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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한 수영장은 자연이 그려주는 대로 무엇이든 담아내는 좋은 화폭이 된다. 파란 하늘의 흰구름을, 먹구름을, 나무의 그림자를,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들을 그려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화사한 보라색 자카란다 꽃잎이 수영장 가득 떨어져서 한 폭의 모네의 그림을 보는듯 황홀경에 빠졌다. 지금은 분홍색 줄 장미의 꽃잎이 미풍에 날려 와서 하늘거리며 물 위에 가득 떠 있다. 가벼운 꽃잎은 물결이 이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니며 아름다움을 연출해 주고 있다. 어느덧 수영장은 장미의 향기로 가득해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부부 모두가 수영을 못하고 수영장을 바라만 보고 있다. 남편은 아예 물에서 뜨지도 못하는 수준이고 나는 겨우 물에서 뜨기는 하는데 숨을 쉬려면 이내 가라앉는다. 수영을 배울 때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가는 어려운 고비를 못 넘긴 탓이다. 물에서 걷기만 해도 운동이 된다고 하지만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기가 쉽지 않고 또 자주 다리에 쥐가 나서 힘들기도 하다. 이래저래 우리는 수영장 관리만 하고 손주들이 수영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고 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놀고 간다. 그럴 때면 시끌벅적, 첨벙첨벙 고함 소리와 함께 모처럼 집은 활기를 되찾는다.어느 날 무료하게 수영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어미 오리가 새끼를 여러 마리 거느리고 나들이를 나왔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물에서 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 것이다. 수영 강습을 하러 왔는지 더운 여름에 피서를 왔는지 모두가 물에 둥둥 떠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이곳을 어찌 알고 찾아왔을까 어디서 왔을까 어린 새끼들을 거느리고. 참으로 신기했다. 한동안 신나게 놀다가 어느새 어미 오리가 이만하면 충분히 놀았다 생각했는지 수영장 밖으로 나갔다. 새끼들은 더 놀고 싶으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엄마를 놓칠세라 물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어린 오리들의 짧은 다리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뭍으로 올라 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미가 수영장 난간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우왕좌왕 헤매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들어올 때는 호기 있게 들어왔는데 이런 난관이 있을 줄이야! 어미도 미처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보다. 저들이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기다려 주었는데 헤어 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새끼 오리들이 놀랄까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다가가 뜰채로 한 마리씩 꺼내 주었으나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오늘 우리가 베푼 작은 돌봄이 오리들에게는 구원의 생명선이 되었을 것 같다. 착한 일을 한 것 같아 온종일 흐뭇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지간히 혼이 났는지 그 후로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한 번 더 놀러 오면 좋으련만. 지금은 맑고 깨끗한 수영장이 나의 마음을 비쳐주는 거울이 되기도 하고 더위도 식혀주는 역할도 해주지만, 한 때는 매몰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수영장 근처의 큰 나무와 수양버들 가지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많은 낙엽을 떨어뜨렸다. 특히 가지나 나무 껍질같이 무거운 것은 쉽게 바닥에 가라앉았고, 청소하는 기계도 그것을 쉽게 제거하지 못했다. 매일 소독약을 뿌려도 여전히 이끼가 끼어, 물이 녹색으로 변해서 보기에도 지저분했다. 그래서 성가신 수영장을 메워버리려고 알아봤더니 그 일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나무부터 자른 후 수영장 전문가와 상의했다. 그의 조언에 따라 기계를 자동으로 대체하고 소독약 대신 소금으로 소독하도록 바꾸었더니 관리가 훨씬 쉬워졌다. 잘 모르면 전문가와 상의했어야 했는데 그 동안 참 미련하게 살았나 싶다. 이제는 수영만 할 줄 알면 된다. 수영장이 늘 곁에 있고 깨끗한 물이 우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내가 수영을 할 줄 모르나,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내 몸의 힘을 다 빼고 자신의 전부를 물에 다 맡기면 뜰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운동이 다 그런가? 골프를 배울 때도 그랬다. 힘껏 내리치면 공이 멀리 가는 줄 알고 힘을 다하여 골프채를 휘둘렀는데, 공은 바로 내 코 앞에 있지 않았던가. 힘을 다 빼야 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러한가? 자신을 다 내려 놓고 나를 만든 창조자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임을 아는데도 욕심이 앞서니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언제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또 수영은? 이 두 가지 문제가 앞으로 내가 풀어 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홍콩에 살고 있는 아들과 손주들이 다음 달에 호주로 휴가 차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듣던 날, 우리 부부는 흥분하여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머물고 갈 한 달 일정을 미리 짜 보고 행복해했다.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 몇 년째 만나지 못했으니. 지금은 오미크론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 위험의 난관을 뚫고 이곳을 온단다. 오는 것은 반가워 두 팔 벌여 환영하는데 홍콩으로 돌아 가서 3주 동안 호텔에서 격리되어야 한다니 어찌해야 할지?그러나 나에게는 벌써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손주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이곳에 살고 있는 사촌들과 어울려 첨벙첨벙 시끌벅적 즐겁게 뛰놀고 있다. 깔깔 웃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희망이 아지랑이가 되어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작가 소개: 배명희저자 배명희는 해방 이듬해 성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예과 교사로 10여년 근무하다가 세 자녀를 키우며 남편의 직장과 일터를 따라 서울, 미국, 일본, 부산, 호주, 포항,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에서 살다가 지금은 시드니에 정착하여 딸들 가까이 살며 텃밭을 가꾸는 전원 생활을 하고 있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  - 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06/04/2023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우리 부부가 인디언 퍼시픽 열차(Indian Pacific Train)를 탄 지 올해로 10여 년 되는 해이다. 그때 우리가 거주하는 시드니를 벗어나고 싶어 퍼스까지 비행한 후 퍼스를 관광했다. 퍼스는 서호주의 주도이며 서쪽 끝의 유일한 대도시로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경치 좋은 레스토랑, 전시된 거리의 예술 등이 압권인 도시였다. 퍼스 관광 후 시드니로 돌아오는 노선으로는 비행기 대신 인디언 퍼시픽 열차에 탑승하기로 했다. 1970년 운행을 시작한 774미터의 이 열차는 4,352킬로미터의 광야를 오늘도 달리고 있다.‘인디언 퍼시픽’이라는 이름은 퍼스에서 시드니까지, 즉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열차라는 뜻이다.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열차 구간이다. 호주의 대륙을 횡단해 보고 싶었고 세계에서 가장 긴 직선도로가 있는 널라버(Nullarbor) 사막을 달려 보고 싶었다. 인도 태평양 열차 여행은 미국 관광객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 중의 하나라고 한다. 대륙횡단을 여러 번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우리는 몇 차례 고민 끝에 가장 비싼 플래티넘 서비스를 택했다. 인디언 퍼시픽의 객차는 레드, 골드, 플래티넘 서비스로 나뉜다. 플래티넘 서비스를 선택한 사람은 우리 부부와 두 명의 자녀를 둔 다른 한 가족뿐이었다. 욕실 딸린 침대칸은 와인과 초콜릿까지 준비되어 있었으며 정갈한 서비스가 더해져 럭셔리 기차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비록 좁기는 하지만 마치 호텔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우리의 열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식당칸은 고급 레스토랑 수준이었으며 골드 서비스 여행객들과 함께했다. 그중 퍼스에 본부를 둔 일본 탄광회사의 지사장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플래티넘 침대는 어떻게 생겼느냐며 우리 방을 보고 싶다고 하여 웃으면서 보여 주기도 했다.첫 번째 정차역은 금광촌 캘굴리(Kalgoorlie)였다. 사막의 오아시스로 불리는 그 부촌은 빨간 흙먼지가 휘날렸다. 그래도 호주에서 두 번째로 엄청난 금을 생산하는 부촌이려니! 버스를 타고 광부들이 입는 형광조끼를 입은 채 2시간 반 동안 노천 금광을 견학했다. 