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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너무 유명해서 따로 소개가 필요 없다. 반지하에 사는 백수 가족 기택네가 가족사기로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 집에 들어갔다가 겪는 일을 그린 영화다.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국내외 많은 상을 수상했고 관객들과 비평가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 양극화와 빈부격차라는 세계적 보편적 주제를 음모와 반전, 살인 등, 매우 강렬하고 흥미 있는 스토리로 전개한다. 영화 ‘기생충’은 너무 유명해서 따로 소개가 필요 없다. 반지하에 사는 백수 가족 기택네가 가족사기로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 집에 들어갔다가 겪는 일을 그린 영화다.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국내외 많은 상을 수상했고 관객들과 비평가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 양극화와 빈부격차라는 세계적 보편적 주제를 음모와 반전, 살인 등, 매우 강렬하고 흥미 있는 스토리로 전개한다.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는 ‘봉테일’(봉준호 감독의 별명)다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깊은 이해가 숨어있다.‘기생충’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빠른 전개와 흥미 있는 스토리로 인해 눈을 떼기 어렵지만 시종일관 불편하고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대충 덮고 외면해왔던 현실을 다시 들춰보는 고통을 겪게 된다. 기택의 딸 기정의 대사처럼 “검은 상자(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이다.  왕, 귀족같은 계급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가 계층을 나눈다. 기택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박사장과 같은 부자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가고 이는 영화 제목처럼 기생충에 비유된다. 영화에서 빈부격차는 수직적 구도로 시각화된다. 매우 높은 언덕의 박사장 저택과 끝없이 아래로 내려와야 만나는 저지대의 기택네 반지하집의 대조적으로 배치된다. 박사장 집은 눈부신 햇빛이 가득하고 폭우와 같은 재해에도 별 피해가 없는 멋진 집이고, 기택의 집은 볕이 잘 들지 않고 습기차고 벌레가 많으며 폭우에 모든 물건이 침수되는 집이다.자본주의에서 계층은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나눠진다. 부자인 박사장은 기택에게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위계층을 향해 선을 긋는 것이다. 자신의 소유,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를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이 선은 부자와 빈자 뿐 아니라 빈자와 극빈자 간에도 존재한다. 영화에서 빈자를 대표하는 기택네는 극빈자 근세와 문광 부부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고 기택의 아내 충숙은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문광을 발로 차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게 만든다. 선을 긋는 것은 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자기 삶에서 밀어내려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영화에서는 계층 간의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 ‘선’을 넘는 상황설정으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데 여기에 사용된 중요한 소재가 냄새다. 기택네와 근세의 몸에 배인 지하의 습한 냄새, 찌든 냄새 등이 박사장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오고 이에 대한 박사장의 경멸과 무시가 기택의 잠재된 분노를 일으키면서 스토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하류층의 일방적 ‘기생’이 아니라, 서로 함께 사는 ‘상생’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언뜻 보면 기택네가 박사장 가족에게 의존하며 사는 듯 하지만, 문광이 갑자기 해고당한 후 박사장의 아내는 쌓여가는 집안 일로 인해 어쩔 줄 몰라 한다. 박사장네도 남의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레위기에서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3:22)” 라는 말씀은 우리의 사유재산 안에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해 놓으신 부분이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나만의 영역이라고 선을 긋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선 안에도 다른 사람들의 영역이 남아있다. 잠언에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대할 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이 영화의 가장 큰 탁월성은, 비슷한 류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자본주의사회의 문제를 특정 계층때문이라는 식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기택네 가족은 박사장의 집에 들어가 일하기 위해 거짓말, 위조, 음모와 사기 등을 저지르고 기존의 운전기사나 집사를 거짓으로 누명 씌워 쫓아낸다. 박사장네가 캠프를 떠난 빈 집에서 파티를 벌이고 물건을 파손하지만 도덕적 고민이나 죄책감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기택네 가족은 박사장의 집에 들어가 일하기 위해 거짓말, 위조, 음모와 사기 등을 저지르고 기존의 운전기사나 집사를 거짓으로 누명 씌워 쫓아낸다. 박사장네가 캠프를 떠난 빈 집에서 파티를 벌이고 물건을 파손하지만 도덕적 고민이나 죄책감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문광은 빚쟁이들을 피해 지하실에 숨어 사는 남편 근세를 위해 음식을 훔치고 때로는 남편과 함께 빈 박사장 집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자기 집처럼 즐긴다. 잠든 박사장 아내를 무례하게 손뼉으로 깨우거나 외부인에게 마치 자신이 집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집자랑을 하면서 은근히 박사장 가족을 무시하기도 한다. 불리한 상황에선 충숙을 언니라고 부르다가 상황이 유리해지자 돌변해서 기택네 가족을 무시하고 욕하며 경멸한다.박사장 부부는 언뜻 예의 바르고 세련되고 순진하며 착해보이기도 하지만 충숙의 인상적인 대사처럼 사실 “부자니까 착한거다”. 아내 연교는 기우에게 과외비 일부를 빼고 주면서 이전 과외비보다 더 넣었다고 속이고, 박사장은 남이 자신의 선을 넘는 것은 불쾌해 하면서 자기 아들의 생일파티를 위해선 업무의 연장이라며 기택에게 역할을 강요한다. 근세의 냄새가 자신이 그은 선을 넘었을 때의 표정은 그가 속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얼마나 경멸하고 무시해왔는가를 보여준다. ‘기생충’엔 선인도 악인도 없다. 단지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가 손해볼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과도하게 방어하거나 공격하며, 자기 중심적인 도덕관념으로 행동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담겨있을 뿐이다. 등장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가족만은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이는 가족이 자기의 확대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 사랑은 자기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의 근본은 시스템보다 그 속의 사람들에게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도 결국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근본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혁명이 일어나 빈자가 부자가 되고 부자가 빈자가 되어도,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나 심지어 공산주의가 되어도 문제는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기독교의 원죄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기중심성의 원죄가 표현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원죄를 극복하기 위해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방어, 자기중심, 자기애에서 벗어나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에 비로소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익숙한 사회를 낯설게 만든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며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영화이다.이창일 리뷰어

17/11/2021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7) 마지막 기독교 세계관이 내 삶에 스며들게 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세계관은 복음과 성경 전체 흐름에 대한 현대적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변화, 기독교화의 핵심은 이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들려지고, 나눠지고, 확인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바로 성경 전체 이야기고 기독교 세계관의 주제이기도 하다. 바돌로메우가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은 다양한 세계관을 담은 이야기들로 덮여있다. 이 시대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접하고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도 이상한 세계관에 끌려다니기 쉬운 상황이다. 이런 유혹에 자신을 지키는 것은 먼저 자신의 세계관을 잘 정립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번 그런 강의를 듣거나, 설교로 도전을 받았다고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이후에도 무의식적으로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내 생각을 인도하는 삶의 습관이 될 수 있도록 자꾸 이야기하고 나누어야만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 한 구절이나 일부 만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고 광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다. 다시말해 단순히 노아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하나를 가지고 다룰 수 없으며, 성경전체를 엮어 이야기할 때만이 표현될 수 있다. 다시말해, 창조, 타락, 구속의 전체 흐름으로 게속해서 이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자주 이야기하고, 새롭게 이야기하고,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호주에 사는 한인들은 비교적 더 나은 입장에 있다. 호주 기독교안에는 이에 도움이 되는 좋은 유산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신학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바로 그 것이다. 