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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에는 인구, 자본. 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자기 모국이 아닌 곳에서 사는 인구가 많아졌다. 그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디아스포라(Diasporas)’와 ‘초(超)국적인(Trans-nationals)’이다. 디아스포라는 가난, 전쟁, 탄압에 의해 조국을 떠난 사람이고 초국적인은 좀 더 나은 문명생활을 위해 떠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원래 뜻은 ‘이산(離散)’이다. 서기 66~70년 이스라엘의 967 명 열심당원(Zealots)이 1만 5천명의 로마군에게 포위된 상태로 마사다(Masada) 요새에서 3 년 이상 저항한다. 마사다는 흑해 옆 2백여미터 절벽 위 천연요새이다. 헤롯왕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1천명의 군대가 3년간 먹을 식량과 물을 비축했다. 그들은 성벽이 허물어지자 전원 자살한다. 이 일로 유태인에게 질려버린 로마황제 티토(Titus)는 유태인들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한다. 1년에 한번 ‘통곡의 벽’에 와서 기도하는 것만 허용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2 천년간 유랑민족이 된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국을 떠나 망향의 슬픔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s)’라고 부른다. 중국, 러시아,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는 ‘디아스포라’다. 일제하에서 농사할 땅을 찾아서 갔거나 일제에게 강제동원되었거나 독립운동하러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한국이 산업화되면서 좀 더 낳은 ‘삶의 질’을 찾아 서양 선진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으로 2~3 만명의 이민쿼터가 한국에 매년 주어진다. 70 년대에 호주,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유럽 등 서양 선진국에 동포들이 대거 진출한다. 그 중엔 유신체제, 군사독재에 환멸을 느껴서 조국을 떠난 중산층 엘리트도 많았다. 이들은 한국에 오고 싶으면 언제나 항공표만 사면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초국적인(Trans-Nationals)’ 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s) 디아스포라는 강한 민족주의와 귀소본능을 보이며 혈통과 전통을 중시한다. 해외에서 민족군락(Ghetto)을 형성하여 자기들끼리 산다. 시드니의 한국인 집거지(集居地)인 이스트우드나 스트라스필드도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단순노동자가 많고 애국심이 강하다. 그래서 심하면 민족분쟁의 원인이 된다. 그 나라 문화나 언어를 체득해 그 사회의 주류와 섞여 살지 않는 대신 한국인끼리 만나고 자기네 모국소식, TV를 많이 접하며 산다. 그들은 대개 교회 같은 한인단체에 속해 있다 초국적인(Trans-nationals) 초국적인은 자기가 선호하는 환경에서 살고자한다. 서양인과 섞이는 것을 당위로 생각하고 한민족문화를 보존하면서 서양문화를 즐기려고 한다. 초국적인은 전문적 엘리트로서 2중 언어(한국어,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다. 초국적인은 애국심은 약한 대신 분쟁이 생기면 해결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선진국에 살아도 디아스포라가 있고 후진국에 살아도 초국적인이 있다. 호주에 온 청소 등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생계형 이민자는 디아스포라가 많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초국적인을 선호한다. 국제감각을 가진 전문인으로 세금도 많이내고 거주국 문화와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비교 해외동포는 조국의 정치상황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 안목을 제시할 때가 많다. 초국적인은 세계주의, 다문화주의, 다양한 종교의 포용, 국제무대에서 활동, 개인주의, 개방적 성개념, 타민족과 결혼무방 등 성향을 보인다. 디아스포라는 민족주의, 단일문화, 단일종교, 혈통주의, 귀소본능, 영토적 정체성, 보수적 성개념, 같은 민족과의 결혼추구의 성향을 보인다. 세계화는 전 인류사회를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변화시키고 있으면서 동시에 민족적 단합과 영속성에 대한 현실도 인정하고 있다.(용광로에서 샐러드/모자이크 정책으로) 그래서 글로벌체제와 민족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할이 재조명 되고 있다. 한상대(대한문화학교 교수/린필드한국학교 교장)

03/12/2020
한상대 칼럼

현재 전 세계에 자기의 모국이 아닌 곳에서 사는 인구가 1억을 훨씬 넘는다. 그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디아스포라’와 ‘초(超)국적인’이다. 디아스포라는 가난, 전쟁, 탄압에 의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무리다. 초국적인은 좀 더 나은 문명생활을 위해 떠난 사람들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원래 뜻은 ‘이산’이다. 서기 66~70년 1만 5천명의 로마군에게 포위된 상태로 이스라엘의 967 명 열심당원(Zealots)이 마사다(Masada) 요새에서 3 년 이상 저항한다. 그들은 버티다가 성벽이 허물어지자 전원이 자살한다. 마사다는 흑해 옆 2백여미터 절벽 위 천연 요새다. 헤롯왕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1천명의 군대가 3년간 먹을 식량과 물을 비축해 놓은 곳이다. 이 일로 유태인에게 질려버린 로마 황제 티토는 유태인들을 이스라엘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한다. 1년에 한번 ‘통곡의 벽’에 와서 기도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2 천년간 유랑민족이 된다. 이후부터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국을 떠나 망향의 슬픔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s)’라고 부른다. 중국, 러시아,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디아스포라’다. 일제 하에서 농사할 땅을 찾아서 갔거나 일제에게 강제동원 되었거나 독립운동을 하러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가 산업화되면서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찾아 서양 선진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들은 한국에 오고 싶으면 언제나 항공표만 사면되는 사람들이다.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으로 2~3 만명의 이민쿼터가 한국에 매년 주어진다. 그 후 계속된 이민으로 70 년대에 호주,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유럽 등 서양선진국에 동포들이 많이 진출한다.. 그 중엔 유신체제, 군사독재에 환멸을 느껴서 조국을 떠난 중산층 엘리트도 많았다. 이들은 ‘초국적인(Trans-Nationals)’ 이다. 디아스포라는 강한 민족주의와 귀소본능을 보이며 혈통과 전통을 중시한다. 해외에서 민족군락(Ghetto, 게토)을 형성하여 자기들끼리 산다. 시드니의 한국인 집거지(集居地)인 이스트우드나 스트라스필드도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단순노동자가 많고 애국심이 강하다. 그래서 심하면 민족분쟁의 원인이 된다. 그 나라 문화나 언어를 체득해 그 사회의 주류와 섞여 살지 않는 대신 한국인끼리 만나고 자기네 모국소식, 비디오를 많이 접하며 산다. 반면 초국적인은 자신이 선호하는 환경에서 살고자 한다. 서양인과 섞이는 것을 당위로 생각하고, 민족문화를 보존하면서 서양문화를 즐기려고 한다. 초국적인은 전문직종의 엘리트로 2중 언어(한국어,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다. 초국적인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약한 대신 분쟁이 생기면 해결사 노릇을 한다. 그러나 서양에 살아도 디아스포라가 있고 후진국에 살아도 초국적인이 있다. 호주에 온 생계형 이민자들은 디아스포라의 요소도 많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 입장에서는 초국적인을 선호한다. 국제감각을 갖춘 전문인으로서 거주국에 세금도 많이 내고 거주국 문화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으니까.

19/11/2020
한상대 칼럼

정월 January의 어원은 로마의 신 야누스(Janus)에서 나왔다 야누스는 처음과 끝(beginnings and endings), 시작과 변화(starts and changes)를 상징하는 신이다. 야누스는 머리가 둘 달린 신이다. 우리나라에선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사람을 “야누스 같은 자” 라고 한다 원래 야누스의 앞 머리는 앞으로 금년 1년을 내다 보고 뒤 머리는 작년 1년을 돌아 보고 있다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은 우리가 지난 1년을 돌아 보고 앞으로 1년을 내다 보는 시기다. 새로운 각오로 맞는다. 낡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 송구영신의 달이다 야누스는 로마 신화에만 있고 그리스엔 없는 신이다. 16세기부터 로마에서 정월이 한해를 시작하는 달이 되었다. 야누스 신전은 평화 시에는 문을 닫는 다고 한다 로마가 제2 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치고 열어 두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물리쳤을 때가 두번째였다. 새해의 결심 내 아들놈이 어렸을 때 정월 초하루가 되면 나에게 큰 절을 한뒤 무릎꿇고 앉아서 새해 결심을 얘기한다. 아버지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한다. 세배 돈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준비해온 각본이다. 나는 그 말에 속아 번번히 세배 돈을 더 주곤 했다. 그러나 이놈이 그 결심을 지키는 걸 못 봤다. 서양에서는 1월이 되면 새해결심(New year’s resolutions)을 많이 한다. 호주엔 살이 찐 사람이 많아 감량(diet) 결심이 제일 많다. 여행을 많이 하겠다와 저축을 더 하겠다가 그 다음이고 담배를 끊겠다는 결심, 건강관리, 더 좋은 인간관계와 음악감상 등이 뒤 따른다. 아쉽게도 이런 결심들이 대부분 실패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지금 결심하는 마음이 1년 내내 지속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결심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실천 자체는 어렵고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중간에 이를 미루고 당장 더 큰 행복감을 주는 눈 앞의 일을 택하게 된다. 호주 동포들의 새해 결심은 무엇이 제일 많을까? 한상대(대한문화학교 총괄교수, 린필드한국학교 교장) sdhahn@gmail.com

