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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룡 비오 신부 화가 나고 분노가 치솟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결책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랑입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방해받아 일어난 분노, 나의 원의(願意)가 자유로운 길을 가고 있는데 길이 막히면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계속 제지당하면 당연히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인생의 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인생길에서 우리는 헤어지고 만납니다. 이별이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면,‘만남’은 새롭게 갈 수 있는 곳을 선물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인생의 길에서 사랑은 분노와 화를 풀어낼 수 있는 비법입니다. 마음속에 화를 이기는 온전한 사랑을 담아보세요. 완벽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길을 받아주고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화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사랑의 언어로 표현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원한과 울분 그리고 분노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분명 나의 감정을 무너트리고, 우리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게 합니다. 화나 분노를 자주 표출하는 사람은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 안에 숨어 있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마음의 거울을 바라보세요. 신뢰할 수 있는 친구에게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그 화의 뿌리가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를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는 이유는, 혼자서 앙갚음 할 것을 숙고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겨낼 수 없다면 도움을 청하세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 변화에 더디고 그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자, 죄인, 세리, 부정한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 갑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늘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을 원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언어를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담아주십니다. 삶이 변해야 한다고 강변하거나, 죄책감을 지적하며 죄인 취급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면서, 잘 알아듣지 못하고 당신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려 해도(마르 9,31-37) 나무라거나 잘못부터 따져 묻지 않습니다. “너무 죄의식을 갖지 마세요. 온전한 나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응원과 용기를 이처럼 주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일꾼의 1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다리위에 부었습니다. 느닷없이 벌어진 황당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가 더 불쾌해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처럼, 여자를 나무랍니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마르 14,4-5) 제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양, 그 뜻을 다른 이에게 강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조용히 말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마르 14,7).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르 14,6)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을 중지시키고, 진심어린 그녀의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행동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사랑을 담아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웃사람이 취하는 행동과 모습에 틀렸다 맞다 비판하며 살아갑니다.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불신합니다. 심지어 죄의식을 조장하거나 그 죄책감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온전한 자신이 충분히 드러나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사람은 습관화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양식이 사랑의 언어‘따뜻한 부드러움’ 곧 온유함을 지니면 됩니다. 사랑의 언어를 마음에 담아보세요.

12/11/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요즈음 미국과 많은 다른 나라들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정치적, 민족적, 경제적, 생태적 갈등들로 인해 혼란스럽다. 주어지고 있는 이러한 상황들 안에서, 그들은 내가 왜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두 가지 계명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에 관해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은 아마 지금 지구의 많은 나라가 코비드-19라는 불덩이로 여전히 전소되고 있는 동안 내가 한가하게 네로 황제처럼 수금이나 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도 있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위험한 이 시대에 인간이 해야 하는 것 가운데 코비드-19 퇴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설명을 하자면, 그 과정을 통해 볼 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상황에 접어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안내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죽었을 때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는 지에 대한 정보서적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꿈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께선 이 세상을 목적과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셨다. 곧 이렇게 당신의 목적과 꿈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인간이 협조하도록 창조하셨다. 