이 운동은 성경을 조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으로 보는 가운데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전체 흐름을 강조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설교해 왔다. 미국과 한국에서도 최근들어 성경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어쨌든 호주 안에서는 훨씬 오래된 시도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문화가 있음에도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기회 낭비다. 호주 사회가 오랫동안 거쳐온 세계관 전쟁은, 이제 이민자들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도 성경의 전체 이야기, 기독교 세계관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의 창조, 타락, 구속 이야기를 세미나든, 성경묵상 시간이든, 구역예배든, 성경공부든, 설교든, 가정예배든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자꾸 시도해야 한다. 더 깊고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하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길 기원한다. 교육에서 가정의 역할을 회복하라 우리 시대의 세번 째 도전은 우리가 분별의 능력을 갖추는 훈련을 하고, 성경의 큰 그림을 계속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환경’ 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교육과 변화를 원한다면 좀 더 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육학자들은 이러한 교육을 위해서는 가정과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생각해 보면 아주 상식적인 답이다. 아무리 학교에서 윤리 과목을 잘 가르쳐도, 이를 실천하게 하는 것은 시험이 아니다. 도리어 이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분위기, 까먹을 때마다 자꾸 주지시켜 주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는 사람의 존재다. 이런 학교, 교사가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우리 시대에 좋은 교사를 찾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교육을 학교에서 한 지 200년도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 기대는 너무 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학교나 대학은 그 문을 연지 천년이 넘었다지만,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교육이 주로 이뤄진 곳은 따로 있다. 바로 가정과 지역공동체다. 어쩌면 산업사회 때문에 붕괴된 가정과 지역사회때문에라도 학교가 생기고, 학교가 더 강화되어 왔고, 또 그 기대를 저버리는 일에 다들 이렇게 화가 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교육의 위기는 원래 교육을 했던 장이 무너진 때문이지, 단순히 학교 때문이 아니다. 물론 지금의 가정, 지금의 지역사회 상태로는 교육적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 때문에 먼저 가정과 지역사회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가정 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나누고, 서로 많이 대화하며, 같이 예배하며, 서로 관계해야 한다. 이러한 비전은 신명기 6장 4-9절의 쉐마, 특히 6절,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에 잘 나타난다. 교육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 회복은 가장 단순한 결단에서 시작된다.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경험을 듣고, 이를 성경적인 지혜로 걸러주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 관계의 확장, 가정 관계를 돕고 격려하고 지원하는 장소로 교회가 바로서야 한다. 결론 세계관 운동에 대한 몇 가지 실천 계획만으로도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확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싸움은 보기만큼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을 읽어보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믈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세속화의 위협, 세계관 전쟁의 현실은 영적으로 바로 깨어있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분별력을 제대로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 지 몇 가지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시도들이 다 성공한 것도 아니고, 항상 잘해 온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맥빠지고, 속상하고, 힘들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싸움에 나설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도 이 싸움의 결론이 이미 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복음의 승리말이다.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분별, 복음, 가정의 회복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한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04/04/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6) 지금 해야 할 일 1: 선한 구조, 잘못된 방향 읽어내기 세속화의 도전 앞에서 우리의 반응은 도망이 아니라 분별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분별의 도전은 예수님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 나오는 소금과 빛 비유를 잠시 살펴보자. 13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여기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뒤,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빛과 소금으로 나서도록 도전한다. 이와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 누가와 마가복음을 보면, 초점은 ‘제자의 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본문은 조금 다른 뉘앙스가 눈에 띄인다. 소금과 빛의 일하는 ‘현장, 배경’을 언급하는 것이다. 소금은 썩는 것 사이에서, 빛은 컴컴하기 짝이 없는 어둠 속에서 역할을 발휘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피해 도망다니는 빛, 썩은 것을 피해 우리끼리 모여있는 소금이 아니라, 어둡고 썩은 곳 사이에서 역할을 하는 자다. 이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이 말하는 ‘분별’은 단순히 나쁜 것을 파악해서 잘 도망다니자란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본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 때 좋다고 ‘평가’하셨던 원래의 창조 ‘구조’입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자연세계 뿐 아니라, 남녀가 서로 만나 이루는 결혼, 인간의 뛰어난 능력으로 만드는 문명, 정부, 정치, 음악, 미술 등도 포함된다. 그러나 창조의 또 다른 측면은 ‘방향’이다. 인간의 죄는 창조의 구조가 가진 ‘방향’을 하나님을 반대하는 쪽으로 틀어 놓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이 가진 수 많은 장점, 도구, 제도들을 더 파괴적으로 몰아왔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힘입어 하나님의 창조 구조를 다시 구해내는 것, 이를 거룩한 방향, 하나님의 방향으로 바꾸시는 성령의 역사에 같이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창조 세계를 볼 때, 두 가지를 같이 볼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아무리 악한 것, 아무리 눈쌀을 찌뿌리게 하는 세속적인 방향 속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선한 구조를 놓치지 않는 눈이다. 동시에 아무리 그럴듯한 껍데기, 괜찮아 보이는 유행, 더 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거룩하게 장식된 것이라고 할 지라도, 정말 그 방향이 바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능력은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능력을 키우는 노력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1) 먼저 세상의 것 속에서 숨어있는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예를 들어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문화나 상업적 음악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있는 보편적인 음악성, 창조성, 아름다움, 기술적 수준 같은 것을 분별해 누리고, 또 우리도 잘 개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훈련은 특히 그동안 도망을 주로 답으로 삼아왔던 근본주의적 경향의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무조건 기독교라는 뜻이나 글자가 안붙었다고 해서 거부하고, 도망다니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당연하지만 현실을 지배하는 ‘잘못된 방향’을 분별하는 능력도 더 갖춰야 한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영화나 유행, 혹은 기독교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것들이라도 할 지라도 그 안에 숨어잇는 물질주의, 탐욕, 성적쾌락, 착취 같은 반기독교적 가치들을 찾아내고, 이 것들을 걸러서 버릴 수 있도록, 영적 비판력을 갖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도 필요하지만, 이를 분석할 수 있는 꾸준한 시도와 이를 통한 자기만의 노하우 축척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나눌 동료나 모임의 존재도 중요하다. 창조 구조를 재발견하고, 죄의 방향을 비판하는 눈을 가지는 것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선한 구조와 악한 방향은 너무 오랫동안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눈을 가지도록 자꾸, 생각해보고, 고민해보고, 격려해주고, 시도해 봐야한다. 이를 통해 참다운 분별의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해야 할 일 2: 성경의 큰그림을 더 많이 이야기하라 두번 째로 현재 시급한 문제는 정신없이 전개되는 세계관 전쟁 속에서 어떻게 해야 기독교 세계관을 ‘내 삶의 일부, 내 문화’로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문화화 과정은 기독교세계관 단기 속성과정을 수료하거나, 책을 붙들고 하는 학문적 연구, 혹은 선교여행 한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생활에 항상 깊이 적용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 나의 가치관으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을 대개 두가지로 묘사한다. 하나는 바울처럼 극적인 경험을 통해 확 바뀌는 것이고, 또 하나는 디모데처럼 신앙의 유산을 받아 차분히 자라난 경우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두가지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두가지 관점일 뿐이다. 