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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라는 거대한 거미줄에 먹잇감으로 얽매여 있다가 탈출한 듯 홀가분한 해방감과 설레임으로 한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한나절 날아간 비행기가 내려 놓은 곳은 아련했던 추억의 땅이 아닌 냉엄한 현실의 땅이다.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앞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풍경들이 먼저 그리워진다. 먹먹한 슬픔으로 잠시 길 잃은 아이처럼 서성인다. 누구를 만날까…작은오빠를 만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현관문이 열린다. 손을 내밀며 서있는 오빠의 처연한 모습에 무릎이 휘청인다. 웃음도 말도 잃어버린 듯 텅 빈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앉아서 축축해진 눈으로 머리만 끄덕이는 오빠에게 나도 아무 말 못하고 손만 주무른다. 아프게 목을 조이며 차오르는 울음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눈치 없는 강아지는 계속 짖어대고 있었다. 조용히 달래던 조카가 못 참겠다는 듯 실내화 한쪽을 벗어 들고 팔을 번쩍 올리며 낮은 소리로 말한다. “마르, 조용히 하지 못해!” 그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조카의 모습에 오빠가 겹쳐진다. 묘한 기시감을 느꼈고 수십 년 만에 들어보는 마르라는 단어는 마치 체면술사의 암시처럼 한 순간 먼 옛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우리 마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마르는 짧게 잘린 꼬리대신 넓적하고 커다란 귀를 펄럭이던 잉글리쉬 포인터였다. 가게에 붙여 지은 별채에서 아버지와 동거하며 사랑을 독차지했다. 칸막이가 있는 커다란 책상 밑이 침실이었고 낮에도 손님과 앉아있는 아버지의 손을 핥고 또 그 손은 마르를 쓰다듬는 애정행위가 이어졌다. 게다가 아버지의 잔심부름도 잘하는 동네사람들이 알아주는 명견이었다. 돈을 물고 가 담배를 사오고 단골 정육점에서 소고기를 물고오면 아버지상에만 올라갈 맑은 전골이 끓여졌고 어김없이 반쯤 남겨져 마르의 밥그릇으로 옮겨졌다. 팔 남매 끄트머리로 태어난 우리들은 질투심으로 의기투합하여 마르를 구박했다. 가끔 귀를 축 내리고 눈치를 보며 안채를 기웃거릴 때 작은오빠가 신발 한 짝을 벗어 들고 “마르, 니 아부지 한테 가, 임마!” 윽박지르곤 하던 이유였다. 겨울방학때 서울에서 언니 오빠들이 내려와 집안이 북적거리면 사냥을 떠나던 아버지. 자식들에게 꿩만두를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신이 나 껑충거리는 마르와 아버지의 배웅이 끝나면 우리들은 장끼이냐 까투리인가를 써 놓고 내기를 했다. 긴 겨울 밤 따뜻한 아랫목에 깔린 이불속에 발을 집어넣고 둘러 앉아 내기에서 진 사람들이 사온 뻥튀기과자를 먹으며 게임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큰언니가 우리들이 기억 못하는 마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도 얼어붙고 싸리 눈이 어지럽게 흩뿌리던 유난히도 추웠던 날, 목화 솜을 두툼하게 넣고 누빈 하얀 바지저고리를 챙겨 입은 아버지는 엄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사냥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반쪽 시야로 눈을 뜬 곳은 병실이었다. 사냥터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며 아버지가 가끔씩 들려 몸도 녹이고 꿩도 한마리씩 떨구고 오던 친구의 말은 이러했다. 그날 마르가 갑자기 뛰어들어와 끙끙거리고 짖어대며 바짓가랑이를 물어 끌어당겨 뭔 일이 생겼구나 생각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쫓아가니 아버지가 쓰러져 있었고 구조한 후 우리집에 연락을 했다고.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 후 처음 치료한 의사의 말은 한쪽 눈을 잃을 만큼 머리와 얼굴에 부상이 컸지만 파편과 혈흔이 닦아진 듯 깨끗했으며 만약 그 날씨에 골든 타임을 놓쳤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그날 아버지는 꿩을 향해 총을 조준하고 몇 발작 움직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방아쇠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발사되었고 튀어 올라온 파편들은 얼굴에 많은 부상을 입히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마르는 깨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피범벅이 된 상처를 핥아내고 곁을 지키다가 아저씨네로 달려간 것이었다. 마르는 팔 남매의 아버지이며 가장을 구해 낸 우리 가문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큰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우리들은 마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인정했고 아버지의 한쪽 눈이 의안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철부지들은 마르 앞에 서면 먼저 꼬리를 내렸었다. 평화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마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울로 떠나던 이삿짐트럭 조수석에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속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가는 길에서 허공에 흩어진 아버지의 시선과 마르의 시선은 닮았었다. 전학 수속이 늦어져 몇 달 후 서울에 올라와 보니 마르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르며 찾아다니는 나에게 “마르는 사라졌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르는 어디로 갔을까! 낯설은 서울이 싫어서 고향의 사냥터로 향했을까? 전설의 주인공 답게 뒷모습도 보여 주지 않고 죽을 곳을 찾아 떠났을까? 작은오빠도 속수무책 불치병으로 소멸의 길을 향하고 있다. 과거 신장이식을 결정 못해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아내가 설득해서 추진해 주지 않았다는 뒤늦은 원망. 그의 곁에는 아버지의 마르같은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꼭 닮은 아들과 함께 남겨질 전설 하나쯤은 있으리라. 지나온 인생길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인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고통의 구렁텅이 속에서 가족을 위해 스스로 자기자신을 건져내는 사건들. 이렇게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생겨난 이야기가 전설로 남는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은 그것을 기억해 주는 것이리라. 이영덕/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23/11/2023
문학지평

[문학지평] 지금 그리고 여기 친구가 밤새 비행기를 타고 이른 아침 시드니에 나타났다.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등에 한 짐 그리고 어깨와 목에 카메라 장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호주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하는 그의 열정은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준비 탕!’이다. 출발지가 한국이었으니 시차적응도 필요없으렷다. 하이드파크에서 아치볼드 분수대를 한참 감상하더니 드디어 렌즈를 만진다. 360도를 조금씩 조금씩 돌며, 멀리 또 가까이서 쉼 없이 셔터를 누른다. 마치 이 순간이 지나면 분수대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 담고 싶은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는 것. 드디어 카메라가 손에서 놓여지고 다시 한 번 전체를 바라본 후에야 몸을 돌린다. 그제야 아름드리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초록터널이 눈에 들어오나보다. 시내 한 복판에서의 거대한 숲 속 느낌에 감탄하며 또 손이 바빠진다. 덩달아 나도 고개 들어 감상하다보니 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하늘이 마치 초록 옷에 매달린 반짝이는 단추같아 보여 다음 글쓰기 첫 문장으로 저장해 놓는다. 근처에 있는 세인트 메리 대성당 안에서는 플래시만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찍기가 허용된다하니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담는다. 덕분에 나는 긴 시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친구와 중학교 입학때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같이 했던 오십년도 넘는 시간들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떠오른 바로 두 달 전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양 생생하다. 그는 한국 방문 중인 나를 파주 헤이리예술마을로 데려갔었다. 수 십년간 아나운서였던 황인용씨가 틀어주는 클래식이 높은 천장의 카페 안을 채운다. 웅장한 음악 공간으로 다시금 빠져드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어제는 서울에 있던 친구가 떡하니 내 앞에 서 있다. 맞다. 지금 우리는 같이 시드니에 있다. 오전 내내 땅에 발을 딛고 담은 모습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싶다면서, 그녀는 또 ‘준비 탕!’을 외친다. 우리는 309 m 높이의 시드니 타워로 올라가 하나의 드론이 된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는 커다란 그림자로 인해 성당 지붕 위와 넓은 공원은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장관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는다. 관람층에서 한 바퀴를 다 돌며 분주히 찍다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킨다. 우리는 페리를 탔다. 파도가 어찌나 심한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하다. 친구는 뱃머리에서 아찔함을 즐기며 특이한 장면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좋아한다. 20여분만에 도착한 맨리비치, 거친 파도 속에서 서핑하는 많은 무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끌리듯 해변가 물 가까이로 달려간다. 게다가 불그레한 석양까지 배경으로 또 그렇게 한참을 머물며 앵글을 조절한다. 멀찍이 떨어져 벤치에 앉은 나는 그 전체 모습을 한 장면으로 바라보며, 친구의 사진 작업을 통해 나의 글쓰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어느 새 늦저녁 어둠이 밀려온다. 첫 날 일정은 그렇게 12시간만에야 막을 내렸다. 어떤 날은, 오페라하우스 계단 위에 자리잡고 앉아 몇 시간이고 건물 끝에 걸쳐진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모양을 비스듬히 찍다가 아예 엎드려 찍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5박6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그녀는 떠났다. 그 후 어느 날, 친구와의 추억이 떠올라 맨리비치를 다시 찾았다. 나는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한 입 베어물며 생각에 빠져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친구 대신 이번에는 ‘준비 탕!’하는 갈매기 한 마리가 등 뒷쪽에서 순식간에 내 손도 건드리지 않고 기술적으로 봉지 속 음식만 낚아채 길바닥에 떨어트리니 갈매기들이 떼로 몰려든다. 마치 지금의 내 모습 같아, 졸지에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만 손에 쥐고 갈매기 무리 속에서 빠져나왔다. 느닷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허탈감이 그 친구가 함께 없음을 더 실감나게 했다. 머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음에랴. 바로 페리를 타고 오페라하우스 쪽으로 돌아왔다. 샌드위치 가게에 다시 들렀다. 이번엔 안전한 곳을 둘러 보다가 '갈매기 쫓기'를 전담하는 순찰 도는 훈련된 개를 발견했다. 오페라하우스 근처 식당 야외 테이블 위 음식을 낚아채고, 유유히 날아가는 불청객 갈매기들을 쫓기 위해 순찰견을 활용하여 이 문제에 대처하다니. 여러 방법 중 이 묘안은 성공적이라한다. 그 도둑 갈매기 한 마리가 나를 맨리비치 대신 오페라하우스 앞에 머물게 했으니 평화롭게 점심을 먹은 후, 친구와 몇 시간 함께 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사진작업을 처음 지켜보며 ‘지금 그리고 여기'에 온전히 머물러야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의 글쓰기에도 적용해 본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모발폰에 새 글의 초안을 써서 저장했다. 친구는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지고 시드니에 나타나 ‘매 순간 현재에 머물기’를 몸으로 내게 보여주었다. 순간을 포착하는 갈매기와 무심히 지나치는 구름에서조차 찰나의 한 장면을 포착하려는 그녀의 열정에서 나의 안일했던 글쓰기를 돌아본다. 은퇴 후 요즘, 남은 에너지는 청춘 때와 같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글쓰기의 글감을 떠올릴 수 있으니 게으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매월 첫 토요일의 ‘지금 그리고 여기’는 메도우뱅크에서 모이는 문학회이다. 차수희/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원