성경시대의 많은 유대인들과 예수님 스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한 두 계명과 함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요지를 설명하였다. 성경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부르심 받은 구원의 이야기며, 그것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회복하는 은총의 서적이다. 이 글은 하느님의 꿈을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우리 세상의 해결책이 없어 보일 것 같은 어려움에 대한 대안의 몫이 된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곳에는 굶주림도 범죄도 어떤 두려움도 없지 않을 것 같지 않겠는가? 성경은 우리를 사람답게 즉 하느님의 형상처럼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세상에선 모든 사람들이 돌봄을 받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불안이나 과도한 힘을 쓰는 것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고, 그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각 개인들과 우리를 통해, 모든 공동체가 효과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진실로 사랑할 때에만 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열정이 이런 글을 쓰도록 안내한다.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느님과 함께 협력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왕국의 도래를 돕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우리 모두는 자주 두 계명을 들어왔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계명들의 요구대로 살아가는데 문제와 어려움도 동반할 것이다. 여러 해를 걸쳐, 나는 나 자신을 돕고 다른 이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다가갈 수 있는 다른 여러 길을 찾아 왔다.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그들의 사랑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방법들을 제안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이 사랑의 두 가지 계명에 관해 이론적인 공부가 되지 않기를 그리고 더구나 그 계명들의 장점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안 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서 이 글을 대하는 여러분이 그 계명들을 알고 있으나 그것들을 수행하기에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어떤 경우엔 불가능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과 이웃을 좀 더 낫게 사랑하기를 원하면, 그때 그러한 사랑들이 성장하는 방법들을 시도하려는 것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 순간 이런 시도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려는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나의 작은 한 몫이 될 것이다. 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3/07/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예수님의 생애는 오명과 수난으로 시작하고 끝이 난다. 예수님은 부모의 결혼 없는 임신으로 잉태되었고, 베틀레헴의 작은 마을, 마구간의 동물들 사이에서 탄생하였으며, 살인자 헤로데 왕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을 가야했다. 마테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사회 안전망의 경계 밖에 있는 자들과 일생을 함께 하며, 그들과 깊이 연관된 삶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적고 있다. 한편 당시 정치,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였을까? 설교와 치유기적을 베푸는 공적인 직무에서 베엘제불 악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예수님은 고발된다.(마태12, 24: 루카11,15) 한편 군중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일까? 설교와 치유기적을 일으키자 많은 사람들이 따르면서도 그들 속내를 채우고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세상과 힘의 왕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자, 예수님을 벼랑에 밀어서 떨어뜨리려 한다. 예수님은 군중들 가운데를 지나갔다. 예수님은 나자렛 고향에서도 거부된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은 자신을 죽일 범죄자들의 카르텔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에게 어떤 메시지와 도전을 던지고 있을까?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고 경배 드린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바라실까?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느님은 묻고 계신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인생 최고의 실패, 바닥 치는 삶으로 들어가 보았는가? 거부당해 보았나? 폭력을 당해봤나? 고독에 빠져봤나? 절망 속으로 들어가 봤나?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실패와 고통의 삶 안으로 빠지기를 원하지 않으시듯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렇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에게 들이치는 삶의 고난과 아픔의 십자가를 스스로 발견하고 짊어지는 순간, 그들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축복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여전히 이웃을 위해 수난당하고 십자가 지는 주님을 만나도록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일까? 지금도 예수님은 버려진 자, 가난한 자, 죄를 지어 부끄러워하는 자, 부서지고, 아픈 자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 계신 구세주다. 오늘 성주간의 성금요일,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의 카르텔 속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초대를 받았다. 주님은 초대받은 기독교인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거부를 당하고, 고통을 맞보며, 절망에 빠지고, 실패의 바닥 치는 삶을 경험한 형제를 만나 보았는가? 이처럼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만나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그들 안에 계시고, 그들과 함께 있는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하실 것이다. 이제 예수님처럼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우리의 영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리자! 그러면 예수께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고통 속에 있는 온 인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또 다시 구해내실 것이다. 성주간(Holy Week) 주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당신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신다. 주님! 코로나-19에서 벗어나도록 온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또한 의료진들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허락하소서! 온 국민에게는 손세정,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를 반드시 유지하게 하소서! 곽승룡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주임 신부)

