한 평가서에 의하면, “인간은 기후 시스템에 명백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최근 배출된 온실가스의 양은 관측 이래 최고 수준이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류에 의해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 에어로졸, 미세먼지 등이 배출되었고, 경작과 생산을 위해 산림이 훼손되고 있다.   세계 최대 삼림이라 불리우는 브라질의 아마존은 더 이상 ‘지구의 허파’ 노릇을 못 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몇년째 화재와 벌채가 함께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콩과 소고기 세계 최대 수출국인 브라질은 땅을 개간하여 소를 키우기 위해, 벌목 및 아마존 숲에 불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사람들은 더 많은 토지를 농지로 전환하면 생산성이 커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비를 덜 내리게 하는 역효과를 낸다”고 전망한다. 이제 아마존은 더 이상 ‘지구의 허파’가 아니다.   이전까지는 아마존이 지구상의 더러운 공기들을 흡수하여 정화하는 지구의 허파 노릇을 했지만, 지금은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흡수량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재로 인해 아마존에서 이산화탄소가 매년 15억 톤씩 발생했지만, 이 가운데 삼림에 흡수되는 것은 5억 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질수록 전 지구상의 평균 기온은 높아진다.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이산화질소의 인위적 온실가스 배출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이중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산화탄소 배출의 증가는 인간이 사용하는 석유와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문명과 관련이 많다. 결국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생산에 몰두한 삶의 방식과 그로 인한 2차 산업들의 발전으로 인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굴뚝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의 매연을 발생시키는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사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는 산업화 이전의 280ppm에서 2005년 기준 379ppm으로 30% 증가했다.  2021년 5월 조사한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는 419ppm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해 무려 50% 이상 늘어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이산화탄소 농도가 25% 증가하는데 200년이 넘게 걸렸지만, 최근 30년 동안 무려 50%에 도달한 것은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도 메탄가스는 폐기물, 음식물 쓰레기, 가축의 배설물, 초식동물의 트림 등에서 발생하고 이것은 인간의 경제성장과 인구증가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산림을 벌목하는 일은 지구상의 온실가스를 높이는 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2°C 올라간다면  지금의 지구는 산업혁명 이후 지구 온도가 1°C 가 오른 상태이다. 고작 1도 오른 것이 무슨 큰 일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지구의 온도가 1°C 밖에 안 올랐음에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재해와 피해들을 목격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1만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구의 온도는 4°C 변했다고 추정한다. 1만 년 동안 4°C 변한 것도 자연에서는 무척이나 빠른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불과 100년 동안 지구의 온도를 1°C 상승시켰다.   자연보다 25배나 빠른 속도라고 할 수 있다. 기후 학자들은 이대로 나간다면 2050년에 지구온도가 2°C 높아진다고 내다보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2040년에 벌어질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지구의 온도가 2°C 높아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과학자들은 다양한 컴퓨터 기후 모델을 통해 미래의 기후 변화를 예측했다. 이런 모델링 결과를 종합해 볼 때 2050년에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2°C 올라갈 경우, 북극 생태계와 아마존에서 환경변화가 갑작스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는 이른바 ‘티핑 포인트’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육지의 탄소 흡수량 감소, 생물종 멸종 위험 증가, 해양 산성화와 높은 기후변화 속도에 따른 해양 생물 다양성 손실, 기후변화에 의한 작물 생산 변동성 증가, 질병률 증가 등의 위험이 심각할 것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빈곤계층의 물 부족’이다.   이것을 좀더 쉽게 예를 들면, 만약 지구의 온도가 2°C 올라간다면, 북극의 빙하가 녹아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안데스 산맥의 작은 빙하들도 녹게 됨으로 5천만 명이 물 부족현상에 처하게 된다.   