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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았다. 그들은 억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그리고 구원으로 가는 길을 원하였다. 오늘날에도 의로움을 구현한다지만 폭력과 테러가 많이 일어난다. 검사, 판사, 변호사와 감옥의 수가 정비례한다. 정의와 자비가 서로 싸우는 현실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폭력이 없는 정의, 미움이 없는 옳음, 이를 위한 첫 걸음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불의와 폭력을 미워해야 하지 않을까?운동 감독은 전략을 짜고 체력을 기르며 팀 훈련에서 선수들과 운동장에 함께 있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오히려 감독은 운동장 밖에 있어야 한다. 테니스에서 코치는 코트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다. 게임 중간 쉬는 시간에도 남자 테니스선수들은 코치들과 대화가 불가능하다. 오케스트라는 다르다. 지휘자는 연습과 실제 공연 때나 항상 공연자들과 함께 한다. 지휘자가 실수한다면 단원들도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지휘자와 단원들은 온전히 하나이며 전체이다.정의와 자비도 그렇다. 정의가 실행되는 과정이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면 의로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와 자비는 파트너다. 서로 반대할 어떤 이유가 없다. 자비와 정의는 다른 길이 아니라 다른 수단과 방법으로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 한 방향의 도로에서 같이 달리는 다양한 자동차들과 같다. 그 길은 평화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 위의 자동차들은 정의와 자비다.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찡한 자비의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추기경 카스퍼에 의하면 정의는 최소한의 자비이고, 자비는 최대한의 정의다. 자비에 대한 갈망이 정의에 대한 갈망을 능가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일까?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했다. 정의는 또한 자제와 관용을 요구하는 덕목으로서 수양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필요한 정의들이 많이 있다. 믿는 이들에게 정의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서 움직인다고 믿으면 된다. 정의와 믿음은 그 점에서 같은 말이다. 믿는 대로 하느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서 발생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신다. 온전한 변화를 향하는 회심(悔心)은 정의와 연대하는 구체적인 헌신이다.자비는 최대한의 정의이니, 최대한의 의로움을 향하여 증거하고 연대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 자비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자비란? 미안마, 아프카니스탄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일텐데... 우리도 코로나 판데믹 델타 변이로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찌 이런 일이! 화도 나고, 원망도 들며, 미움이 올라와, 기도도 손에 잡히지 않고, 어쩔 땐 주님의 말씀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 이렇게 마음이 굳어가고 생각은 많아지며 힘든 몸을 모두 체험한다.억지로 뒤집어 보면 이런 시간이 언제 다시 올까! 하느님의 선물 같은 생각도 억지로 들게 한다. 아마도 초기 교회의 박해를 체험하는 듯하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은 maranata! 주님. 어서 오소서! 하고 기도했다.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움과 불안을 이긴다면 분명 희망의 새로운 하늘, 새 땅이 다가 오리라고 믿는다.지금 사랑하는 친구들도 많이 보고 싶다. 혹시 오해를 해서 미워했던 친구들은 정말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쁜 종말은 분명 아니다. 주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고. 축복이기 때문이다. 오늘 혼자 독거의 시간을 보내시는 모두를 위해 나는 기도로 기억한다. 그들이 몸, 마음, 정신의 건강을 챙기는 이 시간의 날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주님, 자비를 베푸소서!”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6/08/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어린 시절 넓게만 보였던 학교 운동장은 커서 보니 손바닥만 하고 친구들과 시끄럽게 축구하던 골목은 이제 자동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 보입니다. 편안히 드나들던 대문은 고개를 숙여야 가능하지요.안식일에 예수님은 고향의 회당에서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며 못마땅해 합니다. 예수님의 옛 모습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에게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마르 6, 2)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에 왔습니다. 3년만의 방문이지요. 목수였던 청년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 지혜와 기적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보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지혜와 능력 속에서 움직이는 거룩한 힘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잘 알고 믿을만한 사람의 능력에 흥미가 없다면, 그것은 그렇게 보는 이의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은 미움의 씨앗이고 또 미움은 지옥의 뿌리가 됩니다. 천국이 사랑이면, 미움은 지옥이기 때문이지요. 눈앞에 그런 미움의 씨앗들 곧 선입견으로 지옥은 만들어 집니다. 천국은 처음처럼 살고 지옥은 미움으로 삽니다.구약성경은 가족, 민족, 국가의 발전을, 복음서는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전합니다. 조직과 단체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성장 속에 선입견과 미움의 씨앗을 심는 것이 됩니다.좋은 고등학교와 유명 사립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의 어떤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기사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 기사는 필자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직장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로 인해 자신감이 점점 떨어져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폐쇄적인 조직문화란 새내기 직장인으로서 일을 창의적으로 시도하려고 하면, 상사나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답니다.“그거 해보나 마난데, 새로운 거 하려고 그러지 말고 하던 데로 하세요!”,“당신 말고 일할 사람 많으니까...”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롭게  일을 찾은 것은 도배사입니다. 직장을 그만둔 그 순간에는 도배하는 일을 도피처로 찾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아주 소중하고 적성에 맞는 행복한 일이 되었답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면서 몸무게도 빠지고 몸도 여기저기 아프지만, 조용히 혼자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니 하는 일도 재미있다고 합니다. 