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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묻는다. “영사관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선거하라네요…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투표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지요?” 이심전심이다. 그러나 이런류의 고민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지독하게 평안해 보이는 호주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조만간 상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룰 태세인 연방정부를 봐도 ‘투표할 맛이 싹 사라졌는데 누굴 뽑지?라는 고민이 이어진다. 더구나 이번에는 연방상원투표법도 개정된 덕에, 주요정당 외의 당에 투표함으로서 기존 정치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힘들어질 것 같다. 이런 고민에 대한 가장 흔한 반응은 ‘기독교 당’을 만들자는 반응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호주에서나 이런 당들이 잘해야 동성애문제나 중절 문제 같은 개별 이슈에나 ‘기독교적’ 목소리를 낼 뿐이다. 도리어 우리 생활을 실제로 지배하는 경제나 이민 같은 복잡한 사안에서는 다른 ‘덜’ 기독교적 당들하고 다르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 낀 많은 지도자 중에는 교계 안에서 조차 존경받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점일 것이다. 또 다른 반응은 당에 상관없이 ‘로비’를 선호하기도 한다. 호주의 ‘크리스찬로비’ 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신경을 좀 쓰는 분위기다. 그러나 막상 주요 교단들은 이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고, 대변하는 정체도 분명치 않다. 인종차별법과 동성애결혼법 논쟁이 끝나면 어떤 이슈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할지 궁금해진다. 막상 교계 안에도 교단 경계를 넘어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반공 보수의 보루인 한국에서조차,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항상 존재해 왔다. 이점에서 정당이나 로비같은 방법으로도 이런 다양성을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가 국가권력을 보는 성경 자체의 관점 때문에도 그렇다. 성경에는 바울류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권위’라는 개념과, 요한류의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사단의 대리자’같은 이미지가 공존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정치를 ‘긍정’과 ‘부정’ 속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 둘이 다 섞여있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회색지대라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개인과 공동체가 각자가 처한 현실과 이슈에 따라,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새롭게 성령 앞에 내어놓고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점에서 기독교인의 정치권력에 대한 반응은 항상 시대적 상황적 필요에 영향을 받고, 개인 신앙수준을 드러내는 자리이자, 하나로 강제할 수 없는 다양성이 당연시되는 영역이다. 여기에 깔린 가장 ‘최소’ 원칙은 현재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끊임없이 검증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문에 나는 투표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표를 거부하는 식으로 체제를 부정하기 보다는, 체제 안에서 지지나 비판을 드러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런 장황한 이야기보다는 이 한마디가 더 설득력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선거에 참여하는 성실성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김석원 목사(로뎀나무아래 교육선교회), dave.swkim@gmail.com)

  24/03/2016
  로뎀나무 아래서

신학을 공부하자는 말만 들어도 이 글을 읽지 않기로 단념한 분도 있을 것 같다. 신학 그러면 부담스럽고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일반신앙생활 하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하면 자동적으로 목회자의 반열에 들어가는 특별한 자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요즘에 신학 공부하는 분들이 꽤 많다. 이런 저런 이론들을 알고나서는 그동안 내가 믿은 내용이 좀 유치하게 느껴지고, 조금 뒤부터는 다른 모든 사람의 신앙수준도 한심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물론 성장통일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신학 공부가 필요하다. 여기서 공부하자고 외치는 신학은 위에서 말하는 그런 신학이 아니다. 일반신앙생활과 상관없는 신학, 일반인들은 근접할 수 없는 상아탑 속에서나 이해되는 이론들을 모아놓은 지식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신학도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신자가 자기의 신앙을 위해 반드시 씨름해야 할 신학이 아니다. 여기서 ‘꼭 공부해야 할’ 신학이란 ‘나의 신앙을 꼼꼼히 점검하고 반성하고 정리하는’ 신학이다. 기독교 신학은 원래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신앙 내용의 설명’, 그리고 ‘이미 초대교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잘못된 신앙 내용에 대한 반박’에서 출발했다. 이런 신학은 교회가 가진 신앙 내용에 대한 질문과 답을 구하는 과정이다. 이런 신학은 복음과 성경읽기를 통해 기대하는 것처럼, 더 체계적으로 나를 돌아보며 죄를 더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붙들고, 내 삶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도록 돕는다. 이런 신학은 내 신앙을 시작하게 만든 신앙고백의 내용을, 더 분명하게 이해시켜주고, 내 삶에 어느 부분에 씨름할 것이 빠졌는 지를 비춰지고, 이것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인정케 하고, 하나님께 더 의지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누가 신학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모든 성도는 나름대로 ‘이런 신학’적 훈련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정도로 충분한가? 그리고 우리 주변의 신학들로 이런 필요로 제대로 채워지고 있는가? 실제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신학은 이런 신학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우리가 말하는 신학은 이제 ‘신학’의 중심주제가 아니라 ‘변증’이라는 또 다른 부가 학문의 주제로 떨어진지 오래다. 실제로 근대 신학의 주류는 기존의 교회와 개인의 고백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도전하는 방향에서 주로 이뤄져 왔다. 물론 나름대로 그 안에서도 인간사회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자신과 존재에 대한 더 깊은 혼란과 의심이 더 오래 우리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자신과 교회를 돌아보는 비판의 혜안을 허락할 때도 있지만, 내 힘에 의지해 발버둥치는 신(新) 바리새인으로 우리를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신학은 날카로운 비판력이나 지적 만족은 있지만, 우리가 신학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유 자체를 허무는 신학이다. 이점에서 자기파괴적이다. 이 때문에 전문 신학자 중에서도 신학이 더 많이 교회와 신자들의 고백과 삶 가운데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모든 학문세계가 그런 것처럼, 학교와 현실이 너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는 아직 소수고, 현실은 현실은 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너무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해 있는 장면이 더 흔하게 목격된다. 그래서 교회는 더 단순한 교육만으로도 안주하고, 교회는 전문가 훈련에 더 관심이 쏠린다. 아직 넘어야 할 괴리가 너무 멀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학 공부하기를 포기해서는 곤란하다. 우리 신앙문화 속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왜곡과 변명이 구석구석 쌓여있다. 그러기에 그냥 믿고, 그냥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은 왜곡과 착각이 우리의 사고와 삶을 지배한다. 교회도 개인도, 제대로 신앙을 내 삶에 적용되고, 이웃과고민하고, 온 세상 전체에 답이 되길 원한다면 기본적인 것만 단순히 ‘믿고 치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내 신앙내용이 정말 무슨 내용인지를 잘 점검해 보고, 혹시 오해가 없었는지 돌아보고, 그 내용을 제대로 내 삶에 적용할 방법을 더 찾아보고,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와 의미를 더 고민해며, 실천을 격려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지금 일반적으로 교회가 하는 수준의 신학 공부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많은 학교들이 해온 방향의 신학 공부로는 답이 되기 힘들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신학 공부가 필요한 때다. 김석원 목사(로뎀나무아래 교육선교회, dave.swkim@gmail.com)