마을로 들어갔더니 캘굴리 호텔을 비롯하여 중국 레스토랑, 온갖 유명한 명품 브랜드 샵이 줄을 이었다. 금광촌이라 부자임을 뽐내는 풍경이었다. 유명하다는 펍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뿐하였다.다음 목표인 롤리나(Rawlinna)역은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진행할 때만 정차하는 역이란다. 산타를 태운 열차가 롤리나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위해 위문공연을 해 준다고 한다. 호주에서 가장 큰 양 목장이 있다. 롤리나 역을 지나 드디어 내가 가 보고 싶었던 676킬로미터 길이의 널라버 평원을 통과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널라버는 호주 원주민 애버리지니의 언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나무가 없다’라는 뜻이다. 서호주와 남호주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 석회암 지대에는 이름처럼 나무가 거의 없는 건조하고 편평한 평원이 펼쳐진다.널라버 평원은 사막 지역이라 하여 새하얀 모래사막을 상상했으나 토지의 색깔은 갈색이었다. 그전에 창문 너머 보이던 검푸른 빛의 나무들은 점점 사라지고 키 작은 덤불이 메마른 갈색 사막을 덮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직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대자연을 보며 지루하기보다는 오히려 경외감을 느꼈다. 널라버 평원 내에는 478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선 철도가 있다. 곧게 뻗은 직선의 기찻길 위에서 멀리 보이는 낙타나 캥거루 무리를 보며 호주 대륙의 진정한 아웃백 풍경을 원 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로는 웃기게도 금방 만나 보았던 아웃백의 동물인 캥거루, 에뮤, 악어 고기로 요리된 메뉴가 나왔다. 그 요리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데 좀 망설였지만 어쩌랴. 이걸 거부하면 아웃백에서 굶어야 하는데 말이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점차 아웃백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인디언 퍼시픽 열차 여행을 택한 이유는 1990년 호주로 이민을 왔을 당시 들었던 영어 수업(Arrival English Class)에서 널라버 평원을 달리는 521호 열차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대륙이라 별 열차가 다 있구나 싶었다. 521호 열차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남호주 포트오거스타(Port Augusta)로부터 서호주의 캘굴리까지 운행되는 기차였다. 이 기차는 1915년 호주의 대륙횡단 철도(Trans-Australian Railway) 건설을 위하여 사막에서 철도 공사를 하는 정착자들의 가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차로 시작되었다. 이 기차의 고객들은 1,692킬로미터의 철도 노선을 따라 퍼져 있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정착지에 살고 있었으며, 각 마을에는 보통 6가구, 몇 개의 큰 마을이라 하더라도 겨우 20가구 정도였다.521호 열차는 애칭으로 ‘차와 설탕의 열차(Tea and Sugar Train)’라고 불렸는데, 이 열차로 밀가루, 차, 설탕 등을 운반한 데서 기원한다. 차와 설탕의 열차는 이 외지고 건조한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오늘날 슈퍼마켓이나 쇼핑센터에서 살 수 있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널라버 평원의 작고 외로운 마을에 제공해 준 일등 공신이었다. 길이가 500미터나 되는 차와 설탕의 열차는 강력한 디젤 기관으로 운행되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데는 6일이 걸렸다. 열차는 널라버 평원에 있는 모든 마을에 물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커다란 물탱크를 갖추고 있었다. 우체국, 도서관, 은행까지도 구비하고 있어 사실상 열차는 라디오 외에는 도로, 비행기, 텔레비전도 없이 사는 널라버 평원의 주민들에게 널라버 사막 너머의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철도 정비기술자는 널라버 평원의 사막을 통과하는 열차들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전신, 전화를 수리했으며 산불, 홍수로 인해 손상되거나 낡은 철도를 수리하였다. 어떻게 사막에도 홍수가 있을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륙이라 그런 날씨가 있다. 때때로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한 지역에 일 년 치의 강우량(120밀리미터)으로 몰아쳐 순식간에 철도를 휩쓸어 간다. 이 덕분에 아웃백에도 식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가 아닐지….차와 설탕의 열차에는 기관사들을 포함하여 34명 이상의 직원들이 일하였으며 운행 기간 내내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별한 물건이 필요한 주민들은 보통 일주일 전에 주문을 했다. 영화 기사는 영화를 마을마다 보여 주는 데 기차를 이용하거나 때로는 영화의 필름을 두고 감으로써 다음 기차 편에 가져가기도 했다. 목사와 의사, 간호사는 운행 때마다 승차하지는 않고 필요시마다, 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만 승차하였다. 그들은 수술실과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급한 환자의 경우 플라잉 닥터(Flying Doctor: 호주의 헬리콥터 응급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521호 열차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널라버 평원에 정착했던 주민들에게 그들이 원했던 우편물, 잡지, 책, 사탕, 초콜릿, 담배 등 모든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이 열차를 ‘차와 설탕의 열차’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열차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포트오거스타와 캘굴리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철도건설이 5년에 걸쳐 1917년에 완성되어 시드니와 퍼스 사이의 대륙횡단 철도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521호 열차가 인디언 퍼시픽 열차로 재탄생함으로써 소위 차와 설탕의 열차는 1996년을 마지막으로 더 달리지 않는다. 열차에 딸린 쇼핑 칸 중의 몇 개는 애들레이드의 국립철도박물관(National Rail Museum)에 보존되어 있다. 이렇게 호주 최대의 교통망을 구축한 대륙횡단 철도의 시작이었던 521호 열차, 차와 설탕의 열차로 불렸던, ‘달리는 쇼핑센터’ 열차는 80여 년의 성과와 낭만을 가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철도를 달리며 과거의 ‘차와 설탕의 열차’에 탄 듯한 착각 속에 어느덧 나를 태운 열차가 제법 대도시 역에 다가오는 모양이다. 창가를 통해 끝없이 펼쳐지는 갈색 평원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살 수 없는 사막 지역에서 철도 건설을 위해 수고했던 정착자들의 가족과 ‘차와 설탕의 열차’를 운행했던 모든 분께 감사한 생각이 든다. 그들의 노고 덕분으로 현재 편안하게 호주의 아웃백을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드디어 애들레이드에 도착하니 비가 많이 와서 철도가 끊어져 있었다. 브로큰힐, 블루마운틴을 거쳐 시드니로 가는 여정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비행기 티켓을 철도 측에서 마련해 주어 시드니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도시인 브로큰힐을 관광하지 못해 더욱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애들레이드 공항에서 지갑도 잃어버렸다. 하늘도 말리는데 할 수 없구나..작가 소재: 김정인대학에서 정신과 간호학 교수로 10여년 제직하였고 역서로는 ‘가족 정신건강: 가족치료의 이론과 실제’(수문사, 1984년)가 있으며 ‘스트레스 콘트롤 테이프(서울음반, 1986년)를 제작했다. 이후 남편의 해외근무로 호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16/03/2023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르신들과 함께 여러 가지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젊으셨을 때, 새로 나온 물건 중에 신기하고 놀라웠던 게 있으셨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A : 예전 우리 젊을 때는 세탁기나 칼라 TV가 나왔을 때 정말 대단했어요. 작은 상자 안에 진짜로 사람이 들어가 있는 줄 알았어요. H : 토스트나 전자레인지를 처음 샀을 때도 신기했죠. 음식을 쉽게 데워 먹을 수 있어서 아주 편했어요. L : 요즘 생각해보면 핸드폰이 제일 신기한 거 같아요. 설마 우리가 걸어 다니면서 전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거든요. 옛날엔 집 전화로 통화를 했고, 급할 때 밖에서 공중전화에 20원인가 넣으면 통화가 되었잖아요?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려면 줄을 길게 서 있곤 했어요. P : 그런데 그 핸드폰도 날마다 기능이 많아져서 더 좋아지잖아요. 옛날 우리 애들 졸업식에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찍어주고, 사진관에서 필름을 인상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어딜 가든 핸드폰으로 찍을 수 있어서 너무 편하죠. T : 맞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물건이 생활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데요, 사실 조선시대에도 이런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때는 놀랄만한 물건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다음 설명을 들으시고, 이 물건이 무엇인지 한 번 맞춰 주세요. 이것은 멀리 있는 풍경이나 하늘 위의 별들을 마치 가까이 보는 듯 자세하게 볼 수 있는 물건입니다. L : 망원경이요. T : 네, 맞습니다. 