왜냐하면 가장 극적으로 보이는 경험조차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섭리와 준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지루할만큼 긴 제자훈련 과정이 등장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종종 첫째 제자,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선뜻 반응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따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데는 3년이란 긴 기간이 걸린다. 이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사람과 사회, 온 우주의 변화는 혁명으로 갑자기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세부터 있었던 오랜 계획의 결과로 예수님이 오셨듯이, 이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된 회복의 과정은 오랜 씨름과 고민을 수반한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고민과 함께 방향을 제시하고, 모델을 보여주며, 동시에 균형잡힌 접근을 이끌어주는 ‘바른 복음의 선포’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28/03/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 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5) 그러나 호주 사회 전체적으로는 점점 더 세속적인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 지역교회와 주일학교들도 약해지면서 이 상황을 더 심각해진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앞장섰던 호주의 화란 개혁교회들도 2-3세대를 거치면서 호주 사회에 흡수되고, 전반적인 교세는 상당히 위축되었다. 이 점에서 지역의 개별교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다른 전문 활동들도 뒷심을 발휘할 수 없음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항상 한 쪽으로 기울면 다른 한 쪽으로 가는 힘도 커지는 것을 보게 된다. 세속화가 심해지면서 교회를 떠나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가 주류가 되었다. 어느 세대나 부모들에게 반발하는지는 몰라도, 이들의 자녀 세대 중에는 다시 신앙을 찾는,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찾는 흐름이 다시 일어났다. 덕분에 젊은 청년 중에는 비교적 더 논리적이고 선명한 보수적 개혁 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호주의 보수 신학교들은 다른 주류 신학교들에 비해 학생 확보가 훨씬 수월한 편이다. 또다른 중요한 변화는 순복음 운동이다. 호주는 세계 순복음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미국보다도 더 오래 전에 자생적인 성령운동의 전통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지역교회가 약화되는 분위기에서도, 80년대부터 찬양과 은사 운동에 강조를 두는 역동적이고 활발한 교회들이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힐송처치, C3등이 바로 그런 교회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세계관운동이 말하는 조직적인 신학적 사고나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신학적 기준을 따지는 데는 약했지만, 뜨거운 가슴과 체험의 경험을 안고 새로운 교회 운동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이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교회 뿐 아니라 삶 속에도 어떻게 신앙을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중 일부는 기독교 정당을 통해 무언가를 단번에 바꾸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정치적 경제적 보수주의와 기독교를 혼란스럽게 섞어 놓긴 했지만, 이들의 진지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다른 변화는 1980년대 오랜 노동당 정부기간을 뒤로 하고 집권한 하워드 정부의 교육 정책에서 시작된다. 자유당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하워드 수상은 70-80년대 노동당 정부아래서 시도된 ‘진보적’ 흐름들을 뒤집어 놓는 작업에 들어간다. 특히 그는 ‘장기적 파장’이 큰 교육 문제에 주목했다. 그동안 공립 학교에만 집중된 국가교육 재정을 사립 학교에도 나누어주고, 지역사회와 공동으로 “학교 교목”을 고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기존 교단학교, 독립 기독교학교 할 것 없이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은 급속도로 팽창했고, 공립학교에서도 신앙교육 활동이 늘어났다. NSW주에만 학교 교목제도가 채택되지 않은 것은, 전문 교목보다 지역 교회에 의존하는 SRE 교육방법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팬들럼처럼 한 방향으로 가면 다른 방향으로 당기는 힘도 강해진다. 하워드 정부기간에 이뤄진 ‘기독교의 컴백’은 이미 일반사회에 자리잡은 반기독교적 문화와 첨예한 갈등을 경험한다. 특히 여성 평등, 동성애자 문제들이 그러했다. 앞에서 말한 ‘세이프 스쿨’ 프로그램의 도입도 이런 반발의 예다. 그냥 보면 전체 상황은 기독교인들에게 별로 유리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최근 들어 아주 강력한 플레이어가 이 세계관 전쟁판에 새로 등장했다. 바로 미디어다. 이미 티비등을 통해 존재해 왔지만, 모발폰 문화를 통해 개인의 사고와 삶을 지배하는 수준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덕분에 대부분의 호주 가정들은 세속화, 개인주의, 상업주의의 영향 속에 더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2018년에 있었던 동성애 결혼 합법화 논란은 이 점에서 그동안 진행된 호주 사회의 세속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한 쪽에서는 이 문제가 동성애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동성애든, 포르노든, 폭력이든 뭐든지 가리지 않는 미디어 세계의 그림자가 더 크게 드리워져 있다. 그럼 주류 미디어를 공격하고, 동성애 반대 그룹과 연대해서 거리로 나가 시위라도 하면 다 해결될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리 간단치는 않다. 현재의 세계관 전쟁에 보수 기독교쪽의 동맹군들 속에는, 이민자들을 싫어하는 인종차별적 백인들,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은 보수 유대인들, 기독교와 척을 지고 있는 무슬림들도 포함되어 있다. 도리어 우리 같은 이민자들의 인권을 지켜주고, 약자들의 편을 드는 쪽들은 대부분 동성애 결혼 합법화를 지지하고 있다. 이 말은 호주 정치 상황에서 편 나누기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어떤 행위로 보지 않고, 삶의 방향, 가치관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히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대한 반응을 가지고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시비하는 것도, 핵심을 왜곡할 수 있다. 동성애 결혼에 극렬히 반대하면서도 난민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인종차별을 합리화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민 교회가 세계관 전쟁에서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 강조해야 할 3가지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각각의 내용은 그 자체로 더 깊은 연구와 생각을 해봐야 할 이슈지만 논의의 출발점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 3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선한 구조와 잘못된 방향을 구분하는 눈을 키우자, 2) 성경의 큰 그림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다듬어가자 그리고 3) 교육에서 가정의 역할을 더 강화하자.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21/03/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4) 호주의 경우 호주도 단순 유형지에서 벗어나 장기 정착 식민지로 정비되기 시작한19세기부터 ‘세속화’ 가 지배적이었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고 파견된 식민지 운영자들은 본국의 계몽주의 영향을 그대로 가져왔다. 국교회 전통이란 틀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던 본국보다도, 새로운 신생 식민지에서 더 열심히 계몽주의 이상을 실천하고 싶어했다. 덕분에 호주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가능한 더 많이 배제하는 방향으로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먼저 대학부터 당시로선 당연시되던 목사의 교직과 이사직 참여를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교회와 교육이 완전히 분리된 의무 공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물론 기성교단들이 일찍부터 세운 사립학교들이 있었지만, 정부 지원이 끊어지면서 비싼 학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면서 이들은 부자와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 더 굳어졌다. 기독교적 가치는 ‘학교 로고’안에서만 남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대학 교육의 분리는, 호주 주류 신학이 다른 영국과 대륙의 신학처럼 계몽주의, 이성주의에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정통신학을 잘 이어가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류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더 적어져갔고, 사회 복지와 물질적 풍요가 이어지면서 기독교 종교생활에 대한 관심도 줄어갔다. 회중 교회 목사들도 호주 연방 수상까지 올라선 봅 호크의 말대로 기독교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옵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불씨는 의외의 자리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파괴와 네덜란드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독립으로 약 5만 정도의 네덜란드 인들이 호주로 이민을 오게된다. 처음에는 신학적으로 형제라고 할 수 있던 호주 장로교회에 집단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도 한국인들처럼 이민자들의 문화와 가치를 따로 챙길 수 있는 교회와 교단을 따로 만들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문화 전수 이상의 목표가 있었다. 처음부터 카이퍼의 정신에 따라 기독교 세계관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화란 이민자 자녀뿐 아니라 호주전체를 대상으로 기독교 가치관을 적용하고 가르칠 기독교 대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이를 위해 당시 몇 개 되지도 않는 개혁교회들은 엄청난 자원을 동원해 학교를 세웠고, 목사 교육 뿐만 아니라 기독교 대학의 비전으로 개혁 신학 칼리지(Reformed Theological College. RTC)를 당시 빅토리아주 제 2의 도시인 질롱에 세운다. 이런 배경에서 RTC는 당시에는 호주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독교 교육 과목을 따로 개설해 기독교 교육자들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졸업자들은 곧 호주 기독교 학교 운동의 중추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민간이 대학 교육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기독교 대학운동은 벽에 부딪힌다. 