08/04/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처럼 상대방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사랑인 듯싶다. 바로 성령의 역할이란?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듯이 상대가 누구이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내 생각을 상대방이 알아듣겠지 생각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이나 그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는데, 그러므로 누구든 내 마음 안의 성령을 느껴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영적 인격자로서 사람은 내 안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만난다. 곧 사람은 몸과 영혼 그리고 성령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먼저 먹고 숨을 쉬는 몸은 육적인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영혼은 생각하는 정신과 결정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안다. 끝으로 성령은 나의 마음과 생각 안에서 아빠 아버지를 부른다. 다시 말해서 내 안의 성령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올려드린다. 영적인 사람은 이처럼 수덕(修德)의 삶에 관한 지성적 성찰들을 함께 공유하고, 아름다운 모든 이야기들을 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누구나 순수하게 믿는 영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보호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요한 14, 26)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각자 마음 안에 성령이 거처하시기에, 특히 믿는 모든 사람은 영적 인격을 선물 받은 품격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내 마음의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고, 영적 인격을 살도록 이끌고 감도하신다. 그 순간 성령은 말씀과 사람도 이해하는 이웃을 만나도록 인도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 26) 나는 내 마음 안의 성령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몸과 영혼 곧 생각, 정신, 마음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 몸은 먹고 움직이고 육적 여러 기능들을 수행한다. 운동하고, 음식을 먹는다. 영혼은 정신을 잘 바라보고 생각하게 한다. 마음은 결정하고 선택하며 자유를 누려 알게 한다. 성령께서는 내 영혼 곧 생각, 마음 안에서 ‘아빠 아버지’ 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내 마음 안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드린다. 내 마음 안의 성령께서 늘 우리가 함께 만나면서 가정, 교회, 사회 공동체 안에서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이겨내도록 서로 서로 이해하도록 인도하신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info@hanhodaily.com

18/06/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한동안 일본과 한국 사회에서 『미움 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현상은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과 눈치를 보고 미워하며 살아온 불편한 대상관계를 참는 것이 덕목으로 살아 온 사회의 목소리입니다. 이제 더 참지 말고 미움 받을 용기로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하자는 호소입니다. 타인을 위한 인내가 아니라 자신을 응원하고 위로하는 사랑을 하자는 소리입니다. 인내를 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데 힘을 온전히 쓰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한계 때문이지요. 인내할 수 없는데 참고 견디라는 덕목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타자와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인내하는데 사용하는 에너지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라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옵니다. 이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좋고 설레며 그리움을 행동으로 옮기는 희망을 스스로에게 주고 찾아가 보세요. 수직의 인간관계를 살아가야 하지만 수평으로 평등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현실과 만나보세요. 좋아하는 친구와의 만남 또는 성당의 고해성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수평적 위로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고요한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지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미움 받을 용기를 지녀야 하는 이 모습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죄책감 그리고 반성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도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하는 미안함을 넘어 일종의 착하게 살지 못한 죄의식이 동기가 되어 봉사활동에 참여한답니다. 칭찬받을 욕망에서 착하게 살지 못해 생긴 죄의식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금기된 것을 욕망할 때 죄의식은 발생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먹지 말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금식하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그 의식이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욕망의 실행이 죄입니다. 이것이 원죄, 짊어진 죄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는 그 속의 죄의식과 불안을 이겨내고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 곧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도록 일어나라는 용기와 응원입니다. 