그럼 이 물건은 무엇일까요? ‘스스로 울리는 종’이라는 뜻을 지닌 물건인데, 조선시대 선비 홍대용은 중국에서 이 물건의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P : 자명종인가요? 알람 같은 거? T : 네, 아주 잘 맞히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물건을 무엇일까요? 옛 사람들은 이 물건을 ‘애체’라고 불렀습니다. ‘애체’는 구름이 잔뜩 끼어서 무언가가 잘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모두들 : 갸우뚱 T : 바로 안경입니다. 희미한 물건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안경의 별칭이 바로 애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L : 조선시대에도 안경을 썼었나요? T : 네 맞습니다. 조선시대 임금 영조를 기억하십니까? A :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죽인 왕이잖아요. 얼마 전에 라는 영화도 했잖아요. T : 영조가 아들을 죽인 이후, 손자가 그 다음 보위를 잇게 되는데요, 그가 바로 정조입니다. 영조와 정조 임금이 조선시대에 처음 안경을 썼던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영조에게는 안경이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거 같아요. 영조는 항상 안경을 쓰고 난 후 많이 화를 냈습니다. 안경을 썼는데도 글자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자, 영조는 심지어 “안경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가증스런 물건이다.”라고 화를 낼 정도였어요. 그래서 의원들이 황련(黃蓮)을 우려낸 물을 적신 수건으로 눈 주위를 닦는 것이 눈 치료에 좋다고 권하기도 했어요. H : 아마 안경 도수가 잘 맞지 않았나 봐요. 왜 지금 우리가 안경을 맞춰도 조금만 시력이랑 안 맞으면 어지럽고 머리 아프잖아요. T : 어르신께서 일리 있는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기술이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안경을 쓰고 “오히려 안 쓰는 게 낫다.”고 불평을 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경이 너무 잘 맞아서 새 세상을 얻은 거 같다고, 안경을 예찬하는 시(詩)를 쓴 선비도 있습니다. 바로 이익의 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내게 밝은 두 눈이 있었으니 하늘이 주신 것 실로 많았지. 기운이 쇠하여 어두워지자 또 이처럼 반짝이고 환한 물건을 내어주시어 의지하게 하시니 이제 노인이 아니라 젊은이가 된 듯하네. 털끝만한 것도 자세히 눈에 들어오니 누가 이런 이치를 알아냈을까? 구라파의 사람들이로다. 저들이야말로 하늘을 대신해 어진 일을 하였구나.” P : 정말 딱 우리 나이에 안경을 쓴 선비인거 같아요. 특히 선비들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었으니, 눈이 나쁘면 많이 답답하죠.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거 같아요. T : 그런데 불행하게도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좋은 안경을 아무 때나 쓸 수 없었습니다. A : 안경을 쓰는 데 제약이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T : 네, 조선시대 사람들은 공식적인 장소에서 안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혼자 방에 앉아 글을 읽을 때는 안경을 쓸 수 있었지만, 밖에 나가거나,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안경을 쓰는 것이 무례한 일이었어요. 왕도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보는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습니다. 정조 임금은 말년에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문서를 잘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정에 안경을 끼고 나가고 싶은데, 예법에 어긋나니 많이 갈등을 했던 거죠. L : 눈이 안보여서 쓰는 건데, 무례한 일이었어요? T :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예법’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규경의 라는 기록에는 “아무리 눈이 나빠도 존귀한 사람이나 연장자 앞에서는 안경을 써서는 안 된다. 안경 너머로 높은 분이나 연장자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건방지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H : 듣고 보니 이해는 되네요. A : 아휴...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니는 건 너무 힘들었을 거 같아요. P : 오늘 배운 물건들을 보면, 우리가 참 편한 시대에 살고 있는 거 같아요. 돋보기도 자유롭게 쓰고, 전화기도 들고 다니고. T : 오늘은 조선시대 ‘안경’과 이를 쓰는데 따르는 ‘제약’ 등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연말을 장식할 만한 재미난 소재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9/12/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더워지는 날씨에 모두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이사하실 때 뭐가 가장 힘드셨습니까? A : 집을 구하는 게 가장 어렵죠.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따져봐야 하니까요. 채광이랑 위치, 크기 등등이요. P : 이사 날짜를 맞추는 일도 참 신경 많이 쓰여요. 나가는 집 날짜랑 들어가는 집 날짜가 잘 맞아야 손해를 덜 보니까요. L : 집구하는 것도 일이지만, 짐을 싸고 푸는 것도 큰일이에요. 전부 주부들 몫이니까. 애들이야 학교 끝나고 새집으로 들어오면 되지만, 우리는 밤새 짐 싸고, 며칠 동안 짐 푸느라 못 쉬었어요. H : 호주에서 이사하는 게 한국보다 더 어려웠던 거 같아요. 한국은 집주인이랑 세입자만 조건이 맞으면 금방 계약이 이루어지는데, 여기는 내가 아무리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도 신청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려야 되잖아요. 집 한 번 보러가는 것도 주말에 따로 정해진 시간을 따라야 되고, 가 보면 집 보러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 해요. A : 맞아요. 애들이 많아도, 애완견을 키워도 조금 집구하기가 어렵죠. T : 맞습니다. 그럼 세입자와 집주인을 중재해서 서로 간의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L : 공인중개사 분들이죠. P : 우리 젊을 때는 복덕방 주인이라고도 했어요. 지금이야 수수료라고 하지만, 그때는 복비라고 했지요. 아휴...진짜 오래 전이네요. T : 아주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그럼 복덕방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H : 해방 이후가 아닐까요? 해방 이후에 새로운 제도들이 많이 생겨났잖아요. L : 자세히는 몰라도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 같아요. 1950-1960년대 이후? 그 때 젊은 사람들이 돈 벌러 서울로 많이 모여 들었잖아요. 그래서 복덕방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T : 사실 복덕방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럼 복덕방(福德房)의 뜻은 무엇일까요? A : 와! 그렇게 오래 되었어요? 글씨를 보니 한자로 복(복)자에 덕(덕)자가 들어있네요. T : 네, 맞습니다. 바로 ‘복’과 ‘덕’이 생기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 선비 유희춘의 에 ‘생기복덕(生氣福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기복덕’은 예부터 오늘의 일진과 길흉을 예측하는데 사용하던 것인데, 길일을 택하는 데 기초가 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복’과 ‘덕’이라는 글자를 따서 거래 당사자들에게 복과 덕이 생기도록 중재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복덕방’이 되었던 거죠. 그럼 어떤 사람들이 복덕방을 운영했을까요? H : 요즘이야 공인중개사 하시는 분들이 그 쪽 분야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잖아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그런 게 있었을까요? L :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물건 팔듯이 겸해서 하지 않았을까요? T : 조선 후기 복덕방 주인들은 그 지역에서 오래 살아서 지역의 특징과 사람들을 속속들이 아주 잘 아는 노인들이었습니다. P : 어머! 듣고 보니 그래야 될 것 같아요. 지금처럼 기계나 컴퓨터가 발달되지 않았으니까 노인들의 연륜이나 경험이 중요하겠네요. T : 맞습니다. 그 복덕방 주인들을 조선시대에는 ‘가쾌’라고 불렀습니다. A : 가쾌요? 굉장히 생소한 말인데요... T : ‘가쾌(家儈)’라는 한자의 ‘쾌(儈)’를 자세히 살펴보시면, 왼쪽에는 ‘사람’을 뜻하는 인(亻)과 오른쪽에는 ‘모이다’라는 뜻의 회(會)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즉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서로의 요구를 중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L : 아! 한자로 보니까 이해가 더 쉽네요. T : 그러면 가쾌들은 주인과 세입자를 중재해 주고, 얼마의 복비를 받았을까요? P : 조선시대에는 세금도 쌀이나 그 지역의 특산품으로 내지 않았나요? 그러니 물건으로 복비를 주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면 계란이나 감자 등등이요. T : 맞습니다. 조선시대 초기 ‘가쾌’들은 사실 이익을 창출하는 전문 직업인들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중개비로 담배 한 갑 정도를 받고, 좋은 일을 소개했다는 뿌듯함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H : 대신 가쾌들은 수완이 아주 좋아야 될 것 같아요. 