09/01/2020
한상대 칼럼

‘용서’는 인간이 하기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보통 분한 마음은 복수만을 위해 치닫는다.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 계절에 자주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평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용서를 다른 힘을 빌려서 하게 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 다른 힘은 예수의 사랑 정신에서 비롯되는지 이 계절의 독특한 분위기가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인간에게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된다. 가장 큰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다. 이를 가리켜 ‘크리스마스 정신’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가 약해지면서 요즘 서양에선 크리스마스가 헤어졌던 가족이 1년에 한번 다시 만나는 날이 됐다. 호주에선 쇼핑센터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캐롤을 금지시켰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노래를 강요한다는 이유다. 호주 다문화주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는 해석이다. 그 대신 서양 크리스마스가 주는 꿈과 환상이 줄어들었다 이왕 변하는 김에 크리스마스가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는 계절이 됐으면 하고 상상해 본다. 자기 힘으로 안 되면 기적과 같은 ‘크리스마스 정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복싱 데이(Boxing day) 12월 26일은 ‘복싱 데이’라는 공휴일이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다. 이 풍습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영연방 국가들이 공휴일로 지킨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 날을 세컨드 크리스마스(2nd X-Mas)로 부르며 역시 휴일로 지킨다. 금년 복싱데이는 목요일이다. 금요일(27일)만 휴가를 내면 주말을 끼고 5일 연휴가 계속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주일은 주중 4일이 공식 휴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가 자기의 월차 2-3일을 합하면 1주일에다가 다음 주 토, 일요일까지 합쳐 약 10일 간의 휴가기간이 생긴다. 여기에 1월 초 3일 간 공휴일을 합하면 2주쯤 된다. 외국여행 하기에도 충분하다. 호주의 경우 12월 24일부터 1월 4일까지는 실제로 국가 행정이 마비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호주는 이 계절에 국민의 3분의 1정도가 동시에 여행을 한다. 이 기간 중 호텔 등 숙소나 휴양지는 6개월 전부터 예약이 완료되는 게 보통이다. 해변에서 ‘캠프 파이어(camp fire)’를 하며 맞는 호주의 여름 크리스마스도 맛이 색다르다. 또 12월 26일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반액 세일하는 쇼핑(Shopping day)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다음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세일과 같은 성격이다. 원래 이날은 예수의 제자로 예수를 부인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성 스테판의 날(Saint Stephen’s day)’이기도 하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라 선물 상자(Box)를 풀고 정리하는 날로 영연방국가들이 이 날을 철저히 지킨다. 한상대(린필드한국학교 교장)

19/12/2019
한상대 칼럼

지구상에는 4 천 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다. 이 많은 언어 중 문자는 55~56 정도만 있다. 이 중에서 한글만 자기네 문자의 발명자, 창제원리를 알고 있다. 한글은 문자발명의 목적과 대상이 분명하다. 한글은 세종의 지휘하에 집현전에서 성삼문을 비롯하여 8명의 학자들이 1438년에 창제를 시작했다. 세종은 안질이 심해 온천에 요양 갈 때도 한글 보따리만은 챙길 정도로 창제에 집념을 보였다. 한글은 1443년에 반포된다. 해외동포 후예가 한국어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피를 가졌고 조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먼저 한글의 우수성을 잠깐 짚어 본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면서도 음절 단위로 쓴다. 정보화 시대에 경이적인 장점이다. 21세기의 언어는 강한 경제적 가치를 갖는다. 컴퓨터에서 한글의 업무능력은 한자나 일본어에 비해 7배 이상 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소리와 발음 기관의 완벽한 연관성이다. 로마자는 소리와 문자는 전혀 별개이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천지인(天地人)과 발음 기관을 같이 본떠 만든 한글의 모음은 더욱 경이롭다. 한글의 위대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표음문자(表音文字)이면서 표의문자(表意文字)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어연구로는 세계 최고인 영국 옥스퍼드(Oxford) 대학의 언어학부에서 세계 모든 문자를 순위를 매겨(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의 기준으로) 진열해놓았는데 그 1위는 자랑스럽게도 한글이다. 이미 1960년대에 하버드대학의 마틴 교수도 한글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문자란 주장한 것을 비롯하여 94년 미국의 레드야드 교수는 한글이 문자학적 가치가 세계문자 중 으뜸이라고 발표했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시간이 갈수록 인정(음 대표 기능, 굴절성 등)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는 우리나라 훈민정음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글반포 훨씬 전인 고조선 시대에 원시 한글 가림토(加林多) 문자가 중국의 갈홍이란 사람이 쓴 포박자(抱朴子)란 책에 나온다. 한글 창제 이전의 일본 신대문자 (神代文字)도 있다. 이들은 모양이 한글과 거의 같다. 그렇다면 집현전이 옛날 존재 하던 원시한글을 체계화시켜서 더 발전시켰다는 설이 유력해 진다. 우리가 연구해 야할 문제다. 그렇더라도 세종의 위대성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가장 자랑스러운 문자를 가진 민족으로 자부심을 가져서 마땅하다. 국력만 뒷받침 해 주어서 한국어를 세계공통어로 쓰면 인류를 위해 좋겠다. 호주 한인 어린이의 언어 환경 한인 어린이들이 호주에 살면서 한국어를 배우는데 무슨 제약이 있나 알아 본다. 어휘 호주는 상용어가 영어다. 대부분 어린이들은 취학전부터 Preb, Creche, Kindergarten 등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한국어를 하는 경우에도 그 나이 또래 한국 어린이에 비해 한국말 어휘수가 부족하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어휘수도 영어가 서툰 부모 때문에 부족하게 된다. 오히려 부모의 엉터리 영어(Broken English) 때문에 아이가 틀린 영어를 쓰는 경우도 많다. 말하기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영어의 영향을 받는다. 자고 있는 아빠를 깨울 때 “아빠 눈 떠”를 “눈 열어(Dad, Open your eyes.)” 하고 동전을 길에서 “주웠다”고 안하고 “찾았다 (I found it)”고 한다. 감정 표현도 영어식으로 한국말을 한다. 밥 먹으라고 자기 방에 있는 애 이름을 부르면 “가요”가 아니고 “온다(I am coming)”하고 대답한다. “이 모자 입고(put on, wear) 가도 되요?’ 라고도 한다. 10대 특히 Teen age(13~19세)에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청소년의 낭만과 정서가 형성된다. 유머 감각, 죄의식, 수치의식, 서열의식, 정의감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 이 의식은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이 때 한국어와 영어를 하는 이중언어자는 한국과 호주 양쪽의 감정을 모두 소유하여 한계는 약간 있지만 이중문화자가 될 수 있다. 호주에 살면 어린이가 한국어를 사용하는 장소와 시간이 제한된다. 한글학교, 교회, 비디오 등에서 접하는 한국어로만은 부족하다. 같은 또래 친구들 중 영어를 쓰는 아이들이 많은 경우는 더욱 어렵다. 부모들의 의식도 문제다. 언제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호주에 좋은 교과서와 훈련 받은 교사들이 있어 옛날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어를 배워 이중언어(Bi-lingual). 이중문화(Bi-cultural) 자를 배출하기가 훨씬 용이해 졌다. 한인 어린이들 중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만 하는 경우에도 한국어 환경(Back ground)에서 자라면 백인 부모(Non-background) 밑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한국어 습득속도가 비교가 안 되게 빠르다. 이미 2차 언어가 한국어이기때문에 무의식에 의한 언어습득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있다. 필자가 지난 학기에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12세 어린이를 가르쳤는데 9주 동안에 한국어를 1년 배운 호주 학생보다 진도가 더 빠른 것을 보며 새삼 언어환경의 중요성을 느꼈다. 실제로 한국어로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라도 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어도 자기가 들으면서 자란 것들은 너무 빨리 외우는 걸 보았다. 이런 학생들은 말하기에 비해 쓰기 실력이 떨어진다. 부모가 아이와 한국어로 소통을 안한 경우 한국말의 모음, 자음, 억양 등 모든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불완전하다. 같은 음도 경우에 따라 틀린다. 단어 뜻을 알면 발음을 잘하고 뜻을 모르면 잘 못한다. ‘애기’, ‘자동차’는 발음을 잘하지만 ‘애인’, ‘국민’은 잘 못한다. 집에서 한국말을 안 쓴 경우에는 영어식으로 발음한다. “으” 발음을 못하고 된소리, 거센 소리가 서툰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한국 부모 밑에서 자란 어린이들은 백인에 비해 진전이 엄청나게 빠르다. 문법을 보면 조사나 어미를 빼놓고 말하거나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이가, ~을를’의 사용을 못하고 또 무슨 뜻인지 모르고 기능어를 쓴다. “먼저 전화걸어고 가요”, “한자 읽지 알아요?” 등이다. 단어 나열을 위주로 하여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나 한글말 몰라 미안해요”. 긴 문장을 피하고 단문만 쓰는 경우 접속사를 쓰지 않고 문어체 보다 구어체를 사용한다. “뭐 할라구 이걸 사요?” (무엇을 하려고 이것을 사세요?) “나랑 같이 가요”. (나와 같이 가요) 또 반말을 주로 하고 존대말을 잘 쓰지 못하는 어린이들도 있다 쓰기와 말을 어느 정도해도 한글을 전혀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글을 써도 획의 순서가 엉망이다. 구어체만 알고 있고 그것을 문어체 형식으로 바꾸어 쓰지 못한다. 한글로 써 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맞춤법이 많이 틀리고 문법, 구문구조를 모른다. 듣기는 네가지 기능 중 가장 뛰어나다. 듣기 능력 개발이 언어교육에서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기능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된다. 단어나 문장구조를 확실히 몰라도 내용을 이해한다. 문화이해에 대한 장벽이 없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눈치로 안다. 읽기는 문자와 접촉이 적어 읽는 것이 서툴고 유창하지 못하다. 체계적 훈련을 못 받아 모음, 자음 등 발음이 부정확하다. 음의 동화, 축약, 자음 접변 등 음운 변화를 모르고 읽는다. “졸업하고”, “한국말”, “같이” 를 다르게 발음하고 연음을 못해서 “오월 일일”, “취직을”을 다르게 발음한다. 유성, 무성 규칙을 못 지킨다. 바보, 고기를 다 유성음으로 낸다. 된소리, 거센 소리에서도 많이 틀린다. 그러나 한국 어린이는 백인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발전 속도가 빠르다. 필자가 미국 평화봉사단 강사로 근무할 때다. 한국말을 모르는 뉴욕의 한국 어린이 33명과 미국 대학생 수십명에게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노래를 가르치는데 한국 어린이들은 금방 “송아지” 라고 발음 하는데 미국 대학생들은 수십번을 훈련 시켜도 계속 “쏭아지” 였다. 이중언어자(Bi-lingual)를 만들면 이중문화자(Bi-cultural)가 된다. 그러면 한국문화와 부모를 더 이해하게 되고 본인 자신에게도 인성개발, 취업에 도움이 된다. 한상대(린필드한국학교 교장)