19/10/2023
문학지평

Sun에게는 처음인 유럽을 그룹여행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패키지 여행을 선호하는 그의 뜻을 따랐다. 그는 그룹여행이, 여럿이 우르르 몰려 다녀서 재미있으며 먹고 자는 중대사를 쉽게 해결하고, 어딘가에 종속되면 편하다는 것이다. 그 핑계로 꾀를 내어 나도 아직 밟지 않은 동유럽과 발칸반도 6개국을 12일만에 패스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Putin’s  War로 인해, 서울에서 항공로 변경으로 두 시간이 지체되어 열 네 시간후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플러스 4시간 버스를 타고 바바리아(바이에른)에 이른다.  휴우, 약 18시간에 걸친 거리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8시간(시차)을 고려하면 10시간만 걸렸다는, 시간을 번(=돈을 번) 나의 다소 이상한 계산법으로 힘든 몸을 달래었다. 여행의 끝무렵에는 프라하의 유서깊은 성당에 내걸린 현수막의 소리없는 웅변으로 위로 받기도. ‘HANDS OFF UKRAINE, PUTIN!’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가 첫 구경지이다.(카라얀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뭘까? 현지 여행가이드가 나타나 ‘얼마나(x2) 빨리(x2) 우리를 몰아 가는지..아, 미칠 뻔 했다. 이런 저런 해설을..이건 뭐 이런 약장수도 없다. 아, 자유여행이 그립다.’(그날 내 일기장에 이렇게 씌어 있다) 알고보니 시간맞춰 해야 할 선택관광 때문에 그렇게 난폭한 진행(?)을 하는 것이었다. 영화 ‘Sound of Music’이 태어난 미라벨 궁전의 정원을 찍고, 잘츠강의 풍경과 다리에서 찰칵, Mo氏의 생가, 세례당, 자주 다녔다던 카페, 초콜렛 가게와 대성당과 돔 광장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물론 박물관과 성당 내부 관람은 당연히 생략이다. S와 나는 과감히 선택관광을 취소하고 한 시간의 자유시간을 얻기로 한다. 먼저 모짜르트가 자주 이용했다는 Café Tomaselli(since 1700-)로 가서 멜랑주(mélange)를 주문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의 커피 멜랑주가 오늘날의 카푸치노 원조라고 하지 않은가. (그후 빈에서 즐긴 비엔나 커피는 아인슈패너einspanner였다) 모짜르트는 뜨거운 커피에 설탕과 생크림을 가득 올린 부드러운 커피를 즐겼을까? 여기서 떠올린 악상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나도 관광객이 붐비는 지금, 그의 감성을 느끼기가 어렵기만 하다. 돔 광장과 미라벨 정원에서 트렙가의 일곱 아이들과 마리아가 부르는 도레미송이 들려오지 않은 것처럼. 차르르 차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듯 잘츠부르그를 떠나 할슈타트를 지나고 두번째의 국경을 넘어 발칸반도로 들어간다. 발칸반도의 산천을 가로지르며 나는 니콜라 부비아의 여행기 [세상의 용도]중의 첫째권 ‘아, 봄꽃들이여 무얼 기다리니’를 읽었다. ‘..우리는 일체의 사치를 거부하고 오직 느림이라는 가장 소중한 사치만을 누리기로 작정했다..’ 그는70년전 느림의 미학으로 이곳을 지났다는데, 나는 흐드러진 봄꽃들의 향기를 추억의 밑바닥에 서둘러 파묻으며 고속으로 스쳐간다. 블레드, 중세의 성과 호수, 아흔아홉의 계단을 신부를 안고 올라야 축복받는(?)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는 작은 섬의 예쁜 교회..오늘날에도 동화는 계속된다.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피란(Piran)을 거쳐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 들어선다. 아침 이른 시각에도 많은 사람이 트레킹에 나섰다. 한국 여행사들의 여행객 합집합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대 로마의 시저(Julius Caeser)처럼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찍었노라)를 외친다. 카이사르 집합의 원소가 된 나도 찰칵거리며 부지런히 발을 내딛는다. 여러가지의 걷기 코스가 안내되어 있다. 일주일 정도 머물며 저 코스들을 다 밟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당연한 생각을 냉큼 뿌리치고 안광을 부라리며 멋진 경치를 시신경에서 뇌세포와 가슴까지 전달한다. 나는 S의, S는 나의 모델노릇을 일사분란하게 진행하면서 찰칵 찰칵, 두 발은 또 다른 풍광을 겪으려 열심히 움직여야 하노니..많은 일정을 빠르게 진행하는 패키지 여행에 나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16개의 천연 계단식 호수를 연결하는 98개의 크고 작은 폭포로 이루어진 이곳..진초록 에메랄드빛 호숫가로 난 통나무 트레킹 코스는 정녕 느림의 미학으로 가야하는 길이 아닐까.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본다. 세포 하나하나에 자연의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 청량한 우주적 힘이 축적되길 바라며. 여행5일차에 묵었던 보스니아 땅 네움(Neum)의 초저녁 하늘에는, 아마 몇천만km 거리의 초승달과 샛별이 내 육안으로는 100m간격으로 떠 있었다. 가늘고 매혹적인 몸매의 초승달과 빛나는 별이 혜원(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의 두 연인처럼 애틋하였다. 그러니 더욱 요염한 달은 삼경에 떠 있는 부분월식의 눈썹달이 아닐까. 이건 정말 순전히 혜원의 그림 탓이다. 아, 예술의 위대함이여! 오백년, 천년, 이천년 전 그들도 같은 달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내어 문화를 문명을 이끌어 왔을 것이다. 이제는 예술이 된  옛날의 도시들을 구경하며 멀리 있는 과거로 갈 때는 예술에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다.  바쁘고 바빴던 이번 여정의 막바지, 하얀 달은 어김없이 차올라 밤 이슥히 독일 시골 마을의 조촐한 호텔 창문 밖으로 내다 보이는 성당의 뾰족한 종탑 위로 반달이 되어 걸려있다.  세상의 봄꽃들이 따사로운 햇살과 달빛의 정기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듯 달은  반원의 달무리를 그리며  천지에 은빛을 뿌린다. 봄이 무르익어 간다. 문득 시드니가 그립다. 김인숙/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김인숙/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1/09/2023
문학지평