아는 사람도 많고, 나름대로 인품도 좋아야 될듯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믿고 거래를 하지 않을까요? T : 아주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쾌들은 쉽게 비유하자면, 시골 농가의 ‘이장님’같은 분들이 맡아서 했던 거죠. A : 그럼 언제부터 가쾌가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바뀐 건가요? T : 1893년 이후,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면서 가쾌의 역할이 많아졌습니다. 혹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셨습니까? 시대적 배경이 어떠했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L : 그 때 조선에 미국이나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죠. 드라마에서 미국 군인들이랑 일본 군인들이 충돌하는 장면도 있었어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양반집 규수가 총잡이가 되잖아요. T : 맞습니다. 그 당시 갑자기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거주할 집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각 나라의 공사관으로 써야 할 건물도 많이 필요 했고요. 그래서 토지나 건물의 무분별한 매입을 막고 책임 있게 중개 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쾌 인허제를 도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공인중개사의 시초가 됩니다. P : 동네 노인이 담배 한 갑 공짜로 얻고 슬슬 놀면서 두루뭉실하게 하던 일인데, 갑자기 전문직으로 바뀐 거네요. 모두들 : 하하하!! T : 오늘은 이렇게 조선시대 공인중개사, 가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재미있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6/11/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 보겠습니다. 우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무엇일까요? P : 각 나라의 문화유산 중에서 뛰어난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거지요. T : 네, 맞습니다. 그럼 유네스코에 등록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L : 궁궐이랑, 불국사요. A : , , 도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어요. 예전에 허준에 대해서 배우면서 얘기해 주셨어요. T : 네. 일일이 열거하자면 더 많지만, 우선 오늘은 ‘온돌’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H : 우리나라 온돌도 세계문화유산인가요? T : 사실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중국의 거센 항의가 있었습니다. A : 아...그 기사를 얼핏 읽은 거 같기도 하네요. 중국이 자신들이 먼저 온돌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던 거 같아요. T : 그래서 오늘은 조선의 온돌이 중국의 온돌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진으로 살펴보겠습니다. L : 왼쪽이 우리나라 온돌이네요.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 따듯한 기운이 구들장으로 가서 온 방을 따듯하게 덥히는 거죠. A : 그리고 연기가 맨 오른쪽에 있는 굴뚝으로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H : 그럼 오른쪽 사진이 중국의 온돌인가요? 이 사진을 보면 중국 온돌은 방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인거 같은데요. P : 그러게요. 마치 우리나라 돌 침대처럼 생겼어요. L : 돌 아래에 아궁이처럼 생긴 네모난 구멍이 있어요. 거기에서 불을 때는 거 같아요. T : 자세히 잘 살펴보셨습니다. 중국식 온돌은 ‘캉’이라고 부릅니다. 이 캉은 아까 말씀하신대로 우리나라 돌 침대랑 아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벽 쪽에 시멘트를 무릎 높이만큼 쌓아 올리고, 아래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장작을 넣고 불을 때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P : 그런걸 보면 중국이 온돌이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도 이해가 되네요. 우리나라 온돌이랑 아주 비슷해요. 다만 중국 온돌이 크기가 작아서 빨리 데워질 것 같긴 해요. T : 아주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사실 조선의 선비들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식 온돌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배우셨던 연암 박지원을 기억하십니까? A : 네! 그 중국 여행 중에서 똥이 최고라고 했던 사람이죠? T : 네, 맞습니다.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 초정 박제가 등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던 선비들을 ‘북학자’라고 부릅니다. 한 일화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조선의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려면 대략 2달 반 이상이 걸립니다. 긴 여정 중에 피곤에 찌든 사신들이 중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아마도 뜨듯한 방바닥에 몸을 지지면서 쉬는 거였겠죠. 그런데 역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에서 쉬고 싶다는 뜻을 몸짓 발짓으로 전달하면서 “방이 어디 있소?”라고 아무리 물어도, 그들은 한쪽 구석에 있는 높은 바닥을 가리키며 “이게 방입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역관을 통해서 설명을 들어보니, 바로 방 한 켠에 만들어진 ‘캉’이 누워서 쉴 공간이라는 거죠. H : 그런데 캉은 굉장히 효율적이게 생겼어요. 그럼 나머지 방 안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니나요? 호주사람들도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침대에서만 벗는 사람도 있잖아요. P : 맞아요. 여기 사람들은 집에 뭐 고치러 와도 신발을 잘 안 벗어요. 처음에 한국에서 막 왔을 때는 그게 너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T : 중국 청나라 사람들은 캉 위에서 쉴 때만 신발을 벗고, 나머지 공간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캉 주변에는 화로도 있고, 물 항아리도 있어서 추운 겨울에 여자들이 부엌을 드나들며 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A : 그 점은 너무 좋네요. 조선시대 여자들은 추운 겨울에 손이 곱도록 개울에서 빨래도 하고, 일이 많았잖아요. L : 그런데 장단점이 다 있는 거 같아요. 우리나라는 방 전체가 온돌로 되어 있으니 방문을 닫으면 아늑하고 따듯하잖아요. 그런데 중국의 캉은 웃풍이 있을 거 같아요. 캉 위에만 따듯하고, 나머지 실내는 조금 추울 것 같기도 하고요. P : 그리고 위생 면에서도 다를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실내와 실외가 구분이 되어 있지만, 중국 캉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니까요. H : 안전을 따져보면, 중국 온돌이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해요. 실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직접 사람들의 호흡기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우리 젊었을 때, 겨울에 연탄가스 마시고 죽는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A : 그렇네요. 연탄가스 사고 나면 동치미 국물 먹이고 그랬죠. T : 네, 적절한 비교를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이처럼 조선의 온돌과 중국 청나라의 온돌을 한 번 비교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재미있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1/11/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르신들께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먼저 수업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자녀분들을 위해 어떤 태교를 하셨는지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L : 특별히 한 태교는 없고, 다만 어른들이 먹지 말라는 음식들을 안 먹었어요. T : 옛 어른들이 먹지 말라고 금하셨던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 가자미를 못 먹게 하셨어요. 애기 눈이 옆으로 벌어져서 나온다고요. H : 닭이나 오리 고기도 잘 못 먹게 하셨던 거 같아요. 애들 피부가 닭살처럼 된다고요. P : 우리 친정어머니는 과일이나 음식을 먹을 때 반듯하고 예쁘게 썰어진 걸 먹으라고 하셨어요. 문지방도 함부로 못 밟게 하셨고요. T :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토록 조심을 했던 건, 예나 지금이나 아주 비슷합니다. 특히 요즘은 의료기술이 발달해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 초음파 사진으로 아이얼굴을 미리 볼 수도 있고, 심장 박동 소리도 미리 들어볼 수 있습니다. L : 맞아요. 우리 딸보니까 산모 수첩 같은 거에다가 빼곡하게 아이 건강상태나 예쁜 짓하는 거 전부 써놓더라고요. A : 요즘 젊은 엄마들은 카톡에 아이들 사진을 올려놓고 일기처럼 쓰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때는 그렇게는 못했어요. H : 맞아요. 아이들 키우면서 1년에 한 번 씩 벽에 키를 재서 연필로 표시해 놓은 건 생각이 나네요. P : 우리 때는 애들이 셋 정도가 보통이어서, 애들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사실 예쁜 건 손주들이 더 예뻐요. T : 그럼 어르신들께서 직접 손주들의 육아일기를 써 보신 적 있으십니까? 