03/10/2019
한상대 칼럼

두 팀 주역이 모두 한국인 푸치니는 일본을 가본 적도 없다. 런던에서 1900년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이란 연극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다. 나비부인은 어떻게 일본 색채를 그렇게 음악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지 나는 푸치니에게 놀란다. 푸치니는 일본 음악이라고는 가부키 공연을 한번 본 것뿐이었다. 일본인들은 100년이 지났는데도 푸치니 만큼 자신들의 모습을 음악으로 이렇게 큰 규모로 아름답게 표현을 못하고 있다. 이야기는 일본의 참담했던 1900년대 초 나가사키 항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히는 일본 여인의 비극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이다. 핑커튼이라는 미국 해군이 15살이 된 초초상(Cio-Cio-San)이란 게이샤와 결혼식까지 하고 데리고 놀다가 버리는데 일본여인은 진정으로 온 맘과 몸을 바쳐서 핑커튼을 사랑한다. 핑커튼이 떠나간 후 그의 아들을 낳아 기르며 기다리는데 결국은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나타나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나비부인 초초상은 자살한다는 비극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는 동양여자들의 일부종사, 남성 우월주의에 순응하는 문화가 미화 되면서 동양여자들에 대한 아련한 신비와 성적 환상을 만들어왔다. 나비부인에 나타난 미국 군인은 전리품처럼 일본여성을 농락하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비하되고, 일본의 처참한 꼴이 다 드러나는 오페라로 회자된다. 만약 우리나라가 이런 식으로 오페라에서 다루어지면 국민들과 정부가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 당장 그 오페라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데모를 하고 난리를 쳤을까? 일본은 행여 이런 점들 때문에 여성단체가 들고 나오든지 공연의 횟수가 줄어들까봐 전전긍긍하며 오페라에서.표현되는 초초상의 매혹적인 면을 더욱 부각시킨다. 푸치니가 일본을 음악으로 포착하여 세계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전역에서 독립기념 폭죽이 터지고 있을 7월 4일 저녁에 나비 부인을 보러 갔다. 시드니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나비부인은 정통 연출이 아닌 디지털 영상 처리를 주로 하는 현대판이었다. 한국계 성악가 마리아나 홍이 이날 주인공 나비부인이었다. 푸치니의 백미는 목소리의 미학이고 특히 고음을 시원하게 지르는 발성의 미학이다. 그런데 비교적 목소리가 가느다란 소프라노가 고음마다 안 지르던지 숨이 짧아 그냥 끊어져버리던지 하여 아주 답답했다. 첫 장면에서도 초초상이 결혼식 하러가면서 아련하게 올리는 고음을 한 옥타 낮게 처리하더니 제일 유명한 아리아 어떤 개인 날(Un bel di) 마지막 장면 야스페토(I’aspetto!)에 숨이 모자라 너무 짧게 끝내는 바람에 듣는 청중에게 전혀 카타르시스를 못 주었다. 푸치니 아리아는 중간에 점점 클라이막스로 가면서 뒷부분을 시원스럽게 질러대는 맛이 일미인데 여기선 그것도 전혀 기대에 못 미쳤다. 북한 김정은과 비슷하게 생긴 핑커튼 역의 테너는 목소리는 릴리코지만 발성도 괜찮고 아리아도 잘 처리했다. 조역 미국 영사역 바리톤은 소리가 허해서 답답했다. 표 한장에 3백 달러를 주고 갔던 나의 기대에 오페라 나비부인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페라 극장 음식점에 갔는데 내부장식도 좋고 서비스도 좋았으나 특별요리는 맛이 없어서 뒷맛이 답답했다고나 할까? 비싼 표를 사서 간 오페라도 뒤끝이 찝찝했다. 누가 나에게 카라 손(Karah Son)이 하는 건 다르니까 가 보라고 한다. 이 오페라는 8월 중순까지 공연한다. 한상대(대한문화학교 주관교수, 린필드한국학교 교장)