  28/01/2016
  로뎀나무 아래서

최근 한 학자와 호주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자신이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의 출신이 어디었을 것 같은가? 뉴질랜드 출신의 백인이었다. 억양이 그렇게 불편했을까? 물론 그의 인종차별 경험은, 아주 미묘한 수준이어서 시비를 가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비호적인 사고 방식과 배경으로 인해 암암리에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대화 속에서 공감은 되면서도, 이 사람이 과연 우리 같은 비백인, 비영어권 출신들이 매일 경험하는 차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실제로 호주는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나라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현실은 다양한 형태로 흔하게 경험된다. 지나가는 차속에서 빵빵거리며 “아시안 고우 홈!”을 외치는 시골의 십대나, “중국인이 너무 많아 호주가 이상해졌다”며 화를 내는 백인 노인만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다. 은근히 “황인종들은 원래 잡일이나 해”란 표정으로 얌체같이 일거리를 맞기고 도망가는 동료나, “너는 우리 쪽 분위기를 잘 몰라”라는 눈길로 나보다 덜 성실한 백인 동료를 승진시키는 보스에게서도 인종차별이 의심된다. 지극히 ‘반차별적인’ 합법적 절차 속에서도 반드시 끼게되는 주관적 판단 속에서 인종차별의 의심을 살만한 일들은 수없이 벌어진다. 그것을 더 많은 학위와 노력으로 메꾸려고 할수록, 또 그 틈을 비집고 성공한 미담들을 뉴스가 떠들어 댈수록,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더 불쾌해지기까지 한다. 어떤 경우든 대부분 인종차별의 현실은 객관적인 능력이나 시시비비가 아니라, 내가 가진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특징을 이유로 차별을 가하는 모든 상황에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현재의 상당한 수준의 반차별법 제재와 법적 규정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그런 짓이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을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어떤 이 말대로 누구나 ‘자기가 편한 사람’과 더 말하고, 더 일하고, 더 놀고 싶은 욕구 때문일 수도 있다. 호주도 ‘섬나라’인만큼 전형적인 폐쇄성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소소한 인종차별 사례와 다 싸울 만큼 열정적인 사람도 많지 않다. 어쨌든 참는 게 쉬워 보인다. 그러나 이건 내 문제에서 끝날 일은 아니다. 다음은 세미나에서 만난 2세 청년의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호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회사에 가니 나를 다르게 취급했다. 아니 다르다고 강요당한 것 같았다.” 한 2세 전문직 종사자은 “직장에서 승진할수록 호주인들간의 네트워크의 장벽이 너무 컸다. 남아있어도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 결국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친구들이 결국 다시 한국어를 배워가며 한국과 한국 사회 주변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문화국가 호주’라는 이미지가 바래져 보인다. 결국 강력한 모국의 힘을 더 동원할 방법을 찾아 우리의 자존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유태인들처럼 끼리만 똘똘 뭉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쪽이라면 무자비하게 싸워야 하나? 혹은 이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털기 위해 ‘대화’하고 교류하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때인가? 현재를 둘러보면 이중 뭐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과 유럽 할 것 없이 경기가 나빠지는 분위기 속에서 목소리가 커져가는 극우 인종차별주의가 남의 일 같지는 않다. 천진난만하게 영어로 깔깔거리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김석원 목사(로뎀나무아래 교육선교회) dave.swkim@gmail.co

