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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으로 가는 길우리 모두는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삶에는 성공 보다는 실망과 좌절의 스토리가 더 많다.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판단한다는 논리로 시작된 ‘상대적 비교’는 스스로를 더욱 빈곤과 상심의 깊은 우울로 빠뜨리곤 한다. 오늘은 모세의 이야기에서 성공의 비결을 찾아 보려고 한다.     1. 실패하는 탈무드의 리더이집트의 노역이집트에서 시작한 모세의 사명은 처음엔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베풀게 했고 형 아론이 말이 어눌한 자신을 대신해 말하게 했다. 모세가 놀라운 이적을 행하자 백성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계속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 모세가 처음 바로 앞에 나타난 때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다. 신과 같은 위치의 바로는 하나님을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 보내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바로는 히브리 백성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매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어 내야 했고, 지푸라기도 스스로 모아야 했다.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에게서 등을 돌렸다. 모세가 행한 열가지 재앙백성들은 “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애굽기5:21)” 하고 비난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다시 찾아가 요청을 반복하였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키는 이적을 보였지만 바로는 그의 휘하의 마술사들도 할 수 있는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 그 다음엔 전염병을 일으켰지만 요동하지 않았다. 이런 기적을 아홉번이나 보여 줬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모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했지만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모세는 매번 이적을 보이면서도 엄청난 압박과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가서 쓰디쓴 불평을 한다. “ 왜 그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왜요? 내 어눌한 입술로 우리 백성도 듣지 않는데, 애굽백성들이 듣겠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일곱번 넘어진 내공은 다시 일어나게 한다2. 실패의 흔적탈무드는 이 모세의 호소엔 성공하는 비결에 대한 메세지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최고의 지위에 있는 리더들이라도 그들에겐 실패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1874년 첫 인상주의파 화가들인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의 첫 전시회는 파리 살롱의 거절로 자신들이 스스로 꾸며 내야했고 호된 비판을 받았다. 연주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의식’은 관중석에서 야유를 퍼붓는 폭동을 일으켰다. 반 고흐는 자신의 동생이 예술품 딜러 이었음에도 그의 생애 단 한 작품만이 팔렸다고 한다. 리더들의 삶에는 이런 실패의 흔적들이 뭍어 있다. 링컨과 처칠도 인기가 없을 때 셀 수 없을 만큼 좌절을 경험했다. 간디도 한 나라 안에서 무슬림과 힌두가 연합하려는 꿈을 이루는데 결국 실패했다. 넬슨 만델라는 폭동을 유발하는 국가 반역죄로 27년이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다.    영웅들은 줄곧, 사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살아간 발자취가 승리의 길로 가는 디딤돌이었음을 드러내곤한다.  세상 속의 리더들은 세속적이든, 경건하던,  지위 고하를 떠나 성공 보다는 실패 할 때 진정한 시험을 치른다. 종종 경제도, 정치도 개인적인 상황도 우호적일 때가 있다.  경제가 좋을 때는 사업이 잘 되고, 선거에 당선된 초기,  정치인의 행보는 승리의 카리스마를 뽐낸다. 보통 결혼 후 첫 해는 핑크빛 꿈 길을 걷는 것 같다. 좋은 때에는 성공을 위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기후는 금방 변하기 마련이고 바로 그 때가 경제와 정치와 결혼이 실패를 경험하는 때이다. 때로 탁월한 사람도 흔들 거릴 때가 있는 법이고, 바로 그 때가 그의 내면의 성품이 시험되는 때이다. 위대한 사람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패배감을 거부하며 계속 전진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노력하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승리자는 실패에서 배우고 그것을 경험으로 여긴다. 패배감을 떨쳐낼 때마다 그들은 강해지고 지혜로워지고 더욱 단호해진다.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이룬 승리 3. 성공의 비결세계적인 경영학자 짐 콜린즈는 리더십에 대해   “ 성공은 어려움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좌절과 격변하고 더 커진 혼동으로부터 일어서는 능력이다. .. 실패는 육체적인 것보다는 마음의 문제이다. 성공은 주저앉는 것에서 끝없이 다시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랍비 이즈학 헌터는 탈무드를 읽고 마스터하는데 실패를 거듭하는 그의 제자에게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 실패의 고통은 우리가 위대한 사람의 내면에 쌓여온 고통에 대해서는 알지못한 채, 높은 수준에 집착할 때 찾아온다. 영국 속담에 싸움엔 지고 진쟁에선 승리하라는 말처럼, “ 지혜로운 사람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느니라(잠언24:16)”  를 기억하라. 그가 여덟번째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일곱 번의 넘어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랍비 헌터의 교훈의 초점은 ‘ 위대함은 실패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고 돌아온 한국 축구 선수들의 환영식이 인천 공항에서 열렸다. 그들이 4년을 별렀지만 가장 약체라고 하는 가나에게 지고 이제 자력으로 16강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 됐을 때 모두 패배를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인터뷰에는 감독과 선수 모두가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꺾이지 않는다”는 한마디 다짐이, 넘어지고 지칠 때 한 걸음을 떠 뛰게 만든 초석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3차전 포르투갈전의 승리는 세계인을 놀라게 했고 한국 전체의 기쁨과 자부심이 되었다. 그들은 좌절의 순간을 기쁨과 승리의 축제로 변화시켰다. 절망의 순간이지만, 세계의 무대에서 더욱 강해진 경험과 승리의 능력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제 더 높은  성공의 계단에 우뚝 올라서게 된 것이다.  패배와 지연, 낙망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위대한 인물들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세상과 탈무드의 선각자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실패와 좌절이 있었음에도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갔다는 점이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여러 실패의 골짜기를 지나게 한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성공의 비결은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절망의 순간에도 확고한 승리를 계속 꿈꾸는 것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01 성공으로 가는 길02 이집트의 노역

08/12/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창세기의 첫 도입부의 이야기는 두가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하나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이고, 다음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두 가지 다 특별한 종류의 실패에 관한 것이다. 자유와 책임1. 실패의 역사첫번 째 사건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이야기이다. 먹지말라한 열매를 따먹고,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만이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디 있느냐?’고 찾을 때 그들은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대답하고,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묻자, 아담은 이브가 먹게 했다고 핑계를 댔고 이브는 뱀이 꼬여서 먹었다고 남 탓을 했다. 둘 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남 때문에 먹게 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큰 죄로  여기고 벌로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 내었다.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고 ‘나는 아니다’라고 한 것에 대한 벌이다. 두번째 사건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가인이 아벨을 들에서 죽였을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 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동생의 피가 땅속에서 부르짖는데,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하고 탄식하였다.탈무드는 이것에 대해, 가인은 ‘나는 아니라’고 개인의 책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가인은 내가 왜 타인의  안위까지 신경써야 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는 ‘도덕적 책임’을 부정했다고 평가한다. 아담과 이브가 개인의 책임을 부정했지만, 한 단계 더 나가 ‘도덕적 책임’에 대해 그 중요성을 부각 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윤리는 ‘정의는 강한 자의 편’이라고 흔히 말한다. 강하면 옳은 것이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다윈의 강한 종자의 이론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없이 나만 강하면 정의는 실현되는 셈이니 생존의 문제는 간결해 질 수 있다. 그것이 세상에서 시대를 거슬러온 가인의 항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탈무드는, ‘이 두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의 시작에 발생한 실패를 거듭한 리더의 덕목인 ‘개인의 책임’과 ‘도덕적 책임’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권력과 책임2. 모세 이야기어린 시절, 모세는 자라서 유대인들이 종으로 일하는 것을 보게 됐는데, 이집트의 관리가 한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일어난 사건을 토라는 ,  “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하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날 유대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는 과정에서 그들이 모두 자신의 살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 그가 좌우를 살펴 어느누구도 간섭하려하지 않음을 보고..” 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성경적 사건은  ‘방관자 신드롬’을 발생시킨 과거 뉴욕의 한 여성이 폭행을 당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어느누구도 끼어들어 구해 내지 않았던 사건을 상기시킨다. 후에, 사회 과학자들은 이 일에 대해, 아무도 구하러 달려오지 않는 방관자들의 영향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은 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서겠지 하는 ‘책임의 방조’ 를 조성하게 된다’고 해석했다.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종이었고 누구든 이집트 관리자의 엄중한 권력 앞에 남의 일 때문에 자기 목숨을 위험에 빠트리는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모세를 움직이게 했고 바로 그가 리더가 되게한 것이라고 탈무드는 설명한다.   탈무드의 리더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나서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면 실패를 지적하고 불평한다. 