모두들 : 아니요. T : 그래서 오늘은 제가 아주 신기한 기록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진) A : 정말 오래된 책인 거 같아요. 조선시대 기록인가요? P : 한자로 ‘양아록’이라고 쓰여져 있네요. T : 네, 맞습니다. ‘양아록’은 키우다(양) / 아이(아) / 기록(록)으로 ‘아이를 기르는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H : 신기해라! 조선시대에도 육아일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T :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 육아일기는 아이의 엄마가 쓴 기록이 아닙니다. 어르신들께서 잘 아시듯이 조선시대에 ‘한자’는 남자들만 익혔던 글자라, 여인들은 그저 한글 정도만 떼었을 뿐입니다. L : 그런데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전부 한자로 쓰여져 있네요. 혹시 아이의 아빠가 쓴 기록인가요? T :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육아일기는 아이의 할아버지가 쓴 기록입니다. A : 할아버지요? 조선시대 선비들은 맨날 만 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육아일기도 썼다고 하니까 굉장히 특이하네요. T : 그럼 이제 이 에 대해서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양아록은 조선시대 선비 이문건(1494-1567)이 손자를 키우면서 17년 동안 직접 쓴 육아일기입니다. P : 17년이요? 와아! 굉장히 오랫동안 쓴 거네요. T : 사실 명문가문에서 태어난 이름 높은 선비가 을 쓰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문건이라는 사람은 아내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는데, 아내는 일찍 사별했고, 아이들은 모두 어려서 죽고 아들 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들은 장애를 지니고 있었어요. 급기야 그 아들마저도 역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죽기 전에 핏덩이 아기를 남겼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 의 주인공, 이숙길입니다. H : 기구한 사연이 참 많은 사람이네요. 이제 피붙이라고는 손주밖에 없는 거네요. T : 그렇죠. 그래서 더 애틋한 마음으로 손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했던 거죠. 사진에 있는 의 기록들을 몇 가지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① “돌잔치에서 붓과 먹을 잡았으니, 훗날 진실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칠 만 하다.” ② “젖을 떼고, 내 잠자리로 불렀더니 품에 쏙 안겨 잠이 들었다.” ③ “9개월이 지나자 윗니가 났고, 11개월 때 처음 일어서게 되었다. 두 손으로 다른 물건을 잡고, 양발로 쪼그리고 앉는다.” ④ “열이 불덩이 같아 이틀 밤낮을 미음을 먹이고, 주물러 주었다,” ⑤ “아이가 열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내가 화를 내고 회초리를 든 것은 아이를 절제시키기 위함이다.” L : 어머나! 할아버지가 돌잔치에서 뿌듯해 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네요. A : 세상에 대단하네요! 개월 수에 맞춰서 아이의 발달 상황을 자세히 기록을 했어요. 남자분들은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잘 모르잖아요. P : 저는 아픈 손주를 보면서 할아버지가 잠을 못 이루고 있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요. T : 오늘은 조선시대 선비가 손자를 위해서 쓴 육아일기, 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육아일기 중에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해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21/10/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바비큐 모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조선 선비들의 여름 모임에 대해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연꽃’ 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이 있으십니까? L : 심청이요. 아버지 심봉사를 구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갔잖아요. 나중에 심청이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님이 다시 심청이를 세상에 보내줄 때, 연꽃 속에 넣어서 보내잖아요. P :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잖아요. 그래서 사월 초파일이 되면 사찰 주변에 연등을 달잖아요. H : 연잎밥이요. 연잎에 밥을 싸서 찌는 거요. 이게 사찰음식이라 저는 익숙해요. A : 음식이야기 하시니까 연근도 생각이 나요, 간장이랑 물엿 넣고 졸이면 맛있잖아요. T : 네, “연꽃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옛 말도 있듯이 연꽃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모든 부분을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 혹시 ‘연밥’이 무엇인지 들어보셨습니까? P : 연밥이 연잎밥의 줄임말 아닐까요? T : 사실 연밥은 연꽃의 씨앗입니다. 사진을 통해서 확인해 볼게요. L : 어머나! 까만색 알맹이가 쏙 들어가 있네요. T : 옛날 중국에서는 이 연밥으로 젊은 남녀가 사랑을 고백하곤 했습니다. A : 아! 그 이야기 지난번에 해 주셨어요. 뱃놀이를 나갔던 남녀가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연밥 알맹이를 톡톡 던진다고 하셨죠? 우리나라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밥도 따로 먹었는데... T : 와! 아주 잘 기억하셨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 당시 조선보다는 훨씬 개방적이었던 거 같아요. 또 이 연밥은 건강에도 아주 좋은 음식입니다. P : 연밥으로 음식도 만들어 먹나요? T : 네, 연밥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빻은 뒤 죽을 쑤어 먹거나 미숫가루로 타서 먹었다는 기록이 조선시대 요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양식으로 아주 인기가 있었어요. H : 정말 연꽃의 모든 부분이 유용하네요. 연밥, 연잎, 연근 모두요. T : 그럼 이번엔 여름철 ‘피서’와 연꽃을 관련시켜 보겠습니다. 우선 ‘피서’는 무슨 뜻일까요? A : 더운 여름을 피해서 놀러가는 거지요. 한국에서는 계곡에 자주 다녔는데, 호주 와서는 바닷가를 많이 다닌 거 같아요. 요즘엔 그것도 귀찮아서 에어컨 틀고 집에 있는 게 제일 좋기는 해요. L : 요즘 젊은 사람들은 캠핑 용품도 다들 갖춰서 피서를 멋지게 다니더라구요. T : 말씀하신대로, ‘피서’는 피하다(피)/ 더위(서)로 더위를 피해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도 피서를 떠났을까요? P : 글쎄요...조선시대 선비들은 매일 책 읽느라 놀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T : 사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피서를 즐겼다는 사실을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여름 피서를 얘기해 볼게요. 우선 선비들은 더운 여름에 연꽃이 만발한 자신의 정원에 벗들을 초대했습니다. 바로 연꽃을 감상하며, 연꽃잎에 담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입니다. H : 연꽃잎으로 술을 담을 수 있나요? T : 연꽃잎으로 술을 담은 건 아닙니다. 다만 연꽃잎을 술잔으로 사용했습니다. A : 술잔이요? 어떻게요? T : 우선 두 개의 사진을 보면서 말씀 나누어 보겠습니다. L : 연잎 위에 이슬방울이 맺혀 있네요. 아마도 연잎이 이슬이나 빗물을 흡수하지 않으니까, 물이나 술이 줄줄 새지 않았을 거 같아요. T : 아주 정답과 비슷했습니다. 사실 연잎은 물이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물이나 술을 담아두기에 좋은 재료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연잎 속에 술을 담아서 넣고, 비녀처럼 생긴 막대기로 연잎을 꿰어 봉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진을 보시면 연대가 연잎에 매달려 있죠? 이 연대는 바로 우리가 지금 흔히 사용하는 빨대의 역할을 했습니다. P : 어머나! 그러니까 연잎 속에 술을 담아 넣고, 연대로 쪽쪽 빨아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네요. T : 네, 맞습니다. 여름철에만 즐길 수 있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특별한 술이었죠. 이런 방식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벽통음(碧筩飮)’이라고 했습니다. H : 와...정말 기발한 생각인거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마시면 은은한 연꽃향도 느껴져서 더 운치도 있었을 거 같네요. T : 네. 벽통음은 선비들이 즐겼던 여름 음주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비들이 목숨처럼 여겼던 ‘체통’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A : 아! 선비들은 국을 마셔도 후루룩 소리를 내거나, 수염에 묻지 않게 마셔야 하잖아요. 그런데 연대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먹는 모습이 그다지 품위 있어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T : 바로 그 점 때문에 ‘벽통음’을 꺼려하던 선비들은 굵은 연밥 속을 파내고, 연밥의 껍질을 술잔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A : 참 다양한 방법으로 술을 즐겼던 것 같아요. T : 오늘은 이렇게 옛 사람들의 연꽃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아주 특이했던 여름 피서법, ‘벽통음’을 기억해주세요. 다음 시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피서법 두 번째 내용을 공부하겠습니다.