그의 희망은 아파트 한 채를 온전히 맡아서 자기 스스로 구상하며 꾸미는 도배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여행도 좋아하고 해서 그에게 꿈은 마련한 집에 어울리는 도배를 하고 방은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꾸며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하우스를 운영하고 싶어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의 기사였습니다. 소위 MZ세대(밀레니움 제네레이션)의 젊은이들다운 생각입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를 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가족의 위로 한 마디는 어느 누구의 칭찬과 격려보다 아주 힘찬 응원과 위로가 되지요. 가까운 가족끼리 천국을 자주 건설해 보세요. 미움이 만드는 지옥은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공동체 속에 있는 사람을 온전하게 만나는 힘은 색안경을 벗은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선입견이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도 약하면 서로를 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코로나-19 그것도 델타 변이로 전 세계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오늘의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게 합니다. 코로나-19에 답이 백신인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와 믿음 그리고 사랑과 신뢰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영적인 백신’입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2/07/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된 유흥식 라자로 대주교프란치스코 교황께서 6월 11일 한국 천주교 대전 교구장 유흥식(70) 대주교를 한국인 사상 처음으로 바티칸 교황청의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하셨다. 500여년 역사의 교황청 성직자성은 전 세계 사제와 부제들의 모든 직무와 생활에 관한 사목 업무를 관장하는 교황청의 주요 부처다. 신부들의 사목활동을 감독하고 심의하며 신학교 관할권도 갖는다.교황청에는 9개 성(省. Congregations)으로 구성된 행정기구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유흥식 라자로 대주교와의 인연은 2013년 7월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서 유 대주교가 이탈리아어로“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자, 교황께서 “코레아?”하며 이탈리아어로“한국 교회는 강합니다”라며 왼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교황과의 인연은 2014년 8월 계속되었다. 교황께서 대전교구에서 열린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하셨다. 당시 한국은 세월호 참사가 사회적 아픔이었다. 유 대주교는“젊은이들 약 3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도 부활절 성주간에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걸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저는 그걸 하느님께 따지고 있습니다.”라며 프란치스코 교황께 물었다. 그 말을 듣고 교황께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씀하셨다.“주교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런저런 안 좋은 것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또 그걸 통해 더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안 좋은 것들을 더 좋게, 세월호를 계기로 대한민국 국민이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랍니다.”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로마 교황청의 별도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성 마르타 기숙사 곧 사제들이 거주하는 공동 숙소에서 지내신다. 교황께서는 교황청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하신다. 교황께서 직접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아, 식당의 맨 구석에서 벽을 향해 앉은 채 식사를 비서와 함께 하신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교황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의 교황들은 별도의 공간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그 어느 교황보다 개혁적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다. 하지만 ‘변화’라는 말을 썼다. 교황에 선출된 직후 8명의 추기경으로 이뤄진‘교황청 개혁위원회’역시, 그 명칭을 쓰지 않고,‘교황청의 모든 기구를 다시 보는 기구’라고 정했다.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주요 부처의 장관에 한국인 주교를 임명한 것도 큰 변화고 파격이다. 유흥식 라자로 대주교는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교황님께서도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북한이 교황님을 초청한다면 북한으로서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며 “바티칸 현지에서도 저의 임명이 북한이나 중국 문제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보도가 나왔다”고 말했다.교황청 9개 성 가운데 아프리카 추기경 2명이 장관으로 있고, 이번 유 대주교의 임명으로 필리핀 출신 타글레 추기경과 함께 아시아 2명의 장관이 탄생해, 아시아의 가톨릭교회가 교황청 행정기구에 봉사하는 그 몫을 인정받은 셈이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의 대전교구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대회에 참석하실 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대전가톨릭대학교를 방문하셨다. 그 당시 필자는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직접 뵙는 기회가 있었다. 교황께서 대전가톨릭대학교 방문을 마치고,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 솔뫼 성지로 떠나기 직전 필자와 나눈 대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필자가 먼저 “교황님, 건강하시고 교황님의 저희 신학교 방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교황께서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신부님! 오늘 제가 신부님의 방을 사용했는데, 방값을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하고 물으셨다. 저는 즉시 “아! 교황님, 이번 방값은 공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만일 제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님을 찾아뵈면 교황님의 방을 한 번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응답해 드렸다. 그러자 즉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더 환하게 웃으시면서 “당연히 그래야죠, 언제든 오세요!”하고 대답해주셨다.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전 세계 사람들, 신자이건 아니건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계신다. 