남아프리카와 지중해에 물 공급량이 20~30% 감소되어 물 부족 현상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열대지역 농작물이 크게 감소(10%)되어 약 5억 명이 굶어 죽게 된다. 그리고 6천만 명 이상이 말라리아에 노출된다. 홍수로 매해 천만 명 이상이 영향을 받는다. 아마존이 사막과 초원으로 변한다. 해수면이 상승하여 없어지는 나라들도 발생한다. 세계 대부분의 산호층이 죽게 되어 해양생태계가 변한다. 해양이 산화되고 많은 바다 생물들이 멸종한다. 지구의 33%의 생물들이 멸종한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어쩌면 지구 온난화가 가속도를 받아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로 빠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스프링을 과도하게 늘리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지구기온의 탄력성이 상실되어 지금까지의 기후와는 전혀 다른 기후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3°C 올라 간다면 남아프리카, 호주, 미국 서부는 사막으로 변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많은 섬들은 사라지고 낮은 지역들도 해수에 잠기게 되며, 최대 50%의 생물이 멸종한다고 가정한다.  기후 학자들은 지구 온도가 2°C 높아질 시기를 2050년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재앙과 같은 날이 될 것이다.  재앙을 맞이하는 미래세대  2018년 8월 스웨덴 국회의사당앞에서 15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이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우리가 자란 후 이런 재앙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후 매주 금요일 학교를 빠져가면서 시위를 계속했고, 이는 지구 온난화를 염려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9년 9월 23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항공기가 아닌 태양광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환경을 위해 비행기 탑승을 거부하고 영국에서 뉴욕까지 15일간 친환경 요트를 타고 간 것이다.   툰베리는 기자의 질문에 “비행기 탑승을 거부하면 내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는 것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기후 위기가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메시지를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캠페인이 되기 위한 동력이 될 수도 있고요.”라고 답변했다.   또한 툰베리는 각국 정상들에게 “세계 지도자들이 온실가스 감축 등 각종 환경공약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 행동은 하고 있지 않다”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지만 적극적으로 시위를 벌였고, 세계를 상대로 캠페인에 나선 것이다. 지구를 걱정하는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세계가 그녀의 행동에 동참하고 있다.  2050년은 그리 멀지 않은 세월이다. 특히 우리 자녀와 손주들에게는 금방 닥칠 미래이다. 그들이 맞이할 세계가 영화 ‘매드맥스 시리즈’가 보여주듯이, 북극과 남극이 녹아 없어지고 많은 곳이 사막으로 변해 황폐화되었으며, 해수면이 높아져 많은 나라와 도시가 사라지고 질병이 들끓고 물과 식량이 부족해 서로에게 빼앗으려는 세상을 맞이하게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될까?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개인의 노력은 쓸모가 있다  어쩌면 기후변화를 위한 개인의 노력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을 생각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개개인이 하는 노력들은 기업이나 국가적 단위를 바라볼 때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나 하나 운전을 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고기를 안 먹고 채식을 하고, 비닐 사용을 줄이고 쇼핑백을 들고 다니고,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사용하고, 쓰레기를 줄여 나가고 물을 아끼는 이 모든 개인의 행동은 실은 공장이나 기업이나 국가가 하는 일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운동가들은 말한다. 개인의 행동으로 온실가스를 줄이는 노력은 기업이나 목장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행동이 바로 환경을 보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 행동들이 가족과 친구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서 정부와 기업에까지 대책 마련을 할 여건을 조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도 맨처음 그녀 혼자 피켓 시위를 했다. 비록 혼자지만 여러 날을 국회의사당에서 피켓 시위를 한 것과 기후변화에 대한 그녀의 지속적인 행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전 세계가 주목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지속적인 실천이 의견을 형성할 수 있다. 개인의 힘은 미미할 지 모르지만 개인이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고 각자의 삶에서 지속적이고 진지하게 온실가스를 줄이는 노력들을 실천한다면 그 행동들은 주위에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견들은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나라들이 동참할 수 있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지역교회들도 기후 변화와 같은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영성에 관심을 가지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관심을 갖고 지구를 보전하는 일에 앞장서면 좋겠다. 