24/09/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긴 겨울이 어느새 끝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겨울밤에 주로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내셨는지 얘기하면서 수업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L : 우리는 평소에 두 노인만 살다가, 주말이 되면 손주들이 잔뜩 몰려와요. 목요일부터 애들 해먹일 생각에 장을 보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H : 호주는 겨울에 뼛속까지 으실으실 춥잖아요. 그래서 따듯한 차를 많이 마시면서 겨울을 보낸 것 같아요. 시중에 파는 차는 너무 달아서, 저는 유자차랑 생강차를 직접 담아요. A : 겨울밤이 워낙 기니까, 지인들이랑 저녁 모임도 많이 가졌던 거 같아요. P : 맞아요. 손님들 오면 거실 벽난로에다가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하죠. T : 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긴 겨울밤을 보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모이면 바비큐를 가장 많이 구워먹는 거 같아요. 바비큐는 언제부터 구워 먹었을까요? H : 아무래도 한국은 직장인들이 회식자리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1970년대 정도부터 아닐까요? 우리가 젊었을 때, 이미 새마을운동도 있었고요. A : 맞아요. 그 노래 생각나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아마 이런 가사였던 거 같은데... T : 저도 그 가사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매일 9시 뉴스 끝나면 그 노래가 항상 나왔던 거 같아요.^^ 그런데 한국불고기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옛 중국 문헌을 보면, “고구려는 맥적 요리가 유명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맥적이라는 게 바로 오늘날 양념불고기랑 거의 비슷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고기를 구워먹는 모임들이 많았어요. 오늘은 조선시대 모임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림을 한 번 봐 주세요. P : 양반들이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같아요. A : 옆에 기녀들도 같이 동반한 거 같고, 거문고처럼 생긴 악기도 있어요. L : 배경 사이사이에 꽃들이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봄에 꽃구경을 나간 것 같아요. T : 네, 맞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신윤복이라는 화원이 그린 그림이에요. 봄에 양반들이 꽃구경을 간 장면을 아주 다채롭게 잘 그려냈습니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꽃놀이를 갈 때에는 꼭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누구였을까요? H : 기녀랑 악사들이요. 놀이에 음악이 있어야 흥이 나니까요. T :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장면을 그리는 화공들도 데리고 다녔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누리는 풍류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봄에는 진달래, 복사꽃, 살구꽃, 버들가지 등을 구경하러 다녔고, 가을에는 국화를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추운 겨울에 이들은 어떻게 긴 시간을 보냈을까요? A : 우리 어렸을 적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화롯불에 고구마랑 밤을 구워주시기도 했 어요. L : 그리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아랫목에서 옛날이야기를 듣기도 했던 거 같아요. H : 그렇죠. 우리 어릴 때 텔레비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참 재미나게 놀았던 거 같아요. P : 맨날 언니들이랑 소꿉놀이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오빠들이 끼면 눈싸움도 많이 했어요. T : 추워서 밖에 잘 못나가는 날씨에 조선시대 사람들도 실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마음에 맞는 벗들이 모여서 난로회(煖爐會)를 많이 했어요. A : 난로회요? 실내를 따듯하게 만드는 그 ‘난로’요? T : 네, 맞습니다. 조선시대의 문헌 에 따르면, “한양의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놓고, 번철을 올린 다음 소고기에 갖은 계란과 파, 마늘, 후추 등 양념을 더하여 구우면서 둘러 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번철’은 전을 부치거나 고기를 구울 때 쓰는 무쇠 그릇입니다. H : 세상에, 지금 우리가 먹는 불고기랑 거의 비슷하네요. T :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난로회는 사대부 양반들이 즐겨했던 겨울 모임인데요, 고기만 구워먹었던 것이 아니라, 겨우내 방 안에서 직접 기른 ‘매화꽃’을 벗들과 함께 감상하면서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시도 지었어요. L : 조선시대 양반들은 참 멋있었던 거 같아요. 놀 때도 시를 짓잖아요. P : 정말 너무 운치 있네요. 바깥에는 눈이 펑펑 오는데, 방 안에서 고기도 먹고, 시도 짓고. T : “시(詩)를 빼면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남는 게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시를 짓는 게 일상생활이었습니다. A : 수업을 하면서 늘 느끼는 거지만, 우리가 하는 많은 활동들이나 문화, 음식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거 같아요. H : 사실, 우리 아이들도 김치나 고추장 같은 음식은 전부 사 먹어요. 후대에 제대로 전해 주려면, 많이 가르쳐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L : 애들이 직장일로 많이 바빠서 거의 사 먹는 일이 많죠. 그래도 저는 가끔 김치 정도는 직접 담아 먹고, 추석 같은 때엔 다 같이 모여서 송편도 만들고 했으면 좋겠어요. 바쁘다고 요즘은 너무 많은 좋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거 같아요. T : 새겨들을 말씀이 너무 많은 거 같아요.^^ 오늘은 이렇게 조선시대 양반들의 겨울 모임, ‘난로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다음 주엔 조선시대 양반들의 여름 모임, 연꽃 구경과 ‘피서음’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0/09/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똑같이 그려낸 그림-의궤 T : 안녕하세요! 요즘엔 날씨가 많이 따듯해졌습니다. 곧 봄이 올 것 같아요. 모두 건강하셨습니까? 혹시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A : 봄엔 꽃구경 가야죠. 사진도 많이 찍고요. H : 상추나 깻잎 씨도 뿌리고, 야채 모종을 심고 싶어요. L : 글쎄..주부들은 봄이 되면 제일 먼저 겨울옷이랑 이불을 싹 빨아서 정리하죠. 집안 대청소도 하고요. T : 그렇죠..늘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때마다 할 일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옛 사람들은 사진기가 없었던 당시에 어떻게 멋진 추억을 남겼을까요? P : 글로 남기지 않았을까요? 조선시대에는 기록들이 참 많았잖아요. L : 맞아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 기록들이 많다고 신문에서 읽었던 거 같아요. T : 네 맞습니다. 이나 , , 등의 기록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A : 그런데 글로 기록하는 데에는 한계가 많을 것 같아요. 아무리 자세히 쓴다고 해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표현할 수는 없잖아요. T :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실물과 똑같은 사진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사를 기록한 ‘그림’이라고 해야 됩니다. 한 번 사진을 살펴볼게요. H : 손에 창을 든 군졸들도 보이고, 궁궐처럼 보이는 건물도 있네요. A : 기왓장 위에 초록색으로 아주 세밀하게 소나무도 그려놨어요. 사람들 입은 옷도 각양각색이고요. L : 오른쪽 그림은 여인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그린 것 같아요. P : 그러게요. 오른쪽 그림은 잔치 날 그려진 것 같은데요. T : 네, 아주 자세히 잘 보셨습니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 기록을 남겼는데요. 이 그림을 바로 ‘의궤’라고 합니다. 아주 자세하고 정밀하게 그려서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듯해요. P : 그럼 이 그림들은 화가들이 그린 건가요? T : 네, 맞습니다. 바로 궁중화원들이 그린 거예요. 조선시대에는 ‘도화원’이라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중요한 행사들을 그릴 수 있는 전문 화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었죠. A : 아! 맞다. 옛날에 그 드라마 있었잖아요. 박신양이 나왔던 건데... T : 바람의 화원이요?^^ A : 맞아요, 맞아. 그 사람이 거기서 조선시대 화가로 나왔어요. T : 도화원의 화원들은 개인적인 취향대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똑같이 그려내는 기술을 연마하는 데 최우선의 목표를 두었습니다. L :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일일이 특징을 잡아서 그리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H : 그러게요. 눈도 빠르고 손도 빨라야겠네. T : 그렇죠. 특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데에는 정말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어요. 한 달에 겨우 베 한 필 정도를 받아서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A : 어휴....그럼 어떻게 살아요? T : 그래서 많은 화가들이 도화원 일이 끝나고 나면, 개인적으로 양반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사군자를 그려 돈을 벌었습니다. P : 그럼 이런 의궤는 보통 사람들은 절대 그릴 수 없는 건가요? 