하지만 ‘ 토라의 리더는 무엇이 잘못 되었을 때, 바로 잡는 사람이고 그들이 바로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 ’이라고 탈무드의 ‘티쿤 올람’ 정신을 리마인드한다.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와 아브라함3. 최고의 성취를 위한 선택세상의 위대한 문명과  종교는 모두 ‘수용’을 말한다. 폭력과 핍박과 가난과 고통의 세상에서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순리이고 다가오는 세상은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탈무드의 리더는 그저 수용하지 않고 대항하고 심지어 신을 직면하면서도 호소한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 아브라함은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 하고 도발했다. 모세는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출5:22) 하고 말했고, 에례미야는 “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하고 항변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응하기를 원하고,  토라는 바로 ‘사람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탈무드는 ‘ 인생의 최고의 성취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일에 대한 파트너가 되는 것’이라고 일깨운다.  선택과 성장의 리더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이 ‘어디 있느냐?’고 불렀다. 랍비들은 이것은 첫 사람 아담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울리는 공명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유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지 우리에게 일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한다. 가인이 죄를 범하기 전에 찾아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주위와 우리 안에있는 죄를 다스리라고 말하는 분이시다.  책임있는 인생은 반응하는 것이다. 바로 타인의 어려움을 내 책임으로 간주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누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의 선택에 있다. 행동하는 리더탈무드는 우리가 아담과 이브처럼  탐욕의 소리를 들을 것인지, 가인의 내면에서 소리치는 분노의 소리를 귀에 담을 것인지, 또는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정의와 평화의 땅으로 만들라는 창조주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고 조언한다. 마치, 까다로운 주제를 너무 쉬운 숙제 처럼 말하는 얄미운 학교 선생님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숙제를 잘하려고 수긍하는 것이 좋은 학생의 출발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17/11/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며칠 전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인으로 십수만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젊은 청년들이 156명이나 압사로 생명을 잃는 끔찍한 사건이 생겼다. 그 중엔 여성이 약80%가 되고,  대부분이 10-20 대 라고 한다.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대통령과 장관을 비롯한 주무처 관리들은 사건을 규명하고 보고하느라 매스컴에 등장하고, 어린 자녀들의 죽음에 안타까운 국민은 그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 세운다. 북한이 울릉도 부근에 전후 처음으로 NLL을 넘어 미사일을 쏘았다.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위기의 순간이 되었다. 리더십1. 예측된 리더 토라의 첫 책인 창세기의 후반부는 거의 성경의 위대한 리더인 요셉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는 항상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고 그의 꿈과 상황의 극적인 변화는 온통 그가 원초적 리더로서의 정해진 방향성으로 가는 것에 어느 독자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에서는 요셉을 예수의 예표라고까지 인정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요셉의 후손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족속은 BCE722년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그들의 종적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반면에 전혀 예상치 않았던 유다의 후손인 다윗이 왕이 되면서 그의 후손은 계속 왕위를 이어가는 왕족이 된다. 유다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다. 막내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창37:26-27) 했던 장본인이 바로 유다 였다.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에서 살다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그의 아들들이 죄를 지어 두명이나 죽게 되고, 나중에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게한 인물이다. 유다는 이방 친구를 사귀고 그를 따라 “형제들을 떠나 내려갔다”(38:1)고 한 것의 ‘내려갔다’는 말을 주석가들은 그의 도덕성이 주저 앉은 강력한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이 정도면 리더 얘기는 입에 담지도 못할  형편의 인물이다.  사울왕과 다윗2. 반전의 리더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고, 그의 모든 형제들이 붙잡혀 볼모가 되고 꼼짝 못할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로운 반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기근으로 인해 곡식이 궁해 이집트에 왔지만 총리가 그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고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의 첫 아들 요셉을 잃고 또 남은 아들 마져 잃을 수 없어 거절하게 된다. 그 때, 큰 형인 르우벤이 ,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내 두아들을 죽이라고 하며 납득되지 않는 말로 나서고 모두 방안을 찾지 못할 때, 유다가 조용히 “ 내가 스스로 볼모가 되어 베냐민이 돌아 올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 요셉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융성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고자 할 때, 또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자 할 때 그가 나서서 그의 아버지 야곱의 슬픔이 극도에 달해 어떤 비극이 아버지에게 닥칠 지 모른다는 장면에서 요셉이 이집트 총리의 모습으로부터 그들의 동생인 것을 드디어 나타내게 되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탈무드의 현자들은, 이 장면에   “ 뭇 의인의 설 수 없는 자리에 참회자는 우뚝 선다(Bersakhot 34b)”는 회개의 원리를 고양시킨다. 그리고 이사야 서57:9에 “평화, 평화가 먼 데 있는 자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 있을 지어다” 하며, 먼 데있는 자(참회자)가 가까운데 있는 자(의임)보다 앞서 부르는 것으로 이 원리를 인증하고 있다. 요셉을 전통적 ‘의인’이라고 여기던 토라의 맥락에, 유다는 ‘참회자’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요셉은 왕의 다음가는 둘째가 되지만, 유다는 왕의 조상이 된다.   유다는 토라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회개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록 젊은 시절 동생을 팔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죄지은 아들이 두명이나 죽게 된 부도덕의 과거가 남은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와 동침해서 임신을 하게되는 수치의 순간을 맞이 하게 될 때,  그의 변모를 짐작케하는 기록을 토라가 남기고 있다. 다말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수절하는 여인이 임신한 것을 죽여야 한다고 유다 앞으로 데리고 나왔을 때, 다말이 증거로 제시한 끈과 지팡이와 도장을 보고, 임신케한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그가 나보다 의롭도다(창38:26)”하고 고백한다. 이것이 토라에서 처음 잘못을 시인하는 장면이다. 유다가 첫 ‘참회자’가 되고 다말이 다윗의 조상인 ‘베레스의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다. 유다와 변장한 며느리 다말바로의 제2인자가 되는 요셉유다의 고백으로 만난 요셉3. 탈무드의 리더마이모니데스는 ‘고백’을 ‘회개’의 핵심으로 삼았다. “ 리더는 실수하는  사람들이다. 매니저는 규정을 따르지만, 리더는 규정이 없는 상황에 행동하는 사람이다”라고 탈무드는 상기시킨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의 위기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리더의 곤혹스런 문제이다.  나치와 마주한 전쟁의 위기의 시기, 1939년 영국의 총리 챔버레인의 유화적인 태도는 나중에 처칠에 의해서 누가 옳았는지 금방 판명이 되었다. 모든 리더들이 실수를 범하지만 결국, 리더십이 문제가 아니라, 리더의 나약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최고 지도자인, J.F 케네디와 빌 클린튼의 성적 스캔들은 그들의 리더십에 큰 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 토라의 위대한 리더 다윗이 충성된 부하의 아내와 취해 임신하게 하고, 이를 숨기기위해, 교살까지 한 것에는 비교 할 수 없을 지 모른다.          토라가 리더의 진정한 덕목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회개’ 하는 것이다. 잘못한 것을 시인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다. 랍비 솔로비치크는 이스라엘의 1,2대 왕인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죄를 범했고 둘 다 선지자들로 부터 견책을 받았다. 삼상15:24, 삼하12:13에 “내가 범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확연하게 다르게 나타났다. 사울은 왕위를 잃었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랍비 라브는 “ 다윗은 곧장 회개하였고, 사울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얼버무리고 변명으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유다와 그의 후손 다윗의 이야기가 말하는 리더의 덕목은 ‘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다. 오히려 리더십은 실수로부터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성장하도록 실수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유다의 마지막은 그의 청년 시절과 학연히 다르다. 어눌하고 주저하던 젊은 모세와 120세에도 눈과 기력이 쇠하지 않은, 막강한 영웅이 된 모세는 분명 다른 인물이다. 리더는 비록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정직하고, 겸손하고, 용기있는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토라에서 보여주는, 리더 유다의 정의는,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을 연약한 한 여성의 버려 질 수 있는 인생을 위해,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용기이며, 타협할 유혹이 분명, 큰 순간들 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조국에, 규정없는 상황으로 일어나는 급박한 위기에, 빛을 발하는 ‘반전의 리더’들로 우뚝 서기를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샬롬!   이태원 압사 사건북한 NLL 미사일 동해 침범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03/11/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야곱을 흔히 약싹 빠르고, 거짓과 술수에 능한 세속적 인물이라고 판단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야곱을 평가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팥죽 한그릇으로 형의 마음을 빼앗고, 엄마인 리브가와 공모하여 에서인척 변장을 해 아버지 이삭을 속여, 대신 축복을 받고 외삼촌이 사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친 인물이므로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야곱의 꿈-하늘에 닿은 사다리1.