교회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설교나 환경운동과 관련된 성경공부를 함께 하면 어떨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무모함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지구상의 교회들만 앞장서도 지구온난화는 막을 수 있다. 세계의 모든 교단들이 2022년 교단 목표를 ‘교회가 기후변화를 막는데 앞장서자’로 정하고 실천한다면, 그리고 개교회들이 올해 교회 목표를 ‘기후변화를 막는데 우리 교회가 솔선수범하자’하고 따라간다면, 아마도 세계 20억 기독교인들이 동참한다면 분명 지구 온난화는 멈출 것이다.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후 변화이다. 인류는 모두 낭떠러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버스에 함께 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떨어지지 않았다고 자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아차 하는 사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류는 기회가 남아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개인과 교회와 기업과 나라가 모두 함께 노력한다면 아직 인류에게 기회는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우선 나부터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실천해보기를 권면한다. 그리고 지속적이고 진지하게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성에 대한 경고를 가족과 친구와 교회에서 나누자.   이런 작은 노력이 모여 또 하나의 여론이 될 때 낭떠러지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는 ‘기후변화의 버스’는 멈추게 될 것이다.〠주경식|본지 편집국장

25/09/2021

(재)기독교선교횃불재단(명예이사장 이형자)은 전 세계 193개국에 흩어진 750만 한인디아스포라들을 선교사로 세우라는 비전을 좇아 2011년부터 횃불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해 왔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팬데믹 상황 속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들이 대회에 직접 참여할 수 없어 사전녹화 후 온라인으로 스트리밍 방송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여덟 번에 걸쳐 개회해 온 이 대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즉 한인 2, 3, 4, 5세를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의 선교사로 세우기 위한 선교사역이다.   횃불재단은 지금까지 디아스포라 선교대회를 통해 ‘보내는 선교에서 세우는 선교’라는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디아스포라 선교는 앞으로 100년의 선교역사를 새로 쓰게 될 획기적 선교 방식이 될 것이라 믿고 추진하고 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리고 국가 간 이동이 어려운 현재의 팬데믹의 상황에서는 기존의 선교 방식에 더해 새로운 접근이 요청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의 확산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귀국을 했거나 하고 있고, 신임 선교사들은 파송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여러 국내 교회들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선교비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 선교의 내일을 부정적으로 전망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금번 대회는 ‘디아스포라, 그 시작’(Diaspora, the Beginning)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주제에서 보여주듯 디아스포라의 시작은 성경이며, 성경의 인물들을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다루게 된다. 특히 아브라함과 모세, 다니엘, 그리고 바울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설교자들이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금번 대회는 온라인의 장점을 살려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으며, 강사로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경험하고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원로),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김승욱 목사(할렐루야교회), 최병락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디아스포라로서 현지의 한인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미국의 강준민 목사(새생명비전교회)가 저녁집회에서 말씀을 전한다.   또한 미국의 권혁빈 목사(씨드교회), 독일의 이찬규 목사(프랑크푸르트 한마음교회), 호주의 진기현 목사(주안교회),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강 볼레슬랍 목사(타슈켄크 아가페교회), 중국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사역하는 서영희 목사(한중사랑교회), 북한 디아스포라를 섬기는 탈북민 김성근 목사(한나라은혜교회), 복음의전함 대표로 광고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고정민 이사장, 그리고 디아스포라 대회를 기획하고 실행해 온 이경석 목사(기독교선교횃불재단) 등이 주제강의 강사로 나선다. 