 한나 안오랜만에 헌 구두를 꺼내어 닦았다. 구두 앞부리 껍질이 벗겨진 부분을 구둣솔 끝에 구두약을 살짝 찍어 바른 후 촘촘하게 박힌 구둣솔로 살살 윤을 내 봤다. 옆면과 뒤꿈치까지 약을 바르고 쓱쓱 문질러가며 광을 냈더니,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헌 구두가 구름을 헤치고 얼굴을 내미는 햇님 모습이다. 오는 일요일에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모처럼 정장 차림으로 교회 가야지.서울에서 살 때는 집을 나서기 전 꼭 하던 일이다. 그때는 신발장에 갈색, 검정, 체리 빛과 흰색 구두를 뚜껑 달린 신발장 안에 가지런히 넣어 두고 신었다. 회사 다니던 때 구두는 항상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어야 했고, 바지 주름은 칼날처럼 서 있어야 했고, 옷과 구두와 핸드백 색을 매치해서 입고 다녔었다.  시드니에서 생활하는 요즈음은 메시(Mesh)천으로 만들어진, 운동화 비슷한 검정 신발 한 켤레이면 모든 옷에 통한다. 검소해진 걸까 게을러진 걸까. 바지 역시 겨울철에는 주름이 서지 않아도 되는 레긴스바지이다. 편하기도 할뿐더러 어디를 가던 그런대로 괜찮다. 헌 구두가 새 얼굴로 반짝이듯 나이 든 사람의 마음도 반짝이게 하는 약과 솔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겉만을 닦고 광낼 게 아니라 마음도 반짝반짝 광을 낼 수 있는, 그냥 바르고 쓱쓱 문지르기만 하면 활기차고 젊어지는 것 말이다. 마음은 아직도 젊은데 나이가 영 생경하다. 내 나이 칠순이 넘은 게 맞나? 알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불로초를 좋아하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구두를 닦듯 구두약을 발라 쓱쓱 문질러 광을 내고 싶어진다. 외출이 점점 싫어지는 것은 집이 아늑하고 좋아서만은 아니다. 친구들의 전화마저도 귀찮아지고 꿈쩍하기 싫어지니, 특별히 제작한 맞춤구두약과 구둣솔이 필요한 게 분명하다. 아침이면 감나무, 살구나무들이 잎을 모두 털고 나목으로 서 있는 뒤뜰에도 가보고, 풀만 무성한 텃밭도 둘러보고, 다육식물 녀석들 형형색색 물든 화분들도 둘러본다. 꽃들의 활짝 핀 모습과는 달리 내 마음은 갈수록 점점 갈대처럼 드러눕고만 싶어진다. 마음을 닦고 광을 내고 싶은데 약과 솔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구두약과 솔을 찾아 바닷가로 나섰다. 본다이 비치에서 브론테 비치까지는 약 1시간 20분 걸렸다. 마주 불어오는 해풍을 점퍼 가득 품고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월의 물기 어린 바닷바람에 마음속 덕지덕지 낀 먼지를 한 움큼씩 짙푸른 바다에 띄우며 나는 가끔 이 길을 걷는다. 일상의 권태와 나이 듦의 나른함에서 도망칠 수 있는 내 마음의 장소이기도 해서이다.  벼랑 위에 우뚝 선 고층 건물 안 카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통유리창 너머로 지난날들이 꼬리를 물고 눈앞에 나비처럼 나풀거렸다가는 파도가 되어 멀어져 간다. 빗속에서도 걸었고, 뙤약볕 속에서도 걸었다. 때로는 축복처럼 눈이 내린 후의 아침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늘 선택의 길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게 최상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그건 아니었던 거야 해 지기도 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멀어져간 친구도 그렇고, 결혼도 남편도 그렇다. 그때 이럴 걸 그랬어....... 동굴 속에 숨어든 메아리처럼 외로움이 덩어리 채 만져지는 때면 잃어버린 관계들 상실의 아픔이 스멀거린다. 헌 구두를 닦듯, 구두약을 칠하고 새로 광을 내어 관계를 새롭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유리창에 비치는 시들어진 내 모습은 구두가 낡아졌듯, 무슨 근심이 있냐는 질문을 들을 법한 얼굴이다. 고개를 돌려, 젊음이 있고 생기가 있었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포도 위를 걷던 때를 퍼 올려본다. 그때가 그리운 요즈음, 마음을 광낼 수 있는 구두약과 구둣솔을 찾아 두리번거려본다.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내 등짝을 밀어붙이는 영혼의 바람 중의 하나이다. 소설 쓰기 강의를 수강한 게 일 년이 넘었다. 환갑을 지난 할미꽃들 모임이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지난 삶의 무늬들을 종이 위에 그려보고 싶어서이리라, 누가 그랬던가. ‘노년은 생각보다 멋지다,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기에 좋은 나이다’ 라고. 담담한 삶의 여백을 가슴에 담으며, 순간 다시 젊어지는 느낌은 구두약이 되고 구둣솔이 되어 새로워지며 상쾌한 기분이 솟는다. 머리를 드높이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나이가 더 들어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 헌 구두를 닦듯 글쓰기를 벗삼아 까부라지려는 나를 하루하루 닦으며 광을 내 보련다.  한나 안/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회원

17/08/2023
문학지평

모든 이별은 마음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나 흔적을 남긴다. 그 이별 중에서도 혈육을 나눈 가족이나 마음을 나누고 지내온 친구와의 이별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가 겪은 마지막이 된 배웅은 오랫동안 나에게 텅 빈 세상, 허무한 나락을 경험하게 했다. 70년대 말. 갑자기 찾아온 병마로 아버지는 오른쪽 반신불수에다 언어장애까지 와서 온가족을 충격과 절망에 빠뜨렸다. 뇌졸중이란 단어조차 주위에서 들은 적이 없었던 그 당시 아버지는 57세 젊은 나이였다. 장녀인 나는 결혼해서 동경으로 간지 일년이 되었고 나머지 동생 넷 중에 셋이 학생이었다. 그 후 나는 시드니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어머니는 시집간 딸네 집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에 누르며 13년을 단 하루도 빠짐 없이 아버지 곁을 지켰다.  중환자실을 거쳐 처음 몇 년 동안은 위독하다는 연락이 오면 나는 비행기를 탔고 내 눈 앞에서 아버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이 멍든 것처럼 보라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려고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으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회복시키려고 혼신을 다했다. 수소문하여 한의와 양의를 병행해서 치료에 임했는데 서울 토박이 어머니는 친척이나 지인 한 명 없는 지방 어디어디에 침을 잘 놓는 한의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싫다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 어떻게 해서든지 모시고 갔다. 그 지성이 하늘에 닿았던가. 언젠가부터 경련이 멈추고 다리의 마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라도 글을 써서 가족과 소통을 하면 좋으련만 의사표시는 왼손의 제스처로 했고 어머니가 유일한 통역사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기 싫어서였을까. 말하기 좋아하던 사람의 입에서 소리가 나질 않으니 아버지는 그렇게 냉가슴을 앓았다. 식사조차도 아내가 곁에서 떠먹여 드렸으니 미안한 마음이 컸으리라. 어머니와 자식들은 아버지가 그런 상태라도 살아 계시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아버지는 6남매 중 막내였다. 막내가 갑자기 쓰러지니 위로 두 형님이며 누님들이 애절해 하셨다. 연로하신 큰고모님은 아버지의 병세를 아시면서도 나를 보실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시며 ‘아빠 어떠시냐’고 물었다. 내 입에서 한가닥이라도 희망적인 말이 나오길 기대하시던 그 애절한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도 막내동생 걱정을 하시던 큰아버지, 둘째아버지 두 분이 70의 벽을 간신히 넘기고 먼저 별세하셔서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그 해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긴장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비록 말을 못하고 오른 손 사용을 할 수는 없지만 혼자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이발소도 다녀오실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좋아하는 맥주도 한잔 하게 되었다. 안된다고 하면 화를 내는 바람에 좋아지던 병세가 도루묵이 될까봐 드리게 되었다. 식구들은 그런대로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게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주에 모시고 오고자 했다.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시며 ‘나는 아니고 엄마만 모시고 가라’고 왼손으로 말씀하셨다. 동생들도 모두 어머니가 호주에 다녀오시길 원했다. 아버지는 이제 많이 회복하신데다 자기들이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엄마는 아무 걱정 말고 호주에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 아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기회인가. 그러나 어머니 입장에선 병중에 있는 아버지 곁을 자식들 보다 자신이 지키기를 고집하셨다. 결혼한 딸네 집에 왔다갔다하며 지내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는 어머니는 결국 처음으로 딸네 집엘 다니러 가기로 했다. 호주로 떠나는 날. 온 가족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아버지가 엄마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오셨다는 건 우리 가족 친지에겐 뉴스거리가 되었다. 60일만 헤어져 있다가 다시 반갑게 만날 터이니 서양사람들 같으면 서로 끌어안고 인사를 하건만 우린 그냥 몸을 숙여 절을 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시드니 집에 와서 어머니와 나는 그 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어머니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시드니 하버의 푸른 물결을 하염없이 쳐다보며‘속이 후련하구나’하셨다. 그러나 운명은 딸과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머니를 그냥 두지 않았다. 호주에 온 지 오십일. 이제 열흘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텐데 한밤중에 남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쌍초상이 날까 두려워 협심증이 있는 어머니에겐 사실을 숨기고 아버지가 병원에 가셨다고만 했다. ‘내가 13년을 하루같이 돌봐드렸는데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나면 절대로 안된다.’고 완강한 어머니의 믿음과 고집. 급히 한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내가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말씀드려야 했을 때의 그 상황을 어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몸부림치며 배웅했다. 50일 전 김포공항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면 가장 힘들었던 배웅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버지와의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을, 먼 길을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렸다고 표현하고 싶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권영규/수필가, 이효정문학회 (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