11/07/2019
한상대 칼럼

광해군.. 폭군인가? 현군인가? 동양에서 덕(德)은 인물 평가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왕도 덕치(德治)에서 벗어나면 용군(庸君)이 된다. 조선 왕조에서 폭군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을 꼽는다. 그러나 광해군의 입장은 연산군과 다르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죄목이 세 가지였다.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킨 일.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고 혼탁한 정치를 한 일. 명나라에게 사대를 안 하고 친 청나라 정책을 편 일이었다. 광해군의 자주, 실리 외교가 사대파에게 밀려난 것이다. 1575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광해군은 세자에 봉해졌다. 광해는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였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가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선조가 아들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에게 제일 아쉬운 점은 모후와 일찍 사별이라고 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선조는 기뻐했다.(종계변무 – 태조 이성계에 관련된 명나라 역사를 고친 일) 선조는 왕자들도 광국원종 공신 1등에 책록하였다. 1584년 선조는 주청사를 임명하면서 "모든 게 너희 역관들 때문이다. 빈손으로 오면 네놈들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줄 테다"란 최후 통첩을 내렸다. 이 일행이 조선 왕실의 숙원이던 종계변무를 성사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숙종 때 편찬된 유명한 역관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官志)’에 기록됐다. 1583년 역관 홍순언이 명종 때 명나라에 사행을 갔다. 통주란 곳에서 홍등가에 아름다운 소복 기녀의 사연을 듣고 도와준다. 역병으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비용을 도와준다. 홍순언은 공금 횡령으로 투옥되고 만다. 그리고 1584년, 주청사를 보내며 수석 통역관 자리를 맡겼다. 그 여인은 이후 예부 시랑 석성의 후처가 됐다. 석성은 자기 처가 조선인에게 도움을 받은 얘길 들었다. 그는 역관을 집에 초대하여 부인이 술을 따르도록 하였다. 석성의 노력으로 이성계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기록이 고쳐진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했다. 그때 광해는 군량미를 모으고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공을 세웠다. 왜란에 선조는 신의주로 쫓겨가고 광해가 왕 대역을 했다. 광해는 난중에 동분서주 소임을 다했고 조야의 명망을 모았다. 그는 현군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부왕 선조는 그 보고를 받고 인정과 칭찬은 커녕 오히려 견제와 냉대만 했다. 이 와중에 1606년 인목대비가 아들을 낳았다. 선조는 태어난 영창대군을 총애하고 세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자 광해군에게 선위 유지를 내렸다. 신하들에게는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교를 내렸다. 영의정 유영경이 광해군과 사이가 나빠 유교를 감추었으나. 이일은 이이첨, 정인홍 등에 의해 누설된다. 광해는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오르자 유경영의 소북파가 정인홍의 대북파에게 궁지에 몰렸다. 인목왕후는 대비로서 교지를 내려 광해군이 즉위했다. 광해가 1608년 즉위하고 유영경은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는다.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가 득세하여 요직을 차지하였다. 광해는 조정의 기풍을 일신하고 초당파적 인재를 등용하고 임진왜란으로 파탄난 재정과 불탄 궁궐을 중수했다. 조세를 공평하게하여 민생을 구제하려고 했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고 후금과 실리외교를 펼쳤다. 당시 욱일승천하는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광해는 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똑바로 읽었다. 그러나 이복 형인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낱낱이 비방하고 다녔다 한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도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에 임해군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일러바쳤다. 대북파가 주동하여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했다가 사약을 내린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인목대비와 아버지 김제남은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영창을 추대하며 반역도모를 했다. 이에 영창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조치가 되었다 이듬해 강화부사 정향 자의로 영창은 증살되었다. 영창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다. 자식과 아버지를 잃은 인목대비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광해군을 헐뜯고 원망하는 일만 하고 살았다 권신들이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광해가 응하질 않았다. 광해군은 5년을 참았다가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정인홍은 전은론(全恩論)을 주장(부모는 형벌 불가능)했다. 효가 기본인 사회에선 생모가 아니라도 사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폐모의 조처를 한 것이 광해군의 큰 실수였다. 왕권 확립을 위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게 필수였다. 인륜에 어긋나는 조치는 선례가 많았다.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세조는 형제와 조카를 죽였다. 인조도 숙부와 아들, 며느리를 죽였다. 광해는 전국을 돌면서 조선의 국력을 체험, 평가했다. 명나라의 양식, 물자, 노역 공급과정에서 명의 횡포를 목격하였다. 그에겐 왜군보다 명나라 군의 피해가 더 크게 느껴졌다. 광해는 여진족을 주시했으나 대신들은 명나라에 보은사상만 갖고 있었다. 광해는 정탐꾼을 통해 금나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1617년 명은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의 원병을 요구한다. 광해군은 “반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또 “우리 군대는 훈련이 부족하고 무기도 없다”고 했다. 1618년 7월 명의 거듭된 강요에 군대 파견을 결정한다.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1만 3천 여명이 갔다. 광해는 3만 군사로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강홍립에겐 저 유명한 관형향배(觀形向背) 밀지를 내렸다. “형세를 보아 유리하게 행동하라”는 내용이었다. 강홍립은 명에게 “군량미가 뒤 처졌다”며 머뭇거렸다. 그는 통역을 보내 후금과 내통하기도 하였다. 명의 독촉에 못 이겨 나가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했다. 청나라에 “우리는 마지 못해 출정에 나섰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평안 감사 박엽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었다. 투항한 장수의 가족을 가두고 조정의 처분을 대기하였다. 조정은 강홍립의 죄를 논하고 명의 은의를 따지고 있다. 이때 강홍립은 적진의 사정을 몰래 조정에 보고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역적 강홍립을 죽이고 명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처음으로 자기 마음을 실토했다.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찌할 건가? 우리 병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지난번 명에서 청병해 왔을 때 경들은 마치 북 한번 울리면 청을 싹 쓸어 버릴 것처럼 말했다. 내 이를 두려워 밤낮으로 고민했다. 경들은 어찌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항한 장수를 명에게 일러 바치려고만 하니 내가 이를 절통해 하노라”고 말했다. 왕은 국제정세를 읽는데 신하들은 능력이 따라가질 못했다. 왕은 국내에서 성(城)을 보수하고 강한 군대를 키워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했다. 인재 등용과 둔전을 개간하여 백성의 걱정을 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왕의 형안은 무지한 신하들 때문에 고군분투한다. 조정은 광해의 정책에 반대를 거듭하고 왕비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왕은 후금과 우호를 다지면서 명에게 적당히 대처했다. 서인 반역세력이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성공 가능성도 낮았고 한 붕당의 씨를 말려버렸지만, 나름 명분이 있었고 민생만은 안정을 찾았던 쿠데타였다. 연산군을 내버려뒀다가는 나라가 망할 거라고 대신들이 확신하고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능양군의 개인적 원한과 당리당략적인 이해 요소도 있었다. 능양군은 추대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칼을 갈며 주도하였다. 아버지가 책봉의사가 있기도 했던 신성군의 동생이었기에 정치적으로 반정의 명분을 얻기 쉬웠던 것이다. 연산군 때는 내각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군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편인 대북 전체가 공공의 적이었다. 인조 반정은 서인들이 대북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대북파는 몰락하여 힘을 못 쓰게 되었다.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이서와 이귀, 김자점, 최명길, 최내길 형제가 동조했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반군은 2,000여 명의 군사로 창의문으로 진격했다. 