  26/05/2016
  로뎀나무 아래서

설교가 은혜가 안된다는 한탄이 자주 들린다. 내 설교를 듣고도 그런 소릴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다... 은혜가 안된다. 깊이가 없다.... 설교가 주업인 목회자들엔 무서운 이야기다. 정작 무슨 뜻으로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 자주 지적되는 것은 설교가 어디서 들은 것 같다, 베낀 설교 같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저작권이 강조되는 시대에 심각한 지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베끼는 몰염치에 빠지진 않아도, 설교가 뭐가 그리 새로울 것이 있을까? 특히 한국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수교회들은 ‘새로운 사상’이나 ‘성경 외 이야기’를 설교에 끼는 것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 여부가 기준이 되긴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불평은 주로 표현방법과 적용 내용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적용은 나중에 또 다루겠지만, 표현방법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동시에 기술과 훈련 문제다. 적어도 ‘공적 발표자’의 역할로 그 자리에 선 만큼 목소리, 단어선택, 내용표현방법 여러 가지 면에서 ‘공적’ 발표자에 걸맞는 수준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고 설교로 월급을 받기엔 좀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여기선 목회자의 자성과 노력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다른 비판은 성경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현장 설교들을 듣다보면 그런 문제가 자주 발견된다. 설교를 성실히 준비하는 목회자라면 다루는 주제나 본문의 핵심을 잘 추려내고, 이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 지 비교해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둘러보는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설교 내용은 한쪽에 치우치거나 설익은 반쪽짜리 결론을 피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는 예화와 적용문제다. 여기서 가장 흔하게 지적되는 것은 너무 교회이야기만 한다는 지적이다. 하나님의 응답하면 교회사역이 커지는 이야기, 하나님의 역사하면 선교지 이야기, 하나님의 도우심하면 교회일하다 겪은 기적적인 도움들... 이런 식이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경험이긴 한데,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목사나 직장과 가정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하며 교회일에 매달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남의 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교역자 태도문제일 수 있다. 평소에 교인들의 ‘삶’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심방하며 대화한 사람이라면, 또 신학서적 뿐 아니라 세상의 뉴스와 사정에도 관심을 가지며 살아왔다면 예화가 교회 안에만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교회 안에서 들리는 설교에 대한 불평, 강단의 위기는, 목회자가 마땅히 거쳐야 할 전문가로서의 훈련 미숙, 성실성 문제, 그리고 관심의 폭 문제이다. 이를 위해 목회자 자신부터 대화기술을 향상시키고, 깊은 연구와 고민을 소홀히 하지 말고, 보다 실제적이고 다양한 삶의 현실에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설교의 질이 모두 목사책임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옳지않다. 이를 위해선 교인의 도움도 많이 필요하다. 설교를 연구, 준비할 시간에는 설교자를 보호해서 방해받지 않도록 좀 도와주어야 한다. 설교에 대해 계속적인 피드백도 매우 중요한 공헌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설교가 설교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작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설교자라는 제한되고 부족한 도구를 이용해서, 하나님이라는 무한하고 완전한 대상을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소리도 나오는 것이다. ‘설교는 듣는 사람의 태도 문제’라고.... 그래도 여전히 목회자의 짐은 무겁다. 짐을 싸들고 기도원으로 가야할 때인가? 나를 충분히 내려놓고 있는가? 하나님만이 온전히 드러나시도록 충분히 주의하고 있는가? 고민이 많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31/03/2015
  로뎀나무 아래서

내가 자주 듣는 방송 중에는 인텔리젼스 스퀘어라는 토론 프로그램이 있다. 원래 영국에서 시작된 ‘옥스포드식 토론 프로그램’이 미국에 이식된 내용이다. 프로그램은 주로 한 문제를 놓고 두세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두 개로 나뉘어져 한번씩 찬반 주장을 내세우고, 서로의 도전에 답을 한뒤, 청중들의 투표로 우열을 가린다. 필자가 최근에 주목하게 된 대상은 ‘하나님이 없어도 종교는 필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여기서 알랑 드 보통이라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작가가 등장한다. 그는 종교가 던지는 예술적 영감, 개인이 받는 위로 만으로도 종교는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 한다. 종교적 건물이나 의식,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적 공헌에 근거해서 종교, 특히 서구에서의 기독교는 여전히 유지될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었다. 이에 반박하는 내용들은 주로 두가지로 나왔다. 하나는 리차드 도킨스 류의 ‘종교는 사회적 갈등과 지적인 마비’를 조장하는 악한 도구라는 공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재 종교, 특히 서구의 기독교는 조직과 전통에 치여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로 인도하는 데 장애가 됨으로 종교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었다. 한마디로 신앙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기성 종교가 가진 문제점을 보면서, 아무리 멋진 건물과 의식, 전통으로 꾸며져 있다 해도, 본질을 잃은 종교는 아예 없어지는 편이 낫다는 식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면 가장 기성종교, 특히 서구 기독교의 존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도리어 가장 하나님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문제는 우리네 신앙이 실제로 알랑 드 보통식의 수준에 머무를 때가 많다는 점이다. 조금만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성도간에 갈등이 생기고, 사역에 부담이 생겨도 손을 훅훅 털어버리고 떠나기 일 수다. 내 필요, 특히 실제적인 필요나 편의에 방해가 되면 그동안 보여준 선한 표정들은 사라지고 멱살을 잡고 자리를 떠나기도 한다.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신앙의 본질 때문에 그러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흔히 드는 이유가 관계인데, 나같은 교역자들에겐 가슴 아픈 일이지만, 목회자와의 관계를 이유로 교회를 지키는 사람은 도리어 드물다. 좁은 교민사회 안에서 수년간 한 교회에서 만든 대인 관계들을 다시 새로 시작하기가 너무 번거롭고 피곤하다는 생각에, 아무리 설교에 문제가 있고 사역이 잘못 돌아가도 그냥 무관심으로 ‘내 할 일’만 한다. 양쪽도 건강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알랑씨가 잘 모르는 것은, 하나님이 예상 외로 훨씬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도전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의외로 투명하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점도 그렇다. 한편으로는 종교가 각 개인들에게 이 하나님을 만나고 더 깊은 관계를 하는 데 도움이 안된다면, 단연코 거부하고 문제로 삼아야 한다. 동시에 종교가 가지는 기능을 단순히 자기 편의나 위로로 보는 관점은 결국 그것이 줄 수 있는 더 큰 가능성을 놓치게 된다. 이점에서 결국 전도의 문제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출발점이 되지 않고서는 종교생활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목적과 수단이 제대로 관계하고 있는 지를 돌아봐야 할 때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18/06/2015
  로뎀나무 아래서