덕분에 대학 대신 초등, 중고등학교급의 기독교 학교 설립 운동으로 에너지가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기독교 학교 운동은 두가지 흐름으로 나눠졌다. 하나는 교사로서 기존 학교에 들어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자는 그룹이었다. 이들은 일반학교틀 안에서 교사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학교 종교교육시간 SRE등을 활용해 신앙교육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분별의 파라다임’에 가장 가까웠던 이 방법은, 안타깝게도 큰 힘을 얻지 못한다. 이 싸움에는 건강한 교회와 가정의 지원이 간절했지만, 호주 교계의 전반적인 쇠퇴 속에 교회는 자기 앞가름을 하기에도 급급한 실정이었다. 지금도 종교 교육시간 SRE는 지역 교회가 강한 지역외에는 명맥도 유지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또 하나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모든 과목을 가르치고 운영하는 독립 학교를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기존의 공립 학교 시스템을 활용하기에는 이들이 너무 기독교 가치와 거리가 멀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그룹은 기존 교단설립 사립학교들도 기독교를 종교나 형식적으로만 가르칠 뿐, 제대로 된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완전히 다른 기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가정이 기독교 교육의 중심임을 강조하고, 이를 돕는 장치로 학교를 이해했다. 이런 류의 학교들을 ‘학부모 통제학교’라고 부른다. 학교의 보다 구체적인 교육 방향과 철학에 학부모들의 목소리와 신앙이 적극적으로 반영되도록 운영하는 구조다. 최근 들어 후자 학교들은 보수 정부의 재정적 지원속에서, 급격한 규모의 확장을 경험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학교들이 신자들만의 도피처가 될 위험이 있고, 이를 통해 세상의 도전과 현실을 감당하기 힘든 ‘너무 연약한’ 기독교인이나 만든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백인부모들이 자신들의 기존문화와 기독교를 동일시 하며, 백인문화를 지키는 도구로 이들을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공교육의 붕괴와 사회의 윤리적 혼란에 우려하는 부모들의 입학서를 든 행렬은 이들 학교 정문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 학교 운동외에도 자녀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심어주고자 하는 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했다. 세속주의적인 일반대학에서도 EU같은 대학생 선교단체들들의 전도와 제자화 훈련사역이 이어졌고,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일반 대학과의 ‘협력’을 통해 기독교 대학의 비전을 부분적으로 이루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맥콰리대의 기독교연구소는 일반 교양 과목으로 기독교세계관 과목을 제공해 왔다. 동시에 독립적인 기독교 대학 설립운동을 다시 추친하는 그룹도 생겨났다. 원래 순복음계열의 신학교였던 파라마타의 알파크루시스 대학교는 신학뿐 아니라, 교육, 음악, 상담 경영부분까지 기독교 가치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종합 사립대학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14/03/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3)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역사: 세계, 한국, 호주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세계관 전쟁은 갑자기 새롭게 발생한 문제는 아니다. 이 점은 실제로 이 문제앞에서 당황해 하는 많은 부모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에서 말세를 떠올리며 절망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실 너희가 씨름하는 문제는 복음이 들어온 이래 계속되어 온 영적 전쟁의 일부다. 너희 선배들도 그 과정을 거쳤고, 어쨌든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 것들이 설쳐도 창조자께서는 이 땅의 주인으로 남아계신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걱정 안하고 허리띠 풀고 그냥 있으면 될까? 역사의 전체 흐름은 하나님과 복음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다고 해서 세부 상황 속에서 겪는 수 많은 아픔이나 고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제 상황 속에서 불필요한 실수나 과거에도 있었던 실패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더 나가서 선조들보다 더 나은 기회를 누릴 기회를 포기할 필요도 없다. 이 점에서 교회사는 많은 도움이 된다. 원래 기독교 문명이었던 서구에서는 ‘세속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7세기 이후부터, 세계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세속화란 기독교나 종교가 사회의 기준, 상식이 되어왔던 자리에서 밀려나는 현상을 가르킨다. 실제로 유럽의 이성주의는 기독교안에서 그 싹이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곧 기독교를 부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19세기 이르러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조가 유럽과 미국의 대학과 신학교까지 모두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교회를 향했지만, 머리는 신을 부정하는 논리로 무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 기독교에도 큰 도전이 되었지만, 막상 이성주의 자체도 기존 기독교의 대안이 되기에는 힘이 부쳤다. 때문에 이후 낭만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같은 다양한 현실부정적 반동들이 등장한다. 한편, 기성 기독교 안에서는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반응이 등장했다. 그 중 하나인 네덜란드에서는 이성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의 세계관에 대항해,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히 이러한 교육의 중심인 학교, 대학과 신학교 등을 기독교 세계관 관점에서 바로 세워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더 나가서는 신앙이 기존의 교회 내부 뿐만 아니라 이성주의가 지배하는 정치와 문화까지도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사람이다. 그는 칼빈이 강조한대로 ‘이 세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세속화를 통해 교회와 완전히 분리된, 교육, 문화, 과학, 정치, 경제 같은 각 영역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회복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를 위해 하나님이 원래 창조 때의 선함을 남기신 모습를 찾아, 죄 이전의 선한 모습, 선한 기능을 회복하는 사명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이 이후에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세속적 세계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이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로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한동안 이 운동은 주로 화란계 이민자들을 통해서 세계로 퍼져갔다. 미국에서도 중서부를 중심으로 정착한 화란 이민자들이 이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미국 기독교는 이성주의에 대항하여 주로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근본주의 방식으로 움직였다. 덕분에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때 등장하는 주요 기독교 세게관 운동 지도자로는 여러분도 들어본 적이 있을 라브리 공동체의 프란시스 쉐퍼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완벽하지는 않았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발전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 논리에만 너무 깊이 빠져,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기도 했다. 화란 개혁교회가 자리를 잡은 형태가 다른 하나의 이민사회에서 나타났는데 바로 남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너’라고 불렸던 화란 이민자가 많이 있던 이 곳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의 온전한 기독교 문화’를 지킨다는 신학적 논리가 동원되었다. 인간이 복음을 얼마나 자주 이해나 자기 입장대로 바꿔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어쨋든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한국에도 전해진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던 보수 기독교 청년 일부는, 당시 대학가를 휩쓸던 학생운동에 자극을 받는다. 이들은 혁명적인 정치활동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신앙이 너무 현실 정치에 무관심하고 교회 활동에만 매여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또한 선교적 관심에서, 교회 외의 다른 분야, 특히 교육과 일반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양한 기독교 교사운동, 기독교 학술운동, 직장 선교운동 그리고 공정선거 감시 같은 방식으로 정치참여 운동까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세계관운동은 주로 학문적, 이론적 성격이 강조되어 일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한국교회 안의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적 경향은, 이런 철학적 접근에 대해 일반 교인들이 거북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비교적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은 CCM 음악 같은 문화 부분에도, 기존 문화속에서의 변화 운동보다는, 기독교 하부 문화를 만들어 세상과 따로 노는 분위기가 더 주를 이루었다. 덕분에 현실적으로는 이원론적 사고, 다시 말해 신앙과 일반 삶을 완전히 따로 분리해 취급하여 교회는 열심히 가도 주중에는 ‘일반문화를 즐기는 신자가 계속해서 세상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기독교가 세상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세상의 문화에 휩쓸려간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적합한 표현이다. 다음시간에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4) 호주의 상황이 이어집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07/03/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2) 성경을 볼 때마다 종종 발견하는 일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깊이 들어가면 문화적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한국 기독교는 최신 미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이고 시대를 앞서는 문화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 호주 할 것 없이 신앙은 항상 더 강력하고 그럴 듯한 ‘세상적인 가치관’들에게 공격을 받고, 조롱의 대상이 될 때가 더 많아졌다. 