그것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 삶의 모습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인 첫 교황청 장관을 부르셨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신 유흥식 라자로 대주교님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17/06/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돈 보스코 성인(St. Don(John) Bosco: 1815-1888)은 청소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살레시오 수도원을 창설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일하고, 즐겁게 놀며, 그들을 바쁘게 만드는 것이 그의 교육원리입니다. 그들이 기쁘고 재미있게 일을 할 때, 죄의식과 불신 그리고 미움과 질투라는 죄를 지을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이 원리를 자신에게도 적용해보세요. 좋은 일과 기쁜 놀이에 집중할 때,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갖지 않게 됩니다.‘꿀 한 수레주고 형제적 충고를 하라'는 돈 보스코의 말은 아무리 크고 넓은 사랑이라도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상대방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라는 뜻이지요. 어느 동네에 노친께서 자식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나이 들어 음식을 흘리면 너희가 나를 이해해 달라! 너희도 어렸을 때 그랬단다. 혹시 같은 말을 계속하고, 또 자주 넘어지더라도, 이해해주고 일으켜다오! 너희들도 그랬단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길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위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지요. 누구나 약점,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삽니다. 살면서 그걸 발견하고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끔 그걸 끄집어 당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알아차리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세요. 자아가 약할수록 약점을 잊고 회피하는 것이 지혜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알아 가면 견디어내는 힘이 생깁니다. 생각의 합리화, 인내로 포장한 억압은 오히려 견디어내는 힘을 약하게 할 뿐입니다. 죄의식과 불안이 약점을 건드리고 그것이 나를 또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죄의식 속에 있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 안의 불안과 타자의 불신에서 자신을 불러내면 됩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이처럼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알아갈 때, 다른 이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 호주인들 곧 서양인들은 사회에 나가면 대우받고 친절함을 받지만, 우리 아시아인, 한국인들은 차별 아닌 차별을 받고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더욱 존중하고 돕고 아껴주어야 합니다. 내가 몸이 아플 때 어디가 아픈지, 아프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나에게 어떤 음식이 맞는지, 내가 뭐를 해야 에너지를 받는지, 내 몸의 중심을 잡기 어려워 몰라서 골반도 틀어지고, 바른 길을 잘 못 찾는데, 우리끼리 약점을 잡고, 설교하고, 비평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의 시기가 참으로 자신을 만나고 상대를 존중해주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참으로 기도합니다. 사람 없는 문학 없고, 인생이 빠진 소설이 없는 것처럼 사람은 타인 없이 자기를 스스로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만나 보세요. 말씀의 뜻을 알게 되는 것과 그 은혜 속에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말씀을 장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려 말씀을 배우고 따라가 보세요. 말씀에 참여할 때, 그것을 닮는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하느님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인격이 실현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과 인간은 각각의 존엄성을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양한 모습들을‘틀린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다름이 자신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We are learning one another.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사진: 돈 보스코 성인

  06/05/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한반도는 지난 100년 전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남쪽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이어오는 역사 속에서 재앙 수준의 빈곤 국가로 한동안 살아왔다. 한반도는 90번의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비공식적으로 960번 정도 공격을 받았던 나라였다. 당나라의 침략은 신라, 수나라의 공격은 고구려, 명과 청의 침략은 조선으로 이어갔다. 어디 그뿐이랴. 한반도는 일본이 벌인 임진왜란을 비롯한 수많은 외침을 받았다. 21세기 한국은 세계 1등의 명암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의 밝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인터넷 속도, 가전제품, 철강, 자동차, 조선, 휴대폰, 그뿐인가 국제수업평가수준의 점수, 수학과 과학교육을 비롯한 1-3차 단계의 교육, 운동(골프, 축구, 야구 등), 영화(기생충, 미나리 등), K팝 음악(BTS, PSY 등), 피아노, 발레, 미술, 등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올라 있다. 이처럼 밝은 점 못지않게, 어두운 점 역시 다음과 같이 세계 1등이 많다. 자살율, 노인 빈곤률, 청소년 불안, 성형 수술 등인데, 통계에 보면 성형한 코의 수, 교회 수, 인신매매 수가 비슷하다는 것에 또한 놀란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도 한반도의 두 나라, 남쪽은 민주주의, 북쪽은 공산주의로 대처하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의 두 나라는 양극단의 상태를 두고 있다. 과연 우리 한반도는 계속 양극단이 마주하는 나라일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극단이 소통하면 최강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소통을 할까?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며 먹고 마시는 놀이로 더불어 살아 왔다. 그래서 지금의 음주가무도 양극의 만남을 위해 건강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 에너지의 뿌리는 문화, 예술 그리고 종교심에 있다. 사실 문화와 예술은 어느 정도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양극단, 발전과 퇴보의 양극을 만나도록 회복하는 길은 영적인 힘을 모으고 키우는 데 있다고 믿는다. 문화, 예술, 운동 분야는 최고의 경지에 오르고 있으니, 이제 종교심의 힘으로 한국의 양극단 현상을 바로 하는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의 호주 이민 역사가 중년기에 들어서고 호주 한인사회를 바라보면, 코비드-19 시대에 한국인들이 서로 도와 협력하는 능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확신한다. 