누구나 자연재해를 만나면 깊은 두려움을 느낀다. 몇 년전 일본 오사카의 한 고층 호텔에서 자는 데, 새벽 5시쯤 강도 6-7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에 심취해 너무 재미있었던 여행 일정이었지만, 단 한번의 지진 경험 때문에 다시는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끼익거리면서 오른쪽, 왼쪽으로 추처럼 움직이는 방에서, 이미 상상만으로도 나는 끔찍한 죽음을 맛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급하게 챙겨 입고 일층으로 내려오니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일본인들의 반응이었다. 이 정도가지고 왜 그리 호들갑이냐는 듯이.. 그래도 일본 동북부 해일사태에 관한 특집을 보면 그런 일본인들 조차, 자연재해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해도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속절없이 작아지고, 당연히 분노하는 신의 존재를 떠올린다. 어느 시대, 어떤 종교를 믿든 세계 어디에서나 자연재해는 신의 분노, 징벌로 받아들여진 것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네팔 지진을 보고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이 네팔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모양이다. 무너진 집 사이에서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대하면, 그런 잔인한 소리를 함부로 할까 싶은데.. 문제는 이런 반응이 이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도 그렇고, 일본의 동북부 해일사태 때도 들리던, ‘전혀 새롭지 않은’ 소리라는 점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강단을 사유화하여, 영적 권위를 명목으로 맘대로 떠드는 문화가 만들어낸 사고라는 주장부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잘못된 신학 때문이라는 지적까지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전자의 경우는 필자 역시 철저하게 공감하는 문제이지만, 안타깝게도 후자의 경우에는 인간의 죄성에 대하여 충분한 성경적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 언론쪽에서 이번 사태가 단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든 재해라는 점을 점점 더 많이 지적하는 분위기다. 최근에 극심한 혼란에 빠진 네팔의 정치상황과 카스트제도로 분열된 국민, 그리고 그동안 전혀 지진 내진설계나 있을 수 있는 재해앞에 안전문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인구를 늘려온 행정.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거에도 있었던 지진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인명과 물질적 피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무원들의 부패와 비리, 도시집중화의 과정 속에 탐욕의 문화가 끼여들지 않을 리가 없기에, 네팔 사태는 적어도 ‘인간의 죄악’으로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인간의 창조자의 지혜와 창조 원리를 부정하고, 자신이 우주의 주인행세를 하면서부터 시작된 갈등과 모순, 파괴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성경이 말할 뿐 아니라 인간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를 망각하고, 인간 개인과 능력에 기초한 ‘주인행세’는 결국 자기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뿐 아니라, 이웃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도 끊임없는 상처를 가져다 주고, 자연계에서도 착취와 오용, 탐욕이 만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종종 범죄나 폭력부터, 환경재해나 자연재해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이 원인이 된 재앙’ 속에서도 경험된다. 이 점에서 모든 재해 속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특정 사람들의 행위나 반응에 연관을 시키는 것은,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죄의 속성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장 누구를 괴롭히지 않아도, 우리가 신는 신발 속에는 방글라데시의 8살짜리 아동노동착취가 포함될 수 있고, 우리가 아내를 위한 반지 속에는 중부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핏빛 다이아몬드’가 끼여져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당장 우리가 그 신발을 신다가 발이 부러지는 식으로 처리하지는 않으신다. 그렇다고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 성경은 세상의 퍼진 ‘죄의 문제’는 모두 다 바로 바로 죄의 파국적인 결과를 경험하게 되지는 않지만, 결국 마지막 때의 평가를 통해 책임을 지도록 하실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마지막 심판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점에서 네팔 사람들이 교회를 가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는 식의 주장은, 무례할 뿐 아니라 무식한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죄의 본질,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기생각과 마음에 더 지배되는 인간의 모습 때문일 수 있다. 이점에서 네팔의 위기는 네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기 보다는, 정신 못 차리고 사회 흐름을 그대로 답습하며 욕심과 경쟁, 자랑과 허영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경고일 가능성이 더 높다. 교회를 가고 있든 안가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21/05/2015
  로뎀나무 아래서