성문을 부수고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었다. 물론 100% 전멸한 것은 아니지만 대북계열은 '학맥'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제거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파로써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명분은 민생에 있어 혼군 척결이었다. 광해군에게 씌워진 죄목은 사대를 저버린 배반죄였다. 나라가 짓밟히면서 존명사대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조정은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명분만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앞선 광해는 대비책을 세우기에 골몰했다. 내치(內治)에도 어느 군왕 보다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후 환도했을 때 궁궐은 다 불타고 없었다. 왕실은 월산군의 사저를 왕궁으로 빌려 쓰고 있었다. 경복궁을 비롯 큰 토목공사는 거의 광해군 때 이뤄졌다. 이런 과정에서 부역이 가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광해가 즉위하자 곧 시작한 것이 대동법 실시였다. 대납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모리배들이 이권화 하였다.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쌀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광해 시절 문화사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의보감을 간행했다. 삼강행실도를 보급, 타락하는 기풍을 쇄신하였다. 성곽의 강화로 외침에 대비하였다. 이런 공적은 그가 쫓겨난 뒤 죄목으로 씌워졌거나 무시당했다. 지주와 벼슬아치의 불만으로 반대세력으로 키운 결과가 되었다. 서얼과 노비출신의 인재등용은 양반 출신을 실망시켰다. 조카 인조에게 쫓겨났을 때 왕비 유씨가 질문했다. “이 일이 종묘사직과 부귀영화 중 어느 쪽이 목적이냐?” 광해군, 폐비 유씨, 폐세자 질은 위리안치(강화도)되었다. 서울 가까이 두고 감시하면서 후환을 막기 위해서였다. 위리안치 두 달 만에 폐세자가 담 밑 구멍을 파고 탈출하다가 잡혔다. 손에는 은과 황해감사에게 보내는 서한이 있었다.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이 걸 보고 있다가 떨어져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목메어 자살했다. 인목대비가 광해를 죽이려고 하나 이원익 등이 말렸다. 인목대비는 폐 세자에게 주검을 명해 목매어 죽었다. 광해는 쫓겨 난지 두 달 만에 20대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다음해 10월 폐비 윤씨도 심화병으로 죽었다. 박씨에게 시집간 딸을 빼곤 광해는 외톨이가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과 1636년 병자호란에도 교동에 안치하고 경기수사에게 “알아서 선처 하시오” 했으나 그가 광해를 보호하였다. 다음 해에는 광해를 멀리 제주도로 보냈다. 그를 데리고 다니는 상장이 상방에 광해는 아래채에 잠을 재워도 입을 다물었고 “영감”이라고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오랜 침묵은 무얼 뜻하는지 해석이 분분하다. 귀양 19년 만에 광해는 67세로 제주에서 죽었다. 그의 유언은 “내가 죽으면 어머니 옆에 묻어 달라”였다. 그는 유언대로 양주의 자기 어머니 무덤 옆에 묻혔다. 임해군의 묘도 옆에 있으나 후손들은 광해를 무시한다. 광해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세자책봉, 왕위 계승에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라 다녔다. 아버지 선조의 잘못이었고 형제들에게 왕위를 위협당했다. 이런 음모와 술수 속에서 그에게는 정서불안의 결함이 생겼다. 그러나 광해군은 늘 개혁과 혁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치도의 이론 제공자는 정인홍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용병자위설로 우리가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부패한 관리를 척결했다. 정인홍은 청나라와도 중립의 실리외교를 주장했다. 광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군주였고 혁신정치를 폈다. 광해의 반대파 서인은 그의 모든 공적을 헐뜯고 매도하였다. 인목대비는 “광해가 선조를 독살했다”고 터무니 없는 날조도 했다. 세금이나 노동을 차출할 때 부패한 관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산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광해군 때의 권세가였던 정인홍, 이이첨, 유희분을 비롯,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었다. 반정 모의를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 고령자는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1689년 송시열은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을 받았다. 인조반정의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다.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배청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조선은 당한다. 1627년 후금은 대거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이 때 왕은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한 채 강화도로 도망갔다. 결국 조선은 강제로 청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굴복했다. 이후에도 국제정세를 못 읽는 인조는 도망온 명의 장수는 돕고 청의 사신은 죽이려 하고 청나라 황제는 오랑캐라고 인정을 안 했다. 1636년 드디어 청의 전면적 침공을 당하게 된다. 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아무런 대책을 못 세우고 있었다. 끝내 항복하여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9번 절하면서 예를 행하고 군신관계를 맺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이었다. 당시 이귀, 장유, 최명길 등은 실리 외교를 주장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볼모 시절 그는 청나라의 국력과 당시 국제 정세를 읽고 조선의 친청정책과 서양문물울 받아들여 개혁을 해야한다는 필요성을 실감했다. 그는 서양인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는 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다. 1645년 세자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인조는 서양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 박대했다. 소현세자는 1644년에 청에서 석방되어 3개월에 걸쳐 귀국하였다. 9 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4월 26일 갑자기 죽는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귀비가 의원을 시켜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파다했다.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1645년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인조는 아들을 폐위시키고 '폐세자'라 불렀다. 그 뒤 세자빈 강씨와 후궁 조귀인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이 자기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첫째 석철은 12살, 둘째 석린은 8살,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1648년 장독으로 죽었다. 둘째 석린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셋째 석견은 효종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진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에 청나라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다. 소현은 황제 청태종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다 봉림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과 함께 갈 수 있길 원했다.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이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던졌다. 이때 인조가 '용연석'이라고 외친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청나라에 잡혀간 50만명(당시 조선인구 1천만)의 처녀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고향으로 환향녀(還鄕女)가 되어 돌아 왔는데 주위에서 몸을 오랑캐에게 더럽혔다고 냉대를 했다. 그들은 청나라에 잡혀갈 때 한번 죽고 고향에 돌아와서 두번 죽는다. 그들은 고향에 들어 가기 전에 관헌의 감시하에 냇물에 몸을 씻고 들어가야 했다. 그 때부터 서방질하는 바람난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 되다가 못 된 것이 신숙주이고 콩나물 되다 못 된 것이 숙주나물이고 조광조를 모략한 심곤과 남정이 이름에서 곤정(곤쟁)이 젓이 나왔다. 역사 인물을 오늘 날 기준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중요하다.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보아야 한다. 당대의 가치기준, 이념 조작으로 쉽게 왜곡되고 기록된다. 그 실상을 접근해 보기 위해 동태론적 접근을 한다. 새로운 역사 경험을 하기 위해 그 작업을 해야 한다(참고: 이이화저 인물 한국사). 나는 개인적으로 선조나 인조처럼 자기보다 잘난 아들을 몰라보고 질시만 하던 선조나 인조 같은 무능하고 옹졸한 인물들을 싫어한다. 동양에서 덕은 인물 평가에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덕이 있는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위선을 하고 사람들은 그 위선에 속고 산다. –끝- 한상대 (대한문화학교 주관교수, 린필드 한국학교 교장)