지금의 이 갈등 상황은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너무 놀라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이러한 핍박, 갈등, 씨름의 결론이 어떨 것인지를 이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시록 21장 3-4절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큰 위로의 메세지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구원받은 자답게 살도록 요구받듯이, 이런 승리의 약속이 주어진 우리에게도, 승리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결국 망하게 될 헛되고 죄악된 세상적 관점을 잘 분별하고, 우리가 마땅히 기준으로 붙들고 살아야 할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신자의 당연한 모습이다. 성경적 세계관: 창조 타락 구속 그렇다면 우리가 잘 무장하고 있어야 할 기독교 세계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미 ‘성경의 맥’, ‘큰 그림’이나 ‘성경 신학’을 들어보신 분들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내용을 좀 더 간단히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주제, 세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바로 창•타•구, 바로 창조, 타락, 구속이다. 특히 이러한 성경의 전체 주제들은 단순히 교회 사역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여러분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말하는 창조에 따르면, 이 땅은 창조자가 자신의 지혜와 영광을 담아 만든 걸작품이자, 선한 것이며, 특히 인간은 그 이미지를 담고 이 땅의 관리와 발전을 책임지도록 지음받은 특별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은 한 가지 조건에서 제대로 이뤄진다. 창조자를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말하는 타락에 따르면, 인간은 선한 하나님의 창조를 흩으려는 사단의 유혹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능력을 ‘하나님 대신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데’ 쓰려고 했다. 덕분에 인간은 인간끼리도, 자연과도,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고, 자기를 파괴하는 길, 죽음의 길에서 돌이키지를 못해 왔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재기의 기회와,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말하는 구원에 따르면, 인간의 계속되는 실패와 그럼에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 커져간다. 이 과정은 특히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 모델로 세우시며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의 반역, 불복종, 무지, 교만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그럴수록 인간과 이를 통한 세상 전체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 자비하심도 더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이러한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가 실패의 피크에 이르렀던 왕국 시대의 예언자들의 증언을 통해 보충되고 더 나은 방법으로 구체화된다. 이들은 그동안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과 함께, 실패를 모두 해결할 대안을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고 계신다고 선포한다. 옛 언약을 대신할 마음판에 새겨진 새 언약이, 고난받는 종 메시야를 통해 주어지고, 이를 통해 세상 전체의 회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졌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이제 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인간 죄성의 실상과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아가면 회복이 시작된다. 이러한 회복에 참여한 개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 회복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에 참여할 특권을 누린다. 이 회복은 특별히 주님의 역할을 시간과 공간, 문화와 언어에 매이지 않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 성경적 세계관의 구원에 따르면, 이 회복은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주님께서 완성시키기 위해 오셔야 할 일로 정의한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그 때가 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악한 것들이 심판을 받고, 약속하신 온전한 창조의 회복,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까 읽었던 계시록 21장의 내용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통해, 세계관의 주요 질문들에 답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시작은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왜 이 세상은 문제인지?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지? 무엇이 맞고 틀린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진리는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지 등등 말이다. 이 답들은 성경과 삶에 대한 경험, 이해가 깊어질수록 더 많은 내용이 붙게 된다. 이러한 세계관을 자꾸 이야기하고, 더 살을 붙이며, 변화하는 내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계속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 교육이다.. 다음 시간에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3) 역사적 교훈이 이어집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28/02/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 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기독교인 가정에 필요한 신앙교육 방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호주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교육문제를 같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가정에도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세속화 •개인주의• 상업주의에 대해 ‘기독교적 답’ 절실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1)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문제 파악에 집중했다. 현대사회는 시험 중심의 경쟁, 학교 제도 자체의 후진성, 그리고 가치관 전쟁으로 인한 전에 없는 고민에 빠져있다. 아이들이 시험을 잘 치르고, 학교에 잘 가고, 겉으로는 멀쩡하게 크고 있다고 해서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특히 사회에서 어떤 자격과 성공의 자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면과 영혼의 중심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특히 세 번째 문제, 즉 가치관 성립의 문제에 대해 더 긴장할 필요가 있는 상황을 발견한다.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 교육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을 몇 가지만 꼽아본다면 사회 전체의 세속화 경향과 그 뒤에 있는 개인주의, 상업주의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세속화 경향은 단순히 교회 기관이 힘이 없거나 학교에서 종교 교육시간이 사라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적 가치를 말하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을 말한다. 상업주의란 돈의 논리가 세상을 더 지배하면서, 상업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더 정교하고 치밀하게 사람들의 근본 뿌리부터 흔드는 분위기를 말한다. 이러한 세속화와 상업주의는 ‘미디어’와 ‘인터넷’에 의해 더 강화되어 우리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주체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미디어와 인터넷을 무조건 피해 다닌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도리어 미디어에 숨겨진 잘못된 논리들을 잘 분별해 낼 수 있어야 아이들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다. 우리가 이 작업을 제대로 못 하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생각과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화와 음악, 광고, 게임이 어떤 메시지를 주입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2003-8년 동안 13-17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미국에서 이뤄진’전국 청소년과 종교 관계 연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청소년들의 대부분이 ‘문제해결형 윤리주의적 이신론’을 신앙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치유 중심이란 하나님이 삶의 실제 문제를 풀어주는 분으로, 윤리주의적이란 기독교를 어떤 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신론이란 하나님이 원리만 만드셨을 뿐 그후에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관여하신다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는데 비교적 열심이었던 미국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러한 기독교는 세속적 가치관, 미디어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들의 반영이다. 세계관적 통찰력 없이 그저 열심으로 교회만 만들다 보니 결국 기독교가 성경하고 별 상관없는 신앙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세상을 접할 때마다 우리 모두는 세계관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내가 그냥 즐기는 이 영화가, 이 음악이, 이 광고가, 이 게임이 삶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주입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근거가 필요하다. 