06/07/2023
문학지평

음(音)의 안내로 그림 속을 거닐었다. 전람회의 그림 콘서트에 간 것이다. 빠방하고 트럼펫이 전시회의 개막을 알리자, 나는 전시회장으로 급류처럼 빨려들어갔다. 무소륵스키가 연인처럼 사랑했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동맥파열로 39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자 그 애틋함을 친구의 유작전 전시회를 본 후 열 다섯 곡의 음악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러나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열 점의 그림을 보며 산책하는 이야기. 그리고 150년이 지난 오늘 오페라하우스에서 시드니 심포니의 선율로 그는 나를 마중한다. 감히, 단테가 베르킬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사후세계를 여행하듯 나는 그를 만나 그림 속의 세상과 소리의 세계를 동시에 산책한다. 먼저 난쟁이를 만난다.(1곡 Gnome) 나는 유년의 백설공주가 되어 일곱 난쟁이들을 만나고 해리네 집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집요정 도깨비도 맞닥뜨리다가 운유시인이 노래하는 중세의 고성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2곡 The Old Castle) 루브르 궁전역 튈르리 정원으로 뛰어가서 싸움박질하는 아이들을 말리기도 한다. (3곡 Tuileries) 휘익 갑자기 들리는 채찍소리는 처음들어보는 타악기 음향인가. 저 멀리서 소달구지가 달려오네. (4곡 Bydlo: 비드워 폴란드의 우마차) 어서 여기를 지나야겠다. 귀요미 꼬마들의 발레 연습도 지켜보고 (5곡 Ballet of the Unhatched Chichens), 두 남자를 만난다. (6곡 사무엘 골든베르크와 슈무일레) 두 폴란드 유대인, 부자는 고음에서 빽빽거리고 가난뱅이는 저음으로 징징댄다.  행복이란 즐거움, 몰입, 음이 있는 삶의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진정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1년여를 집콕했을 때 나는 이 3박자를 얻으려고 뒤뜰 데크에서 음악을 자주 들었다. 소리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고 들어오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좋아하는 지휘자 아바도의 뒷모습을 유튜브에서 붙들어 유화 한 점을 그렸다. 그의 음악이 내 그림 속에서 조금이라도 뿜어져 나오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나의 기묘하고 욕심있는 소망은 그 전에도 있었다. 퇴근하는 길목 타운홀 역에서 가끔 연주되는 경쾌한 멜로디와 뮤지션의 풍경을 어설프게 그림으로 엮어내기도 했고, 세인트 제임스(St James)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다리하나를 포개고 연주하는 색소폰 주자를 그린 적도 있다. 특히 그 때는 St. James는 성 야고보, 성 야고보는 생장, 생장은 산티아고…. 이런 낱말 잇기 놀이를 하며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며 들어가는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점인 생장(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마을)과 도착점인 산티아고의 별이 쏟아지는 들판에 선 사람들이라는 상상을 즐기기도 했다. 이젠 시장 구경을 간다. 리모주의 시장 (7곡 Limoges Market)에서 가격흥정 끝에 싸우는 두 여인들을 보고 혀를 끌끌차며 예나 지금이나 인간군상들아 <현재를 즐겨라>하고 충고하다가 불쑥 카타콤 (8곡 Catacombs)으로 들어간다. 아, 화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듣고 직접 나를 안내하네. <죽은 언어로 말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죽음을 잊지 말라> 우리는 간다. 시계가 땡땡 12시를 알린다. 현실로 돌아가라. 닭발 위에 오두막집 (9곡 The Hut on Fowl’s legs)에서 러시아 민담 속의 마녀 바바야가(Baba-Yaga)가 경고한다. 현실로 돌아가라! 개선문 위에서 펄럭이는 파랑과 노랑 두색갈의 깃발, 키이유의 성문 (10곡 The Great Gate of Kiev) 앞에선 나는 눈물이 찔끔 난다. 일 년 넘게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전쟁, 죽어가는 사람들, 파괴된 도시와 마을…. 그러나 1874년 무소륵스키는 오늘의 상황을 예견하고 키이유의 대문에서 댕댕 승리의 종소리를 울려퍼지게 했는가. 벅찬 마음으로 성문을 통과하며 평화와 승리의 깃발이 하루속히 빨리 나부끼기를 염원한다. 캔버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소리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들> 음악으로서 눈이 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더 멀리 볼 수 있게 한 그에게 브라보하며 환호한다.문장에 음악을 들려주는 고금의 많은 시인들처럼 음악과 미술의 만남 그리고 그를 표현하는 나의 문학적 서사가 캔버스 위에서 스며나오는 리듬과 음조와 더불어 나를 더욱 행복하게 이끌어갈테지.뿌듯하게 충만했던 그 반시간남짓한 시간은 오래오래 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데 기여하리라.김인숙(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2/06/2023
문학지평