시드니를 중심으로 이민교회가 삼백여 개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좀 됐다.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으니 짐작이지만 그런 분위기는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언제부터인가 목회자들 모임dp 나가면 내가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진 것도 그렇다. 이제는 가봤자 뻔하지 싶은 모임조차 다시 나가볼까 싶어질 정도니까. 그동안 기독교회 특히 개신교회의 숫자는 주로 조롱거리였다. 가장 창업비용이 적게 드는 한인업종이란 조롱투부터, 자기 교회 안에 교인을 가두어 놓는 반사회적 조직이라는 날이 선 비판도 들린다. 사실 개신교회의 다양성은 태생적인 운명이다. 신앙의 중심을 베드로부터 이어진 조직 교회에 두는 가톨릭과 달리, 성경을 통해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가르치는 것이 개신교회다. 그러나 성경 해석도 성령 감화도 개인, 사회, 역사적 상황에 한 목소리만 나오기 힘들다. 덕분에 개신교회는 다양한 계층과 그 필요에 매우 기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헤비메탈 매니악도 좋아할 만한 모임부터, 그레고리안 성가를 고집하며 중세로 돌아간 것 같은 자리까지...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기업 같은 교회로부터, 탈북자나 외국노동자인권을 위해 뛰어다니는 인권단체같은 교회까지... 다양하기 이를 때 없다. 그렇다면 호주 한인교회 삼백교회 시대는 장점이 없을까? 두 가지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는 더 다양한 사역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쟁이 심하면 규모 아니면 특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물론 더 눈에 띄는 것은 규모의 경쟁이다. 안식과 자녀교육을 핑계로 큰 교회로 옮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의 동기가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막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교계를 이루는 다수의 교회들은 그런 ‘큰 교회’가 아니다. 특히 새롭게 생기는 교회들은 남과 다른, 분명한 ‘성격’, ‘특징’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가르치는 내용이든 교회 운영방법이든, 전에 비해 더 분명한 목적, 더 뚜렷한 대상, 더 분명한 원칙을 강조할 것이다. 덕분에 뭘 누굴 위해서 하는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았던 교회 사역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절박하지만 속으로만 품고 있던, 그간 소홀히 되었던 내 영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기회가 늘지 않을까? 둘째는 교회 연합활동도 더 늘어날 것이다. 교회 연합이 더 쉬워졌다는 말은 아니다. 교계를 대표하는 기존단체들의 대표성 시비도 전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내 말은 교회가 많아질수록 이들을 엮는 종횡 연대 시도와 성공률도 더 늘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신학교나 전문사역팀의 출현도 그렇고, 교단들이 늘어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점에서 호주한인교계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은 더 힘들어질지 몰라도, 작은 단위의 연합은 전에 비해 더 흔해질 것이다. 더 다양한 연합활동으로 교회 안에 갖혀사는 운명에서 좀 더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물론 속편한 소리나 한다고 욕 먹을지 모르겠다. 현실 속의 삼백교회 시대는 더 많은 윤리 문제, 더 시끄러운 갈등으로 이미 넘쳐나고 있다. 다양성을 누리고, 연합 기회가 느는 것도 아직은 현실이라고 하긴 힘들다.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더 자질구레한 그룹’으로 나누어질 뿐, 세대와 계층을 연결하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은 더 찾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연합 속에서 더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더 큰 실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회는 항상 문제뿐 아니라 기회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런 기회를 만들 주도권이 나에게도 있을 수 있음도 잊지 말자. 귀찮다고 가만있지 말고 더 다양한 사역, 특화된 사역에 관심을 더 가지고 시도해 보자. 좀 힘들더라도 작은 규모와 영역 연합 기회를 만들어 신앙의 폭을 조금이라도 넓혀보자. 그러면 신앙생활 하기가 확실히 더 즐거워질 것이다. 김석원 목사(로뎀나무아래 교육선교회, dave.swkim@gmail.com)

  25/02/2016
  로뎀나무 아래서

처음 호주신학교에서 공부 할 때가 기억난다. 매번 맨 앞자리에 앉아서 눈을 부릅뜨고 들어도 강의의 반은 놓치던 그 때 말이다. 옆자리에 앉은 친절한 호주친구가 자신의 노트를 보여주지만,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의 필체여서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결국 혼자서 씨름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남이 1시간이면 다 읽을 논문을 난 서너시간을 붙들고 앉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지만 고난은 훈련과 성숙을 가져온다. 덕분에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고, 어지간한 강의는 어렵지 않게 핵심을 파악한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다. 그러나 학업과정에서 가장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공부의 어려움 자체가 아니었다. 도리어 내 의견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무시되는 분위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국말로 하라고 하면 그냥 그 자리에 끝낼 것을 영어로 어렵게 엮어 내야 하는 것도 큰 숙제였지만, 그 보다는 내 의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는 상대편을 보면 무시당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인지 더 기분이 나빠졌다. 실제로 호주친구들 중에서는 나를 도와줄 때는 아주 친절한데, 논쟁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너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같은 태도를 보이는 인간들이 없지 않았다. 나중에 호주단체나 교단에서 일하면서도 좀 더 미묘한 방법으로 같은 태도들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면서 속상한 적이 많았다. 물론 실제로 내가 잘 모르고,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문제도 많겠지만, 그런 것에 해당되지 않는 것 앞에서 아시아계를 무시하는 뿌리깊은 태도가 자꾸 눈에 띄기 때문이다. 호주생활이 더 익숙해지고, 영어가 늘면 늘수록 '미묘하게' 이런 모습을 흔하게 발견하기에, 이민생활이 쉽지는 않다. 다행히도 이러한 도전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훈련의 일부였던 것 같다. 나를 겸손하게 하시고, 또 그들의 교만을 보면서 내 모습을 반추하게 하시는 지혜로 말이다. 동시에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내가 옳거나 분명히 내 의견을 정리해서 표현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은 아님을 배운다. 상대의 선입견, 뿌리깊은 문화적 분위기, 거기다 각 개인이 매일 만나는 다양한 경험들이 어우러져, 대화는 항상 '창조적'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호주에서 사는 '다문화의 경험'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인도한다. 그래서 이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가끔이라도' 드는 모양이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31/03/2015
  로뎀나무 아래서

