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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월요일 아침. 이번 주 칼럼의 화두를 잡기 위해 인터넷을 켰다. 쇼킹한 뉴스가 떴다. 한국의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의 자살 소식이다. 정말 놀랐다. 내가 좋아하던 정치인이셨다. 혼탁한 정치판에 오래 몸 담아 왔으면서도 진정성 있는 자기 성찰과, 초심대로 살지 못함에 대한 공개적 참회를 할 줄 아는 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현행법을 어기게 되었고, 실수를 감추다가 거짓말을 하게 되었으며, 그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남겨 놓은 유서를 읽었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해 주십시오.” 아쉽다. 어리석었던 선택을, 죽음이라는 또 다른 선택으로 종결지어 버렸으니 정말 아쉽다. 이제는 그 분을 추모하는 것 외에 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음 인용하는 기사에 내 마음을 얹는다. “노 의원이 잘못을 깨끗하게 시인하고 사과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합당한 처벌을 받은 뒤에 그 법의 현실적 개선에 앞장설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한때의 비난은 있었겠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와 한국 정치에 더 큰 기여를 하는 길은 아니었을까?” 2. 연약함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 계실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추기경님은 여러 나라 말을 다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느 말을 가장 잘하십니까?" 추기경은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말? 내가 가장 잘하는 말은 거짓말이지." 물론 거짓말을 장려함이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어찌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어찌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선 자리를 알아야 한다. 너무 높은 곳에 자신을 올려 놓으면 바람 잘 날이 없고, 그러다가 떨어질 뿐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낮은 곳에 내려가 하늘의 자비를 구할 뿐이다. 3. 회복 요새 한국의 예능프로 ‘도시 어부’를 재미있게 본다. 왕년의 최고 인기배우 이덕화씨가 대표 선수로 나온다. 이경규씨나 마닷에 비해서는 물고기를 많이 잡지 못하지만 오랫동안 낚시를 해 왔으니 그가 대장이다. 이 프로가 많이 뜨니까 또 다른 예능 프로에도 초청되어 인생 사부로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최고로 잘 나가던 전성기 시절 25살 때,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났다. 3년 동안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매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는데, 그를 구해 준 여성이 있었다. 한 동네 친구일 뿐,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다. 생사도 미래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녀는 병실에서 먹고 자며 간호했고 결국 살려냈다. 둘은 결혼했고 평생의 동반자가 된 그녀에게 이제는 66세가 된 이덕화씨가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까지 산 게 다 사랑 덕이다. 사랑은 천국의 일부분이다. 3년 동안 병상에 있는 나를 하늘에서 아내가 내려와 살렸다.” 죽다 살아난 인생 사부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래서인지 요새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기 절정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4. 미완성 교향곡 요새 반복해서 계속 듣고 있다. 슈베르트가 26살에 쓰다가 그냥 방기해 버린 교향곡이다. 그럼에도 세계 3대 교향곡 중 하나다. 수십 번 반복해서 들어도 전혀 흠 잡을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좋아진다. 그래서 역설을 발견한다. 미완성의 인생도 버티다 보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고. 그러니 오늘의 결론이다.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는 왕이나, 물이 나올 때까지 우물을 파는 인부처럼,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래야 회복할 기회가 온다. 그러다 보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다. 김성주 목사(새빛장로교회 담임 목사) holypillar@gmail.com

  26/07/2018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지난 수요일, 미루고 미루던 뒷마당 청소를 시작했다. 1년 이상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던 야외 의자들과 테이블을 소독약과 비누를 동원하여 씻고, 가을의 깨끗한 햇볕 아래 뉘어 놓았다. 잔디를 깎고 잡초를 뽑고, 제초제를 뿌렸다. 그렇게 4시간이 지나갔다. 그 동안 난 전자책으로 나온 소설도 듣고 있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미루던 청소를 하게 된 이유도 이 책 때문이고, 긴 시간 동안 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책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가던 한 남자가 눈이 멀어 백색 맹인이 된다. 안과의사가 진찰해 봤지만,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냥 갑자기 원인도 모르게 장님이 되었다. 문제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성이었다. 결국 모든 시민이 다 장님이 된다. 도시는 무법천지가 되고, 인분으로 가득 찬 쓰레기장이 되 버렸다. 