한국인들은 위기에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시드니의 한인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징인 서로 갈라지는 것을 먼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 한인사회는 현재의 한국보다 훨씬 더디게 변화되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호주 시드니에서 한국인들이 서로 멀어져 가는 양극단을 이기는 데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불어 놀아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축제 같은 삶으로 충분하다. 더불어 춤추고, 함께 노래하고 먹고 건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위로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위치하고, 아래로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으로 연결하는 라인이 존재한다. 이곳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그 출신의 끈이 존재한다. 하지만 역으로 이곳에서 한국인들이 분열의 단초인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기를 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고 협력할 때 일치라는 큰 축복을 받는다고 확신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함께 춤추어야 한다. 어깨를 흔들고, 노래 부르며,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하지만 ‘건강하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4,9)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01/04/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곽승룡 비오 신부 코비드-19로 많이 줄어들었지만 살다보면 잔치에 초대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 음식을 먹고 사람도 만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을 종종 봅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루카 5, 29)습니다. 아마 새로운 삶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세관 레위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분을 따랐습니다. 회개지요. 레위가 그저 죄인이라 회개한 것만이 아니라, 죄의식과 비난, 손가락질하는 세간의 시선에서 처음처럼 온전히 자신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이웃사람의 집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더럽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죄의식을 갖지 않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죄인이라고 비판하거나 단죄하지도, 부정한 위치 있는 자라고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라는 노래 제목처럼, 예수님은 늘 품고 있던 죄의식으로 자신마저 불신하던 레위를, 처음처럼 온전한 자신이 되고 스스로의 좋은 데를 알도록 불러냈습니다. 사랑은 옳고 그르다, 맞다 틀리다 등의 말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미 완벽한 하느님의 나라가 됐을 것입니다. 맞는 말과 맞지 않은 말이 그 사람에게 언제, 어떻게, 정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오히려 맞는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찌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레위는 원수도 죄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가 예수님을 초대한 잔치 자리는 저녁 만찬으로 레위의 보속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레위 스스로 준비한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식탁입니다. 우리는 이웃집의 초대를 받았을 때, 깨끗하고 잘 정리된 장소대신 쓰레기통만 뒤적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그러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 30)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에는 쓰레기만 담겨 있습니다. 마당과 안방과 사랑채의 방들은 깨끗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의 시선처럼,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에만 집중하는 건 편견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식사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과 왜 식사를 나누는지 한 번 더 생각하고 바라보세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루카 5, 31) 병원이 환자를 위해 존재하듯이, 죄인으로 낙인찍혀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18/02/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곽승룡 비오 신부 예수님은 늘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온유합니다.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지역민들이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를 넘는, 저주에 가까운 폭탄질문을 합니다. 삶의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지요.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예수님 일행은 어찌하여 사마리아 동네의 완고함에 맞서지 않고 다른 마을로 피해갔을까요? 예수님은 화가 나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면 나는 대로 있지, 행동으로 응징하지는 않습니다. 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왜 대하지 않았을까요? 부드럽고 자애로운 마음이 능사는 아니지 않다는 걸 모르신 걸까요? 실제로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과 원수지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대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반전이 필요합니다. 완벽하지 않고 약한 자들에게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예수님은, 깊고 넓은 자비의 시선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보복과 앙갚음의 방식은 폭력과 죄의식을 더 증폭시킵니다. 화가 나더라도 예수님은 미워하거나 더욱이 행동으로 보복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보복인 자비를 취합니다. 아니 보복을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용기를 줍니다. 반전 또는 총체적 변화 요구의 부메랑이 쓰나미처럼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라고 말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 39) 반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반전은 악에 저항하지 말고 상대방을 유연한 부드러움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지요. 이웃 사랑의 대안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보복이 아닌 변화 곧 받아들임입니다.(루카 10,31-37) 화가 나고 밉기도 하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 반전을 한번 시도해보세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지요. ‘이웃이란 누구인가요?’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에 상처입지 않도록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입니다. 