한국 국회의원 선거가 해외에 있는 우리같은 사람까지 놀라게 했다. 지역과 세대를 기반으로 지지세가 철옹성이 갔던 여당이 제 2당으로 내려앉고, 욕만 먹고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 같던 야당이 1당이 되고, 여전히 뭐가 ‘새 정치’인지 알 수 없는 당이 입법부의 캐스팅 보드를 쥐게 되었다. 덕분에 1, 2당에서는 ‘누구 덕’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가지고 논란이 계속되고, 2당의 삼분지 일도 안 되는 3당이 1야당 역할을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느라 시끄럽다. 이들 당 내부만큼이나 외부에서 이번 현상을 해석하는 목소리가 여러가지다. 이번 선거는 한국사회 기득권층쪽에 서서 국민 다수의 이익을 무시하는 여당에 대한 심판이었다고도 한다. 호남에서 기득권층의 특권을 누리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궈내지 못하는 기존 야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일부 날카로운 분석가들은 기성 언론에 대해서 여론의 심판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들의 조장해 온 내용도 별로 먹히지 않았고, 이들의 여론 평가마저도 정확하지 않았다. 덕분에 언론뿐 아니라 투표자조차도 모두가 놀라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언론이 입을 맞춘 듯 침묵하는 것도 재미있다. 한국 개신교 일부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몇 개의 ‘기독당’을 만들어 정치참여를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도 많은 개신 교회들은 주로 여당을 지지하는 편이라 이번 선거 결과를 기뻐하고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성도 중에도 현재 기득권층, 한국 정부와 여당에 대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고, 시드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번 선거를 통해 가장 긴장해야 할 대상에는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정당들만큼이나, ‘교회’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일반 대중의 정서나 눈높이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보수적인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정치관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도 생각보다 크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이번 선거가 아니더라도, 현장 교회 좌석의 다수를 차지하는 하얀 머리의 수만 봐도, 시간이 갈수록 교회가 국민을 골고루 관계하고 설득하지 못하고 있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나마 토착 조직력이 큰 힘을 발휘하는 국회선거에서조차, ‘동원’이라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교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분들의 기대와는 달리 앞으로의 전망은 더 매우 암울하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사실 다른 데 있다. 비례대표 투표결과를 앞에 두고 1석을 목에 걸고 통성기도 하는 ‘기독당’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사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간절한 기도가 무시당하는 현실에 시험이 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참여 과정에서 들어간 엄청난 자원들이 어떤 ‘명분’으로 동원되었을까? 기존 여야와도 특별히 다른 것이 없는 정책들(물론 정책이 있는 영역 자체도 매우 적다), 거기다 여전히 사회전체가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현실상 미국과 호주 같은 곳에서 이슈가 되는 동성애문제, 이슬람 종교 같은 것도 아직 법을 움직일만한 이슈가 아니다. 겁만 줘도 이런 저런 정당 지도자들이 모두 나와 ‘항복 선언’을 하는 분위기에서, 왜 교회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요즘 한국교회가 먹는 욕이나 기독당 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면면을 봐서는 사회정의나 부패척결이 관심거리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걸까? 예수님도 몰랐던 정확한 종말의 시간표를 이분들만은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동안 한국교회가 보여준 대로, 돈이나 권력 같은 실제 힘을 가져야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 물질주의적 맹신이 반영된 결과는 아니었을까? 조금이라도 그렇다면, 그 맹신으로는 교회는 아마 계속해서 이번처럼 망신을 당할 것 같다. 신앙의 눈을 보면 현실은 심각한 영적 위기 속에 있지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싸우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다. 예수님 때의 ‘열심당원들’이 믿었던 것처럼 권력을 잡아서 풀 수 있는 이슈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얼마나 많은 ‘자칭 기독교인’들이 권력을 이용해 뇌물이나 받고, 자신과 주변 이익집단이나 챙기며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 왔는가. 도리어 나는 이런 상황이 진정한 기도의 힘을 비웃는 분위기나 만들까 걱정이다. 나는 이런 상황이 복음이 던지는 자기갱신의 부르심이 교회 안팎에서 더 안 들리게 될까 걱정이다. 나는 이런 상황이 약자와 강자 모두를 포함한 죽어질 모든 영혼에게 던지는 성경의 도전을 가릴까 걱정이다. 불행히도 내 걱정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이번 선거 결과가 별로 즐겁지 않다. 김석원 목사(로뎀나무아래 교육선교회) dave.swkim@gmail.com