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하지만 그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의 아버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과 이삭, 심지어  모세도 얻지 못한 색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 스스로  “우리는 야곱의 회중” “이스라엘의 자녀”라고 자부심을 내재한 칭호로 부른다는 점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태동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끄집어 내지도 않았고 민족에게 토라를 갖다 준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쉬마엘과 에서와 같은 아들을 배출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달리, 그의 자녀들이 모두 신앙 안에 머물렀고 그는 성공적인 삶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토라의 첫 장면은,  바로 벧엘의 사건이다. 벧엘의 옛 이름은 ‘루스’라고 불렸다. 이곳은 야곱이 살던 가나안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브엘쉐바를 거쳐 이곳에 이르고 돌베게를 베고 광야에서 잠이 들었을 때 땅으로부터 하늘에 닿은 사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네 자손이 티끌 같이 될 것이고 동서 남북으로 모든 열방이 네 자손으로 인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반드시 돌아 오게 할 것이다. 이걸 다 이룰 때까지 절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곳이다. (창28:14-15)그 때 야곱이 잠을깨서 한 말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정말 하나님이 여기 계셨지만 내가 알지 못했구나!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도다!” 하고 고백했다(창세기28:16-18). 야곱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몸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고백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뜻이다. 벧엘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처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처음 알게 해준 곳이다. 얍복강가의 씨름- 새 이름-이스라엘2.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보내고 드디어 가나안을 향해 도망 나올 때, 얍복강에 이르러 형 에서를 다시 만나야 하는 두려운 밤에 천사와 다시금 씨름을 하게 된다. 그 때, 천사가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29,31)” 이 내용들이 야곱에게 보여진 분명한 영적 경험이었다. 이는 야곱이 둘다 두려움과 불안한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난 일들이다. 아직 문제가 산적해 있고 해결 되지 않은 지점에서 용기를 얻고 그 남은 여정을 갈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된 곳이다. 탈무드는 야곱이 바로 그런 힘을 유대인들에게 부여해 준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지 이 민족이 비극을 겪은 비운의 민족이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두 번의 성전의 파괴와 바벨론과 로마의 침공과 추방과 핍박과 중세의 포그롬과 19세기의 극성을 부린 반유대주의와 급기야는 대량 학살로 이어진 ‘홀로코스트’ 를 통해서 다른 어느 민족이라도 세상에서 분명 사라지고 말았을 상황에서 역사 속에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이스라엘이 한 번의 사건을 치를 때마다, 더욱 새롭게 태어났고 더 높은 경지의 수준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라반과 야곱의 계약3. 진정한 리더바벨론 포로기에 토라와 연과하여 더 깊어 졌고, 로마 정복시에는 구전 토라의 문자적 기념비가 세워졌고, 미드라쉬, 미쉬나, 그리고 게마라가 태동되게 되었다. 중세에는 법의 기초가 세워지고 토라 주석과 시와 철학이 발전되었다. 홀로코스트 몇년 후엔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고, 어두움의 역사로부터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건강 검진이라는 것은 얼마나 빨리 정상으로 되돌아 오는 힘이 얼마나 되는 지를 재는 테스트이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민이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리더들은 피로를 감당하며 애를 써야한다. 바로 그것이 리더들의 정신 건강 검진이며,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 일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피곤한 일이다. 토라에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같은 출중한 선지자들은 이 일을 계속하기 보다는 죽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이다.  아브라함도 깊은 우울증에 시달였고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도 사춘기에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이 있고 미켈란 젤로, 베토벤, 고호 같은 예술가들도 평생 우울증상에 시달렸다. 위대함이 절망의 순간으로 이끌어 가는 것인지, 위기의 순간이 위대함으로 이끄는 지는 정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을 지 모른다. 사랑하는 라헬과의 만남사실 야곱은, 위기의 순간에 차분하게 대응했던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달리 우리처럼 감정적으로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다. 두려워 했고, 외로워 하고 사랑하고, 다른 조상들보다 방랑의 시간이 길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야곱을 견디어내고 존속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수 많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생존자이다. 탈무드는 생존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바로 리더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위험이 도사린 삶을 기꺼이 살아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루스벨트가 말했던 것처럼 위대한 리더는 비판하거나, 앞에선 사람을 지적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그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부족함과 실패를 안고서 마지막에 성취를 이루어내는 사람들이다. 설사 실패한다하도, 그들의 실패는 결코 현장에 발을 들여 놓지도 않은 뒷짐진 방관자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야곱은 경쟁심으로 불타는 에서와, 적의로 가득한 라반을 견디어냈다. 여러 아내들과 배다른 자녀들 사이의 긴장과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을 일찌감치 감내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20여년이나 안고 살아야 했다. 그가 이집트의 왕 바로를 만났을 때 ‘거친 인생을 살았다’ 고 말 할만큼 굴곡진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불안한 삶의 여정에는 천사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거기에 함께하는 확연한 하나님의 존재 확인이 늘 있었다. 잃어 버린 아들 요셉과의 만남탈무드는 도전하고, 넘어지고, 두려워 하면서도, 계속 그 길을 가는 것이 좋은 리더가 되는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이름을 태동하며, 우리의 생각과 달리 유대인의 리더로 인정받는 이유이다. 두려움과 위기의 순간에 거기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된 까닭이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소망과 능력의 원천은 취하는 자의 몫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20/10/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다소 예상치 않게, 유명 랍비인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그다지 가깝게 소통하며 지낸 것 같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들의 관계가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야곱과 라헬 부부와 같지 않았고, 그들은 문제가 있을 때 서슴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네치브는 리브가가 처음 이삭을 만날 때의 장면이 광야에서 오후에 묵상하는 모습이었고 리브가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장면에 대해서, 리브가는 스스로 두려움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의 아내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공포심은 이때로부터 그녀의 마음에 고정되었다고 보았다.가족간의 불통1. 이삭과 리브가의 소통의 부재이삭과 리브가의 관계는 편하거나 솔직하고 소통적이지 못했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연속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날 때 ‘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삭에게는 결코 알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리브가가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고 야곱을 에서 보다 더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했다. 만약 이삭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에서를 선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몇년이 지난 후에,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것을 듣고는 속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야곱에게 에서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왜 그녀는 이삭에게 이삭이 바로 축복 받게 되어있는 아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까? 말하지 않은 것으로 아이들이 자라는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을 이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었다. 이삭의 야곱 축복만약 이삭이 이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두 아이들에게 각각 다른 축복을 기도하고 에서에게는 부와 능력을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임하고 많은 열방이 너를 섬기고 네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했을 것이라고 탈무드는 진단한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주신 축복이 야곱에게도 고스란히 임하기를 당연히 기도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손의 축복과 약속의 땅과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으로 민족의 수가 늘어나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동일한 약속이다. 결국,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바로 앞의 야곱2. 가족이 치르는 대가이삭은 미리 알았다고 해서 에서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 때로부터 하나님께 직접 받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세운 총체적인  계획으로 야곱이 수행한 속임수는 처음부터 결코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리브가는 이것을 알지 못했을까? 탈무드의 현자들은 그 이유는 남편과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삭은 이제 늙고 눈도 어두워졌다. 야곱에게 속고 심하게 몸을 떨었을 정도로 (창27:33) 충격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이 들자 에서에게 “ 네 동생이 속였다”는 말을 하자, 에서 역시 배신 당한 것으로 마음이 분하고 미움이 증폭하여 죽이고 싶게 되었다. 결국 리브가는 야곱을 피난 보내고 근 20여년을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소통의 부재로, 가족 내에 분노가 증폭하고 형제 간에 살인을 저지르고자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케네디와 후르쇼프의 대화야곱 자신에게도, 속인 결과는 평생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간에 분쟁과 갈등의 요소로 남게 되었다.  바로를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 평생 험악한 삶을 살아 왔다고(창47:9)”라고 자신의 인생을 평가했다. 