변화에로 초대된 회개는 압박과 강요로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회개는 죄의식과 불신, 불안과 패배감에서 벗어나, 완벽하지 않지만 처음처럼 사랑받고 이해받으며,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인생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너무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을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회심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를 만나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혼자 갈 수 없다면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세요.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손을 뻗어 보세요. 손을 뻗어보시면,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말하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나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을 통해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메타인지란 자기 자신의 인지 처리 과정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으로,‘생각에 관한 생각’을 말합니다. 곧 하루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지냈는가를 살피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거울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신뢰와 믿음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브레인스토밍은 한 가지 문제를 놓고 가족이나 집단에서 회의를 통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방법으로서 많은 구상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의견들과 생각들이 달라 갈등하고 헷갈리기도 하겠지만 그런 긴장을 통해 사고가 확장이 되고 중요한 가치들이 모아져서 점차 정리가 되어갑니다. 손을 뻗어 보세요. 그리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우리의 속담을 믿어보세요.

  14/01/2021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곽승룡 비오 신부 화가 나고 분노가 치솟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결책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랑입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방해받아 일어난 분노, 나의 원의(願意)가 자유로운 길을 가고 있는데 길이 막히면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계속 제지당하면 당연히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인생의 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인생길에서 우리는 헤어지고 만납니다. 이별이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면,‘만남’은 새롭게 갈 수 있는 곳을 선물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인생의 길에서 사랑은 분노와 화를 풀어낼 수 있는 비법입니다. 마음속에 화를 이기는 온전한 사랑을 담아보세요. 완벽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길을 받아주고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화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사랑의 언어로 표현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원한과 울분 그리고 분노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분명 나의 감정을 무너트리고, 우리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게 합니다. 화나 분노를 자주 표출하는 사람은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 안에 숨어 있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마음의 거울을 바라보세요. 신뢰할 수 있는 친구에게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그 화의 뿌리가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를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는 이유는, 혼자서 앙갚음 할 것을 숙고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겨낼 수 없다면 도움을 청하세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 변화에 더디고 그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자, 죄인, 세리, 부정한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 갑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늘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을 원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언어를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담아주십니다. 삶이 변해야 한다고 강변하거나, 죄책감을 지적하며 죄인 취급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면서, 잘 알아듣지 못하고 당신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려 해도(마르 9,31-37) 나무라거나 잘못부터 따져 묻지 않습니다. “너무 죄의식을 갖지 마세요. 온전한 나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응원과 용기를 이처럼 주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일꾼의 1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다리위에 부었습니다. 느닷없이 벌어진 황당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가 더 불쾌해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처럼, 여자를 나무랍니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마르 14,4-5) 제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양, 그 뜻을 다른 이에게 강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조용히 말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마르 14,7).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르 14,6)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을 중지시키고, 진심어린 그녀의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행동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사랑을 담아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웃사람이 취하는 행동과 모습에 틀렸다 맞다 비판하며 살아갑니다.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불신합니다. 심지어 죄의식을 조장하거나 그 죄책감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온전한 자신이 충분히 드러나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사람은 습관화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양식이 사랑의 언어‘따뜻한 부드러움’ 곧 온유함을 지니면 됩니다. 사랑의 언어를 마음에 담아보세요.