  21/04/2016
  로뎀나무 아래서

요즘 교회예배에 가면 사도신경을 하는 곳이 하지 않는 곳보다 많다. 필자는 침례교 출신이기 때문에 어렸을 적에는 아예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초대교회의 원형회복'에 남다른 집념이 있는(!) 침례교회들은 신약성경시대 이후에 더해진 신앙고백류들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때 개혁주의적 설교로 유명한 존 파이퍼가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사도신경을 배척하고 보다 더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적이 있는 것을 보고 일갈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들 지도자들은 사도신경을 거부함으로서 교회가 오랜기간을 통해 혼란과 이단의 공격에서 사수한 복음의 본질을 도리어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도신경은 성경 자체가 말할려는 내용을 보다 뚜렷하게 보여주는 역할, 더 나가서 성경을 왜곡하려는 일부의 노력을 막기위한 '꼭 필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는 교회사를 통해 나왔던 건강한 신앙고백이나 신조들은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되는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을 무시하다가 그 당시에 성도들이 빠졌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기 쉽상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영적 겸손이자, 기독교가 그동안 거친 경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경고로 들린다. 실제로 성경 자체는 방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흐름을 잡고, 핵심을 읽어내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때문에 '성경으로만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그리 '명확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단들이 성경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성경을 이해하는 바른 기준의 필요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중요성은 그런 '거르기 수준'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사도신경은 교회가 동방정교, 카톨릭, 이후 개신교와 다양한 교파로 갈라지기 이전에 만들어진 가장 기본적인 '공통 신앙고백'이다. 이점에서 우리가 많이 서로 강조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믿음의 형제자매로 인정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점에서 사도신경은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운동)을 하는 쪽에서 매우 중요한 연합의 도구로 이해된다. 우리가 역사적 신경들을 없는 듯 대하고, 사도신경마저 홀대하는 사이에, 어쩌면 성경에 대한 읽는 기준도 같이 흐려지고,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이어주는 영적 연대감도 사라지고 있는 지 모른다. 이 속에서 성경은 갑자기 특정 개인이 주관적으로 받은 영감으로 무자비하게 난도질되고, 기독교의 교파들은 마치 다른 종교처럼 서로를 대하며 서로에게서 배워야 할 것에 귀를 닫을 때가 많다. 가끔이라도 우리네 예배에서 사도신경이 같이 고백되어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교회마다 교단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집에 관심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현대교회의 현실에서는 쉽지 않겠지만...?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31/03/2015
  로뎀나무 아래서