또 이를 위해 복음을 가지고 ‘기독교적 답’을 잘 정리해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심각한 세속화와 상업주의와 미디어 홍수 속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최선의 것으로 가르치고 최선의 삶으로 인도하길 원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잘 확립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 속에 숨겨진 다른 세계관들을 잘 비교 분석, 걸러서 받아들이는 능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전쟁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성경본문 로마서 12장 2절은 이천 년 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복음은 최신 유행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모두가 환영할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23은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기서 유대인이란 하나님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대표한다. 그러나 막상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에 매여 십자가를 단순히 저주받은 자들이 달리는 기둥으로만 보았다. 이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까지 주신 사랑’이란 메시지를 ‘ 듣기 꺼려’ 했다. 여기서 이방인 이란 세상 유행의 첨단을 걷던 사람을 대표한다. 당시 지성인들의 최신 유행이었던 헬라 사상에서 보면 신이 저질스런 인간의 몸을 가진다는 ‘성육신’도 웃기는 소리였다. 더구나 이들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신이 인간의 죄를 위해 죽는 생각도 상식에 맞지 않는 ‘미련한’ 생각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21/02/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 가정의 신앙교육 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격변하는 문화 속에서 자녀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독교 가정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지만, 논의의 배경은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비 기독교인가정에도, 현대 교육 문제, 특히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무엇이 문제인가 (6) 특히 사이어의 세계관 질문들을 가지고 기독교 세계관을 정리하면 간략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세상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삼위일체의 인격적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의 조화와 완성은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2)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말씀에 순종해 이 땅을 다스리고, 발전시키고, 그 영향력을 퍼져나가도록 지음 받았다. 3) 우리 세상은 왜 이렇게 엉망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유혹과 자기가 기준인 인간의 욕심 때문에 죄가 들어왔고, 이 때문에 모든 창조 세계는 갈등과 파괴로부터 자신을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4)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인간의 죄성과 자신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고, 그분을 다시 주인으로 삼기 결단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성령의 인도 속에 살아가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온전한 회복이 이뤄질 것이다. 5) 뭐가 맞고 틀리는 것을 결정하는가? 창조자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원리들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창조자 하나님의 지혜를 계속 왜곡하는 우리의 경향에 비추어, 계속해서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가 복음 위에 제대로 서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6)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이 땅에서의 활동에는 심판이 기다리며, 이 모순의 땅은 결국 창조주에 의해 원래의 창조보다 더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될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복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복음을 단순히 개인 구원이나 위로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를 회복하려는 의지로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복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읽기 쉬운 우리에게 성경이 보여주는 전체 스토리, 다시 말해 창조-타락-구속-완성/새 창조라는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각 부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보다 큰 뜻과 지혜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전한다. 앞에서 읽었던 로마서는 우리의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다시 로마서 12장 2절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각 시대마다 나름대로 놀라운 유산과 업적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모든 시대를 지배하는 문제의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자신만을 쳐다보며 사는 지구는 결국 개인, 관계, 자연 세계 모두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시대적 근본 모순에 대해 수많은 우리의 선배들과 위대한 스승들이 씨름해 왔지만,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를 제대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더 나은 지식, 더 나은 과학, 더 나은 위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본질을 새롭게 함을 받아야만 한다. 기독교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인도에 복종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뜻을 알기 원하기 마련이고, 그리스도가 저와 우리 세상 모두를 향해 가지신 계획과 뜻을 알아가면, 우리는 이 죄 된 세상을 분별하고, 우리를 방어하고, 고통받은 세상을 향해 회복의 길을 전파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교육이라고 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매주 교회를 오게 하는 것에 매달려 있을 때가 많았다. 사실 아이들을 교회에 오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어렵지 않다. 부모나 교회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말이다. 어떤 가정처럼 교회 안 갈 경우 밥을 주지 않는 것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교회에 최신 시설과 더 편한 환경들, 말 주변이 좋은 재미있는 강사를 동원하면 아이들에게 끌리는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현실은 대부분 부모와 교회들이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막상 이런 간단한 땜방과 기교에 필요한 자원 투자에도 인색하다. 이러다 보니 이런 장난 기교만 조금 해도 대단한 뭔가를 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지기 일쑤다. 중간캡: 기독교 신앙은 교회란 조직이 다 표현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 우리의 모든 것을 가장 건강하고 창조자가 기쁘게 보시는 최선의 답으로 인도하는 길 그러나 신앙은 교회에 오고 헌금하고, 교회란 조직에 소속해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종교 생활이 다가 아니다. 도리어 종교 생활로 남는 신앙은, 교회가 어려움이 빠지기만 해도 흔들리고, 좀 유명한 학자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떠들기만 해도 흔들린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교회란 조직이 다 표현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이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관계, 우리의 내면, 우리의 모든 것을 가장 건강하고 창조자가 기쁘게 보시는 최선의 답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특히 시대적으로 사람들을 더 이용하고, 이상한 곳으로 몰아가는 시대의 분위기 앞에서 우리를 깨우고, 세상을 분별하게 하는 힘이다. 건강하지 않은 도전과 유혹, 설득이 점점 더 강해지는 시대에, 우리는 이제 우리 아이들을 향해 기독교 세계관을 점검하고 가르치고, 계속 도와주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종교 행위가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보고, 듣고, 누리고, 즐기는 삶 속에서 어떤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지를 같이 돌아보고, 성경적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반응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론 다음 시간에는 이어서 우리 자녀들의 기독교 세계관 교육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해결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특히 화란 개혁교회의 유산을 중심으로 세계교회와 호주교회가 그동안 어떤 씨름을 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호주교회의 경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이 교회가 서 있는 환경과 문화 속에서 우리네 교회도 마주하고 또 씨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당장부터 시작해야 할 일 세 가지를 고민해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세계관을 바로 세운다는 말은 첫 번째는 세계관 전쟁의 현실에 경각심을 가지고, 그 실상을 분석하는 능력을 키운다는 것이다. 두번 째는 이에 맞서는 가장 최선의 답으로 자신을 지키고, 더 자랄 수 있도록, 성경적 이야기를 삶의 기본 이해 틀로 바로 세워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많은 정보가 가치관의 홍수 속에서 휩쓸려 가지 않고,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시간에는 2.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1)가 이어집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14/02/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격변하는 문화 속에서 자녀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독교 가정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지만, 논의의 배경은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비 기독교인가정에도, 현대 교육문제, 특히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무엇이 문제인가 (5) 그러나 막상 세계관을 따져보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물어야 한다는 뜻일까? 세계관을 생각해 보자는 말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하는 행동, 말하는 것, 입고 사는 모든 것에 숨겨진 진짜 동기와 기준’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나 상황에서 기준과 동기가 뚜렷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세계관을 점검하자는 말은, 남들이 하는대로 세상을 그냥 살거나 보지 않고, 그 이면을 한번 뒤집어 보자는 이야기에 더 가깝다. 