  12/11/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한동안 일본과 한국 사회에서 『미움 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현상은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과 눈치를 보고 미워하며 살아온 불편한 대상관계를 참는 것이 덕목으로 살아 온 사회의 목소리입니다. 이제 더 참지 말고 미움 받을 용기로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하자는 호소입니다. 타인을 위한 인내가 아니라 자신을 응원하고 위로하는 사랑을 하자는 소리입니다. 인내를 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데 힘을 온전히 쓰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한계 때문이지요. 인내할 수 없는데 참고 견디라는 덕목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타자와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인내하는데 사용하는 에너지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라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옵니다. 이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좋고 설레며 그리움을 행동으로 옮기는 희망을 스스로에게 주고 찾아가 보세요. 수직의 인간관계를 살아가야 하지만 수평으로 평등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현실과 만나보세요. 좋아하는 친구와의 만남 또는 성당의 고해성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수평적 위로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고요한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지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미움 받을 용기를 지녀야 하는 이 모습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죄책감 그리고 반성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도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하는 미안함을 넘어 일종의 착하게 살지 못한 죄의식이 동기가 되어 봉사활동에 참여한답니다. 칭찬받을 욕망에서 착하게 살지 못해 생긴 죄의식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금기된 것을 욕망할 때 죄의식은 발생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먹지 말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금식하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그 의식이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욕망의 실행이 죄입니다. 이것이 원죄, 짊어진 죄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는 그 속의 죄의식과 불안을 이겨내고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 곧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도록 일어나라는 용기와 응원입니다. 죄의식에서 일어서면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온 세상을 위해 연대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주된 메시지입니다.“세상 밖으로 나가라!” 한비야의 말처럼 용기도 가져보세요.“지구 밖으로 행군하라.”세상 밖으로 나가 보세요.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이 아니라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불신과 죄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로 걸어갈 수 있는 환경으로 사람을 인도합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사람들에게 죄를 끊어버리고 뉘우치는 변화를 위한 어떤 압박을 하지 않습니다. 정화의 물세례를 받도록 죄인의 회개를 선포한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죄가 아니라‘죄 없던 본래의 사람이 되는 것,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온전한 사람’에 집중하였습니다. 미움 받을 용기 속에 잠재해 있는 사람의 죄의식과 눈치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주었습니다.‘회개하라’metanoeite는 온전한 인격과 마음에서 드러나는 본래의 자기 자신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온전한 인격과 마음이란 생활에서 부드러움, 행동에서 겸손, 사람에 대한 태도에서 신뢰, 완벽한 사람의 모습, 일치를 말합니다. 온전한 마음과 인격을 만나도록 나를 인도하는 것은 사랑이지요. 예수님의 유언(遺言)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허하며, 함께 하나 되도록 기도하면서‘서로 사랑할 것'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죄의식을 사랑으로 내려놓도록 인도합니다. 죄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본래 자기의 존재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용기를 줍니다. 부활 후 두려움과 죄의식 속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용서의 말씀’과 함께 숨을 내쉽니다. 성령을 불어 넣어주며 죄의식이 남지 않도록 용서하고 서로 용서받듯이 용서하며 하나 되는 일치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강요와 설득에서 멀고 용기와 위로 그리고 배려와 응원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선물한 위로의 언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온유, 겸손, 신뢰, 하나됨, 용서, 상호애(相互愛), 긍정과 칭찬입니다. 죄책감과 불안 그리고 불신을 넘어서 온전한 자신이 되도록 초대하는 용기와 위로 그리고 사랑입니다. 이 덕목들이 자신을 늘 새롭게 변화하도록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나를 만나도록 초대하는 따뜻한 위로가 또한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존재하도록 합니다. 온전한 존재로의 초대이지요. 변화할 것을 강요하거나 끌고 가지 않습니다.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실행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상대방의 뜻을 소중하게 묻습니다. 온전한 나를 만나는 길뿐 아니라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종교와 인간관계에서도 절실한 방식입니다. 