오늘도 꿈쟁이 나의 영혼은 내가 잠든사이 제멋대로 육신을 빠져나가 낯선 곳을 헤매며 나의 애간장을 태웠다. 집 밖으로 나간 호기심투성이의 감성은 날개 옷으로 갈아 입고 여기기웃 저기기웃 잿빛의 세상이 궁금하다. 침대에 누워서 돌아오라 외치는 추상같은 이성의 명령은 그저 종이 호랑이 일뿐이다. 나는 아직도 애칭 아가라고 부르는 어리버리 열아홉살 작은 아이를 옆에 태우고 지그재그 바다로 난 길을 향하여 카 레이서가 무색할 정도의 스피드로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이내 아스팔트 도로가 물에 잠겼다 보였다 하다가 저 멀리 하늘로 치솟은 도로의 끝에서는 길이 끊어져 자동차들이 심연의 물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달려버릴까.. 노심초사 이성에게 어깃장을 놓아 보았지만 철없는 감성도 아이가 다칠까 걱정스런 마음 앞에선 어미의 마음이 되는가 보다. 그대로 멈췄다. 새해 다섯째 날 작은 아이가 두번째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날이다. 햇수로는 지난해12월24일, 날 수로는 열이틀 전의 불합격에 재도전을 하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해서 친구들과 여자친구 앞에서 자랑하고, 축하 받는 특별한 성탄을 맞이하고 싶다며 들떠 있다가 첫번째 시험에 참패를 당했다. 그날의 RTA내부 풍경을 스케치해 보자면, 한바탕 테스트가 끝나고 여러 팀의 시험관과 응시자가 거의 동시에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그리고 시험관들은 바로 자신들의 룸으로 들어 가는데 낙방한 사람은 호명이 빠르고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느라 시험관의 말이 길어진다. 또한 합격된 사람은 컴퓨터에 면허증 발급을 위한 신상 등을 입력 하느라 조금 지체되는 경향이 있고 일단 호명이 되면 사인란에 사인을 하라고 볼펜이 주어진다. 연두색 유니폼 조끼를 입은 시험관들은 다소 사무적이고 무표정 했으나 나름 권위가 엿보였다. 그들은 20여분의 테스트 시간동안 응시자들에게는 절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주 작은 실수의 경우라 할지라도 점수를 주고 말고는 그들의 재량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을 잘 만나는 것도 그날의 운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와 나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시험관에게 걸리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삐죽삐죽 검은 수염이 면도한지 삼사일은 되어 보이는 듯한 남자에게 불려나가는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은 결코 겉모습만 보고 평가 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내 삶의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땐 대체적으로 생긴 이미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말‘꼴값’의 어원이 알고 보면 결코 속된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살이 떨렸다. 아이의 수능 시험 때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했다. 기도라기 보다는 주술같은 중얼거림으로 기다리던 20여분의 시간은 좌불안석이었다. 차가 돌아올 때가 되어 연신 주차장을 내다보니 아직 주차가 능숙치 않은 아이에게는 무리수인 듬성듬성 이 빠진듯한 좁은 공간들만 남아 있었을 때도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주차 직전에 이미 채점이 끝난 상태이므로 나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아이가 바짝 긴장된 모습으로 돌아오고 호명이 빨랐고 칸막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설명이 길었다. 어쩌나.. 아이의 꿈이 옛날 이야기속 항아리장수가 되어 버렸다.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장으로 가던 사내가 잠시 쉬어가려 항아리를 내려놓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네. 이것을 팔아 병아리를 사야지, 닭이 되면 내다팔아 돼지를 사야지, 그것을 키워 내다팔아 송아지를 사야지, 송아지가 어미 소가 되고 새끼에 새끼를 치면 부자가 되겠지. 그러면 첩을 보겠지, 본 마누라와 첩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겠지. 그러면 내가 이렇게 뜯어 말려야지…. 사내의 손에 맞은 항아리가 쨍그랑 작살이나고 꿈이 깨졌다. 어린날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몹시도 아파했었다. 가련하게도 아이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계획이 무참히 부서졌다. 깨진 상심의 파편 한조각이 내마음에 와 박혔다.   와신상담 두번째 시험날이 왔다. 지난밤 꿈에 달리다 멈춰선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운세를 내어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시험장에 도착하니 이번엔 마음이 좋아 보이는 시험관에게 호명이 되었다. 과속이 낙방의 원인이었던 지난번의 실수를 되새기며 침착한 모습으로 시험에 응하는, 단 며칠새에 성숙해진 아이의 모습을 보니 좌절이나 실수가 때론 교만의 브레이크가 되는구나 싶어서 되려 지난번 참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험관의 수신호에 따라 좌,우 방향 제시등과 브레이크등을 확인하고 떠나는 차의 꽁무니를 먼길 떠나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되어 바라보았다. 도로가 밀리는 바람에 종전 보다 십분 정도 늦은 30여분이 지나서 들어오는 아이의 표정이 침울했다. 실수한 것 같다고 지레 낙심하며 실패를 각오하는 듯한 태세를 취한다. 주행 중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과잉 방어 급정지를 한 것이 감점이 될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꿈에 갑자기 멈춰선 것과 아이의 급정거가 불길하게 연관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를 채점한 시험관은 이름을 바로 부르지않고 무언가 이쪽저쪽을 오가며 업무가 바쁘다. 아이와 나의 가슴속에서 팡파레 직전의 두그 두그 두그 북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눈빛으로 감지되었다. 드디어 이름이 불리워지고 볼펜이 주어졌다. 잠시 후 자신의 얼굴이 박힌 P면허를 받아들고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가슴으로 바르르 터뜨리는 환희에 찬 아이에게 찬물 한잔을 권했다.젊은 청춘에겐 귓등으로 흘려 들을만한 뻔한 충고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산다는 것 또한 운전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어떤 날은 시종 일관 청색신호 질주에 세상 살만한 것 같고, 어떤 날은 시종일관 황색신호 턱걸이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어떤 날은 시종일관 빨간신호 정지에 안달도 나지만 삶과 운전의 신호등 앞에 순명 해야함을, 질풍노도의 파란 청춘도 빨간불 앞에서는 봐 주기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두려울건 없어 얘야.. 마음의 GPS를 틀고 논길, 밭길, 가시밭 길을 헤치고 네가 점찍은 먼곳을 향해 달려라 하니(Honey).꼭 어제같은 10년 전의 일이다. 결혼을 앞둔 어깨가 떡 벌어진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리버리한 아기가 아니다.이항아(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08/06/2023
문학지평

몇 년 째 인사를 나누는 나무가 있다. 아픈 손가락인 셈이다. 산책을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여느 나무처럼 서 있었다. 특별히 눈이 가지 않았던 이유다. 심한 태풍이 다녀 간 다음 날, 홀로 뿌리를 다 드러내고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가슴이 철렁했다. 뿌리 몇 가닥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기는한데 살아남으려나 안타까워 매일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잎파리가 마르지 않고 있으니 일단 안심은 되었다. 나무가 그 상태로 살고 있는 모습에서 나를 본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에 맞았다. 털장갑에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꽁꽁 언 길 위를 조심조심 걸어 성당으로 향했었다. 마침 첫 눈까지 오는 해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희망을 가득 품곤 했던 추억을 몸이 기억한다. 호주 도착 후 제일 힘든 일이 생겼다. 너무 더워 해변에서 지내야 했던 첫 해에는 무엇이든 새롭게 느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반바지 차림의 산타할아버지를 내 아이들은 자연스레 쳐다보는데 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해 낯설기만 했다. 결국 십 년을 넘게 버티다 12월이 되면 한국 나들이하는 것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서서히 그렇게 겨울과 여름을 넘나들다가 이제서야 겨우 내 몸이 더운 성탄절에 낯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몸에 익었던 날씨, 언어, 문화를 뒤로 하고 사회초년생인양 새로 구축해가야하는 과정이 쉬울 수 있었겠는가. 누워 사는 나무가 그렇게 정상으로 회복되듯 나의 이민 생활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얼마 전 화창한 목요일, 시드니에서 열린 ‘설치 미술가 서도호’의 개인전을 다녀왔다. 작가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성북동 한옥을 실물 크기 그대로 옮겨 놓은 아래층 전시관에서는 몸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그 집 외벽 전체에 종이를 붙이고 일일이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을 떴다. 그리고 떼어 내어 완성했다는 설명이다. 속이 텅 비어있는 그 종이집을 직원 네 명이 사방에서 지킨다. 멀찍이 떨어져 놓여진 긴 의자에 앉아 넋 놓고 바라본다. 이 전시관을 나서면 코 앞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보인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옥에 빠져들어 마음은 이미 어린 시절 고향으로 와 있다. 디딤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동그란 문고리에 둘째 손가락을 넣어 잡아 당긴다. 열려진 방문 안에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보인다. 둘러 앉은 식구들 속에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함께다. 올망졸망 형제들이 조잘대며, 구운 김을 하얀 밥 위에 얹는 숟가락들이 분주하다. 그 때는 하루가 천 년 같아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나 막연해 했던 기억이다. 순식간에 어린 시절이 가 버릴 줄도 모르고. 가물가물 했던 원가족의 한 자리 모습을 또렷하게 보는 순간 잠깐이어도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집은 개인적 공간인 동시에 문화의 결정판’이라고 말하는 작가 서도호는 서울을 떠나 런던,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문화 차이를 작품에 녹여내려 했다. 그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어릴 적 살았던 혜화동 한옥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도 덩달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가 살고 있는 호주 주택에 한옥을 겹쳐 느껴 보았다.  나의 고향을 느끼게 해주려고 이 전시회 표를 선물해 준, 호주에서 자란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건물을 떠나려는데 아쉬움이 밀려온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 아름다운 한옥은 흔적도 없이 시드니를 떠나겠지. 마치 내 어린 시절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안타까움에 한 번 더 느껴보고파 전시회 마지막 날 다시 찾았다. 보고 또 보고, 기억 창고에 넣고 또 넣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 본다. 오늘 새벽 산책길엔 보름달이 동행한다. 여명에 집을 나섰으니 아직 달이 빛을 발한다.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며 보름달은 점점 옅은 빛으로 자리를 내어 준다. 달과 태양 아래 옆으로 당당히 누워있는 나무를 또 만난다. 몸통을 굳건히 땅에 뉘인 채 아랑곳없이 가지들은 하루가 다르게 하나씩 하늘을 향해 서기 시작했더니 계절이 바뀔 때면 꽃도 피워낸다. 뿌리를 공중에 드러내고도 해와 달의 도움만으로 제법 서 있는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어 자세히 보지않으면 다른 나무와 다름이 없어보인다. 서울 혜화동을 떠나 이 곳 시드니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있는 나를 이 나무에서 다시금 본다. 나의 뿌리를 못 느낄 때 호주에서의 삶이 공중에 떠 있는 줄 알았다. 사실 그렇게 뜬 채로 살아가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땅 속에 묻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죽는다. 큰 뿌리를 고향에 두고 온 듯한 나에게, 붙어 있는 몇 가닥 뿌리는 문학회였다. 한글로 글쓰기를 할 수 있어 그것이 나를 호주 땅에서 여느 나무처럼 바로 서게 지탱해주는 큰 힘임을 어찌 모르랴.차수희(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25/05/2023
문학지평