죄의식에서 일어서면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온 세상을 위해 연대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주된 메시지입니다.“세상 밖으로 나가라!” 한비야의 말처럼 용기도 가져보세요.“지구 밖으로 행군하라.”세상 밖으로 나가 보세요.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이 아니라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불신과 죄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로 걸어갈 수 있는 환경으로 사람을 인도합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사람들에게 죄를 끊어버리고 뉘우치는 변화를 위한 어떤 압박을 하지 않습니다. 정화의 물세례를 받도록 죄인의 회개를 선포한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죄가 아니라‘죄 없던 본래의 사람이 되는 것,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온전한 사람’에 집중하였습니다. 미움 받을 용기 속에 잠재해 있는 사람의 죄의식과 눈치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주었습니다.‘회개하라’metanoeite는 온전한 인격과 마음에서 드러나는 본래의 자기 자신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온전한 인격과 마음이란 생활에서 부드러움, 행동에서 겸손, 사람에 대한 태도에서 신뢰, 완벽한 사람의 모습, 일치를 말합니다. 온전한 마음과 인격을 만나도록 나를 인도하는 것은 사랑이지요. 예수님의 유언(遺言)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허하며, 함께 하나 되도록 기도하면서‘서로 사랑할 것'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죄의식을 사랑으로 내려놓도록 인도합니다. 죄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본래 자기의 존재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용기를 줍니다. 부활 후 두려움과 죄의식 속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용서의 말씀’과 함께 숨을 내쉽니다. 성령을 불어 넣어주며 죄의식이 남지 않도록 용서하고 서로 용서받듯이 용서하며 하나 되는 일치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강요와 설득에서 멀고 용기와 위로 그리고 배려와 응원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선물한 위로의 언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온유, 겸손, 신뢰, 하나됨, 용서, 상호애(相互愛), 긍정과 칭찬입니다. 죄책감과 불안 그리고 불신을 넘어서 온전한 자신이 되도록 초대하는 용기와 위로 그리고 사랑입니다. 이 덕목들이 자신을 늘 새롭게 변화하도록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나를 만나도록 초대하는 따뜻한 위로가 또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존재하도록 합니다. 온전한 존재로의 초대이지요. 변화할 것을 강요하거나 끌고 가지 않습니다.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실행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상대방의 뜻을 소중하게 묻습니다. 온전한 나를 만나는 길뿐 아니라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종교와 인간관계에서도 절실한 방식입니다. 아무리 중요 사안이라도 밀어붙이면, 그 가치가 얼마가지 못하고 역풍을 만나거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변화하려면 실행과 적용에서 상호이해와 소통 그리고 협력이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먼저 착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감을 내려놓아 보세요. 아직은 완전하지 않지만 온전한 나를 만나도록 따뜻한 위로가 응원할 테니까요. 용기를 가지세요.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08/10/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아프리카 수단에서 짧은 가톨릭 사제의 인생을 살았던 고 이태석 신부님! 우리 곁에 가까이 찾아 온 성자처럼 예수님을 너무 빼닮았다. 신앙인 이태석 신부님의 가치관은 무엇일까? 그분의 인생관은 무엇일까? 그는 예수님의 인격을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던 같다. 이태석 신부님은 수단 사람들에게 교회의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인생관이 ‘서로에게 하나의 꽃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사랑인 듯싶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믿는 크리스챤들에게 인생관과 가치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통해서 필자는 예수님의 살아있는 인격을 소개하도록 초대되어 행복하다. 나는 크리스챤의 인생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챤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참으로 만나는데 이 글이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감사할 일이다. 주님께서 나를 움직이시어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길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예수님의 제자사명 1.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였다.”(마르6,7) 주님께 파견 받은 사람만이 사명을 완성할 수 있는 데, 그 사명이란 바로 선교이고 복음화이다. 하느님은 인간마음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따르는 길을 가르쳐주셨는데, 특히 선교사인 교회의 봉사자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선교와 봉사란 무엇일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 것이 선교이고 봉사이다.” 또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은 선교와 봉사가 “서로 사랑하는 친교” 곧 모든 일을 “공동합의”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 봉사자라면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뭐 때문에, 어디까지, 무엇을 하도록 제자를 원하시고 파견하실까. 특히 제자를 파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신데, 그래서인지 제자의 환상도 하느님이셔야 한 듯싶다. 그래서일까 유일한 하느님 한 분만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입하라고 허락하신 듯싶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사, 봉사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남용하면 미래에 펼쳐질 드라마 각본을 즉시 망치게 하는 재앙이 일어날 것은 너무 분명한 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6,8) 예수님은 돈 없이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인간의 경험이 가르치는 바, 어떤 수단을 써서 생기는 모든 이익들과 효과적인 생각들은 그것들이 확산되는 데에 지불할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부자의 헌금보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도 같은 예수님의 가치관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분명하다. 