애초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네 명의 인생이 거짓 하나로 인해 평생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게 되었다. 결국 이삭은 아무런 속임수 없이도, 아브라함의 축복을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인생에서 치르는 값비싼 대가가 되곤한다. 토라는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에 대해 사람들의 실제 삶과 실제 문제에 대해 아주 진솔하게 삶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결국 소통이 문제이다. 극적인 화해 – 쿠바의 핵 전쟁 위기3. 소통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할 때, 말씀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말하는 영이 되었다(창2:7)” 고 기록하였다. 말하는 것은  곧 인간의 삶이다. 삶은 관계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망과 두려움과 감정과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리더라도 목표를 강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열린 소통으로 세워야한다. 이것이 바로 가정과 팀과 회사의 문화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패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존중 받아야한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수치 윤리’를 추구한 것과 유대교에서의 ‘죄책감의 윤리’와의 확연한 차이점이라고 조언한다.  죄책감은 행동과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 한다. 그러나 ‘수치심’은 그렇지 않다. 수치심은 마음에 남아 분노와 증오를 쌓게 한다.때로 세상의 역사는 대화의 부재로 인해 비극을 겪거나 또는 비극이  축복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대화의 필요성은 극적인 순간에 더 실감하게 된다. 1962 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절에,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미국과 구 소련 사이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때가 있었다. 위기의 최 절정의 시기에, 로버트 맥나마라의 회고 영화, ‘전쟁의 안개’에 의하면, 케네디는 두가지의 메시지를 니키타 후르쇼프로부터 받았는데 하나는 유화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호전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케네디의 참모들은 거의  후자가 진의를 담은 것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미국의 주소련 대사였던 르웰린 톰슨 Jr 는 소련의 대통령을 잘 알고있는, 심지어 한 때 후르쇼프 부부와 함께 살았던 기간도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케네디에게 암만봐도 두가지 메시지 중 그의 성품으로 보아 유화적인 것이 소련 대통령의 진의이고 아마도 호전적인 것은 그의 장성들의 마음을 다루기 위한 제스쳐의 한 방편 이었을 것이라고 조언 했다. 케네디는 톰슨의 말에 귀 기울였고 후르쇼프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말로 진정시키게 되었고 결과는 완전히 뒤 바뀌게 되었다. 만약 당시에 톰슨이 그자리에 없어서 무엇이 진정한 대화의 진의이고 아닌 지를 분별할 수 없었더라면 세계사에 어마어마한 비극을 초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듣는 이에게 소통하시는 하나님가정의 부모나 사회의 리더들은 정직하고 열린, 그리고 존경어린 소통을 세워 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잘 듣는 것을 포함한다. 이삭의 가정에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뼈아픈 고통은 대를 이어 대가를 치렀다. 이는 언제든, 우리에게 비극으로 다가 올 수 있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화가 나면 입을 닫고 속으로 분노를 쌓기보다, 소통으로 오해를 풀어 나가는 리더가 되어야 하겠다. 무엇 보다, 이것이 인간을 창조한 신의 관계 방법이기 때문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06/10/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지난 월요일, 유대인의 신년(5783년)이 시작 되었다. ‘로쉬 하샤나’로 불리는 신년은 또한 ‘욤 하민’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 뜻은 ‘심판의 날’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새해가 사과나 석류와 같은 과일들을 꿀에 찍어 먹는데, 풍성하고도 즐거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 때, 이들이 읽는 토라 포션은 ‘회개’에 관한 것이다(신명기 29, 30장). 이들은 풍성하고 달콤한 한 해를 맞이 하기 위해서 열흘 동안 쓴디 쓴 회개의 시간을보내야,  생명책에 기록 된다는 ‘대 속죄일’을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절기를 수 천년동안 맞이하고 있다.  성전 시대의 희생 제사 이 역설의 절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대표적 현자라고 불리는 마이모니데스와 나흐마니데스는 상당히 다른 가르침을 말하고 있어 더욱 회개의 의미를 깊이 발견하게 한다. 1. 마이모니데스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는 부정정인 것과 긍정적인 교훈의 양면이 담겨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일부러 또는 모르고 죄를 범했을 때는 민수기4:6-7절에 있는 것 처럼, “ 그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고백한다(confess in words)’는 말은 입으로 말한다는 의미이고 계명의 긍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내가 심각한 죄를 범했고 간청합니다. 주여, 저는 괴퍅스럽게 행동했고 주께 범죄 한것을 회개하며 수치스러움을 후회하며 다시는 이런일을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이 회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더욱 세세하고 완전하게 회개할수록 그것이 더욱 가치있는 회개의 자세라고 덧붙였다. 마이모니데스는 회개의 근원을 ‘성전’과 ‘제사’에 두었다. 고백의 진정성을 1.잘못을 인정하고, 2.수치를 후회하고 3. 결단하고 다시 범죄 하지 않는 것이 포함 될 때 회개가 온전해진다고 간주했다.  그렇다면 성전이 파괴되고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례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에대해 마이모니데스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도, 밖에서  제사 의례를 죄에 대한 말의 고백(Vidui)이 대신한다고 보았다. Vidui가 외적 행동이라면, 회개는 내적인 연계성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성전과 희생 제물 없이도 두가지 요소를 충족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셈이다. 진정한 회개-결단2. 나흐마니데스  이에 반해 나흐마니데스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주장 했는데, 신년의 토라 포션인 신명기 30장1-10의 “ 하나님이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고 잘못한자들이 흩어졌다고 회개하고 한다면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구절들을 인용하여 이 토라 포션의 의미는 ‘Lashuv’가 Teshuva의 어원으로 회복과 귀환의 의미를 가졌다고 보았다. 그는 ‘죄’의 의미를 1. 타겟을 벗어 났다는 것과 2. 가지 말라야 할 곳에 갔다는 ‘장소’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래서 가장 큰 죄에 대한 ‘벌’을 ‘축출’로 보았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가인이 영원한 방황자로 저주 받을 것을 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의 땅에서 쫓겨 났다”는 기도문을 낭송하곤 하는 데 이것이 잘못된 곳에서의 행동이 집이 아닌 유배지의 삶으로 결과 지어진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죄는 신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과 유배자가 되게 한다. 그래서 ‘회개’는 물리적으로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적인 ‘양면의 귀환’을 담고 있다고 탈무드는 강조한다. 회개의 시작 – 고백마이모니데스는 죄와 회개는 제사장의 영역에 있는 제사와 예배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가장 좋은 예는 대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반면, 나흐마니데스는 회개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휩쓰는 넓은 개념으로 제사장 보다는 선지자의 세계의 의미로 보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백성들의 잘못을 경고했고, 불순종의 결과로 패배와 축출을 맞이 하게 되곤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일들로 돌아가는 것을 그들의 땅으로 귀한하는 서곡으로 간주하곤 했다. 각 개인의 회개가 쌓이고 나라가 귀환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 면에서 회개는 속죄 보다는 귀환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성전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촛점을 두고 있고 개인을 넘어 유대인 공동체적인 사건(네가 어디 있느냐?) 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유대인의 신년의 인사-  풍성하고 탈콤한 새해 되세요!3. 회개의 양면죄의 첫번 째 제사장적 감정은 ‘죄책’이고 선지자적인 감정은 ‘멀어짐’이다. 제사장에게는 속죄와 성결을 위한 ‘희생 제사’가 연결되고, 선지자에게는 ‘행동의 변화’로 치유와 회복이 직결된다.  제사장에게는 먼저 개인의 속죄를 요구하는 수동적인 의미로, 선지자에겐 민족 전체가 돌아오는 능동적의미로 적용되고 있다. 이는 개인이 죄를 짖고 ‘회개’ 하고 민족이 ‘유배’를 당하고 ‘귀환’ 하는 패턴을 가졌다. “ (신 30: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하고 계명이기 보다는 예언과 약속을 담보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벤 구리온의 독립선포그런 면에서, 마이모니데스와 나흐마니데스는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토라의 ‘회개’의 양면을 더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는 제사장과 선지자간의 마찰이 없고 두가지 목소리이지만 한가지 대화를 구성하고 있다. 탈무드는 이스라엘의 제2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과 선지자의 양 시대가 끝났지만, ‘회개’의 양면성이 하나로 합해지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지금도 대 속죄일에는 예배와 고백과 자선이 병행되고 있다. 그날 아침에 부르는 ‘회개’의 노래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 나의 금식은 가난한자와 나그네와 이방을 돌아보는 진정한 회개가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될 것이라” 는 ‘진정성’과 요나의 ‘이방’에 대한 ‘축복’과 우상 바알을 대항한 엘리야의 갈멜산의 ‘하나님의 승리’가 선포된다. 유대인의 신년의 회개는 마이모니데스의 ‘죄’와 ‘속죄’, 나흐마니데스의 ‘유배’와 ‘귀환’ 의 역설적인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을 향한 성결과 회복의 축복을 담고 있다. 현자들은 “ 이제 성전은 사라지고 선지자의 시대도 끝났다. 회당이 성전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다른 나라가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탈무드는 20세기에 들어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2000년동안의 방황이 끝나고 고토로의 귀환이 현실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이제 땅과 민족이 회복되는 물리적 귀환이 이루어 졌다면, 이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귀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유대인의 귀환달콤하고 풍성한 삶을 기재하는 신년에 유대인들은 회개로 새해를 열고 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축복을 금식하며 맞이하는 것이다. 사뭇 수천년 동안 보이지 않는 그들의 기도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데도, 자비한 신은 올해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뭇 세상에 흘러가게 하신다. 