27/06/2019
한상대 칼럼

이순신과 원균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 평가가 확대 되기도 하고 축소 되기도 한다. 그들의 행적이 오늘 날 우리들의 안목으로 평가된다. 이 평가는 고정적일 수도 없고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기준과 접근 방법이었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적 인물들이 영향을 받는다. 삼국 시대는 상무정신이 중심된 가치관이었다. 삼국 통일과 북방 민족과 대립을 위한 가치관이었다. 상무정신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사정이 달라졌다. 외침의 우려가 없는 가운데서 내치를 위주로 했다. 유교가 통치이념이었기 때문에 퇴계와 율곡같은 대학자들을 배출했다. 충, 효 사상을 이루어 ‘충의 열사’들을 배출해 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동태론적 접근(Behavioristic approach)을 통해 다시 분석, 평가가 되어야 한다. 이순신과 원균은 외침을 맞아 싸운 ‘충’의 무장이었다. 이순신은 1576년에 32살에 무과에 합격한 뒤 함경도에 가서 북방 오랑캐를 막는 일을 했다. 소대장 격인 그는 여진족과 전투가 일어나면 항상 앞서 싸우지 않고 병사들 뒷편에 있었다. 그는 별로 공을 세우지 못해 미관 말직에만 머물러 있다가 40대 중반에 정읍 현감이 되었다. 유성룡이 하회 고향에 왔다가 유치숙의 진 모습을 본다. 좌의정 유성룡이 자기와 젊어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 무난한 이순신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라는 높은 관직을 갑자기 받았다. 이순신은 여수에 부임하여 군기를 다지고 나무를 실어와 배를 만들고 군사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의 도움을 청했다. 이순신은 편의종사(便宜從事)의 권한을 무시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리고 기다렸다. 장군은 조정의 허락 없이 서로 협동하는 권한이 있다. 이순신은 5월 2일에야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1567년에 24살에 무과에 합격한 뒤 용장으로 여진족과 싸울때 항상제일 앞장서는 용장이었다. 북쪽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부사라는 높은 관직을 얻었다. 빠른 출세 길을 달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였다. 자기 보다 나이도 다섯살이 밑이고 무과급제는 한참 후배이고 자기 보다 워낙 관직이 낮았던 이순신이 자기 보다 한 계급 위인 전라좌수사가 되어 있는 것에 대해 원균은 심한 불만을 갖게 된다. 술좌석 등에서 이순신이 유성룡 대감의 빽으로 낙하산 인사로 벼락 출세한 별 볼일 없는 인물이라고 틈만 나면 비난했다. 보통 사람이면 어느 시대라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이순신도 그가 자기를 그렇게 평하는 걸 전해 듣고 알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만 안 보였을 뿐이었다. 소심한 사람들은 결단을 못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걸 잘 못한다. 호주 동포 사회에서도 자기 주장을 잘 안하고 조용히 있는 소심한 사람을 인격자라고 평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임진왜란을 앞 두고 두 명은 남해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원균은 부산진에 부임하여 해이해진 군기도 못 잡았다. 3개월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는 경상우수영으로 왜군이 몰려 왔다. 수백 척의 배에 잘 훈련된 왜군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쳐 들어 왔다. 원균의 부대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왜군은 희생도 없이 상륙하여 부산진영을 유린했다.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이순신에게 원조를 청했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을 보면 “왜적 350 척이 벌써 부산 앞 절영도에 와 있다.(4월 15일 협조 요청 공문) 부산진이 벌써 함락되었다.(4월 16일자 공문) “왜적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무인지경으로 몰아치고 있다.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후원해 달라.”(4월 20일자)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정으로부터 출전명령을 받고서야 경상의 수영과 연합작전을 세웠고 그로부터 며칠 뒤 싸움이 있었다. 왜적의 주력 부대는 이미 서울을 육박하고 있을 때였다. 이순신의 연합 부대는 후속 부대와 전투를 한 것이다. 후방 부대와 전투에서 연전 연승으로 승리한 연합부대는 왜군의 통로를 막는데 성공했다. 위기상황에서 20일 만에 참전한 것은 보신책이었다. 원균이 연명으로 전과를 올리려 했으나 이순신은 단독으로 자기만의 전과를 조정에 올렸다. 원균은 가선대부, 이순신은 한 급 높은 자헌대부가 됐다. 서열의식이 강한 원균에게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해군참모총장 격인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드디어 원균은 후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원균의 불만이 쌓여 모함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것이 원균이 역사의 악인이 된 계기였다. 두 장군이 한 바다에서 왜적을 공동으로 막고 있었다. 이들 불화가 심해지자 원균은 충청병사로 발령받는다. 원균이 세 번 째 당하는 수모였다 여기서부터 원균은 요로요소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1597년 조정은 왜와 화의를 벌이다가 깨어지고 만다. 소서행장은 화의파였고 가등청정은 주전파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서행장은 이순신에게 가등청정이 혼자 배 한 척으로 조선을 정탐하니까 잡으라고 했다. 소심한 이순신은 왜의 모략일 거라며 출정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큰 실수였다. 소서행장의 말이 사실이었다. 만약 이 때 가등청정을 잡았으면 정유재란은 안 일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로 이순신은 파직되어 서울로 잡혀왔다. 원균은 열망하던 3도 수군통제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순신은 권율 장군 휘하에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모친상을 당한 그는 상복을 입은채 육군 졸병으로 아무말 없이 행군을 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원균 때문에 훌륭한 장군이 저렇게 되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왜적이 6백 척으로 다시 몰려 왔다. 정유재란 시작이다. 원균은 전선의 약함을 이유로 수륙 양면전을 주장했다. 같은 유성룡 파인 지금의 국방장관 같은 지위에 있는 권율은 이순신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권율은 “장군이 전쟁에서 목숨을 아까워 한다”며 명령 불복종으로 원균을 곤장 5대 벌에 처한다. 다시 출전 명령을 받고 나갔다가 원균은 죽임을 당한다. 58세의 뚱뚱한 원균은 곤장 매독으로 뛰지를 못하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왜군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다시 통제사 자리는 이순신에게 돌아갔다. 원래 패군지장은 할말이 없는 법이다(有口無言). 당시 사관은 “원균은 사람됨이 포악하고 이순신에게 온갖 모략을 하여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았다. 그는 전쟁에 패하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사졸들로 하여금 고기 밥(魚肉)이 되게 한 죄인이다”라고 적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왜군은 물러가고 있었다. 그는 퇴로를 막고 명나라 군과 연합하여 승전을 했다. 당시 사관은 “소서행장은 순천성을 굳게 지키고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군과 바다 입구를 막고 압박하였다. 소서행장이 사천의 왜장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했다. 왜적이 수로를 따라 오니 이순신이 진격하여 크게 깨트리고 적의 배 200 여 척을 불사르고 죽이고 빼앗은 것이 무수하였다. 이순신은 화살과 총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선조 31년 11월초) 이순신은 물러가는 적과 싸우다 죽었다. 앞장 안 서던 그가 일생 처음으로 뱃머리에서 지휘하다가 총에 맞았다. 이를 두고 논자들은 자살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중상모략에 휘말리느니 명예를 택했다. 죽는 장면이 이 둘은 명장과 패장, 용장과 겁쟁이 됐다. 임진왜란의 공신 녹훈 논란은 3년 8개월을 끌었다. 가문의 명예와 자손들에게 커다란 혜택이 따른다. 원균이 2 등 공신으로 녹훈을 올리자 선조는 말했다. “전쟁이 났을 때 원조를 청했으나 이순신이 안달려갔다. 원균은 모든 전쟁에서 언제나 앞장 섰다. 적의 장수를 목 베어 새운 공까지 이순신에게로 돌아갔다. 두 세 번 장계를 올려 해전은 불리함을 호소했으나 곤장만 맞았다. 원균은 죽을 걸 뻔히 알면서 몸을 나라에 바친 사람이다. 원균은 훌륭한 장수였 1 등 공신으로 하라” 권율, 이순신 다음에 원균이 합세했다. 오랜 왕국이 왜적에게 유린된 건 엄연한 사실이다. 왜적은 자기네 국내 사정이 있어 물러 갔다(풍신수길의 사망) 인간은 실수도 있고 약점도 있다. 이 걸 제시해야 한다. 어떤 인물을 지나치게 미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과장에서 그런 위인에겐 악역이 필요하다 그래서 악인은 더 과장되어 악인화되어진다. 이순신 장군이 명장임은 틀림없다. 그를 격하시키거나 원균의 오명을 벗기는 수준을 벗어나 재평가돼야 한다. 원균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대립됐다. 원균도 이순신을 미워했지만 이순신도 그를 미워했다. 난중일기에서 무지하고 보잘것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원균은 적극적으로 모함했고 이순신은 위선을 했다. 임진왜란이 이순신 힘으로 물리쳤단 생각은 어떤가? 박정희 육군 소장이 5. 16 쿠데타를 성공한 후 무장으로 구국 영웅의 선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박정희 군사정부에 선택되어 현충사도 짓고 광화문 네 거리에 동상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한글학회 학자들은 광화문 네 거리에 동상이 처음 세워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세종대왕이라고 주장했다. 한글학회 탄원서도 무시된 채 이순신 동상이 건립됐다. 군사정권의 영웅주의 가치관과 필요성이 반영되었다. 반세기 이상 걸려 세종대왕 동상도 뒤편에 건립됐다. 어떤 인물을 연구하던지 객관성이 결여되어선 안 된다. 현실적 목적으로 어떤 인물이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이순신은 도덕적이지만 원균에 비해 결단력이나 용기가 부족했다. 명예나 욕심이 많은 원균같은 인물도 그 것이 동기가 되어 역사상 큰 일을 해내는 경우도 많다. 한상대 (린필드한국학교 교장, 대한문화학교 교수) 사진 1: 이순신 사진 2: 거북선 사진 3: 원균 사진 4: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