마음의 봉헌, 가슴에서 우러나는 봉헌을 칭찬하신다. 사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경험으로 봐서 돈 때문에 문제는 생겨도, 돈이 없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동안 교회역사의 경험이다. 3.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9)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마라.”(마태6,31)는 말씀과 가깝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에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을 지니고 참 평화를 바라도록 가르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오직 한 가지 여정에 필요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파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만이 제자들에게 온전한 힘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使者) 및 전령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배는 순풍을 만나든 역풍을 만나든 모든 조건들에서 어떤 한계를 만나면서 항해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나라 사람들을 친구로 여기며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였다.”(마르6,7)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6,8)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9)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짧은 인생을 살아가셨다. 예수님처럼 길지 않은 사제의 인생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아니 내일도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분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었기 때문이다. 곽승룡 비오 주임 신부(시드니대교구한인성당)

02/05/2019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현재 세계 그리스도인의 수가 얼마나 될까? 가톨릭만 12억 명 정도 되는 것 같고, 개신교 및 동방교회의 그리스도인 모두를 합하면 전 세계 인구의 1/3이 될까? 그런데 세상은 평화로운 모습이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구촌에는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불교나 이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밀접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구가 평화와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아주 세게 성찰해볼 필요를 느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를 참으로 실천한다면, 세상의 평화가 가능할텐데..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 울까? 주님의 기도를 그렇게 많이 기도하면서도 과연 그 뜻을 이루기가 어려운가? 그래서 나는 주님의 기도란 어떤 기도이고 또 어떻게 하는 기도일까를 알고 싶다. 주님의 기도는 믿음으로 인간의 청원을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을 통해 가르쳐 주신 기도이고, 당신의 삶을 보여주신 복음의 요약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중심에 존재한다. 기도는 모두 7가지 청원을 담고 있다. 첫 부분 3가지의 청원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청원이다. 하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고, 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셋.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다. 요약하면 첫 부분의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기도이다. 내 이름, 내 나라, 내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드릴까. 그러면서도 아직도 아버지의 이름, 나라, 뜻 보다, 내 이름, 내 영역, 내 뜻을 펼치지는 않는지.. 두 번째 부분 4가지 청원기도는 인간에 대한 청원이다. 청원의 골자는 하나. 일용할 양식, 둘. 용서, 셋. 유혹에 빠지지 않게, 넷.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가톨릭 신앙인에게 매일 양식은 성체성사인 미사이다. 이 양식을 매일 주님께서 주시는데 찾아 받아먹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며 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 수의 양식을 구하고 원할까? 코로나-19로 식품점에 쌀, 휴지 등이 동이 났단다. 그런데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기도는 내가 먼저 이웃을 용서하면, 주님의 용서가 선물로 주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유혹은 늘 나의 주변에 존재하지만 ‘빠지지 않도록 구하는 청원’은 주님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악에 대한 것도 먼저 아버지께 도와 달라고 떼를 쓰며 청을 드려야 한다. 또한 “악에서 구하소서”의 기도에서 ‘악’이 매우 추상적일 수 있는데, 만약 “악행자로부터 구하소서”로 바꾸어 기도한다면 보다 분명한 의미가 될 것이다. “손 세정, 자가 격리, 공포심 내려놓음.. 악에서 구하는 구체적인 기도인 듯” 세계는 지금 코로나-19의 전파자를 악으로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으로부터 구하도록 주님의 기도를 아주 세게 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악으로 보지 말고, 바이러스를 이겨낼 방법을 찾아 실천하고 면역력을 기른다. 손 세정, 자가 격리, 공포심 내려놓음 등이 악에서 구하는 구체적인 기도인 듯 싶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삶에서 주님의 기도를 매 순간 드리면서 7가지의 청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초대하신다. 그럴 때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두렵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의탁할 수 있을 것이다. 7가지 청원기도 주님의 기도를 한 주간 7일 단위로 매일 집중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드리도록 권하고 싶다. 그러면 코로나-19의 빠른 소멸이 분명 성취될 것이라 믿는다. 월: 아버지의 이름, 화: 아버지의 뜻, 수: 아버지의 나라, 목: 일용할 양식, 금: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토: 악에서 구하소서! 곽승룡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주임 신부)