친구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급히 한국을 가야 한다는 전화를 받던 날이었다. 할머니라 불리우고 있는 노년의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충격에 가까운 시제의 혼란이 왔다. 급기야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셨어?”라는 예의 없는 경망스러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아주 오래전 인생이 채 여물기도 전에 부모와 사별한 나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라고 변명해 본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그녀가 돌아왔다. 말로는 위로와 애도를 전하면서도 애통한 마음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나보다는 몇배의 긴 세월을 아버지와 함께 이세상에 살았었던 그녀에게 부러움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와의 이별의 순간을 말해주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울고 있는 그녀를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셨다고. 눈빛이란 마음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고 수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눈물을 글썽이던 나의 눈물은 사십 여년 전에 아버지가 남겨준 사랑의 눈빛을 찾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큰언니로부터 한탄강유원지에 민박집을 빌려 놓았으니 모두 모이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미 출가한 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편안한 시간에 각자 가기로 하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그 즈음 아버지는 몇 년 전의 처참한 사업실패로 인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1년이 10년이라도 된 듯 새치머리는 백발이 되고 한겨울 벌판에 홀로선 나목처럼 힘겹고 쓸쓸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자식들이 모인다는 말에 봄기운에 물기가 오르듯 메말랐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서 큰 잉어를 몇 마리 잡아 자식들 보양식을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들떠서 장비를 챙겼다. 나는 제법 무거워진 배낭을 지고 투망과 낚싯대를 들은 아버지와 함께 연천행 버스를 탔다. 어딘 가에 내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샛강변의 버드나무 아래였다. 등짐을 내려 놓기가 무섭게 수정처럼 반짝이는 물보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투망을 던지는 아버지 곁에서 투망도 던져 보기도 하고 망에 걸려있는 작은 물고기들도 주워담으며 즐겁고 특별한 아버지와 둘만의 피서를 즐겼다. 그림자들이 길어져 갈 때쯤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샛강을 떠나 임진강으로 향했다. 우거진 숲길을 헤치며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한탄강유원지가 멀리 보이고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 절벽 위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청히 서 있는 나와는 달리 아버지의 손길은 분주했다. 해지기 전에 밥을 먹어야 한다며 샛강에서 잡아온 물고기 중에 모래무지만 골라서 손질한 후 밀가루를 묻혀 끓는 물에 넣고 양념을 한 뒤 남은 밀가루를 수제비로 떠 넣었다. 아버지가 요리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지만 익숙한 손놀림에 더욱 놀랐다. 그리고 맛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산등성이에 길게 누워있던 노을이 잠들며 사라지고 유원지의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낚싯대는 부여잡고 있었지 거친 물살에 잉어는 못 잡고 미끼만 사라졌다. 실망과 지루함을 멀리 보이는 불빛아래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달래고 있었다. 어느덧 그 불빛들도 하나 둘 꺼져가기 시작했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듯 마지막 불빛도 사라졌다. 이 세상에 아버지와 나만이 깨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아버지는 조그만 등불을 켜고 내 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밤새 낚시를 하다가 앉아서 잠깐 눈을 붙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왔는데 매트까지 준비한 아버지가 바람을 넣고 있었다. 그리고 매트 가장자리에 고랑을 파고 담배가루를 뿌렸다. 뱀을 방지하는 방법이라는 말에 나는 복병을 만난 듯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지금까지 나의 적은 졸림과 지루함 뿐이었는데 뱀이라니. 나는 잽싸게 담배가루의 경계선만으로 들어가 누웠다. 졸음은 멀리 달아나고 나의 눈동자는 사방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홑이불을 여며주며 걱정 말고 자라는 아버지 말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실눈을 뜨고 보니 곁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보였다. 물기어린 눈동자는 슬프게 반짝였다. 팔남매 늦둥이로 태어난 나와 동생을 덤이라고 부르던 아버지. 그 덤들을 오래 지켜주지 못할 것 같은 예감으로 슬픈 듯, 말년의 실패로 고생시켜서 미안한 듯한 눈빛. 하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보이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아래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심신이 노쇠한 아버지를 보호하겠다고 함께 떠났지만 오히려 잊히지 않는 따스한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의 추억이 됐다. 잉어가 한 마리도 없는 텅 빈 바구니로 가족들과 합류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피서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팔남매 중 그 누구도 안아본 자식이 없었다는 무뚝뚝한 아버지. 벽을 문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뚫어 놓고야 만다는 고집이 센 아버지. 사랑한다는 말은 영화속에서나 하는 대사일 뿐이라며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옛날 아버지. 하지만 그날 밤낚시를 하며 보았던 아버지의 사랑의 눈빛은 말로 하지 않았던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내 가슴에 심어주었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사랑의 시선으로 자식들을 바라보며 살았으리라. 그 후 두세번의 여름이 지난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또 그 다음해에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 대신 오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내 가슴에 남은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파산한 아버지로부터 물질적 유산은 없었지만 그 사랑의 눈빛은 따스한 이불처럼 때로는 소낙비를 막아주는 우산이 되어 남아있다. 먼 훗날 나의 자식들에게 나의 사랑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노을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녁이다. 이영덕(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11/05/2023
문학지평

주 5일 아침마다 교토의 한 작은 식당에 어김없이 배달되는 신선한 도미 일곱 마리. M 셰프가 지난 35년간 손질한 도미만 14만 마리쯤 된다고 한다. 그의 손과 하나된 칼이 칼질을 기억한다. 회를 뜰 때 미묘하게 들어 올리는 칼끝은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따라 악기를 연주하 듯 리듬감이 정교하여 보는 사람의 눈이 끌려 들어간다. 죽순을 다루는 그의 솜씨 또한 예술이다. 아침에 수확하여 배달된 10개의 죽순덩어리를 큰 들통 두개에 번갈아 옮겨가며 끓여서 애벌로 조리한 후에 손님들 앞에서 빠르게 마무리하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를 내놓는다. 그의 손을 거친 다양한 요리는 한결같이 카운터에 앉은 10명의 고객들을 감동케 한다. 보는 순간 침샘이 자극되어 입맛을 다시게 된다. 입에 넣어 허물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다. 그냥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어진다. 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쌓아온 과정에는 유명한 셰프였던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었다. 도미를 손질하고 회를 뜨는 일은 보통 이삼십년 경험을 쌓은 고참이 한다는데 아버지는 3대째를 이어갈 새내기 아들에게 그 일을 시키며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기까지는 쉬운 길이 없다. 나의 글 스승님은 반백이 훌쩍 넘어 수필문학에 입문한 나를 두고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하신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늦은 나이였다. 많이 읽고 많이 사색하고 많이 써야하는데 이제는 그 속도마저 예전 같지 않으니 아쉬움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실 삼십대에 호주에 이민와서는 나 자신보다 가정과 자녀교육이 우선이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부부가 선택한 이민이었기에 나는 언제나 아이들 곁에서 대기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면 하던 일을 내던지고 달려갔으니 누구누구 엄마로 산 세월은 두 아이가 적어도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드디어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갖게 되자 기껏 한다는 게 취직이었으니 틈틈이 독서는 했으나 글을 쓰게 되기까지 또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스승님의 문예창작교실 수강 후에 문학을 하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제일 잘한 일 중에 하나로서 뽑는데 변함이 없다. 수십년 동안 타국살이를 해오며 종국엔 호주 땅에 묻히게 될지라도 모국어로 글 쓰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 있고 가슴 벅찬 일인가.      보통 회갑에 이른 주부들이라면 가정사에서 놓여 나게 된다. 수명도 늘어나 팔구십까지 생존을 가정하더라도 앞으로 이삼십년의 기간은 마지막 보너스처럼 오롯이 나만을 위하여 사용 할 수 있는 황금기를 낳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하여 이 기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글쓰기 모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내게는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언감생심 저 M셰프처럼 장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장인정신은 배우고 싶다. 그는 자신이 20세기 피아노의 거장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들을 때마다 감동하는 것처럼 요리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연구를 거듭해 왔다는데 이것이 장인정신이 아닐까. 작품 한편을 써내기 위한 작업은 만만치가 않다. 일상에서 나의 관심은 글감을 찾아내기에 촉각을 세우고 컴퓨터 앞에서 한두 줄 써놓고 어휘고르기에, 서두 쓰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때가 많다. 비록 어설픈 작품일 지라도 얼기설기 짜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형상화가 된 글로 완성되었을 때 느껴지는 기쁨은 그 어디에도 견줄 데가 없다. 행복의 비밀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문우들과 월례회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들은 클래식 음악을 감상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회원이 매달 곡을 선정하여 정성 들여 곡의 배경과 해설을 곁들인 프린트까지 나눠 주고 있다. 정기모임 시작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음악을 듣는다. 18세기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와 개인의 삶이 음악에 묻어나오는 것을 들으며 글의 소재를 생각하게도 된다. 작년에 보스턴에서 열린 밴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18세 최연소로 참가하여 금상을 수상한 한국의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리스트의 초절기교를 연주하기 위하여 단테의 신곡을 열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문학과 음악, 미술, 요리까지 모든 예술은 연결되어 있음에 새삼스럽게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아직 나의 갈 길은 마치 대학시절 지리산 노고단을 향해 헉헉대며 등반했던 그 힘들고 벅찼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내가 선택한 이 길을 중도에 좌절하지 않고 봉우리 끝까지 등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해오며 동기간 같이 가까운 사이가 된 문우들과 서로 격려하며 당근과 채찍을 나누고 있지 않은가. 한번 트인 물길이 마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희망을 걸어 본다. 권영규/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