특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가치관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세계관을 파악하는 질문들 그러나 각자의 세계관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점검하고 알아보려면 구체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가장 흔한 방법은 매일 접하는 여러 토픽과 이슈에 대해 많이 대화해 보면 대강 파악이 된다. 따라서 다른 세계관을 분별하고 내 세계관을 잘 정리하고 싶다면, 내 삶에 대해 많은 대화의 기회를 가지면 자연스럽게 그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세계관 교육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자녀들과 자신의 삶에 대하여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미들톤이란 학자는 개인의 세계관은 몇 가지 삶에 대한 중요한 질문과 모두 연관이 있기 때문에 몇가지 질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생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질문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등… 기독교 세계관이란 복음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 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제인스 사이어의 질문은 이보다 좀 더 구체적이다.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모든 사람이 고민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위의 질문들은 원래 고등 종교들이 답해 온 질문들이다. 아직까지도 고등 종교들이 지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 삶의 세부까지 미치는 영향이 느껴지지 않는가? 미들톤에 따르면 아무리 비종교적인 사람들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바탕으로,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고,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그럼, 우리 아이들에게 해야 할 세계관 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일단은 평소에 아무 생각없이 보고 대하고 따라오던 것에 숨겨진 세계관을 같이 생각해 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가 추구해야 할 더 나은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 현대사회에는 특히 미디어를 통해 얻는 정보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가진 세계관이 무엇인지, 그 세계관이 과연 좋은 것인지를 생각할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가깝게는 음악, 영화, 뉴스같은 것들이고, 나중에 더 발전되면 사회, 경제까지 모두 포함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나의 신앙을 세계관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복음을 세게관적으로 설명하는 능력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돌아보고 격려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오래 전부터 기독교 세계관운동을 해 왔지만, 별로 인기가 없는 분야였다. 생각을 좀 한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학문적인 체계가 부족해 보이고, 현장 목사님들이 보기엔 복음 외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관 운동가들이 신앙을 마치 너무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고, 사실 그런 면이 있었다. 그러나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해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복음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 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특히 세속적 세계관에 휘둘리는 우리에게 잘못된 관점을 분별하고, 복음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도록 도와주는 복음 설명 방법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란 복음을 전하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음을 고백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한 마디로 성경이 증거하는 온전한 복음에 따라, 현대에 가장 맞는 복음의 표현 방법이자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교회는 항상 해오지않았던가? 역사를 보면 진지한 기독교인이나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 세게관 운동을 해 왔다라고도 볼 수 있다. 초대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와 벌린 싸움도 그런 고민이었고, 중세 기독교가 수도원 운동을 통해 기독교 생활과 영성운동을 벌인 맥락도 여기에 속해 있다. 종교개혁에서 일반 생활 속의 소명을 강조한 대목은 당연히 그렇지만, 이후에도 사회정의, 국가권력, 정치 경제적 혼란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서 있어야 할 지를 고민했던 수많은 씨름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단지 시대마다 다른 주제, 다른 방식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에 특별히 나타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특징은 무엇일까? 현대 기독교 세계관은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문제,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이기주의와 상업주의 속에서 우리를 복음으로 분별하게 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다시 한번 우리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잊고 있는 죄의 본질과 그 결과를 더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세속적 세계관들의 실체와 문제를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나 대신 하나님 중심으로, 죄의 권세 대신 하나님의 권세로, 나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미들톤이나 사이어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그런 답을 좀 더 덜 추상적이고 현실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다음 시간에는 1. 무엇이 문제인가 (6)가 이어집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07/02/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 가정의 신앙교육 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격변하는 문화 속에서 자녀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독교 가정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지만, 논의의 배경은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비기독교인 가정에도, 현대교육 문제, 특히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무엇이 문제인가 (4)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현실집착, 더나가서 미디어 혁명 뒤에는 공통 분모가 자리하는데, 바로 돈의 지배, 상업주의다. 다시말해 현대는 돈의 지배가 더 절대적이 되어가고 있고, 이제 돈은 우리 사회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부모들이 자주 걱정스럽게 이야기하는, 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선정성, 폭력성도 사실 더 돈을 벌기 위한 경쟁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돈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는 힘으로서 자본의 힘은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고, 현대사회의 눈부신 풍요에 비해 돈에 대한 욕구는 줄기는커녕 더 커져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경쟁도 더 커져간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경쟁 속에서, 모두가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는 그냥 조용히 설득해서는 상대를 끌어들이기 힘들어졌다. 덕분에 원래 극소수의 대기업들만 사용하던, 인간의 보다 깊은 내면을 조정하려는 심리학적 마케팅이 이제는 동네 가게 영업에도 동원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는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설득’ 속에서 살게 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많은 광고의 시대 말이다. 이들은 이제 그냥 뭐가 필요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이런 멋진 상류 같은 삶을 살고 싶다면 이것을 가지는 편이 좋을 겁니다”란 식입니다. 보다 효과적인 광고들일수록 나름대로의 매력적인 가치관을 깔고 이를 설득한다. 동성애도 건강한 것으로 묘사하고, 남들이 어떻든 나만 편하면 최고라는 생각을 주문처럼 반복하고, 참다운 자유란 성적 만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교한다. 물건 광고뿐 아니라 정당이나 구호단체, 이젠 교회까지도 이런 광고성, 자극적 방법을 쓰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것 같은 부담을 느낀다. 레드크로우 마켓팅이란 미국의 광고회사는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사천에서 만개 정도 광고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광고를 더 하라고 설득하는 광고회사의 주장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인터넷 속에서도, 버스정류장을 지날 때도, 차를 몰고 하이웨이를 갈 때도 수많은 광고를 만난다. 이제는 드라마속에서 조차 주인공이 뜬금없이 음료수를 마시며, PPT 협찬광고를 한다. 공짜 같은 서비스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세계관을 지배하려는 광고의 지배력도 커지고 있다. 어른들도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 세계관 전쟁에 대비하라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유행이란 이름으로 광고들이 조장하는 가치관에 휘둘리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장기적 전략을 생각해 보겠지만, 지금 당장 가장 시급한 일은 아이들이 좀 더 그런 영향에 덜 노출되도록 하는 것일수도 있다.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내용을 분별할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가능한 미디어와 광고에 좀 덜 휘둘릴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동시에 모발폰, 영상, 인터넷에 무절제한 몰입에 빠지지 않도록 사용제한 시간을 세우고, 다른 운동이나 활동에도 충분히 노출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 엄청난 양의 상업적 정보들과 광고 앞에서 전략과 기준을 말하기도 전에 이미 피지배자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세계관의 전쟁 속에 있다. 