모든 사람의 영적 귀환을 위해서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29/09/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우리가 즐기는 홍콩 영화나 서부 영화의 주제는 대체로 ‘원수’ 갚는 일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데 희열을 느끼고 의당 그런 결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흥행의 중요 요소 이기도 하다. ‘복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원한을 속 시원히 푸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하지만, 좌측부터 영화 대부 – 마피아 세계의 복수와 응징 / 중국 영화-복수 / 복수 주제의 영화1. ‘복수하지 말라’성경에서는 ‘복수’를 분명한 어조로 금하고 있다. 레위기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또한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큰 계명이 뭐냐고 물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8-41)” 고 가장 큰 계명으로 소개한 성경의 핵심 구절이기도하다.  토라는 요셉을 통해 그를 죽이려던 형제를 복수하기 보다 대신 용서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대속죄일에 유대인들은 ‘용서’를 구하며 새해를 맞이 하도록 법률로 정해 절기를 지킨다.고문과 살상의 잔재들-킬링필드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어떤 사람이 원한을 오래 마음에 담고 있으면, 언젠가 복수를 하려고 하게 된다. 토라는 원한을 품지 말라고 엄격하게 경고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감정이 전부 제거되고 더 이상 기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것이 사회와 사람이 서로 관계(Human interaction)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원리라고 그는 설명했다. 탈무드는 여기서, 마이모니데스가 관계를 말할 때, 유대인의 관계를 지칭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모든 인류가 그렇게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희생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2. 사상가들의 견해‘신의 복수’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세명의 유명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잰 아스만과 헨리 애틀란, 미로슬라브 폴프라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잰 아스만은 성경에 소개되는 히브리적 문명과 고대 문명을 비교했다. 그는 ‘왕’은 신적 속성을 갖는다고 보았고 왕의 분노는 곧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다. 신의 분노는 왕의 분노를 정당화하곤 했다. 그래서 원수들에 대한 왕의 복수는 신의 일이라고 간주했다. 폭력은 종교적인 제제를 받곤했다. 성경은 대조적으로, 세상의 왕과 신 사이에는 연결 될 수 없는 큰 거리감이 있다고 보았다. 분노는 신학화되고 그래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전송된다고 보았다. 아틀란은 비슷한 관점에서, “세상의 폭력을 신성하게 처리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초월의 세계로 가도록 이를 사람이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러므로, “폭력의 초월성은 결국 세상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 축출되는것이다”라고 보았다. 다른 말로하면 복수가 인간의 셈법에서 사라졌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만 복수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인식이다. 성경엔 분명하게 사람에게 신이 복수를 행하라고 명령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아말렉과 미디안 족속을 멸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2성전이 무너지면서 예언의 시대가 종료되자, 이 두사건 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유일한 사건들로 남게 되었다.요셉의 용서 볼프는 이러한 분석에 동조하는데 더해서, 폭력이 존재하는 세상에선 하나님과 사람의 두가지 폭력으로부터 모두 도망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비폭력성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오히려, 그들 스스로 폭력을 절제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과는 무관한 분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사람의 손에 심판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폭력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고 심판의 칼을 사용하지 않는 신을 믿음으로 인해서 더 은밀하게 커가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신적 복수를 믿으며 비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별 인기가 없고 특히나 서구의 신학자들에겐 더하다” 고 주장했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전쟁으로 실제의 폭력을 마주 대했던 볼프는 동일한 성경의 문맥을 보면서도 아주 다른 생각을 표출해 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면 안된다. 하지만 곧 사람의 비폭력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거절이라고 인식되게 되었다. 전쟁에서 사람들은 약탈하고, 태우고, 모든걸 파괴시켰다. 딸과 자매들이 강간을 당하고 남자들은 목이 베였다. 저주받은 땅에는 선량한 피가 적셔들었고 모든 것을 죽게했다.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용서3. 복수하지 않는 유대인 이 일들은, 중세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의 어린이들의 피를 먹고 우물에 독을 뿌리고 신성을 더럽힌다고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살한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전 파괴의 날(Tisha B’Av)에 듣는 애가는 지금도 죽은자들의 신음의 소리를 듣게 한다. 그 신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복수에 항변하고 있다. 이에대해, 탈무드는 “유대인들은 복수하지 않는다. 믿음은 이것을 하나님께 유보하는 것이다. 복수는 오늘 하루를 마감하며 이 편 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이 땅에서는 당분간 충분히 살수 있는 삶을 확인하고, 다른 것 보다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진 믿음으로 영원한 삶을 맞이 할 때 진정한 ‘정의’의 내실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유대인들은 2차세계 대전에서 6백만명이 죽고 그 중 백오십만명의 어린아이들이 죽어간 홀로 코스트를 뒤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말고 세상을 치료하자(Not Revenge, but repair the world )” 는 슬로건을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완전한 정의를 이 땅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 복수를 유보하는 것이다. 여러 민족이 때로,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채운 갈등의 세상에서, 복수하는 것이 정의의 구현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탈무드는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께 남겨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인류는 홍수를 맞이 해야 했고 하나님은 세상에 인간을 만든 것을 가슴아프게 후회했다(창세기6:6)”고 경고하고 있다.예수의 제자인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 12:20)고 상기시켰다. 복수는 하나님께 속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된 수 많은 복수가 역사 속에 산재해 있다. 복수할 권한 없이 기대하는 진정한 ‘정의’는, 저 끝 온전히 하나님의 신적 영역에 속한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감당되지 않는 어려운 숙제이다. 또 다시 믿음이 중요한 이유이다. 샬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0-21).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22/09/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20세기 말 구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 시대가 끝나갈 때, 전 세계는 서구가 공유해 왔던 윤리가 이데올로기로 인해 상실되는 불안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집된 윤리없는 사회는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개인주의는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은 더 이상 공공의 선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았다. 공동체적 책임감은 뒷전이 되고 공공의 삶을 보호하는 힘의 결집엔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최초의 역사학자로 불리는 헤로도투스  1. 현대 유대인의 정체성구 소련 지역에 살던 현대 유대인 철학자들은 전체주의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몸서리치게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부터의 탈출은 고대 이집트로부터의 출애굽과 같은 개인적 기억을 갖게 하였다.  유대교는 노예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여정에 태동된 종교이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 자녀들이 유월절과 그들이 먹는 절기 음식을 통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 유대인의 현자라 불리는 이사야 벌린 경은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역사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지속적인 공동체로 생존한 오랜 역사를 기억한다.  어떠한 요소가 독특한 혼합체를 구성하는 것에 상관없이, 세상은 과거의 지속적인 역사 속에서 그들이 가장 질기게 살아남은 민족으로 인정을 하는데 큰 이견이 없다.” 탈무드는 “이 말은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생략된 중요한 구별점이 있다고 첨언한다. 그것은 “그들이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신을 발견한 민족”이라는 점이다. 유대인들 이야말로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변함 없는 수레바퀴를 역사성 안에 가정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최초의 역사학자로 알려진 헤로도토스나 그리스 역사학자인 투키디데스보다 오히려 더 먼저 처음 역사를 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적 히브리어에는 ‘역사’라는 말이 없고 대신 어근 ‘Zakhor’라 불리는 ‘기억’ 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대신 쓰여지고 있다.  이 말이 신명기에는 ‘기억하라’는 의미로 스물 한번 나오고, ‘잊지말라’는 의미로 열네번이 쓰였다. 역사의 기록과 탐구현자들은 근본적으로 ‘역사’와 ‘기억’에는 그 의미에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역사는 어느 시대의 제 3자로서의 ‘그의 이야기’인 반면 ‘기억’은 1인칭으로 ‘나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과거가 내면화되고 나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것란 말이다. 역사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에 대한 대답이지만 기억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탈무드는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를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치매처럼, 개인의 기억의 상실은 개인의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2. ‘역사’가 ‘기억’이 될 때‘키 타보’라는 말은 그런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는 성전에 바치는 첫 열매를 의미한다. 미쉬나(비쿠림) 3:4는 이스라엘 각지로부터 과실을 들고 음악과 축제로 기뻐하며 모여든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과실만 들고 오는 것 뿐 아니라 이 때 각 사람은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해야 했다. 그들의 선포는 원래 오순절에 시작했지만, 나중에 유월절의 하가다에 들어가는 가장 잘 알려진 구절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방황하는 아람인이었다. 그가 이집트로 내려갔고 소수의 사람들과 거기서 살았고 나중에 거대한 나라가 되었다. ..”