05/03/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박쥐를 기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신년벽두에 인간을 서식지로 옮겨 타 전 세계로 전파됐다. 본디 동물을 숙주로 하는 미생물들은 함부로 인간에게 그들의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미생물과 식물에게 그들이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오직 인간이 그 서식지를 함부로 흔들어 대곤하였다.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의 바이러스는 인간이 건들지 않으면 미생물들은 그들의 서식지에서 산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단순히 메르스나 사스 같은 단순 전염병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팬데믹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태학자 및 면역학자들은 코로나-19는 생태위기의 한 양상이자 징조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인류역사 안에서 중세와 근현대의 분기점에 흑사병(1347-1351. 2천만명 사망)이 있었다. 페스트 흑사병은 인간이 신중심의 중세문명과의 절연을 과감히 선포하게 하고, 인간중심의 근대문명인 계몽주의 르네상스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인간은 철학과 과학, 의학 그리고 기계기술과 핵무기까지 만들어내며 끝이 없는 인간만의 길을 향해 내달려왔다. 이러한 인간 중심문명의 길을 달려가는 데,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주요한 몫을 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없다. 먼저 성경번역의 오류와 바르지 못한 해석이 인간중심문명을 부추기는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에서 “다스려라”를 “모든 짐승을 부려라.(have dominion)” 혹은 “지배하여라.(subdue)” “제압하다.” “억제하다.”로 번역을 한 것이 오류다. 창세기1,26-27의 ‘다스리라’는 표현이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중심주의를 낳았다는 비판(Lynn White)과 달리 본래 성경의 바른 뜻은 인간이 하느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지구인들은 신약의 예수께서 말씀하신 착한목자와 같이 이 땅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었다. 생태학자들은 2020년부터 향후 10년간을 지구생존을 위한 남은 시간이라고 경고했다. 산업 체제를 바꿔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급격하게 줄여야 미래가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얼마나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여야 할까? 최소한 40%정도 줄여야 미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호주가 작년 9월부터 6개월간 가뭄과 화재로 심각한 생태위기를 겪어냈다. 그 후 설상가상으로 올해 2월부터 코로나-19로 모두가 움직일 수 없다. 바로 인간중심의 문명으로 지구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자신을 공격하는 적을 발견해서 지금 지구의 적을 향해 재공격을 하고 있다. 지구의 적이 누구일까? 코로나-19?, 그 숙주인 박쥐? 맹수? 코끼리일까? 아니다. 지구의 적은 인간이다. 진작부터 지구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미래세계는 인간중심문명과 절연을 과감히 선포하고 자연중심, 지구중심의 삶으로 가야한다. 그 첫 자리가 인간들끼리 경쟁과 집단적 욕구(Want)를 참으로 내려놓고, 지구와 함께 사는 ‘공존과 연대’를 사는 초대이다. 미래세계는 각자의 삶이 존중되고 지구와 개인의 기호(Like)를 존중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물리적 모임(physical Gathering)은 축소되고 정서적이고 영적 모임(Spiritual Gathering)이 지금부터 미래세계에 발견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으로 사회가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한 듯 보인다. 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info@hanhodaily.com

14/05/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남녀가 일생동안 만나고 이별하는 짝의 경험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글을 시작하면서 결론같은 말은 먼저 하면, 인생은 ‘만남’이고 ‘헤어짐’이기에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하려면, ‘만남의 시작’과 똑같이 ‘이별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 여성이 말했다. “아! 우리가 일 년 정도 만나니까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러자 남성은 “왜?” 여성은 지혜롭게 “아 그냥 그렇다고....” 그러자 남성도 발 빠르게 “오빠가 보니까 보통 요러면 헤어진데... 오빠가 더 잘할 게, 내가 뭐 실수한 게 있지?” 여성은 이어서 “그냥! 그렇다고... 헤어지자는 것은 아니니까!” 이 짝들은 그래도 대화를 무난히 이어나간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안녕! 오늘 이별이야...”하고 문자를 보내는 경우, 또는 소위 잠수를 타는 경우가 있단다. 사람들은 왜 얼굴을 보고 이별을 할 수 없을까? 왜 그럴까? 아마 만남과 이별의 건강한 경험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에게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쉽지 않고 혹시 경험한 적이 없을 수 있지만, 처음처럼, 마무리도 그래야 한다. 갑작스럽게 해고하듯 통보는 아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심리학자들은 일기예보처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을 열면 일기예보를 주중 날씨, 주말 날씨 등 최소한 10일 정도 오전 오후 등 자세히 나눠서 시간대별로 예보를 한다. 짝들도 일기예보처럼 만날 때와 똑같이 헤어질 때도 친절하고 세밀하게 썸을 타듯 이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단다. 그래서일까 첫눈에 반하거나 호감이 가 썸을 타듯 이별도 동일한 과정이 필요하단다. 우리는 가끔은 일기예보의 날씨가 헷갈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 글 앞머리의 남녀 대화처럼, 남녀관계에서 핵심갈등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상대 혹은 누구라도 먼저 헷갈리게 하는 이야기나 깜찍한 행동이 대화를 만들어 서로에게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냥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수 있다.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면서 이별 준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이별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왜 이렇게 그냥 되었나’, ‘대화를 끌어낼 수 있고’, ‘불필요한 이별도 방지할 수 있으며’, ‘핵심갈등을 끌어내 대화로 관계가 원만해질 수 있고,’ ‘헤어지더라도 좀 더 안전한 이별’을 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일방적이 아니라, 헤어지고 싶어 하고 대화와 소통을 하면서 만남처럼 헤어짐도 인격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어떨까. 매우 어렵지만 이별하는 이유를 서로 공유해야 한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헤어졌는데, 그 이유를 “몰라요”하는 것이다. 이별할 때는 너와 내가 무엇에 소홀했고, 어떤 합의에 무관심했으며, 무엇을 조율하는데 실패했는지, 이것들에 대해 공유해줘야 한다. 그래야 아픈 이별을 하더라도 다음 사랑을 시작하고 만날 때,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괜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발목잡지 않고 서로를 위해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으면 얼마나 이별해도 괜찮게 될까? 합의 이별이 필요한 듯하다. 곽승룡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 천주교회 주임 신부)