20/04/2023
문학지평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낙엽이 비처럼 눈송이처럼 고요히 춤을 추는 곳. 겨울 안개가 땅에 깔리면서 벽을 타고 커다란 목화솜처럼 덩어리로 뭉치는 그곳. 석호는 삶과 죽음의 냄새를 동시에 풍겼다. 그리고 약속과 부패의 냄새가 유기적으로 납작하게 얽혀 있었다.”라는 소설 속의 습지 묘사에 흠뻑 빠져 나는 한동안 소설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사연인즉 이러했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남편이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말없이 내밀었다. 그의 배려로 나는 주인공 카야를 따라 환상이면서도 실체일 것만 같은 노스캐롤라이나 습지의 원시성으로 삽시간에 빠져들었다. 거의 인간이 살 수 없을 정도의 야성을 간직한 원시 습지는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설렘과 동시에 아픈 가슴앓이를 시켰다.그때 호주답지 않은 기상 이변으로 수십 일간 내리는 우울한 빗소리는 소설 속의 습지를 떠도는 물소리, 바람소리, 갈매기 울음소리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환상교향곡을 연주했다.『타임스』베스트셀러이며 아마존 판매 순위 1위인 이 책이 ‘미국의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는 게 이해가 되고도 남을 만했다.『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벌이는 서정적인 로맨스이면서도 아찔한 미스터리로 가득 찬 생생한 습지 탐구생활 보고서이다. 또한 가슴 아픈 야생 소녀 카야의 고립이 두 남자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인간의 야만적인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흥미진진한 살인 미스터리이기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답고도 야생미 넘치는 기이한 풍광 속에 홀로 살아가는 야생소녀 카야의 문제는 고립이었다. 작가는 그 고립이 카야에게, 아니 인간에게 과연 필요한 것일까를 반문하고 있다. 카야는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녀는 인간들에게 버림받고 사귀던 남자에게서는 사랑의 배반을 당한다.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일어서는 그녀는 점점 강인함을 배워 더 이상 외롭지 않지만 작가는 야생 소녀 카야의 홀로서기를 찬양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외로움이라는 화두를 철저히 배격한다.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과 거의 평생을 지나온 작가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외로워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작가는 나아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급을 질타하는 차별과 편견이 가득한 사회를 비난한다. 카야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읽는다.고립된 채 습지에서 살아가는 소녀 카야는 두 소년을 통해 여자로서의 성숙과 사랑을 배워 간다. 좋아하는 소년에게 강렬한 이끌림과 밀어냄을 동시에 느끼며 첫사랑에 빠져드는 카야의 점진적인 감성 묘사는 가히 예술적이다. 여성이 아니고서는, 아니 델리아 오언스가 아니면 절대 묘사할 수 없는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감정의 변화를 먹이를 찾는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집어낸다. 카야는 성장과 번민을 거듭하며 서서히 소녀의 탈을 벗는다. 그러나 카야와 관계했던 한 소년(거의 청년이 되어 가는 나이의)이 살해되며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던 중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았던 카야는 무죄로 풀려나고 그녀의 인생이 순항하는 줄 알게 된 순간, 거듭되는 반전의 쾌감이 독자를 극도로 사로잡는다. 흠을 잡자면 마지막 법정 공방이 서둘러 넘어가는 느낌이 들지만 많은 부분 습지를 살리려는 작가의 노력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이다.일흔이 넘어 첫 소설을 쓴 델리아 오언스는 여성 동물학자로 『네이처』, 사이언스』등 세계적인 저널에 논문을 수차례 기고했으며, 아프리카에서 23년 동안 야수를 길들이며 살아온 야생마 같은 여성이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인지 생태학자로서 지금껏 봐 온 습지와 자연 그대로의 야생을 소설에 가득 담아 원시성과 서정성이 흘러넘친다. 소설의 제일 중요한 배경이 되는 습지는 어쩌면 배경이 아니라 제일 상징적인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습지를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생명력의 상징으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출산시켰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녀의 인생 자서전이자 꿈이 혼합되어 이루어 낸 습지라는 인생 무대이자 광장이다. 놀랍게도 그 광장은 외롭고도 사랑스런 자연 속 이야기로, 검은 진흙처럼 끈질긴 생명 이야기로 가득하다. 근간 들어 이렇게 아름답고 아찔한 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에 마지막 부분을 아껴 두고 읽고 싶었다. 맛있는 사탕을 숨겨 둔 아이처럼 한참 후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그 순간 주인공 카야가 조각배로 누비던 잿빛 광활한 습지가 파노라마처럼 어른거린다. 그 광활한 야생을 누비며 가재와 울고 웃고 노래하던 나는 이제 내 자리로 돌아올 때이다. 그러나 나도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 카야가 사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비밀스런 습지가 이미 내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다. 책을 덮을 때쯤 자연이 인간이 세상이 모두 달라 보인다. 그것들이 내 앞에서 빛을 내며 눈을 깜박이고 있다. 그 사이로 습지의 하늘이 눈을 뜬다. 낮이 따스해지고 하늘이 윤을 낸 듯 반짝거린다. 나는 시를 읊듯 꿈을 꾼다. 그런데 이 소설이 기교면에서 현대소설의 기법이나 문장의 세련미와는 무관한 고전적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작가가 동물학과 생태학을 공부해 아프리카에서 평생 얻은 산 체험으로 인간을 애정의 눈으로 볼 수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소녀 카야의 성장소설이자 살인과 법정 스릴러가 어우러진 로맨스 소설이다. 여태 카야의 깊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그의 온기를, 그 남자와 그 바다 냄새를, 함께 있는 그 순간을 깊이 들이마신다. 어둠이 달콤한 향내를 내며 습지에 드리운다. 그는 그녀의 첫사랑 그 이상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시간의 한 갈피였고 스크랩북에 붙인 사진이었다. 카야는 그렇게 남자를 기억하며 습지의 조각배 위에서 편안히 마지막 눈을 감는다. 자연이었던 그녀는 자연의 품으로 편안하게 돌아간다. 나 언젠가는 ‘가재가 노래하는 그곳’에 가 보고 싶다. 거기서 습지라는 별명을 얻은 ‘마시 걸(Marsh Girl)’ 카야를 찾아 마냥 모래톱을 달려 볼 거다. 이 겨울 마른 풀들은 패잔병처럼 고개를 숙인 채 물을 바라보고, 혹독하게 몰아치는 소란스러운 바람은 쇠락한 거친 줄기를 흔들고 지나가겠지. 갈색 풀들의 왁자지껄한 함성이 마왕의 습격 같아 두려움에 나는 갑자기 숨이 차오른다.  노래하듯 규칙적으로 쓸려 오고 밀려가는 물살에 조개가 깎이고 짜개져 고운 모래가 되고, 그 모래는 카야의 몸을 애무하는 이중주를 연주한다. 책장을 덮는 순간 광채로 하얗게 빛나는 카야의 희미하지만 밝은 모습에 적이 안도한다. 여전히 습지는 고독하고 위대한데..* 델리아 오언스, 201 9, 『가재가 노래하는 곳』, 살림.작가 소개 : 이마리 이마리는 차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작가로 제 3회 한우리 문학상 대상으로 출간한 장편동화『버니입 호주 원정대』와『코나의 여름』『구다이 코돌이』등이 ‘세종 우수 도서’로 선정됐다. 장편 역사소설로『소년 독립군과 한글학교 』는 ‘아침 독서 도서’로 선정, 『동학 소년과 녹두꽃』『대장간 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에 이어 한국전쟁 시리즈 출간을 앞두고 있다. 동화『빨강양말 패셔니스타』를 비롯 최근 출간한『캥거루 소녀』는 2022년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됐다. 공동 수필집『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을 출간했으며 센트럴 코스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연재를 마치며..  한호일보에 7회 연재된 수필집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은 시드니 작가들의 다른 저서와 함께  K Mall 에 비치되어있습니다. 그동안 할머니들의 글을 사랑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필자 주(註)