고 신명기의  출애굽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나라의 과거를 되뇌이는 것이 모든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비두이 버쿠림’ 이라 알려진 이 말은 ‘첫 열매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역사와 현재이는 간단하면서도 필수적이지만, 과거엔 읽혀지거나, 소리내어 고백되지 않았었다. 짧으면서도 함축적으로 나라의 전체 역사가 정리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 메소포타미아의 원 조상들은, 신비적인 선사 시대로서가 아닌, 역사의 한 가운데로 히브리 국가가 접속되었고, 이집트에서의  노예에서 자유로, 다른 기후의 이스라엘 땅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증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시작된 움직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끄집어 내었다” 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기억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탈무드는 이것이 역사가 내면화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를 현자들이 미쉬나에 “ 모든 세대의, 모든 개인은 이집트로부터 개인적인 출애굽을 한 것으로 인식해야한다(미쉬나 페사힘10:5)”는 말로 유대인 모두의 정체성에 각인되도록 기록하게 되었다.  통곡의 벽- 역사의 기억과 교육3. 정체성의 지속성이는 유대인들에게 그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조상들이 무엇을 기억했고, 그것이 나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개인의 기억에 의해 구성된다. 그룹의 정체성도 역시 공동체의 기억으로 형성된다. 그저 미미한 스토리 텔링이 정기적인 종교적 의무로 전수된 유대인의 정체성은 수세기동안 지속되었다. 심지어 나라도 없고 땅도 지역적 친소성도 독립도, 주권도 없는 상태에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이집트와는 상반되는 삶의 의미와 방향성과 공동체적인 자유와 정의와 생명의 존엄의, 사람이 주권자가 아님 하나님이 ‘왕’인 사회가 건설되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절 속에서도 교육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어떤 이야기에 내가 속해 있는 가에 있다. 모세는 자신들이 어느 이야기에 속해 있는 지 잊지말 것을 당부했다. 유대인들은 세상에 대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지속적으로 말해 온 민족이다. 탈무드는 이것이 유대인의 정체성이 부요하고 공명이 있게 만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 용량은 날로 커져가지만 사람의 기억 능력은 점차 메말라가고 있다. 역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때 찾아 볼 수 있도록 컴퓨터로 대신할 수 있지만 기억은 대체 할 수 없다. 기억은 전수되지 않고, 전수될 수 없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되게 하는 것이다. 탈무드는 만약 민족적 정체성이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때마다 기억을 새롭게하고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려 한 것이고 유대인들이 대대로 전수해 온 것들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강조하는 제목이다.  역사 속으로 오신 예수21세기, 국적을 쉽게 넘나드는 글로벌 시대에도 국가적인 기억은 너무나 소중하다. 윈스톤 처칠은 ‘더 길게 되돌아 볼수록, 더 길게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은 역사가 되었고 그들의 기억이 되고 정체성이 되었다. 2000년전 오랜 역사 속에 예수는 동일한 약속을 위해 이 땅에 살았다.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백성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역사는 기억으로, 기억은 믿음을 바탕으로 시대마다 내면화 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세워가는 신의 변함없는 손길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샬롬!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15/09/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모세의 시대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았었다. 극심한 노역을 강요하고 히브리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태어나는 갓난 남아를 모두 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을 내려 대량 학살을 시행하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시점에 모세는 아무일도 일어 나지 않았던 듯,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환대에 빚을 진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모세는 한편 출애굽을 하며,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으며 이것을 기억하여 미래 세대에 잊지않고 전해지도록 하기 위한 내재된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를 향해가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전하는 ‘이집트 사람들을 미워 하지 말라’는 앞 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유월절의 무교병과 쓴나물1. 자유의 역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진정 자유하고 싶다면, 미움이 떠나가게 해야 한다.’ 는 것이 모세의 강조점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한 원수인 그들을 미워한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고 나왔지만, 결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이집트를 끄집어 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그들은 아직 이집트에 과거의 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직도 쇠사슬이 아닌 마음의 더 끊기 어려운 강한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미움의 바탕 위에서는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 분노와 원망, 모욕과 불공정의 불만으로 과거의 핍박자에게 상처를 가하는 것은 자유를 저해하는 확연한 결핍 요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탈무드는 “우리는 과거와 함께 살아야한다. 그러나 과거 속에 살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과거의 핍박자에 대해 노여움으로 매여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종’일 뿐이다. 이는 과거에 자신을 ‘종’이라고 명명했던 원수들로부터 아직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이다.” 라고 첨언하고 있다. 아간의 죽음과 율법의 엄중함모세가 말한 “네가 이집트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명기15:15)” 는 말은 미움과 복수, 앙갚음과 같은 것을 유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이집트를 기억하며, 종살이를 제한 하라는 것이다. 과한 노역을 부과하지 말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고 7일 째엔 꼭 쉬게 하고, 7년차엔 그들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 자신 처럼 그들을 인정하고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지 말라. 어느 누구도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토라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주라. 추수에서 남은 것들을 먹게 하라. 밭의 한 귀퉁이를 남겨 두라. 너의 축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 남의 생업의 자산을 갈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토라의 법규의 총체적 구조는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깊이 연관돼 있다. 네가 마치 핍박의 피해자로서 마음에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지 말라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 토라의 윤리는 우리가 미움을 보존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기억함으로 과거를 정복 하는 것이다. 과거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해 기억하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2. 하나님의 역설모세가 불타는 숲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로 이끌라는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여기에 기이한 예언을 보탠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온 패물과 금,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애굽기 3:21-22)”이 말은 11장과12장에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된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에스더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원수들로부터 전리품을 챙기고 망치고, 약탈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난처한 상황이 전개된다. 우상 숭배를 한 경우 그들의 재산은 부정하고 불경건하고 파쇠되어야 하고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숨긴 것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호된 벌을 받았다. 출애굽하며 받은 금은 나중에 우상인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에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왜 중요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외된 자들에게 남겨진 곡식탈무드는 종을 풀어 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종에겐 ‘종으로서의 스토리의 종결’이 필요하다.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종은 과거의 주인으로부터 적대감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모멸감이나, 분노, 복수심을 갖고 떠나서는 안된다. 만약 그런 상태로라면 몸은 풀려 났어도 정신적으로 그는 아직 노예 상태일 뿐이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이유는 종의 상처를 싸매는 토라의 심리적 통찰력이 배어있다. 노예들에겐 필연적으로 치유되어야 영혼의 상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송별 선물을 받으라고 한 것은 이는 마치 하나님이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종으로 삼았지만 이제 그것이 과거가 되게 하려고 한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제 “네가 미움으로 복수를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종 일 때 가졌던 고통이지 과거 주인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아니다. 이를 위해선 상징적인 종결이 필요한 하나님의 역설이 담겨 있다. 쇠사슬의 결박3. 미움과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고 지난 세월의 상실된 자유는 회복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부정할 수 없고 기억의 회로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 지우려 하면 할 수록 더 생생히 과거가 되돌아오고 극단의 마음으로 상대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생각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주인은 떠나는 종에게 선물을 줘서 마무리를 해야한다. 이제 종은 충분히 공헌을 했고 당당한 한 자유인으로서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인정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보상의 정의라 불리는 ‘피해 보상’과 같다.  자유를 향한 갈망탈무드는 ‘미움과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은 과거의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다. 