예를 들어 칠순잔치라든가, 집안의 혼례식이라든가... T : 네, 아주 좋은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의궤는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에만 그렸던 그림입니다. 아주 많은 전문 화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L : 이런 문화유산을 보고 있으면, 정말 자랑스러워요. 어떻게 고스란히 후대에 남길 수 있었을까...대단하기도 하고요. T : 그렇죠.^^ 그런데 후대에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빼앗긴 것들도 많습니다. 특히 영조 왕의 혼례를 그린 의궤는 1866년 프랑스에게 빼앗겼다가 2011년에 다시 되돌려 받았어요. 145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A : 그러고 보면 일제시대에 빼앗긴 유물이나 유산도 아주 많을 것 같아요. T : 사실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고도 아직 되찾지 못한 문화재가 대다수입니다. H : 그런걸 보면, 돌아온 의궤는 정말 대단하네요. 구경하고 싶어요. T : 기회가 되시면, 한국 방문 시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르셔서 보셔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되실 것 같습니다. 오늘 배우신 것 중에, ‘실물과 똑같은 조선왕실의 그림-의궤’라는 것만 기억하셔도 꽤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아요. 그럼 다음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27/08/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르신들께서 어떤 머리 스타일을 좋아하시는지 먼저 말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P : 뭐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우리는 파마머리가 편해요. 뻗치지도 않고, 관리하기도 편해요. H : 저는 머리 스타일보다는 오히려 염색이 더 신경 쓰여요. 3주마다 혼자 염색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에요. 너무 까만색도 촌스럽고, 밝은 색으로 하고 싶은데 또 너무 튀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고 그래요. A : 저는 평생 짧은 커트 머리였어요. 애들 키우면서 제일 편하더라고요. L : 맞아요. 긴 머리도 젊을 때가 이쁘죠. 그런데 오늘 공부할 주제가 머리랑 상관이 있나요? T : 네, 맞습니다. 오늘은 왜 옛날에는 나라마다 조금씩 머리 스타일이 달랐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혹시 북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어떤 머리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P : 에스키모들은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래도 긴 머리를 선호할 것 같아요. 짧은 머리는 너무 춥잖아요. L : 그런데 추운 지역에서 머리를 감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 짧은 머리를 선호할 것 같은데요. T : 사실 에스키모인들은 아주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는데요, 그 점퍼에는 털이 있는 모자가 달려 있습니다. 사진으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미지 01 A : 와! 생각보다 옷이 아주 두껍네요. 모자도 크고 털이 많아요. T : 네, 추운 날씨에 모자를 푹 덮어 써야 하기 때문에 에스키모인들은 아주 짧은 머리를 선호합니다. 거의 남자분들처럼 짧은 머리예요. L : 그렇겠네요. 아무리 머리를 예쁘게 꾸며도, 저런 모자를 하루 종일 쓰면 머리모양이 눌리겠어요. T : 이처럼 에스키모인들의 머리는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조선시대 사람들은 머리 스타일이 어땠을까요? P : 머리를 길었죠. 남자들도 긴 머리를 밑으로 땋고 다니거나, 상투를 틀어서 갓을 썼잖아요. T : 그럼 왜 조선시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긴 머리를 했던 걸까요? A : 아! 혹시 신체발부 수지부모...뭐 그런 한자가 있지 않나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거죠. T : 네, 아주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선시대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효(孝) 사상이 아주 철저했던 시대입니다. 부모님께서 낳아주신 몸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효의 으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를 길렀던 것이죠. 그리고 여인들은 쪽진 머리 위로 도톰하게 올린 머리를 미의 기준으로 여겼습니다. 즉, 올린 머리의 숱이 많을수록 탐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미지 02 H : 예쁜 것도 좋은데, 아이고...너무 무거울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저 머리를 하고 있으면 목 디스크가 올 것 같아요. 모두들 : 하하하 L : 평생 머리를 기르면, 저 정도로 올린 머리를 할 수 있겠네요. T : 사실, 이 올린 머리가 풍성할수록 아름답다는 생각이 만연하자, 여인들은 너도나도 가체를 쓰기 시작했어요. 가체는 가짜 머리, 즉 일종의 가발이에요. P : 어머나! 조선시대에도 가발이 있었어요? T : 네, 가체(假髢)의 한자는 가짜 머리터럭이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여인들은 머리를 잘라서 팔면, 하루 먹을 곡식을 구할 수 있었고, 양반가 여인들은 그 머리를 사서 가체를 만들어 쓰곤 했습니다. 또한 숱이 풍성한 가체는 양반들 가문의 재력을 과시하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A : 인모(人毛)로 만든 가발이니, 가격도 만만치 않았겠어요. T : 풍성한 가체 위에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고 다니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에는 가체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첫째, 가체와 머리장식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지면서 사치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둘째, 너무 무거운 가체 때문에 목뼈가 부러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집가는 새 색시가 풍성한 가체를 예물로 준비하지 못하면 소박을 맞는 일이 발생했어요. 이 때문에 영조라는 임금은 가체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A : 결혼 예물로 문제가 생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네요. P : 세상에...목뼈가 부러질 정도로 그 무거운 걸 머리에 이고 살았다는 거네요. L : 뭐든지 지나치면 꼭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H : 이전에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 영조 임금이 굉장히 검소했다고 하셨던 거 같아요. 생모가 천한 신분의 무수리였던 그 임금이 영조 맞죠? T : 네, 맞습니다. 영조는 검소함을 몸소 실천했던 왕으로 유명합니다. 영조 이후에 조선시대 여인들의 가체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고, 쪽진 머리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조선시대 여인들의 머리 스타일과 가체 사용, 그리고 그 폐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더 흥미로운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천영미 고교 및 대학 강사(한국) 전 한국연구재단 소속 개인연구원 현 시드니 시니어 한인 대상 역사/인문학 강사

13/08/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악기에 대해서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어르신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악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L : 우리 학교 다닐 때 풍금이 있었어요. 생긴 건 작은 피아노 같은데, 소리는 많이 달라요. A : 우리시대에 정명화씨처럼 바이올린 켜는 분들은 많지 않았어요. 시골에 살면서 그저 언니들이랑 산에 뛰어다니면서 풀피리를 불곤 했죠. P : 내가 그런 악기를 전혀 다룰 줄 몰라서, 딸아이는 열심히 피아노 학원에 보냈던 거 같아요. H : 호주에서 아이들 키우면서는 스포츠랑 악기를 많이 시켰던 거 같아요. 우리 아들은 기타를 제법 잘 쳤어요. T : 그럼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전통 악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P : 가야금이나 거문고요. 대부분 드라마에서 궁궐에서 연회를 할 때 빨간 옷을 입은 악사들이 많이 연주하잖아요. L : 맞아요. 아쉽게도 전통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회가 별로 없어서, 그저 TV에 나오는 장면들에서 얼핏 본 게 다 인거 같아요. T : 네. 맞습니다. 사실 요즘 어린 아이들은 바이올린이나 플롯, 피아노, 드럼 등 서양 악기를 배우지, 우리나라 전통악기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에요. 오늘은 특히 가야금에 대해서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삼국시대’는 어떤 나라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A : 고구려, 백제, 신라요. 처음엔 세 나라가 경쟁하다가 신라가 통일을 하죠. T : 네 맞습니다. 그럼 혹시 이 세 나라가 강성하던 때, 이들 사이에 끼여 있던 나라의 이름을 아십니까? 모두들 : (갸우뚱) 글쎄요... T : 그럼 지도를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L : 어머! 백제랑 신라 사이에 ‘가야’라는 나라가 있네요. 혹시 그럼 가야금이 ‘가야’라는 나라의 악기였나요? T : 네, 맞습니다. ‘가야’라는 나라의 존재를 모르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가야는 5세기까지는 백제와 힘이 비슷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낙동강이 흐르고,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나라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는 가야에서만 ‘철’이 생산되어서, 크기는 작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사진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P : 오른쪽 사진은 군인들의 갑옷 같아요. 