20/06/2019
한상대 칼럼

”사람 되다 못된 것이 신숙주라고 하고 콩나물 되다 못 된 것을 숙주나물이라고 한다” 신숙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절자이다. 그가 단종을 저버리고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 할수록 신숙주는 반비례한다. 충의(忠義)는 유가에서는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부당한 임금이라도 목숨을 다해 받들어야 한다. 이 것이 이씨 왕조 가신의 중심 윤리였다. 냉정히 그 것이 민족, 국가, 국민을 위한 윤리는 아니다. 그는 동료 사육신이 죽임을 당한 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변절은 매도되어야 하지만 민족차원으로 확대 적용할 적에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뜻에서 신숙주를 역사에 다시 비추어 본다. 그는 조선전기 성리학자, 관리,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신장(申檣)의 아들이다. 1438년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39년 친시 문과에 합격하여 세종 때 24세로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했다.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반정을 지지하고 세조의 최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번 출정하였다. 전라남도 출신으로 1461년부터1464년, 다시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정운 등을 편찬했다. 조선전기 성리학자, 관리,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 사람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우수한 학자들을 뽑았다. 그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학문만 닦게 했다. 신숙주는 자기 집의 책을 모두 읽은 후 궁중에 있는 장서각의 책을 모두 독파할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밤 세종은 집현전에 누가 있는지 보라고 했다. 내시는 “신숙주 경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고 보고했다. 세종의 명으로 내시가 서너 차례나 가서 엿보았는데 신숙주는 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세종이 가 보니까 신숙주가 책상에 앉은 체로 잠이 들어 있다. 세종은 “자기 아버지 신장이 저러더니 그 아들도 그렇구나” 했다. 세종은 자기 위 옷을 벗어 덮어주고 왔다. 신숙주는 잠이 깨어서 용의를 보고 감읍하였다고 한다. 세종이 대마도를 정벌 한 후 왕래가 끊겼던 일본이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사절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왔다. 우리의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세종은 신숙주를 보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사와 승려들이 몰려왔다. 그의 서예, 시, 학문 수준에 그들은 흠뻑 빠졌다. 그는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고 제도, 풍속을 기록했다. 이런 모든 내용을 귀국 후 도면과 함께 나라에 바쳤다. 이것이 유명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이다. 이 책이 일본에 대한 안내서가 되었다. 일본에 있을 때 왜녀(倭女)를 바쳐 데리고 살았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데리고 배에 올랐다. 오는 길에 현해탄의 풍랑이 심하자 뱃 사람들이 계집 때문에 용왕이 노했다며 왜녀를 바다에 빠트리자고 했다. 이를 신숙주가 한사코 반대해 그녀를 끝내 구했다. 첫 벼슬 길에 서리의 잘못으로 그가 맡은 일을 못 했다. 서리가 벌을 받게 되자 신숙주는 “서리가 전해 주었지만 내 스스로 안 나갔다”고 거짓 자복을 했다. 결과 서리는 벌을 면했고 신숙주는 파직되었다. 그의 덕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단종이 죽자 연고자들을 다 종으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단종의 비 송씨도 종이 되었다. 신숙주는 송씨를 자기 종으로 달라고 요청했다. 송씨를 잘 보호하기 위함인 걸 알고 수양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는 종들에게도 언제나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로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에 능통하고 아라비아어와 인도어는 문자를 알았다. 그는 통역 도움 없이 대부분 의사소통을 했다. 그의 저서 동국통운(東國正韻)에 보면 외국어 발음 하는 방법이 나온다. ㅂ 앞에 작은 동그라미 표시로 영어의 F나 V도 발음 할 수 있다. 그는 훈민정음을 제작할 때 그의 어학 실력을 발휘했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중국에 갈 적에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뽑혔다. 그들은 39세 동갑 내기였다. 6개월 이상 같이 여행하며 수양은 신숙주의 실력에, 숙주는 수양대군의 그릇됨에 서로 감명을 받는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며 우의가 두터워졌다. 귀국하여 문종이 임종 시 신숙주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문종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수양은 할아버지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며 왕위에 오르고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준 걸 잘 알고 있었다. 수양은 어린 단종 보다 자기가 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자 중엔 수양의 동생 안평 대군이 명망이 높았다. 글과 그림에 능한 그를 김종서, 황보인 같은 대신들이 따랐다. 수양은 한명회, 권남 등이 있으나 비중이 적었다. 한명회는 수양에게 문신보다 무신을 사귀라고 권했다. 수양은 한명회의 꾀를 받아들여 “활 쏘기”를 열었다. 매일 활 쏘고 술 마시며 무사들을 포섭했다. 김종서, 황보인을 안평 대군과 역모를 꾀한다고 죽였다. 그리고 반대파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제거했다. 이 때 살생부를 쥔 사람이 한명회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수양대군은 실권을 쥐고 영의정이 되었다. 신숙주는 공신이 되고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집현전을 지킨 성삼문에게도 공신의 칭호가 주어졌다. 성삼문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공신들이 차례로 잔치를 벌일 적에도 성삼문은 안 했다. 수양의 세력이 온 나라를 누르자 15세의 단종이 겁을 먹고 옥새를 작은 아버지에게 건네어 주었다. 예방승지인 성삼문은 옥새를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날 밤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하자 성삼문이 뒷날을 도모하자며 옷깃을 잡고 말렸다. 이 둘은 같이 뒷간(화장실)에 가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성삼문을 중심으로 집현전 학사들은 단종 복위운동을 비밀스럽게 진행시켰다. 신숙주는 다시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복위운동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신숙주는 새 왕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사로 북경에 갔다. 수양의 백부 양녕이 단종을 멀리 보내라고 충고한다. 세조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중히 단속만 강화했다. 6월에 중국사신이 오자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다. 창덕궁 잔치는 상왕 단종도 참석한다. 복위세력은 이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성승, 유응부가 칼춤을 추다가 세조 쪽을 치기로 했다.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와 평생 친구지만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며 그를 살생부 명단에 넣었다. 눈치 빠른 한명회가 운검을 금지시켜 실패로 돌아간다. 거사일이 미루어지자 진짜 변절자 김질이 고자질했다. 반대 세력은 세조 앞에 끌려 나왔다. 세조 옆에 서 있는 신숙주를 보고 성삼문이 “세종에게 원손을 부탁받은 걸 잊었는가?” 라고 꾸짖자 세조가 신숙주에게 “뒤편으로 피하라”고 일렀다. 신숙주가 피하고 나서 사육신이 처형을 당했다.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부인이 상복을 입고 두어 자 되는 베를 가지고 대들보 아래 앉아 있다. “왜 그러고 앉아 있소?” 신숙주가 물었다. “영감이 오늘 옥사에 성학사와 같이 죽었을 걸로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하자 신숙주는 몸둘바 몰라 했다고 야사(野史)는 전한다. 사육신 사건 뒤에 노산군이 된 단종이 죽임을 당한다. 그 모든 비난은 신숙주와 정인지에게 쏟아졌다. 단종이 죽고 나서 세조는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신숙주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반정의 으뜸 공신은 한명회, 정인지 등이다. 그러나 평소 세조는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라고 했다. 당 태종에게 위징처럼 신숙주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숙주는 모든 실력을 세조의 문화사업에 바쳤다. 선대 왕의 말을 모은 ‘국조보감’을 편찬했다. 세종이 국가 기본질서를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했다.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로 만들었다. 훈민정음도 그의 손을 거쳐 발전, 보급되었다. 불경 및 많은 고전이 그에 의해 번역 되었다. 성삼문도 죽었는데 그가 없다면 누가 이 일을 했겠는가? 신숙주가 영의정 때 우의정으로 구치관이 임명되었다. 세조는 이 두 명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세조: 신정승! 신숙주: 예. 세조: “내가 새로 된 신정승(新 政丞)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못 했으니까 벌주를 내리겠소” 세조: “신정승” 구치관: 예. 세조: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벌주를 내리겠소” 계속 벌주를 받자 이번엔 왕이 불러도 두 명 다 대답이 없었다. 세조: “신하가 임금이 부르는데 대답을 안 했으니까 두 명 다 벌주요” 하고 또 술잔을 따랐다. 이 날 밤 3명은 다 크게 취했다(연려실기술 중) 생육신 김시습과 신숙주는 어릴 적 친구다. 김시습이 서울에 오면 아무도 찾지 않았다. 신숙주는 김시습이 왔을 때 집주인에게 찾아가 술을 많이 먹이라고 당부했다. 김시습이 술에 곯아 떨어지자 가마에 태우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술이 깬 김시습이 신숙주 집인 걸 알고 나가려고 했다. 신숙주가 그의 손을 잡고 “어째서 나와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며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소매를 뿌리치고 말없이 떠났다. 김시습은 변절한 그를 친구로 생각 안 한 것이다. 신숙주는 아픈 마음으로 떠나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정승인데도 누구 보다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는 “장례는 검소하게, 내 무덤엔 책만 넣어라”라고 유언했다 그의 결함은 물론 실절(失節)이었다. 이제 그 인간의 전체를 보아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숙주는 너무 인간적이고 완벽한 벼슬아치였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여 영화를 누리고 명예를 잃었다. 성삼문은 목숨을 바치고 청사에 이름이 남겼다. 그러나 성삼문은 더 이상 이룬 게 없었다. 신숙주는 우리 역사에 커다란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업적 보다 절의가 중요한지는 수단과 목적처럼 묘하다. 신숙주는 수양과 친했고 역사의 흐름에 따랐을 뿐이다. 그는 인정 많은 깨끗한 벼슬아치고 학자였다. 그는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힌 적이 없었다. 세조 반정에 방관자였지 참여자가 아니었다. 생육신으로 초야에 묻혀 살았으면 업적을 남겼을까? 독립투사 신규식과 단제 신채호는 그의 직계 손이다. 중국의 명나라에서는 가뭄과 기근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지진까지 일어나 대 혼란에 빠진다. 일본에서는 용인의 난이 일어나 본격적인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이 설립되고 베네치아 도서관이 설립 되었으며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쇄소가 섰다. 프랑스 시인 비용이 1462년 유언 시집을 발행하고 다음해 죽었다. 유럽에서 문예부흥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흑사병이 돌면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죽기도 했고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기도 했다. 아비뇽 유수가 일어나 교황이 두 명일 적이 생긴다. 한상대 (린필드한국학교 교장, 대한문화학교 교수) info@hanhodaily.com