23/01/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마르 1,16-20; 2,13-14- 예수님은 삶의 터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주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만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장소에 몰입하고 있는 듯싶다. 호수라는 물가는 제자들이 살고 있던 터인데 그곳에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환경을 바라보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찾고 계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루하루 일하고 있는 일상의 현장을 향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서 당신을 따르시도록 부르신다. 제자들이 어부의 삶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윤리적으로 의심이 가는 세관장의 부정적인 직업을 가졌더라도, 주님은 삶의 현장에서 제자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한 구체적인 현장으로 다가가신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고 헌신하신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부르실까? 예수께서 취하신 인격적이고 친밀한 접근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제자가 되는데 매우 중요하게 눈여겨볼 방법이고 태도이다. 오늘 주님이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러 오신 것은 당신의 말씀과 신뢰 그리고 희망의 언어들을 우리 각자가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와서 나를 따르라.”(마르 10, 21) 이 말씀은 우리가 온전하게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신다. 세례는 부르심의 첫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를 위해 교리교육 책인 복음서를 썼다. 주님의 메시지는 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셨다는 것을 담고 있다. 마르코가 간단하게 그 내용을 소개한다. 곧 그들이 부르심 받은 것을 실현하도록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세례는 다른 특별한 모든 성소(聖召)들이 뿌리 내리는 기초를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르심의 기초이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인격적인 사랑은 버림받은 그 곳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도록 한다. 이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우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내는 하느님의 치유이고 사랑이다. 우리에게 이것이 첫 번째 부르심이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성소(聖召)로 살아가든 각자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분의 모상을 살도록 우리를 선택하셨고, 당신의 아들 안에 선물하신 특별한 자녀들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모든 부르심의 초점은 하느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서서히 발전한다. 세례는 새로운 탄생이고 성소(聖召)의 최고 지점이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부르심이다. 세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 그리고 다른 이들과 형제이고 자매들이 된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은 우리가 거룩함에로 부르심 받은 교회가 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지혜의 결과이다. 나에게 호수 갈릴레아는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찾으시며 방문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아오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주님은 사랑스런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신다. 주님은 마음을 다해 우리를 다시 초대하신다. “와서 나를 따르라.”이제 응답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의 성소(聖召)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는 이제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하느님께 속하고 더욱 그것을 인식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갈릴레아 호숫가는 무엇일까? 우리가 소유한 삶의 상태, 우리의 가족 상황, 우리가 처한 현실, 우리가 있는 어디든 하느님과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는 곳일까? 주님은 지금 그곳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며 모든 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부르신다. 오늘 교회의 선교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요하게 재촉하고 계신다.“오라!” 이제 우리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 곧 주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도움으로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그곳이고 거기가 바로 응답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바탕이 되는 삶에 감사드리며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이다. 곽승룡 비오 주임 신부(시드니대교구한인성당)