그 외에 미국, 독일과 러시아, 그리고 키르키즈스탄 등에서 사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랜선찬양과 예배의 순서자로 각각 참가한다.   <선교대회 일정> ·일시: 2021년 10월 25(월)~27일(수) 오후 7:00~9:00           10월 26(화), 27일(수) 오전 10:00~12:00·주제: 디아스포라, 그 시작 (창 12:3)·대상 :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방식 : 유튜브 횃불재단 TV를 통한 스트리밍 온라인 방송  <주요 순서> (오후 7:00~9:00)  - 10월 25일(월): 이형자 대회장, 김승욱 목사  - 10월 26일(화): 강준민 목사, 최병락 목사  - 10월 27일(수): 오정현 목사, 김상복 목사  <주제강의> (오전 10:00~12:00)  - 10월 26일(화): 권혁빈 목사, 서영희 목사, 이경석 목사,                        강볼레슬랍 목사  - 10월 27일(수): 이찬규 목사, 진기현 목사, 김성근 목사,                        고정민 이사장  <힐링콘서트>  - 10월 25일(월): 송정미, 한웅재, 민호기, 지미선, 김동욱  <파송식> 10월 27일(수)·문의: 이경석 목사 (82-10-9025-0201, kslee@torchcenter.org)

25/09/2021

NSW ‘델타변이’ 확산에 봉쇄령 9월 말까지 연장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됐다. 코로나 발생 초기에는 몇 개월만 지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방심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곤경에 빠졌다. 국경폐쇄는 물론 나라 안에서도 이동을 금지하는 봉쇄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맞서고 있다.  호주에서도 코로나19 공포가 커지고 있다. 시드니 광역권도 봉쇄조치가 길어지면서 코로나19의 폭풍 속으로 들어간 모습이다.  NSW주 감염자 계속 급증 이런 가운데 지난 8월 26일 NSW주에서는 신규지역 감염자가 919명이나 무더기로 쏟아졌다. 사흘 연속 이어진 800명대에서 그나마 감소세를 보인 듯 했지만 역대 하루 최다치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전날에는 753명이 추가된 바 있다. 25일 집계된 919명의 신규지역 감염자 가운데 387명이 시드니 서부지역에서, 247명이 남서부지역 주민들로 파악되는 등 감염 위험지역으로 선별된 12개 카운슬 관할지역의 상당수에서 확신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날 사망자도 2명 추가됐다. 이로써 지난 6월 16일 시작된 이른바 시드니 본다이 발 델타 변이 사태로 인한 누적 확진자수는 1만 4천673명으로 불어났으며 누적 사망자수도 76명으로 증가했다.   한편 이날 하루 동안 4만 5천73명이 백신접종을 맞았으며 이로써 25일 현재 NSW주내의 백신접종 회수는 총 614만 3천824회로 집계됐다. 이같은 상황이 장기화되자 봉쇄조치로 델타 변이 확산사태를 차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신속한 백신접종을 통하여 현 상황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호주는 8월 24일 현재 16세 이상 성인 인구 기준 백신 1차 접종률이 53.6%, 접종 완료는 30.9%로 각각 집계됐다. NSW주의 경우 1차 접종률은 60.3%, 접종 완료는 32.2%로 전국 평균치를 앞질렀다.   지역별로는 ACT가 1차 접종률 60.66%, 접종완료는 37.57%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빅토리아 주는 1차 접종률이 51.8%, 접종완료는 30.78에 그쳤다.   전국적으로 가장 낮은 접종률을 기록한 지역은 서호주 주로 1차 접종률이 46.52%, 접종완료는 27.77%에 불과했다.   NSW 주정부를 비롯한 호주 연방정부는 현재 봉쇄조치로부터 ‘해방’되고 국경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성인 인구대비 백신접종 완료목표를 최소 70%에서 80% 이상으로 설정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호주 내의 전염병 전문학자들은 호주의 백신접종 완료가 70-80%에 도달하면 일일 신규지역 감염자 수가 많아도 국경 재개방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호주의 대표적 전염병 연구소인 멜본대학의 도허티 인스티튜트(Doherty Institute) 측은 전체 성인 인구의 70-80%가 백신접종을 완료할 경우 신규 확진자수가 많아도 국경 재개방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연방정부의 국경재개 4단계 계획을 사실상 입안한 도허티 인스티튜트 연구소다. 연방정부도 록다운을 통한 ‘코로나 제로’ 달성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무조건적인 봉쇄보다는 백신접종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스콧 모리슨 총리는 “사람들이 무기한 감금상태로 지낼 순 없다. 어느 시점에선가 기어 변경이 필요하고 이는 백신접종 70%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신규감염자 통계에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백신접종을 통한 다음 단계 진입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구적으로 동굴 속에 머물러야 한다. 이는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가 정해야 하는 어느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반드시 가야한다”고 말했다.  한편 호주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수는 4만 7천8백여 명, 사망자는 989명이다.  