인간이 세웠던 위대한 문명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진찰하던 안과 의사와 그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이다. 안과 의사의 아내만은 눈이 멀지 않았다. 눈이 먼 남편이 수용소로 옮겨질 때 함께 따라가기 위해 눈이 멀었다고 속였다. 이 부인이 모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와 인도자가 된다. 한 자루 총으로 음식물을 장악하고 여자들을 노리개 삼는 악당들, 수용소에 갇힌 장님들을 향해 마구 발포하던 군인들, 썩은 음식도 마다 않고 먹는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오물 덮인 땅을 더듬으며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난 이 소설을 보면서 그 동안 돌보지 않았던 내 뒷마당이 마음에 걸렸다. 그대로 놔뒀다 가는 ‘눈먼 자의 정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소독약까지 동원하여 깨끗이 닦았던 것이다. 그렇게 일하며 책을 듣는 중에 ‘눈먼 자들의 도시’가 끝났다. 잠시 밀어 놨던 까뮈의 ‘페스트’를 계속 들었고, 그 책도 끝냈다. 이 두 책들이 최근의 내 독서 리스트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선배들의 통찰력을 빌리고 싶었다. 알다시피 이번 금요일(5월 1일)이면 NSW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이 부분 완화된다. 록다운에 지쳐가고 있었던 시민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국가적으로도 호주와 뉴질랜드는 확진자가 현저하게 줄었고, 베트남은 종식 선언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현 위기 상황을 잘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 속으로 ‘페스트’ 끝부분에 등장하는 섬뜩한 경고가 비수처럼 날라 들었다. 페스트가 종식되고 사람들이 다시 거리와 술집으로 몰려 들 때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다시 깨우고, 사람들을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2. 소설 ‘페스트’는 픽션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논픽션이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다시 회복되기까지 300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중세를 지탱해오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르네상스, 종교혁명, 계몽주의, 인본주의가 등장하며 인류문명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도 그에 버금간다고 봐야 한다. 지금처럼 전 세계 국경을 닫아 걸게 하고, 항공사들을 파산케 하며, 수조 억달러를 단시간에 풀어야 했던 때가 있었던가? 이런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도 건지는 교훈이 없다면 그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와 ‘페스트’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눈먼 자들은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오랑’시에 닥쳤던 페스트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불행은 반드시 또 찾아온다. ‘페스트’같은 전염병은 물론,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픽션은 논픽션이 된다. 그 불행한 현실이 너무 잔혹하여 최후의 보루인 신을 찾겠지만, 그 신께서는 이전의 경고를 무시했던 인간들의 간구를 외면하실 수도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끝 부분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안과 의사의 아내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전에 갔었던 지하 3층의 슈퍼마켓 식품 창고를 찾는다. 칠흑보다 더 어두운 그곳은 이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다투어 들어가려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막아져서 거대한 인간 무덤이 돼 버렸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비틀거리던 그녀는 잠시 쉬기 위해 길 건너편 성당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끔찍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남자는 하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여자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칼이 꽂혀 있었다. 성상들의 눈은 하얀 천으로 묶여져 있었고, 성화 속 인물들의 눈에는 하얀 물감이 두텁게 칠해져 있었다. 성당을 숙소 삼아 머물던 사람들은, 여인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눈이 멀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신의 저주를 피해서. 3.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은 끝날 것이지만, 이 불행을 교훈삼아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교육 시스템과 일터 현장, 그리고 경제 인프라는 이미 시작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시급한 개혁의 대상은 교회다. 세상을 책임지는 것이 교회라고 주장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번 사태를 통해서 교회 건물은 쓸모 없어졌고, 대규모 집회의 자랑은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위기는 기회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면, 재앙에 떠밀리어서라도 변해야 한다.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고기는 일본 근해에서 12월에 잡히는 참치다. 