한국인들은 음식뿐 아니라 언어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매우 독특한 취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여러 가지를 먹어도 김치를 먹지 않으면 뭔가 맹맹하다. 아무리 영어를 잘 알아들어도 한국어로 이야기해야 속이 편하다. 외국인 친구와 열심히 놀긴 하지만 뭔가 빈 자리가 있다고 호소한다. 막상 한국에 있으면 김치만 먹거나, 한국어를 유달리 사랑하거나, 한국문화를 특히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으면서 그런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한국이란 울타리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민족이라고 그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프리카에서 10년이 넘도록 사역했다는 선교사를 만나 봐도 여전히 사발면 선물에 눈이 반짝거린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의 영적 필요 역시 유별나다. 교회조직, 설교양식, 사역방향까지 한국인은 따로 교회를 세워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분위기를 초기 호주교계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돌아온 한 선교사는 1970년대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이 따로 한국교회를 만들겠다며 도움을 청해오자 난색을 표했다. 기존 교회에서 조화하며 있으면 되지 왜 따로 하겠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결국 ‘영어 때문에 잘 섞이지 못하는 아내’ 핑계에 밀려 호주최초의 한인교회가 만들어진다. 이제 한인교회는 교회수로도 호주 최다, 규모로도 최대의 비영어권 교회가 되었다. 호주에서도 다른 언어권 교회가 그전에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거의 유일한 성공담이었던 호주장로교회안의 중국교회는 철저하게 호주주류교계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자라난 경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무관심이 중국 교회의 자생력을 키워줬고, 지금은 교단안에서도 수 뿐 아니라 영적 영향력도 상당하다. 이곳 출신 사역자가 호주 교회를 섬기는 수도 늘고 있고, 기존 사역도 왕성하다. 그러나 옛 버릇을 바꾸기가 어려운 듯, 이들은 교단 안에서 별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들이 내는 상회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다. 아마도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는 데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 있는 것일까?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이-삼세대가 주류된 상황인데도 이들은 호주주류교회로 통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만의 교회들, 다시 말해 ABC (Australia Born Chiese) 교회는 날로 왕성해지고 있다. 물론 정서나 언어도 철저하게 영어권이다. 그러나 관계나 정체성은 자기만의 그것이 강하다. 이들 사이에 종종 발견되는 백인들은 대게 중국인들과 결혼했거나 기성호주문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여기에 끼지 못하는 ABC들도 대게 특정호주교회에 몰려있다. 자기만의 정서적 공감대를 어떤 식으로든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호주한인교회의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묘한 영적 교만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교회다. 묘한 영적 교만이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세계사의 특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선택하셨다는 생각이다. 근거가 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한국교회는 제 3세계출신 교회답지 않게 매우 자신감이 강하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동업이나 동역이 잘 안되는 이유기도 하지만, 어쨌든 다들 대장이 되고 싶어 한다. 호주주류교회에서는 목사도 성도든 성에 차는 대장이 되기 힘든 까닭에도 한인교회로 모인다. 물론 이것은 기성호주교회 일부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백호주의나 기성체제의 공고함 때문이기도 하기에, 우리쪽 탓만 하거나 우리만 변하면 된다는 식의 답은 답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아마도 2-3세대가 가도록 계속해서 독립교회로 남고, 또 독자적인 해결방법과 독자적인 사역을 더 선호하는 교회로 남을 확률이 크다. 이를 통해 호주교회들이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신선한 도전도 많이 나올 것이다. 한 호주교회사가의 전망대로 ‘21세기에는 호주기독교의 새로운 생명력을 집어넣는 일이 한국교회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필자 역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끼리 잘하고 그것가지고 남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상관없이, 한인교회는 우리가 모이는 힘이 문화적인 편안함이나 욕심에 중심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사회심리학적 결과지만, 신앙의 원리는 내어주고 섬기고, 자신의 편리를 희생하며 다른 이들에게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이점에서 이민교회의 구성논리와 신앙의 본질은 항상 긴장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그렇게 슈퍼맨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우리의 편의와 본성에 부합하게 되겠지만, 결국 신앙의 성숙은 그것과 어떤 식으로 싸워나가고 극복하는 가에 달려있게 된다. 이점에서 한인이민교회의 가장 큰 숙제는 생존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본성을 신학적 소명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달려있게 될 것이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31/03/2015
  로뎀나무 아래서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는 현실을 깨우는 경종이었다. 9.11사태로 드러나듯이 테러의 위협이 일반생활의 현실이 되어버린 현대서구사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중동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지금 내가 마시는 커피 한잔, 신나는 축구 경기와는 상관없을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왔다. 최근 들어 시리아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프랑스만의 문제, 일종의 자충수로 취급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예라고 말하기엔 아무래도 꺼림직하다. 이미 여러 테러사건으로 24시간 경계태세에 있었던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아무런 걱정없이 떠들고 놀 수 있다던 콘서트장과 축구장에서 끔찍한 살육이 일어났다. 아주 평범해야 정상인 사람들에게서 아주 평범해야 정상인 삶들이 방해를 받았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안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이 불가능해진 현실을 일깨워줬다. 아마도 지난 주일에는 많은 교회 강단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으리라. 그런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 현실의 책임을 ‘과격해진 이슬람’에게 돌리며 이들에 대한 ‘성전’을 외쳤을까? 얼핏 몇몇 교회 이야기만 들어봐도 이제 닥칠 이슬람의 위협에 대한 경고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것을 가지고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도는 나쁘지 않다. 어차피 이번 일이 없어도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명이니까. 그러나 일부에서는 종말론적인 톤으로 이슬람의 융성과 이에 따른 기독교와의 갈등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주문한다. 주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을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 할랄마크가 있는 식품 보이코트에 더 나서라고 외친다. 이들의 정치적 진출을 꺾고 기독교 문명을 지켜야 한다며..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보면 이들이 공격하는 서구사회는 기독교 문명이라고 말하기엔 기독교와 너무 상관이 없다. 몇 주 전까지 언론을 뒤덮던 동성애 합법화 물결이 이것을 보여주지 않은가? 더구나 서구사회에 대한 공격을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는 것도 억지다. 서구인들이 그동안 중동에 한 짓들은 별로 기독교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랑스 테러의 뿌리에는 이슬람 자체의 문제보다 이들을 대하는 더 차가운 현실들이 존재한다. 프랑스 내 이민자들의 사회융합 실패, 계속되는 빈부차와 젊은 세대의 경제적 소외 그리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팔레스타인에서의 불의한 학살과 갈등….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아마도 지금처럼 자포자기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일들… 경찰을 늘리고 감시를 강화하고 시리아에 폭탄을 더 뿌리는 것은 뿌리는 그대로 두고 가지치기로 전세를 바꾸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전에 많은 시도들이 그랬듯이 확실히 실패할 시도가 될 것이다. 더구나 당장 우리 옆동네에 무슬림 친구들이 살고 있는 호주 같은 곳에서 경찰력을 강화하고 혹은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무슨 결과를 가져올까? 이럴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전’을 외치며 기독교 문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나서는 것이 성경적인 태도일까? 결국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려면 미국처럼 각자가 총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는 것 외에는 답이 없을 것 같다. 그럼 곧 무슬림보다 더 평범하게 생긴 이웃들이 그 총을 들고 우리네 학교에서, 우리네 공원에서 또 총질을 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우리 얼굴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면서 ‘아시안 고우홈’을 외치면서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깃털처럼 가벼운 여론의 흐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호전성은 이미 많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도 보여주는 것처럼 균형을 잃은 종교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모습이다. 회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근본적으로 더 호전적인 종교라고 할지라도, 이들의 호전성을 자극하고 공격함으로써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반항아나 폭력적인 아이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가? 인내와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교육학적 지혜가 간절해지는 때다. 문제 자체를 시비하기보다는, 그 아이의 문제를 만들어낸 뿌리의 상처를 싸주고 치료해주고 기대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지혜가 사실 교육학적 지혜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포기할 만한 대상, 폭력으로 자신을 못까지 박은 인간들을 향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회복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전쟁과 적대가 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19/11/2015
  로뎀나무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