봉쇄조치 돌파구 ‘백신 접종’  지난 6월 26일 시작된 광역권의 봉쇄조치가 9월 말까지 5주 연장됐다. 이미 8주가 지난 상태인데 현재의 NSW 하드 록다운이 최소 13주로 연장되는 셈이다. 신규 지역사회 감염자가 가장 많이 나오고 있는 시드니의 12개 ‘우려대상 지자체’를 대상으로 8월 23일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5시까지 통행금지조치도 시행되고 있다.   통행금지 적용 대상지역은 △블랙타운 △캠벨타운 △켄터베리-뱅크스타운 △컴벌랜드 △페어필드 △조지스리버 △리버플 △파라마타 △펜리스 일부지역 △스트라스필드 △버우드 △베이사이드 등이다.  12개 지자체 안에서 거주하며 일하는 어린이집과 장애인시설 근로자들은 8월 30일까지 백신접종을 완료해야 한다. 지자체 밖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은 근로자들은 1차 백신을 접종했거나 아니면 작업장에서 15분이 소요되는 신속 코로나 검사장에서 검사를 받고 일을 해야 한다.    NSW 주민 중 적절한 이유 없이 우려대상 12개 지자체를 방문하다가 적발되면 벌금 처벌과 동시에 귀가 조치되며 14일 자가 격리의무가 부여된다.  12개 관할지역에 대해 8월 23일 월요일부터 적용되는 조치는 △통행금지(저녁 9시- 익일 오전 5시까지. 필수 근무자, 비상구호, 의료진 제외) △야외운동 하루 1시간으로 제한 △소매점인 경우- 온라인 주문 후 물품 수거만 가능(묘목점 및 화원, 사무용품점, 철물점, 건축자재점, 조경자재점, 농사물품점, 애완동물점) 해당분야 기술자는 해당분야 숍 방문허용 △모든 시험 및 기타 교육 그리고 기술개발 관련활동 등은 전면 온라인화(HSC 제외. 세부내용 추가발표 예정)  NSW 주민들은 집 밖에서는 산책 등 운동(1시간 제한)을 할 때를 제외하고 항상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한다.   침묵하지 못하고 함부로 한 말  부끄러워 마스크로 입을 가리웠습니다  감사없이 살아온 낯 뜨거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거짓과 때론 위선으로 알아볼 수 없는  두 개의 얼굴이 돼버린 모습  마스크로 가리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말하지 않고 보지 않는 것 이것은 그나마  코로나 시대의 영성입니다텅 빈 시드니 거리를 걷다  지난 8월 중순 적막함마저 느껴지는 시드니 거리였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나던 화려한 시드니의 거리 모습은 평온과 고요가 자리하고 외부에 무심한 듯 보인다. 하늘길이 막히며 외국인 관광객도 사라졌다. 신축건물들도 공사가 중단되었고 오페라 아이다 공연도 취소되었는데 홍보 깃발만 아직도 바람에 휘날린다. 어떻게 텅텅 빈 도시가 될 수 있는지.  록스 거리도 다르지 않았다. 왁자지껄 사람들이 붐비고 맛있는 먹거리가 늘 즐거운 록스 거리였다. 거리에는 카페와 클럽, 맛집들이 즐비했다. 클럽에서는 매일 밤 라이브 음악으로 떠들썩했고, 노천 카페에서는 사랑하는 이와 커피를 마시며 초코렛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들의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록다운 상태의 상점가는 모두 문을 굳게 닫았다. 굳게 닫힌 상점 셔터와 셔터를 부여잡은 자물쇠가 쓸쓸함을 자아냈다.   록스의 활기는 사라졌다. 코로나가 이대로 계속 장기화 된다면 어떻게 될까?  시드니 불꽃놀이 최고 인기 관람지라는 카힐 익스프레스 전망대에는 외롭게 노숙자 몇 사람만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다. 그나마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에 신기하기도 했다.   서큘라 퀴 항구 옆 작은 잔디공원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여인도, 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는 노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거리의 악사 예술가들도 갑자기 사라졌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면서 감자튀김을 먹던 젊은이가 모두 모습을 감췄다. 갈매기 한 쌍이 먹이를 던져주던 그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서큘라 퀴 선착장 활기도 사라진지 오래다. 설렘은 사라졌고 개찰구는 텅 비었다. 코로나 이전엔 대형 유람선들이 세계 각국에서 몰려왔다. 풍요로움이 넘쳤다. 록다운 된 서큘라 퀴 선착장은 시간이 멈춘 듯 정적만 남았다.   오페라 하우스도 또 다른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다.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오페라 관람을 위해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서둘러 걸어가는 모습도 사라졌다. 광장은 관광객은 물론이고 시드니 시민들도 사랑하는 야외공원이다.   평일에도 일과 후 삼삼오오 모여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날린다. 롤러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시원하게 가로지르기도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거리낌 없이 애정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복잡한 곳, 평소였다면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로 빽빽했던 식당가였다.  그러나 오페라 하우스 광장은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개점 휴업 상태다. 순찰을 돌던 경찰관이 쓴 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는 우리들의 삶에서 일상을 빼앗아버렸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었고, 잃은 것, 잊힌 것도 많았다. 각자 집에 갇힌 사람들은 이따금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가 며칠 동안 먹을 식료품을 구입하는데 그 짧은 외출에도 여러 차례 불편함을 느낀다.