06/06/2019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곽승룡 비오 신부 코비드-19로 많이 줄어들었지만 살다보면 잔치에 초대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 음식을 먹고 사람도 만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을 종종 봅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루카 5, 29)습니다. 아마 새로운 삶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세관 레위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분을 따랐습니다. 회개지요. 레위가 그저 죄인이라 회개한 것만이 아니라, 죄의식과 비난, 손가락질하는 세간의 시선에서 처음처럼 온전히 자신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이웃사람의 집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더럽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죄의식을 갖지 않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죄인이라고 비판하거나 단죄하지도, 부정한 위치 있는 자라고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라는 노래 제목처럼, 예수님은 늘 품고 있던 죄의식으로 자신마저 불신하던 레위를, 처음처럼 온전한 자신이 되고 스스로의 좋은 데를 알도록 불러냈습니다. 사랑은 옳고 그르다, 맞다 틀리다 등의 말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미 완벽한 하느님의 나라가 됐을 것입니다. 맞는 말과 맞지 않은 말이 그 사람에게 언제, 어떻게, 정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오히려 맞는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찌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레위는 원수도 죄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가 예수님을 초대한 잔치 자리는 저녁 만찬으로 레위의 보속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레위 스스로 준비한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식탁입니다. 우리는 이웃집의 초대를 받았을 때, 깨끗하고 잘 정리된 장소대신 쓰레기통만 뒤적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그러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 30)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에는 쓰레기만 담겨 있습니다. 마당과 안방과 사랑채의 방들은 깨끗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의 시선처럼,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에만 집중하는 건 편견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식사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과 왜 식사를 나누는지 한 번 더 생각하고 바라보세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루카 5, 31) 병원이 환자를 위해 존재하듯이, 죄인으로 낙인찍혀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18/02/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메시지의 결론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신앙체험을 적어 써내려간 성경의 중심에 남아있는 ‘부활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사순시기 금요일마다 성당에서 드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복음을 돌이켜보면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24,1)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당황한 여인들에게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루카 24,5-6)하고 전합니다.주님을 따랐던 성경의 여인들은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늘 자신의 눈에 보이는 곳에 두었던 자들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돌아가셨다고 믿었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성금요일에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셔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살려내셨습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로마 6,3)는 사실을 모르냐고 질문합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실...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 5)하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죽어야 하고, 현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하지만, 이미 세례 때 그 신비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 =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 죽음의 성금요일이 오늘 부활한 주님과 함께 단절되지 않고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의 과거로 되돌아감이 아니라 새로운 빛, 영원한 광채 속에서 새롭게 일어나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어둠과 미지 속으로 넘어가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면, 죽음이 생명을 부수지 못하고, 저승을 가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오르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놀라운 은총으로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넘어섰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 = 사랑의 완성’이라는 등식 곧 부활은 완성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현실에서 부활은 어떤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실이 되살아나는 순간인 듯합니다. 그래서 진실을 거부하면 진리는 멀리 도망가 버리고, 진실과 진리가 단절되면 모두에게 부적합한 사회가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보이는 세상과의 접촉을 끊게 한다면, 부활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 눈을 뜨게 합니다. 복음을 돌이켜보면 예수께서는 지상 생활에서 종종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일찍이 부활의 전형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으로 나타나 근본적인 치유로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여기에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고 있는 부활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사랑과 영혼으로 새롭게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는 부활을 검증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믿는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부활을 믿고 고백하려는데 도움이 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믿었을까요? 또 부활사건이 어째서 모든 신약성서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까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1/04/2022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