아무리 중요 사안이라도 밀어붙이면, 그 가치가 얼마가지 못하고 역풍을 만나거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변화하려면 실행과 적용에서 상호이해와 소통 그리고 협력이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먼저 착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감을 내려놓아 보세요. 아직은 완전하지 않지만 온전한 나를 만나도록 따뜻한 위로가 응원할 테니까요. 용기를 가지세요.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08/10/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요즈음 미국과 많은 다른 나라들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정치적, 민족적, 경제적, 생태적 갈등들로 인해 혼란스럽다. 주어지고 있는 이러한 상황들 안에서, 그들은 내가 왜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두 가지 계명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에 관해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은 아마 지금 지구의 많은 나라가 코비드-19라는 불덩이로 여전히 전소되고 있는 동안 내가 한가하게 네로 황제처럼 수금이나 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도 있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위험한 이 시대에 인간이 해야 하는 것 가운데 코비드-19 퇴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설명을 하자면, 그 과정을 통해 볼 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상황에 접어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안내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죽었을 때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는 지에 대한 정보서적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꿈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께선 이 세상을 목적과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셨다. 곧 이렇게 당신의 목적과 꿈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인간이 협조하도록 창조하셨다. 성경시대의 많은 유대인들과 예수님 스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한 두 계명과 함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요지를 설명하였다. 성경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부르심 받은 구원의 이야기며, 그것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회복하는 은총의 서적이다. 이 글은 하느님의 꿈을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우리 세상의 해결책이 없어 보일 것 같은 어려움에 대한 대안의 몫이 된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곳에는 굶주림도 범죄도 어떤 두려움도 없지 않을 것 같지 않겠는가? 성경은 우리를 사람답게 즉 하느님의 형상처럼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세상에선 모든 사람들이 돌봄을 받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불안이나 과도한 힘을 쓰는 것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고, 그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각 개인들과 우리를 통해, 모든 공동체가 효과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진실로 사랑할 때에만 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열정이 이런 글을 쓰도록 안내한다.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느님과 함께 협력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왕국의 도래를 돕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우리 모두는 자주 두 계명을 들어왔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계명들의 요구대로 살아가는데 문제와 어려움도 동반할 것이다. 여러 해를 걸쳐, 나는 나 자신을 돕고 다른 이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다가갈 수 있는 다른 여러 길을 찾아 왔다.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그들의 사랑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방법들을 제안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이 사랑의 두 가지 계명에 관해 이론적인 공부가 되지 않기를 그리고 더구나 그 계명들의 장점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안 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서 이 글을 대하는 여러분이 그 계명들을 알고 있으나 그것들을 수행하기에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어떤 경우엔 불가능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과 이웃을 좀 더 낫게 사랑하기를 원하면, 그때 그러한 사랑들이 성장하는 방법들을 시도하려는 것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 순간 이런 시도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려는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나의 작은 한 몫이 될 것이다. 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23/07/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처럼 상대방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사랑인 듯싶다. 바로 성령의 역할이란?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듯이 상대가 누구이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내 생각을 상대방이 알아듣겠지 생각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이나 그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는데, 그러므로 누구든 내 마음 안의 성령을 느껴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영적 인격자로서 사람은 내 안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만난다. 