자극적인 장치와 엄청난 양의 광고 정보 속에서 수많은 세계관들이 나를 따라 살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 전쟁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을 조정하는 방법을 찾아,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세계관 전쟁 속에서 정말 건강한 길을 지키고, 건강하지 않은 유혹들을 잘 상대하도록 아이들에게 해 줄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창조자의 지혜가 선포되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세계관’을 세워주는 일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이 작업을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을까? 세계관에 대한 오해들 중간캡: 세계관이 일관성을 가질수록 자심감과 정체성, 상황판단과 분별도 쉬워진다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세계관에 대한 몇 가지 오해부터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관에 대한 오해로 인해 불필요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관을 ‘개인이 가진 철학’처럼 생각한다. 특히 기독교 학문 운동을 주로 해 왔던 학자들을 보면 많이 그렇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관 이야기를 하면, 그런 거창한 것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따르는 기본적인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도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쇼핑을 하러 나가면, 당연히 어떤 물건을 언제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어떤 사람은 끌리는 대로 산다. 어떤 사람은 고민하다가 다음에 사기로 한다. 이런 평범한 행위도 잘 뒤져보면 그 사람이 삶에 대한 태도, 생각이 드러난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으면 지를 거고, 당장 그것을 가지는 것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면 안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은 삶과 세상에 대한 관점과 기준, 다시말해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사람도 그렇지만 어떤 세계관은 일관성이 없기도 하고, 변덕도 심하고, 잘 설명이 안되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중요 세계관적 관점을 바탕으로 삶의 다른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세계관이 잘 정리되고, 일관성을 가질수록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해 지고, 상황판단과 분별도 쉬워지는 까닭이 여기서 나온다 다음 시간에는 1. 무엇이 문제인가 (5)가 에 이어집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31/01/2019
로뎀나무 아래서

다음 내용은 교육 선교회 로뎀나무아래 김석원 목사의 강의로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열렸던 ‘21세기 기독교가정의 신앙교육방향’ 세미나 내용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격변하는 문화속에서 자녀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독교가정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지만, 논의의 배경은 최근 일반 교육계의 전반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비 기독교인 가정에도, 현대 교육문제, 특히 가치관 교육의 방향에 대한 건전한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무엇이 문제인가 (3) “사랑과 헌신 기독교적 가치보다 승리와 물질 세상 가치 더 중요해져” 로마서 12장 2절의 내용을 우리 식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창조자가 세우신 원래 창조 원리와 지혜를 따라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 자신이 주인이고 기준이라고 외치며 만든 세상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다른 대안들을 내세워 이 세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속에서 날이 갈수록 정상을 비정상이라고 조소하고, 비정상을 상식이라고 우기는 일들이 더 심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혼란스럽고 위축되고 도망가고 싶겠지만, 그게 답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창조자의 지혜를 바탕으로 기준을 바로 세우고,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여기서 키는 ‘분별력’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분명히 드러난 자리인 성경말씀을 가지고, 남들이 다 옳다고 하는 것 중에서도 문제점을 놓치지 않고, 나쁜 것 속에서도 좋은 것을 찾아내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능력을 갖추는 교육은 다른 말로 신앙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 가정이라면 이런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울까? 특히 이런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에 더 많이 끌리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서는 이런 교육의 중요성은 당연히 강조되기 마련이다. 상황: 세속화시대의 도전 그러나 우리 시대는 이러한 필요성을 전 시대보다 더 절박하게 경험하고 있다. 적어도 신앙가정의 경우는 그렇다. 챨스 테일러라는 캐나다 철학자는 현대사회를 ‘세속화 시대’라고 정의했다. 세속이란 말은 쉽게 생각하면 종교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사회가 덜 종교적이 되었다는 말이 뭐가 새로운가? 개인, 사회, 역사를 보면 그런 경향이 전혀 없었던 적이 과연 있었나? 교회가 사회를 지배했다고 말하는 서구 중세사회에도 수도승이 숨어서 술 먹는 것 같은 세속적인 모습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서구 역사는 전반적으로 교회보다 왕이나 국가 같은 세속의 힘이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왔다. 그 결과, 학교나 정부 같은 공적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공정하게’ 여기게 되었다. 종교는 공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꺼리는, 개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현대사회가 이보다 한발 더 나갔다고 지적한다. 이제는 공적 영역뿐 아니라, 개인의 가치나 생활 속에서도 종교적 영향이나 기독교적 가치를 불편하게 느끼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호주 역사를 살펴보면, 호주사회도 원래 신앙적 영향력이 강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사회, 가정, 개인의 이상형으로 받아들였고, 현실에는 적용하기 힘들어도 추구하면 좋은 모델로는 생각해 왔다. 그런 점에서 호주도 다른 서구사회처럼 ‘기독교 문화’를 가진 사회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이상과 형식조차 완전히 걷어차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호주사회도 보편적으로 기독교적 희생, 사랑, 양보, 양심, 정직, 헌신, 공동체 등 이런 가치나 이념을 당연하거나 이상적으로 보던 시대는 지났다. 희생보다는 철저한 보복을, 양보보다는 경쟁에서의 승리를, 정직보다는 사기나 악용을, 영혼보다는 당장 앞의 물질적 만족이 더 좋은 것이라고 찬양한다. 이제는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대신 동성 관계를 건강한 혹은 더 낳은 관계로 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서구사회는 북한처럼 교회를 다닌다고 탄압을 받지는 않지만,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 조롱거리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바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이 말이다. 상황: 상업주의와 세계관의 홍수 그러나 테일러는 서구사회가 기독교없는 사회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기독교 대신 온갖 잡다한 새로운 신종교들이나 음모론 같은 유사 종교에 매여산다고 지적한다. 그 속에서 과거 기독교가 제공하던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기대를 포기한 대신, 현실의 필요와 만족에만 매달려 사는 사회가 되었다고 우려한다. 기독교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프랑스 문화평론가 길레스 레포핏스키도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가지 다양한 현대의 현상 뒤에는 결국 극단적인 개인주의만이 남아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런 추세를 극단적으로 더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인터넷이나 핸드폰 같은 기술혁신, 미디어 문명이라고 지적한다. 불행히도 이 미디어가 우리 아이들의 주된 교육 도구가 된지 오래다. (중간 캡) 과거 기독교가 제공하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대신해, 현실의 필요와 만족에만 매달려 사는 사회가 되었다. 2015년 호주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은 12-13세 까지 주중 평균 하루 3시간, 주말 평균 하루 4시간, 깨어있는 시간 중 30%를 스크린을 보면서 산다. 보지않는 사람도 있으나 보통사람들은 이보다도 훨씬 더 본다는 뜻이다. 실제로 집과 차는 없어도 모발폰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성인 세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세대를 우리는 아이젠이라고 부른다. 1995년이후 태어난 아이들, 다시 말해 청소년기를 인터넷과 모발폰을 달고 다녔던 아이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고, 이들이 이제 자기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하고 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전 세대에 비해 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고,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름도 모른 채 만나는 수많은 ‘트위터’들의 인기에 민감하고, 주어진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기 힘들어하고, 실제로 사회와 직접 부딪히기 보다는 비쥬얼 리얼리티를 더 편안하게 느끼고, 사람과 만나는 수고보다는 문자로 하는 간접적 대화를 더 좋아한다. 동시에 우울증과 자살율도 높고, 위험을 무조건 피하고 사회적 불의나 압력 앞에서도 수동적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는 인터넷 기업의 수장들이나 미디어 엘리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는 인터넷이나 모발폰을 ‘절제’하도록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도 자기들이 만든 도구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지배하려면, 먼저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지배당하는 쪽에 가까운 우리로서는 마음이 편치않는 대목이다. 다음 시간에는 1. 무엇이 문제인가 (4)가 이어집니다. 김석원 목사 - 로뎀나무아래 디렉터, - 전 호주동아 논설주간, - 한호일보 편집 자문위원(현)

24/01/2019
로뎀나무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