13/06/2019
한상대 칼럼

1. 정도전 – 역성혁명의 풍운아 2. 신숙주 – 변절자인가 충신인가? 3. 원균 – 이순신 성웅화의 제물 4. 광해군 – 선견지명의 명군 역사적 인물들은 필요에 따라 평가가 확대 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판단은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 평가는 고정적일 수도 없고 고정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인물은 당대의 가치기준, 이념조작으로 쉽게 왜곡돼 기록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접근해 보기 위해 동태론적 접근을 해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 1. 정도전 이성계를 찾아가다 1383년 정도전은 삼각산 밑에 삼봉제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가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북쪽으로 떠났다. 그는 야인을 물리쳐 명성이 높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 군막은 기강이 엄숙하고 대오가 잘 정돈되었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은밀히 말했다. “훌륭하도다. 군사여, 무슨 일인들 못 하리요” 이성계가 물었다. “무슨 말이요?” 정도전은 짐짓 둘러댔다 “왜구를 친다는 말이외다” 두 명이 다 선문답을 하면서 서로의 의중을 읽었다. 정도전은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만남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예 군대와 일사 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의 군사 장량을 자처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했다. 이로부터 9년 동안 이조 건국을 위해 하는 일엔 그의 손길과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이색과 수구파는 옛 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1389년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만들었다. 그는 공양왕에게 많은 걸 건의 했다가 수구파에 의해 봉화현, 그 뒤 나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주선으로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자 김진양 등 수구파가 이틈에 개혁파 정도전, 조준, 남은을 죽이려 했다. 정몽주를 죽이다 이방원이 반대파 정몽주를 설득해 보려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봤다.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가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돌아온 정몽주의 답은 단심가(丹心歌)였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이방원은 할 수없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정몽주가 죽자 정도전은 서둘러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 졌다. 그는 고려를 배반하고 스승과 동료의 반대편에 섰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취중에 그는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썼도다”라고 중얼 거리곤 했다. 역성혁명 새 왕조가 들어선 후 7년 간 그는 눈부신 일을 해냈다. 먼저 국가 이념의 성립, 통치 제도의 정비였다. 국가 이념을 유교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교학으로 했다. 그는 ‘심(心) 불교’ 기(氣) 도교’ 이(理) 유교’ 편을 지어 유교가 실천덕목으로 인간생활에 충실한 점을 강조했다. 불교의 이론을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變)을 썼다. 그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도 썼다. 전환기에 사상적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정립이었다. 통치 체제는 중앙집권, 통치철학은 왕도, 민본주의였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이룩한 것이 천도(遷都)였다. 개경엔 언제나 저항세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동의로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 자리를 돌아 보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양이 보이는 언덕에서 “나는 이제 모든 근심을 잊었노라” 하여 그 곳 이름이 망우리(忘憂里)가 되었다. 묘자리로는 더 이상 좋은 이름이 없다. 처음 자리 잡은 곳에서 무학대사가 “십리를 더 가라”해서 그 곳은 왕십리(往十里)가 되었다. 1394년 궁궐과 성곽 윤곽이 10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도전과 무학이 경복궁 방향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무학은 인왕산, 정도전은 북한산이었다(火氣) 왕은 북을 등지고 앉아야 한다는 정도전 주장이 이겼다 그는 경복궁, 근정전, 광화문,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숙정문 등 서울의 모든 궁궐과 대문과 동네 이름들을 지었다. 4 대문은 유교 군자의 덕목 다섯가지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을 소지문(炤智門)이라 하였다가 북쪽에서 오는 음기(陰氣)를 막는다는 의미의 숙정문(肅門)이라고 고쳤다. 정(靖)이란 글자에 지(智)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남쪽 관악산에서 오는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숭례문 간판은 가로로 세웠다. 5상 중 마지막 자(字)인 신(信)은 서울 중앙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에 붙였다. 수도의 행정 분할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때로 명나라에 가서 외교도 하고 전국을 돌며 지방의 구회과 성보(城堡)의 수축을 결정했다 세자 책정 그의 노력으로 새 왕조는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이성계는 첫 왕비 한씨에게 6남을 두고 후비 강씨에게 2남이 있었다. 한씨 소생들은 새 왕조 건설에 공이 있었으나 아버지 이성계가 군 사령관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닐 적에 성장하여 나라를 맡기기에는 학문이 얕거나 거칠고 우락부락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자란 방석은 지혜롭고 성격이 순했다. 태조도 방석을 사랑했다. 정도전은 강씨 2남 방석이 영리해 애지중지했다. 태조에게 “방석을 세자로 삼으십시오” 하고 권헸다. 태조는 방석을 세자로 삼고 정도전이 스승이 되었다. 세자 책봉은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의 불만을 불렀다. 이들 왕자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정도전은 사병을 해체하고 왕자들을 행정 감독 등의 직책으로 각 도로 분산시키려고 했다. 이런 계획들이 첩자에 의해 방원의 귀에 들어갔다.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은 더 이상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들에겐 방원의 아내가 감추어둔 무기가 있었다. 당시 정도전은 요동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날밤 정도전이 있는 남은의 첩집으로 쳐들어 갔다. 이웃집에 불을 지르자 이들이 밖으로 황급히 나왔다. 방원의 종에 의해 정도전이 끌려 나왔다. 그가 “공이 예전에 살려 주었으니 한번 더 살려주시오” 그러나 방원은 정도전을 칼로 치라고 명령했다. 이어 정승 조준과 김시형이 끌려 나왔다. 조준이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 떨면서 말했다. 방원은 조준을 앞 세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이제가 군사를 동원 방원을 치자고 하자 이성계는 “자중(自中)의 일이니 할 수 없구나”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방석과 방번의 죽음 방원은 적자 중에 세자를 세워달라고 부친에게 고했다. 태조는 마지 못해 둘째 방과(후에 정종)를 세웠다. 왕은 세자였던 방석에게 “네가 편하게 되었구나” 했다 그러나 방석은 궁궐 밖으로 나가다 길에서 맞아 죽었다. 방번도 통진에 유배 령이 내려 가다가 맞아 죽었다. 방원은 두 아우의 죽음을 왕에게 비밀에 부쳤다. 태조는 방원이 두 아우를 죽인 것을 알고부터 방원을 몹시 미워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왕자의 난 태조의 넷째 아들이고 방원의 바로 윗 형인 방간은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나 방원에 비해 공적이 모자랐다. 이 때 방원을 도와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박포가 충분한 보상을 못 받자 방간에게 와서 돕기로 한다. 박포 같은 큰 응원군을 얻은 방간은 힘을 얻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에서 방원에게 지고 두 명은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한다. 함흥차사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 주고 함흥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원은 백성들에게불효란 인상을 지우기 위해 부친의 환궁을 원했다. 그러나 차사가 오면 이성계는 계속 죽여 의지를 보였다. 옛 친구 성석린이 찾아왔다. 수 많은 전쟁을 같이 보낸 전우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나에게 한양으로 돌아가자는 말만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 두 명은 옛날 이야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시간을 보내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성석린이 절을 하며 “한양으로 돌아갑시다”라고 간곡히 청한다. 성석린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이성계가 “내가 안 들은 걸로 하겠다. 어서 떠나라”하고 돌려보내자 부하들이 “다른 차사들과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하고 항의했다. 이성계가 계산해 보니까 성석린이 벌써 강을 건넜을 시간이다. 그래서 “강을 건넜으면 그냥 놔두고 아직 안 건넜으면 처형해라” 했다. 성석린은 함흥에 사는 누이 집에 들렸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나룻가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마지막으로 무학대사가 갔다. 그는 젖 떨어진 송아지와 에미 소를 따로 묶어 두었다. 소 우는 소리가 시끄럽자 이성계가 이유를 물었다. 무학이 “하물며 동물도 저러거늘 아들과 인연을 끊는 다면 누구에게 이 대업을 맡기시겠습니까?” 했다. 늙은 이성계도 할 수없이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으로 돌아 온 이성계 방원이 교외로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이때 하윤이 가운데 나무 기둥을 세우게 했다. 태조가 방원을 보자 분노에 못 이겨 활을 쏘았다. 방원은 나무 기둥 뒤로 숨었고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성계는 명궁이었다. 부친 환영 향연에서 이성계가 옥새를 방원에게 주며 “네가 원하는 게 이 거로구나. 가져가라” 했다. 명실상부한 왕이 된 방원이 아버지에게 술잔을 올렸다. 그러나 술잔을 내시를 시켜서 건네게 했다. 이성계가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로다” 하며 소매에서 쇠 방망이를 내려 놓으며 술잔을 마셨다. 그는 궁궐로 안 들어가고 소요산 밑에서 지내다 죽었다. 정도전이 건국한 이조 정도전은 선견지명이 있는 개혁파였다. 조선 개국은 정도전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장량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알고 야인 생활을 했는데 정도전은 끝까지 남아 요동정벌, 세자책봉에 관여하다가 죽었다. 방원이 그를 악인으로 깎아 역사에 나쁘게 기록되었다. 그의 유교숭상, 사대사상이 후대에 비판을 받았다. 고려말 불교의 타락한 사회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후에 유교가 공담으로 흘러간 것은 이념의 타락이었다. 그는 정치, 경제적 모순을 바로 잡고 혼돈을 수습한 혁명가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억울하다.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정도전은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한양 시내의 궁궐, 사대문,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다 지었다. 제 1차 요동정벌(1388)과 제 2차 요동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다.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는 성리학을 공부했다. 부친의 친구 목은 이색의 문하생으로 정몽주, 권근과 동문이다. 정도전은 서얼 출신이라고 동료들에게 안 보이는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정도전의 사후 방원(芳遠)이 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장애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그에게 역적이란 온갖 누명을 다 씌웠다. 조선의 건국에 실질적 주인공이며 조선을 설계한 그에게 두 임금을 섬긴 변절자로 낙인 찍었다. 자기네 손으로 죽인 정몽주는 충신 표본으로 내세웠다.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충 (忠)’은 정직, 성실을 뜻한다. 후대에 와서 충은 한 임금, 한 왕조만 섬기는 뜻으로 변했다. 개혁이나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충’ 보다 좁은 의미의 왕에게 복종하는 ‘충’이 강조되었다. 그 ‘충’을 한 임금을 위해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치는 통치철학의 방편으로 써먹게 된다. 그래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는 충신, 이조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을 역신으로 만들었다. 정도전은 역신으로 죽었기 때문에 시호도 안 내려졌다. 자기의 일생을 알리는 묘비나 행장의 글 조차 없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출생 연도도 모른다. 역사학자 이상백에 의해 그의 생애가 다듬어 졌고 한영우에 의해 그의 사상이 추적 되었을 뿐이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가 봉화 정씨의 시조로 아전이었다. 그래서 그를 “한미(寒微)한 출신’ 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정운교는 직제학 같은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도전은 아버지가 영주에 살아서 영주 출신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수도 개경에 살았다.아버지 친구인 목은 이색에게 글을 배웠다. 목은의 제자 정몽주, 이숭인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촌티를 벗고 더욱 그의 재질을 다듬을 수 있었다. 친원, 친명으로 갈린 조정은 타락의 극을 치 달았다. 벼슬길에 오른 그는 친원파가 원나라 사신을 맞으라고 했지만 반대한 이유로 나주 회진으로 유배를 보내졌다 2년 만에 유배지에서 풀린 그는 삼각산 밑에 자기 호 삼봉(三峯)을 딴 삼봉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유학 이론과 친명(親明)의 당위성을 가르쳤다. 6년을 보내는 동안 나라는 남의 왜구, 북의 야인 습격으로 더욱 어수선해 졌다. 그래서 그는 이성계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 방원은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복 동생 두명과 동복 형까지 죽이게 된다. 방원은 태종이 된 후에 자기는 첫째 양령과 둘째 효령을 제치고 셋째 아들 충령을 세자로 삼아 세종대왕이란 명군을 배출하게 만든다. 혹자는 방원이 저지른 죄는 세종을 탄생시킨 것으로 탕감(?) 되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한상대 (린필드한국학교 교장, 대한문화학교 교수) 사진 1: 선죽교를 찾은 필자 2017년 5월 사진 2: 왼쪽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06/06/2019
한상대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