철이 생산되었으니까 무기랑 갑옷을 만들었던 거 같아요. H : 왼쪽 사진은 오리처럼 생겼는데...아래에 촛불을 넣고 켜는 건가요? T : 왼쪽 사진은 오리모양의 토기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가야 땅엔 넓은 평야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야 사람들은 동물들 중에서 ‘오리’를 풍요의 신(神)이라고 생각했어요. L : 오리를 풍요의 신으로 생각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대체로 신으로 믿는 동물은 강한 힘을 가진 동물일 거 같은데, 왜 오리인지 궁금하네요. T : 너무 좋은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사실 옛날 농부들에겐 가장 귀한 동물이 바로 오리였습니다. 오리가 들판 위를 둥둥 떠다니면서 배설을 하면, 그 배설물이 곡식의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모내기를 마친 농부들은 오리 덕분에 곡식을 갉아먹는 벌레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오리가 알아서 벌레를 잡아먹고, 배설을 함으로써 농사를 돕는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가야 사람들은 이렇게 제사에 쓰이는 귀한 술병을 오리 모양으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A : 옛 어른들이 “오리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요. T : 풍요로웠던 가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쟁 때문에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그래서 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이라는 악사를 시켜서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가야사람들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악기를 제작하고, 음악을 만들게 합니다. 우륵이라는 사람이 만든 악기가 바로 ‘가야금’이에요. H : 저는 전통악기도 모두 조선시대부터 만들어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야금은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악기네요. 거의 1500년 전에 제작된 거잖아요. T : 네 맞습니다. 가야가 신라에 의해서 멸망할 때, 우륵이라는 악사(음악가)는 신라 땅으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가야의 정신을 되살리는 음악을 많이 만들게 됩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갈구하듯 멀리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던 거 같아요. A : ‘가야’라는 나라는 너무 멋있네요. 어떻게 하면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할까를 궁리하면서 전쟁을 하던 시대에, 음악으로 나라의 정신을 이어간 거잖아요. T : 네, 바로 그 점 때문에 가야라는 나라는 망했어도, 가야금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지금까지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가야금을 통해 알게 된 ‘가야’를 꼭 한 번 기억해 주세요. 다음 시간에는 돌로 만든 악기, 편경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22/07/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

T : 안녕하세요? 오늘도 새로운 주제로 어르신들을 뵙게 되어 너무 설렙니다. 오늘은 아주 멋진 옛 사람들의 풍류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어르신들께서는 친구분들을 만나실 때 무엇을 하시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A : 대체로 커피마시면서 수다를 많이 떨지요^^.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요. L : 한국 사람들 모임에서는 음식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다들 만나면 점심이나 저녁을 먹죠. P : 그냥 지인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등산을 가거나 골프를 치기도 해요. H : 편하게 만나는 모임들도 있지만, 봉사활동을 같이 하는 모임도 있어요. T : 여러 가지 성격의 모임들이 많이 있으신 거 같아요.^^ 그러면 조선시대 선비들은 벗을 만나면 무엇을 했을까요? 먼저 1784년에 그려진 라는 그림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L : 옛 사람들은 항상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주변에 소나무가 운치있게 굽어 있고, 꽃이 피어 있네요. P : 중앙에 갓을 쓴 선비들이 빙 둘러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뭔가를 준비하는 거 같아요. A : 옆에 시냇물도 졸졸 흐르고, 완연한 봄인 것 같네요. H : 그런데 선비들이 앉아 있는 중앙 바닥에 물건들이 놓여 있어요. 음식 같기도 하고, 필기류 같기도 하고요. T : 네, 아주 자세히 잘 보셨습니다. 이 그림 속 선비들은 봄에 운치 있는 야외에 나가서 시를 짓는 시회(詩會)를 열고 있는 모습입니다. 중앙에는 붓, 먹, 벼루, 종이 등의 필기류가 놓여 있고, 주변에 서서 담소를 나누는 선비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H : 조선시대 선비들은 늘 공부를 했으니까, 노는 모습도 굉장히 학구적인 거 같아요. T : 이렇게 시를 지으며 노는 모임을 시회(詩會)라고 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시회의 재미난 모습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선비들은 종복과 나귀 한 마리를 거느리고 필기류와 술 등을 챙겨옵니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정한 후, 정해진 시간 내에 시를 지어, 늦게 짓는 사람들은 벌주를 마시기도 했어요. L : 벌주를 마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모두들 : 하하하 A : 그럼 누가 그런 법칙을 정하고 감독하나요? 시간을 정했다고 했는데, 조선시대는 정확한 시간을 잴 수는 없었잖아요. 그저 해시계나 물시계로 대략의 시간만 알지 않았나요? T : 맞습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들은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해냈어요. 나무에 가늘고 긴 끈을 걸어놓고, 거기에 엽전을 매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세숫대야 같은 놋쇠그릇을 놓아둡니다. 모두들 시를 지을 준비가 되면, 한 사람이 그 끈에 불을 붙여요. P : 어머나! 그럼 그게 지금으로 치면 타이머 기능인 거네요. 그 끈이 떨어지면 엽전이 떨어지면서 소리를 내는 거죠? T : 네 맞습니다. 엽전이 ‘쨍’그랑‘하는 소리를 내기 전까지 시를 빨리 짓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H : 와! 굉장하네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한문으로 시를 짓는 거예요? A : 다들 과거시험을 준비하니까 실력들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짜릿하고 떨리고 그러네요. T : 호주에서 사시면서 시티에 야경을 보러 나가시는 경우가 종종 있으시죠? P : 이스터나 크리스마스 때는 특별한 행사를 많이 하니까 종종 다녔어요. 아휴...그런데 요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젠 안가요. 화장실 줄도 너무 길고, 돌아오는 길도 너무 오래 걸리고...집이 최고예요. T : 조선시대 선비들 역시 낮에만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놀았던 건 아닙니다. 밤에도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벗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A :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통금시간 같은 게 있지 않았나요? 드라마에 보면 밤에 군사들이 딱딱이를 치면서 돌아다니던데요. T : 네, 물론 아주 늦은 밤에는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모여 술 한 잔을 거나하게 마시고나서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놀았던 낭만적인 기록이 남아 있어요. 우선 조선시대 후기 홍대용이라는 선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홍대용은 손가락이 아주 길고, 거문고를 잘 탔던 선비입니다. 어디를 가든 거문고를 꼭 챙겨서 들고 다니다가, 멋진 풍광을 만나면 즉석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던 감성을 지닌 선비입니다. L : 너무 멋있네요.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그저 공부만 하고, 예술이나 음악을 천하게 여기는 줄 알았어요. 요즘에 기타를 등에 메고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T : 그렇죠?^^ 그런데 어느 겨울 밤, 벗들과 함께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소복소복 쌓이는 눈이 너무 멋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홍대용은 수표교(오늘날 청계천 다리)에 앉아서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을 받으며 거문고를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흥에 겨운 벗들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고, 생황을 연주하며 흥이 다하도록 놀았어요. 어찌나 신나게 놀았는지 갓과 도포가 젖는 줄도 몰랐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 때 얼마나 재미나게 놀았던지 이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모두 그 날의 일을 글로 남겼어요. H : 그렇게 취했는데도, 집에 돌아가서 또 글을 썼다니까 너무 재미있네요.^^ T : 그렇게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바로 조선시대 선비들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책 사랑’에 대한 일화를 잠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건강하세요.

08/07/2020
왁자지껄 할매들의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