곧 사람은 몸과 영혼 그리고 성령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먼저 먹고 숨을 쉬는 몸은 육적인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영혼은 생각하는 정신과 결정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안다. 끝으로 성령은 나의 마음과 생각 안에서 아빠 아버지를 부른다. 다시 말해서 내 안의 성령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올려드린다. 영적인 사람은 이처럼 수덕(修德)의 삶에 관한 지성적 성찰들을 함께 공유하고, 아름다운 모든 이야기들을 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누구나 순수하게 믿는 영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보호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요한 14, 26)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각자 마음 안에 성령이 거처하시기에, 특히 믿는 모든 사람은 영적 인격을 선물 받은 품격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내 마음의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고, 영적 인격을 살도록 이끌고 감도하신다. 그 순간 성령은 말씀과 사람도 이해하는 이웃을 만나도록 인도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 26) 나는 내 마음 안의 성령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몸과 영혼 곧 생각, 정신, 마음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 몸은 먹고 움직이고 육적 여러 기능들을 수행한다. 운동하고, 음식을 먹는다. 영혼은 정신을 잘 바라보고 생각하게 한다. 마음은 결정하고 선택하며 자유를 누려 알게 한다. 성령께서는 내 영혼 곧 생각, 마음 안에서 ‘아빠 아버지’ 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내 마음 안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드린다. 내 마음 안의 성령께서 늘 우리가 함께 만나면서 가정, 교회, 사회 공동체 안에서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이겨내도록 서로 서로 이해하도록 인도하신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info@hanhodaily.com

  18/06/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

박쥐를 기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신년벽두에 인간을 서식지로 옮겨 타 전 세계로 전파됐다. 본디 동물을 숙주로 하는 미생물들은 함부로 인간에게 그들의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미생물과 식물에게 그들이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오직 인간이 그 서식지를 함부로 흔들어 대곤하였다.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의 바이러스는 인간이 건들지 않으면 미생물들은 그들의 서식지에서 산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단순히 메르스나 사스 같은 단순 전염병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팬데믹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태학자 및 면역학자들은 코로나-19는 생태위기의 한 양상이자 징조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인류역사 안에서 중세와 근현대의 분기점에 흑사병(1347-1351. 2천만명 사망)이 있었다. 페스트 흑사병은 인간이 신중심의 중세문명과의 절연을 과감히 선포하게 하고, 인간중심의 근대문명인 계몽주의 르네상스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인간은 철학과 과학, 의학 그리고 기계기술과 핵무기까지 만들어내며 끝이 없는 인간만의 길을 향해 내달려왔다. 이러한 인간 중심문명의 길을 달려가는 데,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주요한 몫을 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없다. 먼저 성경번역의 오류와 바르지 못한 해석이 인간중심문명을 부추기는데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에서 “다스려라”를 “모든 짐승을 부려라.(have dominion)” 혹은 “지배하여라.(subdue)” “제압하다.” “억제하다.”로 번역을 한 것이 오류다. 창세기1,26-27의 ‘다스리라’는 표현이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중심주의를 낳았다는 비판(Lynn White)과 달리 본래 성경의 바른 뜻은 인간이 하느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지구인들은 신약의 예수께서 말씀하신 착한목자와 같이 이 땅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었다. 생태학자들은 2020년부터 향후 10년간을 지구생존을 위한 남은 시간이라고 경고했다. 산업 체제를 바꿔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급격하게 줄여야 미래가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얼마나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여야 할까? 최소한 40%정도 줄여야 미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호주가 작년 9월부터 6개월간 가뭄과 화재로 심각한 생태위기를 겪어냈다. 그 후 설상가상으로 올해 2월부터 코로나-19로 모두가 움직일 수 없다. 바로 인간중심의 문명으로 지구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자신을 공격하는 적을 발견해서 지금 지구의 적을 향해 재공격을 하고 있다. 지구의 적이 누구일까? 코로나-19?, 그 숙주인 박쥐? 맹수? 코끼리일까? 아니다. 지구의 적은 인간이다. 진작부터 지구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미래세계는 인간중심문명과 절연을 과감히 선포하고 자연중심, 지구중심의 삶으로 가야한다. 그 첫 자리가 인간들끼리 경쟁과 집단적 욕구(Want)를 참으로 내려놓고, 지구와 함께 사는 ‘공존과 연대’를 사는 초대이다. 미래세계는 각자의 삶이 존중되고 지구와 개인의 기호(Like)를 존중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물리적 모임(physical Gathering)은 축소되고 정서적이고 영적 모임(Spiritual Gathering)이 지금부터 미래세계에 발견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으로 사회가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한 듯 보인다. 곽승룡 비오 신부(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info@hanhodaily.com

  14/05/2020
  금요단상 - 곽승룡 비오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