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생활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시기는 초기 3년이라고 한다.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타국, 관습과 문화, 사회, 언어가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것은 미지의 땅을 개간하는 것만큼 지난한 일이라 하겠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그 나라 언어를 숙달하기 위해서는 초기 3년간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 시기를 게을리 하면 그 후 30년을 거주하더라도 정착하는 나라의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없다고 알려진다.
식물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포도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배나무 등 유실수도 묘목을 이식하고 난 뒤 거름과 물을 주며 성심을 다해 키워야 대지에 뿌리가 내리게 되며 3년이 지나면 열매가 맺게 된다.
5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의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이 설정되어 기념하고 있다.
가정에 대해 동양 세 나라는 표현을 달리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권속, 일본에서는 가족, 한국에서는 식구라고 불려진다.
이들 세 나라의 표현 중 한국의 식구가 가장 마음에 닿는다.
그러니까 함께 밥을 먹는 사이라고나 할까?
하루 세끼 밥을 먹어도 다음 날 또 배고픈 것처럼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이가 가족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한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가 가정이다. 가정이 행복하면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가 부흥하게 됨은 만고의 진리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한국의 여성 가족부에서는 ‘건강 가족 기본법’을 마련하여 가족 개념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법에서 혼인, 혈연, 입양, 출생에 관한 법을 고친다고 한다.
그 중에 자녀의 성씨(surname)를 결정할 때 현재의 부의 성을 따르는 법을 바꾸어 부와 모가 협의해서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성씨 중에서 선택하여 결정하여 관공서에 신고하면 유효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에 대한 최근 여론 조사에서 20대와 30대 그리고 여성의 찬성이 반대보다 많았다고 한다.
최근 경향을 보면 여론조사를 신봉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국가의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론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여론의 형성에 TV, 라디오, 신문, SNS 등 미디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일반 시민은 국정에 대한 평가를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
여론은 파도와 같은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이 물결이 높던 날이 있는가하면 잔잔한 호수면을 닮기도 한다.
수시로 변하는 여론 조사를 구실로 역사와 전통의 맥을 이어온 가정의 기본법을 바꾼다는 발상은 심사숙고를 요망한다.
비록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이지만 고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민족이기에 관심과 우려를 표명한다.
만약 한국 정부가 발의한 이 법이 국회를 통과 한다면 수백년 내려온 한국의 전통과 관습이 사라지게 되며 족보의 의미도 퇴색하게 될 것이다.
족보는 한 가문 즉 씨족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고국의 대부분의 장자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자녀의 성을 골라 쓴다고 하면 예를 들어 첫째 아들은 아버지 성인 이씨, 둘째 아들은 어머니 성인 박씨, 딸은 어머니 성인 박씨가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며 가정을 이루는 실로 어이없는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동거, 사실혼 부부, 위탁 가정들은 가족으로 인정 한다는 조항은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다.
호주를 비롯한 서양에서는 여성이 결혼을 하면 남편 성씨를 따르고 있으며 대부분의 동포들도 여권이나 메디케어 카드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결혼을 해도 아내는 남편성이 아니라 처녀 시절의 성을 유지하며 사용하고 있다.
같은 부모를 둔 자녀가 성씨가 다를 때 형제 자매간에 느끼는 괴리감이나 외부의 평판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그렇게 되었을 때 가정의 행복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976년 미국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ry)의 소설 ' 뿌리(Roots)'가 드라마와 영화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인기리에 방영됐다.
작품 ‘뿌리’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납치되어 미국으로 끌려 온 소년과 그 후 2백년동안 그의 후손이 겪은 파란만장한 미 흑인들의 뼈아픈 역사를 담았다.
이 작품의 영향으로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붐(boom)이 전세계에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뿌리를 찾아 나섰을까? 사람은 자기의 뿌리를 알지 못 한다면 자신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은 애정과 소속감에 대한 위계가 있는 법이다. 가정은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기질이 합류한 만남의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정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녀가 각기 다른 성씨를 갖고 생활한다는 현실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가족은 나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히듯 가족 구성원 상호간에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돛단배에 돛대가 없는 배의 운명과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
만약 우리 사회에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인간은 모두가 다 남의 세상을 살다가 죽어지고 말 것이라고 어느 작가는 술회했다.
가정은 묘목과 같다. 항상 애정을 갖고 성심 성의껏 돌보아야 한다. 화목한 가정이 지상에서 으뜸가는 보배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자녀를 보는 기쁨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일 년 열 두달을 가정의 달로 섬기며 살아가자.
김봉주 (자유 기고가, 부영 고문) bjk194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