아직도 미워하고 있다면 아직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핍박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핍박 받은 사람들의 과거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유는 미움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반대로 자유로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에는 과거로부터의 종된 삶의 확연한 청산과,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고 새로이 건설할 미래의 가정과 나라를 향한 신적 통찰이 담겨져 있다.자유하기 위해서는 미움을 떠나 보내야 한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08/09/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12세기의 추앙 받는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명기 31:19)”고 한 모세의 말을 기초로 ‘모든 이스라엘 남성은 자신 스스로의 토라 두루마리를 써야한다’ 고 강조했다. 가령 부모로부터 토라 두루마리를 유산으로 받았다 하더라도,  마치 시내산에서 직접 토라를 받은 것처럼 자신의 것으로 써야 한다는 뜻이다. 모세는 여러 율법 가운데 이 조항을 마지막 것으로 남겼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해야할 각별한 지침이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1. 모세의 마지막 율법이는 특별히 후진들과 미래 세대들에게, 조상이 이미 시내산으로부터 토라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매 세대마다 새로 받고 더욱 새롭게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슬람의 쿠란은 유대인을 ‘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탈무드는 유대교 전체는 사람과 책이, 곧 유대인들과 토라 사이의 확장된 사랑 이야기 라고 간주한다. 유대인은 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민족이다. 읽고, 연구하고  논쟁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마치 토라가 왕인 것처럼 여겨 왔다. 장막절 바로 후의 심캇 토라 때 유대인들은 두루마리가 마치, 신부인 것처럼 회당 안에서 시작해서 춤을 추며 회당 뜰에 나가 오랜 시간 두루마리와 함께 둥글게 돌며 춤추고, 그 이후엔 음식을 나누며 명절처럼 이날을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수 천년 동안, 후대의 현자들은 모세 오경으로부터 마지막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토라의 주석을 써 왔고, 특히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는  ‘ 나의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규례와 법, 나의 종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 고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또 천 여년이 흐르고 마지막 선지서와 바벨론 탈무드 사에엔 유대교의 마드라쉬와 미쉬나 그리고 게마라와같은 전승이 지속적으로 문서 유형으로 계승되었다. 말씀을 필사하는 유대인그리고 또 오랜 세월동안 주석에 대한 또 다른 주석을 성경 주해와 법 코드와 철학적 방법으로 발전시켜 왔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대적 문서는 직간접으로 토라에 대한 주석으로 쓰여져 온 셈이다. 수백년의 세대를 거쳐, 이는 그저 여느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러브레터였고, 선물이며, 결코 파기하거나 철회하지 않는 결혼 서약서와 같은 소중한 문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로서 쓰여진 헌법이며 그 나라 백성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약속된 땅으로부터 흩어질 때 이는 과거의 증거 문서가 되었고 미래의 소망이 되었다. 말씀에 열중하는 유대인 소년2. 토라는 고향집시인 하인드리히 하인은 토라를 ‘유대인들의 고향집’이라고 불렀다. 죠지 스타이너는 ‘토라는 모든 주석이 귀환하는 집이다’라고 표현했다. 현자들은 비록 흩어지고, 영토 없이 떠도는 힘 없는 민족이었지만 그들에겐 영적인 집이 있었다라고 보았다. 유대인들에겐 말씀 만이 전부인 시기가 있었다. 11세기 라비누 게르솜에 의해 쓰여진 대속죄일의 규례로 읽혀지는 시는 이렇게 마음을 찢는 구절로 읽혀지고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토라만 남았네”라고.. 그들은 집도, 안전도, 자유도, 오직 책 한권만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고 탈무드는 상기시킨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었다. 한 미드라쉬에 의하면, 토라가 바로 창조의 골격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먼저 토라를 두고 그리고 우주를 창조 했다”는 것이다. 전체 토라는 원래 하나였고 ‘바로 신비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보는 전통적 견해도 있다. ‘하나님이 곧 토라’이다라는 의미이다. 또 이는 하얀 불 속에 담겨진 까만 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Y Shekalim 6:1). R.Yose 키스마는 토라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로마인들에게 붙잡혀 토라 두루마리로 싸여진 채로 불태워 죽었다. 죽어가는 스승을 보던 제자가 그가 무엇을 보는 지를 물었다. 그러자 스승이 “ 나는 양피지가 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글자들은 공중에 하늘을 날고 있었다 (Avoda Zara 18a)”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록 로마인들이 두루마리를 태워도 결코 토라를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을 대변하는 일화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3. 생명으로의 토라 모세가 그의 삶의 마지막이 가깝고, 토라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마지막 명령은 자연히 계속 쓰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들의 입에 말씀이 있게 하고 그들이 결코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같이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탈무드는 다윗 왕이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는 지를 하나님께 물었던 스토리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그것은 운명에 달린 것으로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 대답하였지만 한가지 그가 안식일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귀뜸해 주셨다. 탈무드는 다윗이 사는 동안 매 안식일에 토라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어느날 다윗이 죽을 때가 다가오자 죽음의 천사가 파송 되었지만, 다윗이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토라를 열중해서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결국 천사는 특별한 전략을 세웠는데, 왕궁 나무 꼭대기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다윗이 궁금해서 사다리에  올라 그것을 보려 했는데 그만 한 쪽 사다리가 부서진 것을 모르고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공부하는 걸 잠시 멈춘 그 때에 비로소 죽게 되었다고 (Shabbat 30a-b) 전해지고 있다. 모세가 받은 하나님 말씀(영화 장면)탈무드의 현자들은 다윗 왕이 전쟁에 용맹한 전사이고 위대한 왕이기 보다는 참회하는 토라애찬가로서 그를 묘사하려 한 것을 엿 볼 수 있다. 실제 그는 많은 시편을 남겼고 말씀을 노래하였다. 다윗왕을 통해, 유대인들이 토라를 공부하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탈무드는 힘을 싣는다.     토라는 계속 쓰고 공부 하라는 모세의 마지막 명령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정신은 심캇 토라 때에 마지막 성경 묵상을 마치자마자 그 날 다시 처음 부터 모세오경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전통으로 계승하고 있다. 토라의 마지막 말과 처음 히브리 단어는 ‘Heart’라는의미로 읽혀진다. 탈무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유대인의 심장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요약한다.    이정표이를 확증이라도 하듯, 신약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요한은 그 역시 유대인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1:1-4)” 라고 어디에 생명이 있는 지 그의 책 서두에 이 말을 적었다. 생명이 위태위태한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어디에 들려 충전을 해야 할 지 탈무드는, 분명한 이정표를 세대를 거쳐 친절히 마련해 두고 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01/09/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윤리적 관념에 엄격한 토라는 수 많은 율법의 규정으로 삶이 경직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일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중압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탈무드는 세상의 시각과 달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사랑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그것이 신명기서에 담겨 있는 윤리의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요셉의 용서와 형제들1. 사랑의 하나님“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신명기7:12-13)”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각시킨다.  (신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신 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신 4: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이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은 오직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그의 용서2. 내재된 하나님의 사랑 탈무드는 ‘모세의 율법 책의 총정리’로 불려지는 신명기서가 오히려 사랑의 언어로 적셔져 있다고 평가한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근인 ‘AHV’가 출애굽기에 두번 , 레위기에 두번, 민수기에는 아예 없지만 신명기에는 23번이나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신명기는 사회적인 축복과 변환을 가능케하는 사랑의 능력을 담은 책이라고 탈무드는 자랑하듯 답한다. 흔히 기독교를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고 평하는 반면, 유대교는 법과 인과 응보의 종교라고 비교를 한다.  하지만 탈무드는 그저 유화적 태도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용서의 분명한 관념을 표출한 것은 유대교에 명백한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 간의 용서는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그의 형제들을 용서했을 때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용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 민족 전체에게 죄 사함의 초월적 대속죄일이 유대력의 절기로 태동되는 성경적 사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유사하게 신약 성경에서 사랑에 관해 표현할 때도, 가장 핵심적인 구절로 신명기 6:5 의 주 너의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레위기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19장 말씀을 직접 인용하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추방철학자 해리 레드너는 윤리를 크게 네가지로 구분했는데, 1. 시민 윤리는 그리스와 로마의 도덕 관념을 2. 의무의 윤리는 유교, 크리스나이즘, 스토아 철학을 들었고 3. 명예의 윤리로서는 페르시아, 아랍, 투르크과 이슬람과 기독교를 그 유형으로 구분 하였다. 네번째로 구별한 것은 그가 간단하게 ‘윤리’라고 불렀는데 레위기와 신명기서에서 그 원형을 찾았다. 그는 그 윤리를 ‘사랑의 윤리’라고 부르고 서구의 윤리의 독특성을 대변한다고 했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은 아주 특별한 유형의 사랑으로 세상의 개념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극도로 이타적인 개념으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없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뭇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고 대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불교가 유사한 이타적 사랑의 개념을 갖고 있지만, 타인 보다는 개인적인 수행에 집중하고  유일신과는 그 관계성이 발전되지 않는 종교성을 가졌다. ‘유교’ 역시 윤리의 의무로 사회 속에 타인과 함께 이루어가는 사회성에 대한 중요한 강조점을 가졌지만, 존재하는 신과 사랑의 교류가 없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용서- 욤 키프르3. 