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문을 나서지만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와 마주치게 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약방이든 슈퍼마켓이든 어딘가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입구에서 QR코드를 찍어야하고 체온계에 이마를 내밀어 열이 있는지 확인받아야 한다.   이때 섭씨 37.3도 이상이 측정되면 코로나19 의심환자로 분류돼 격리 치료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매번 체온을 잴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든다. 장보기 무섭게 서둘러 집으로 피신한 후에는 집을 소독하고, 손을 씻고 또 씻는다.   스쳐가는 감기였으면 좋겠다.                                 교회에 가고 싶다 NSW주의 록다운으로 시민들의 외출이 엄격히 제한됐고 일체의 집회가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22일(일) 저녁 시드니서부 블랙타운(Blacktown)의 한 교회에 60여 명이 예배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성인들 외 아이들도 이날 밤 예배에 참석했는데 성인 30명에게 1인당 1천 달러씩, 교회에 5천 달러의 벌금통지서가 발부됐다. 블랙타운은 감염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우려대상 12개 지자체에 포함돼 가장 강력한 규제가 적용 중이다.   크라이스트 엠베시 시드니교회로 밝혀진 이 교회는 QR 코드판도 설치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에 가고 싶다. 예배당에 들어가고 싶다. 성가대와 기악부의 찬양을 듣고 싶다. 장의자에 앉아 두 손 모으고 눈 감고 기도하고 싶다. 교회 식당 설거지를 끝내고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선교회 회원들과 커피 한잔 하고 싶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교회학교 아이들이 보고 싶다. 잠깐 들러 기도라도 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것도 안 된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록다운 규정에 따라 모든 종교집회에 대중 참석이 금지돼 있다.   그러나 현장예배가 멈추었다고 신앙이 멈출 수는 없다. 각자 혹은 가족단위로 가정과 일터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신앙생활은 계속돼야 한다.   미국 성공회 사제이자 대학 켐퍼스 사역자로 활동해온 티시 해릿 워런은 저서 ‘오늘이라는 예배’에서 사소한 하루가 어떻게 거룩한 예배가 되는지를 세밀히 기록했다. 이를테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침대 정리를 하면서 세례를 생각했고, 남은 음식을 먹으며 말씀과 성례전을 묵상했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친구와 통화하면서 상대방을 축복하는 공동체를 경험했고, 운전 중 교통체증을 버티면서 서두르지 않는 하나님을 떠올렸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다면 모든 순간은 예배로 변할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를 못 드린다고 속상해 할 일이 아니다. 기도와 말씀묵상 그리고 섬김, 기뻐함과 감사 등의 훈련을 통해 코로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성전은  텅빈 공간으로  문이 닫혔습니다  그럼에도   허물어진 가정 제단  다시 쌓게하신 은총  이단은 속임과 거짓으로  성소에 둥지를 틀 때  우리는 외식에 취해  배부르며  해야 할일을 잃고 안주했습니다  코로나19는 펜데믹되고  세상은 단절과 결핍으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  더욱 어두워집니다  주여!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또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 아버지 집에서  서로 뜨겁게 손잡고  목이 쉬도록 찬송하고 싶습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십시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소멸하라”  그리고  “교회여 울지말라   너희의 목자인 내가 있다”  교회와 성도들의 고통은 날로 커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신앙을 걱정해 발을 동동 구른다. 최근에 나 나름대로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 합창곡을 들으면서 사무치는 마음을 달랬다. 잠시 속으로 기도했는데 근래 들어 가장 강렬하고 간절했던 것 같다. 주기도문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했는데 울컥해서 더 잇지 못했다.   우리는 두 다리로 걷는 게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아프지 않고 햇살 한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잊고 산다. 교회에 가고, 지인들과 저녁을 먹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이었는지 코로나가 닥친 후에야 새삼 느끼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전염병의 공포로 꽁꽁 얼어붙었다. 지금 소중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 따뜻한 위로가 희망이 되어 우리는 내일을 다시 살아간다. ‘극복’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평범한 삶을 복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연결의 힘을 믿는다. 힘든 현실에 자꾸만 당신이 생각나는 하루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다.  늘 그랬듯이.〠글|김명동 본지 편집인사진|권순형 본지 발행인

20/0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