20/04/2023
문학지평

남편이 세계보건기구(WHO) 남태평양 지역본부의 14개국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어 그 지역본부가 있는 피지의 수도 수바에 도착했다. 피지는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들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미국, 영국, 중국, 일본,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한국을 비롯한 10여 개국의 대사관과 많은 유엔기구 지역본부도 상주하고 있었다. 작은 섬나라 바누아투에서 살다 온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얼마 후 통가의 왕인 시아오시 투포우 5세의 생일파티에 초청받아 영국 연방국 통가에 가게 되었다. 왕은 언젠가 『타임스』 표지에 사진이 실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체구가 거대한 분이었다. 캡틴 쿡이 남태평양에 도착해서 점령한 다른 나라는 모두 식민지화했으나 유일하게 왕정을 인정해 준 나라가 통가였다. 그 이유로는 그들의 통 큰 대접과 친절한 접대 문화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통가인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하와이 원주민과 같이 폴리네시아인이었다. 피부가 옅은 검은색이었고 여자와 남자 모두 거대한 몸을 가졌다. 왕의 생신을 축하하듯이 그날은 약간의 바람을 동반한 화창하고 쾌적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초청받은 모든 사람이 들뜬 분위기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더욱 축하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손님 대부분이 피지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의 대사 부부들과 유엔 대표들 그리고 왕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다른 작은 섬나라 대표들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초대받은 남태평양 섬나라 왕의 생일 만찬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카바 여흥이 끝나고 통가의 전통 복장인 타파(뽕나무 껍질을 두드려 펴서 만든 천)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통가 전통 무늬와 나무 열매, 조개껍데기로 치장한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의 춤이 흥을 돋우며 한바탕 즐거운 축하연이 벌어졌다. 식민지풍(Colonial Style)의 하얀 목조 건물로 지어진 왕궁 앞 정원에는 디귿 자로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 자리한 음식 테이블 79 에는 온갖 남태평양 음식이 다양하게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뒤로 통가의 전통복장을 입은 덩치 큰 여인들이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며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게 보였다. 음식이 많았지만 그중 원주민이 주식으로 먹는 타로, 얌, 카사바가 먹음직스러웠다. 이곳 명물인 박쥐요리, 거북알 요리, 거북 살코기 요리는 내가 처음 보는 아주 진귀한 음식이었다. 코코넛 밀크를 넣고 바나나 잎으로 싸서 돌 속에서 몇 시간 동안 구운 통 생선구이와 엄청나게 큰 왕새우 요리, 랍스타 요리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였다. 그리고 흰살생선회를 잘게 썰어 토마토와 양파, 레몬즙, 코코넛 밀크를 넣은 샐러드는 섬나라 별미로 아주 특별한 맛이었다. 섬의 특산 시금치는 우리 시금치와는 달리 코코넛 밀크를 버무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맛이 났다. 각종 열대 과일로 차려진 잔칫상도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상을 장식한 열대 꽃의 색상이 무척이나 화려했다. 정원 한편에는 장대를 엮어서 만든 임시 바비큐 설비가 있었다. 통가 남자들이 어린 통돼지 구이를 손으로 돌리면서 춤을 추듯 특유한 제스처로 껍질을 툭툭 치며 굽고 있었다. 가볍고 경쾌하게 바삭거리는 소리가 톡톡 울리면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입맛을 돋우었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속살의 궁합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매력적인 맛이라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그때 미국 대사 부인이 놀란 얼굴로 테이블에 올라온 거북이 요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바다거북을 잡아 요리로 내놓을 수가 있어요?” 그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거북요리를 거부하고 돌아가니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나라의 왕이지만 최소한 외교단으로서의 예의는 지켜야 했기에 모두 숨죽이며 거북요리를 담아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어색한 시간도 잠시, 의외로 많은 사람이 거북요리를 즐기며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거북이는 수백 년을 사는 물고기라서 요리로 오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살코기 맛은 닭고기와 생선 맛의 중간쯤으로 부드럽고 연했으며, 거북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한 맛이 나 의외의 놀라움이었다. 영겁의 나이에도 두꺼운 껍질 속에 감추어진 속살과 알이 어찌도 그리 맛이 있었는지…. 거북요리는 운 좋게 딱 한 번 더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남태평양 파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마도 해양 어류 보존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통가 왕궁 정원 근처의 나무숲은 박쥐들의 서식처였다. 늘 박쥐 소리로 시끄러웠고 더구나 분비물이 바닥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근처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심했다. 꽃만 먹고 사는 박쥐라지만 아무래도 선입견 때문인지 그런대로 먹을 수는 있었지만 맛을 즐길 수 없었다. “왕궁 근처에 서식하는 박쥐는 왕의 소유이고 왕의 허락 없이 함부로 잡으면 벌을 받는대요.” 식사 중에 프랑스 대사 부인이 살짝 귀띔해 주어 그날의 박쥐요리가 귀한 손님에게 특별히 대접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잔치는 영국 왕실 같은 격식도 화려함도 없었지만, 섬나라 특유의 여유로움, 따스하고 친절한 서비스와 진귀한 먹을거리로 만찬은 화기애애하고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나는 자연스럽고 때 묻지 않은 남태평양 사람들의 순수한 환대에 편안한 마음으로 그날의 만찬을 한껏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과식을 한 탓인지 호텔에 돌아 와서 밤새껏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생전 처음 먹어보는 진귀한 요리들로 과식을 했으니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조적인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며칠을 묵는 동안 통가인들의 푸짐하고 따뜻한 대접을 듬뿍 받고 돌아오니, 어린 돼지의 바삭한 껍질과 거북요리는 다시 먹고 싶은 나의 소울 푸드로 남아 있다. 당시 외롭고 힘든 디아스포라의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 나의 향수를 달래 주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성대하게 잔치가 끝난 후 나에게 충격적인 사실은 섬나라 사람들과 우리의 생활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빈부 격차와는 별개로 섬사람들의 여유로움은 우리 생활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큰 잔치에서도 그들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구분하였는데, 온 부락 남자들이 잔치에 참여하여 협력하는 모습이 내겐 무척 낯설었다. 돌 오븐을 만들어 생선을 굽고 장대 구이 바비큐 틀을 만들어 무거운 고기를 통째로 굽는 일이 온전히 남자들의 몫으로 이해되었다. 여자들은 둘러앉아 담소하며 샐러드 정도를 준비하였는데, 그 모습이 명절 때마다 고된 가사 노동을 하는 한국 여자들의 모습과 겹쳐 보여 자꾸 비교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곳의 기후가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여유 있고 낙천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욕심내지 않고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으며 베짱이처럼 노래하고 춤추던 광경이 지금도 가끔 떠올라 내게 잔잔한 미소를 피어나게 한다. 지금 이곳은 그곳과 전혀 다른 환경이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에 따라 느긋한 여유를 즐기며 사는 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자리 한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그곳을 그리워한다. [작가 소개] 김수영피지에서 15년을 지내고 호주로 이민온 지 22년 된 평범한 주부이다. 엄청난 도약으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글을 써 본 적이 없어 힘든 일이었지만 글을 쓴 후 맛본 성취감은 카타르시스가 된다”고 밝혔다.

13/04/2023
문학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