탈무드의 사랑의 윤리탈무드는 토라의 윤리를 평가하는데 있어, 첫째, 고대의 어느 종교와 달리 거칠거나 인류애에 있어 부족함 없는 실제성을 갖고 있었고, 신이 직접 인간의 존재, 보살핌과 행복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둘째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모델을 보여주셨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사랑을 기반한 친절과 긍휼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근본 명제로 삼고있다고 부연한다.  신명기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10:18-19)”토라탈무드는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요청하신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와 가인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반문한다. 사실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과 아브라함이 간청했던 소돔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고 심판받고 흐트러지고 결국 멸망 당하고 말았다. 성경에 겨우 처음 등장하는 신의 용서의 사건은 시내산에서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한 하나님께 모세가 간절히 기도 드려서 용서를 받은 것을 대 속죄일로 기념하게 된 것이라고 되짚는다. 왜 그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까? 에 대한 탈무드의 대답은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를 용서할 때까지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창세기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이후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시작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고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레아는 야곱을 사랑하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또 요셉을 사랑했다. 그러한 사랑의 이야기는 창세기에 넘쳐난다. 하지만 창세기의 거의 모든 사랑 이야기는 불화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야곱과 에서, 라헬과 레아, 그리고 요셉과 형제들은 모두 서로에게 긴장된 관계들이다. 창세기에 드러난 사랑으로는 진정한 사랑의 사회를 건설 할 수 없었다. 흔히 ‘아가페’ 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사회를 위해서는 아직 불충분한 것들이었다고 평가한다. 그것들은 갈라질 수도 있고 혹 연합할 수도 있는 불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그런 면에서, 앞서 말한 ‘네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그저 기계적으로 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각 개인이 필요로 하고 관심을 갖고 존경의 관계로 접어들게 하는 그런 정의를 말한다. 탈무드는 모든 이웃은 사랑의 법 앞에 동등하게 인식되어야 하고, 그래서 정의와 사랑은 결코 떼래야 뗼 수 없는 상호 관계라고 설명한다.   정의 없는 사랑은 경쟁적이 되고 결국 미워하는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긍휼과 자비의 힘을 사라지게 한다. 세상엔 이 모두가 있어야 한다. 이런 독특한 윤리적 비전, 즉 이웃과 나그네  모두를 향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 바로 탈무드가 주목하는 ‘사회 윤리의 밑 그림’이다.  토라는 ‘율법으로서의 사랑’과 ‘사랑으로서의 율법’이 동시에 담긴 ‘하나님의 청사진 ’이다. 샬롬!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25/08/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

자식은 어느 부모에게나 소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지 중지 키우는 아들이 패악한 경우, 탈무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격한 체벌 기준을 세워 두고 있다. 이는 현자들 사이에 율법의 원리와 적용 방식에 대해 상당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그 안에는 율법에 대한 신의 의도와 사랑하는 아들의 죄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 어떤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담겼다. 문제의 율법은 신명기에 담긴 다음의 구절들이다. 돈을 탕진하는 방탕한 아들“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신 21: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신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기21:18-21)”방탕한 아들1. 랍비들의 다른 의견랍비 R. 시몬, 요하이는 “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결코 없었고, 또한 앞으로도 존재 하지 않는다” 라는 확연한 주장을 펼쳤다.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법은 상세한 해석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이 율법은 법적 행동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안의 심각성을 보여 줘서 궁극적으로, 아들이 행실을 고치게 하기 위한, 실제이기보다 상징적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탈무드적 해석은 이런 일이 일어 날 때 해석을 불가피 하지 않도록 상당히 제한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산헤드린은 이런 경우에 대해,아들이 3개월 이내라는 교정 기간이 충족 돼야하고, 부모에게서 돈을 훔쳐야하고, 반드시 어느 정량의 고기와 고급 와인을 자기 부모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한꺼번에 먹고 마셔야 한다(산헤드린68b-71a) 는 규정을 두고 있다. 사실 이러한 법령은 세워져 있긴 하지만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불가능한 조건들이 오히려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랍비들은 평가 한다. 탕진한 아들의 비참함반면, R.요세 같은 랍비는 “ 토라가 못돼먹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훔치고 탕진한 경우 차라리 자신들과 세상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미래적 운명을 예시한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그가 한 일 보다 앞으로 그가 될 미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고 이로인해 이런 범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랍비 요세와 요나이의 견해 차이는 토라의 정의 구현에 있어 체벌이 곧 억제라는 것에 대한 이해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돌아온 탕자2. 칸트와 벤담의 견해계몽주의 시대에, 도덕의 원리에 대해서 임마누엘 칸트와 제레미 벤담의 논쟁은 잘 알려진 사례이다. 칸트가 ‘도덕은 의무’라고 본 반면, 벤담은 ‘결과’라고 간주했다. 칸트는 정의는 인과응보이고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을 범한 사람이 벌을 받고 사회에 도덕적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벤담은 사회에 결과적으로 최선이 된다면 그 행동은 정의가 된다는 공리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런 면에서 정의는 과거이기 보다 미래적이고 결과적으로 범죄가 줄어든다면,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견해 이다. 이 두견해는 현실에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 났는데, 벤담은 결과적으로 전체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면 체벌은 면제될 수 있다고 본 반면, 칸트는 체벌이 가해 지지 않은 범법은 정의가 구현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요하이와 요세가 정의에 대해 경고적 상징성과 인과 응보로 견해가 나뉜 것같은 맥락이다. 성경은 패역하고 완악한 인물로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스마엘을 등장 시킨다. 3.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성경에, 사라는 90의 늦은 나이에 이삭을 낳았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10대의 장남 이스마엘이 있었다. 사라가 어느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고 토라가 기록하는데, 랍비들은 이 ‘조롱’이란 단어를 ‘ 중대 범죄’로 보았고 결과적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뜨거운 광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숲가에 둔 하갈은 하늘을 향해 “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외쳤고 성경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천사가 나타나 ‘ 거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축복을 약속하며, 샘터로부터 물을 얻고 소생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몬 요하이는 이런 하나님을 ‘현재에 의를 행하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맥락으로 탈무드는 ‘각 사람들은 그 때의  행동으로 판단을 받고, 하나님은 그 소년의 소리를 현재 있는 그 곳에서 듣는다(로쉬하샤나16b)’ 라고 기록하고 있다. 쫒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이스마엘은 성경의 첫번 째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이고, 성경이 말하듯 ‘후에 거친 나귀가 될 것’이라는 미래적 판단으로 아버지와 계모(사라)로 부터 거절을 당했다. 미드라쉬는 이에 대해, 요세의 견해 보다는 시몬 요하이의 편을 들었다. 그것은 신의 정의는 미래의 범죄를 미리 예방 하려는데 중점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래에 어찌 될 것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신은 현재의 그들을 판단 하실 뿐이다.탈무드는 정의의 원리에는  ‘인간의 자유’가 그 저변에 있다고 가르친다. 청소년의 비행이 나중에 반드시 살인자로 자라갈 것이라는 확실성을 예견할 수 없듯이 인간에겐 자유가 있고, 패악하고 완악한 아들이라던, 이스마엘도 나중에 회개한 것을 탈무드(Bava Batra 16b)는 상기시키고 있다. 탈무드의 궁극적인 원리는 미래를 예단한 체벌과 심판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사회가 혼동에 빠지지만 담화가 없으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가 부재하게된다. 광야로 쫒겨난 하갈과 이스마엘4. 탕자 이야기이스마엘 이야기에 이어, 신약에 등장하는 탕자는 전형적인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일 것이다. 부자 아버지의 돈을 갖고 나가 탐닉한 삶으로 모두 탕진하고, 돼지나 먹는 주염열매를 먹으며 겨우 생존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종으로라도 살아야 겠다고 돌아 왔다. 그 때 아버지는 먼발치서 기다리던 아들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그를 맞았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화려한 옷을 입히며 아들의 지위를 서슴없이 인정해 주고 잔치를 베풀어 기쁨을 나눴다. 예수는 과거의 잘못에 체벌 보다는 돌아온 것 자체를 귀하게(의로)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천국의 모습으로 가르쳤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R. 시몬 요하이는  “처음부터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체벌 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자체를 정의로 간주하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용서가  정의의 더 근본적인 성경적 가치임을 발견하게 한다.   임마누엘 칸트탈무드는 과거의 잘못에 얽매여 허덕이는 많은 못난 아들들에게, 오히려 미래를 향한 위로와 소망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토라의 ‘정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샬롬!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18/08/2022
탈무드와 자녀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