참치는 알에서 부화한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헤엄 친다. 참치에게 멈춤은 곧 죽음이다. 인간 역시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멈출 때 죽은 목숨이 된다. 이번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는 궤멸했다. 그렇다고 진보가 영원하지는 않다. 그들 역시 보수가 된다.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고, 결국은 궤멸된다.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것, 즉 근본에로의 치달음이다. 그 근본에 도달하면 그 때 비로서 자유로워진다. 모든 부조리와 록다운에서 해방된다. 이제 묻는다. 당신은 날마다 변화하고 있는가? 변화하지 않는 ‘근원’을 향해 날마다 변화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 풍진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 남겠는가? 김성주목사 (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30/04/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한 달 전 이 칼럼의 제목은 ‘기생충과 곰팡이’였다.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다. 기생충을 밀어내고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삼켜버릴 줄은. 사태가 점점 심각해 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 상황을 눈과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지난 3월 19일 목요일이었다. 시내로 나가 오페라하우스가 건너편에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보통 때와는 달리 세자리나 비어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호텔 로비 커피숍으로 들어가 롱블랙을 시켰다. 신문을 하나 집어 들고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천정까지 닿아 있는 오른쪽 유리 벽으로 거대한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뭘 기다리는지, 아니면 다 내렸는지 잘 몰랐다. 거의 두 시간을 채우고 나왔다. 이미 내 앞에 있었던 손님들은 다 나갔고 나 홀로였다. 나를 위해 4명의 종업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커피값으로 6불을 결제했다. 그 돈으로 난 이 특급호텔을 잠시 전세 낸 셈이다. 나오면서 호텔 내 식당을 보니 손님이 하나도 없다. 이미 1시가 넘어가는데 하나도 없다니! 비상사태가 맞기는 했다. 다시 널널한 길로 나가 차를 돌려 오페라하우스 반대편 쪽으로 갔다. 시드니의 온 항구가 다 보이는데, ‘맨리’쪽으로 거대한 크루즈 배 두 대가 더 대기하고 있었다. ‘바랑가루’쪽에서도 한 대가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왔는데, 그렇다면 4대의 배가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점점 이상해져 가는 시티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2. 다음 날 뉴스가 터졌다. 그 배들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렸고, 그중 코로나바이러스로 숨진 사람이 나왔고, 온 지역으로 흩어진 탑승객들이 코로나바이러스 폭탄이 될 수도 있다는 뉴스였다. 그러면서 드디어 교회 문도 닫아야 한다는 정부 조치가 발표되었다. 얼마 전에 500명 이상은 못 모인다고 했고, 바로 100명으로 떨어졌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금지명령이다. 확산 변곡점에 와 있는 호주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국경을 걸어 잠갔다. 중국 우한에 이어,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이 감염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점령하는 것일까? 이 시대의 문명은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일까?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킹덤’의 넷플릭스 개봉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좀비들이 세상 권력을 거머쥐는 드라마, 이 드라마가 이 시대의 묵시록인가? 좀비처럼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또한 가해자다. 생각해보라. 백 년 전만 해도 우한 바이러스는 우한에서 끝나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생겼고, 하루면 못 가는 곳이 없다. 당신도 비행기를 한 번이라도 타보지 않았던가? 그때 ‘참 신기하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 않았던가? 그런 빠른 장소이동과 활발한 경제/취미 활동을 통해 나 자신도 모르게 전염병을 옮기는 가해자가 된다. 2017년 통계에 의하면 스트라스필드 지역의 식당을 비롯한 접객 업소의 종사자들의 숫자는 3,200이다. 본다이 지역보다 100명이 더 많다. 이분들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며 악수를 거부하고 있다. 3. 이런 상황을 통과하며 난 스스로에게 말한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야 해, 아직 종말이 아니야, 금방 끝나. 5개월 전에는 산불 때문에 그렇게 죽을 것 같았는데 다 끝났잖아. 이번에도 금방 끝나. 아직 종말은 아니야.” 정말 그렇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백두산 화산이 터진 것도 아니다. 전쟁도 아니고, 산불과 겹치지도 않았다. 전기는 여전히 잘 들어오고, 수돗물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있다. 쓰레기 수거차는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오고, 인터넷도 잘 터지고, 더 빠른 NBN이 집 앞에까지 들어와 있다. 공기의 질은 더욱 좋아졌고, 하늘이 매우 푸르며, 정부에 돈이 있어서 실업자들과 사업체들을 적어도 1년은 도울 수 있다. 여느 나라와는 달리 민주국가의 체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테이크어웨이 커피와 피자를 사 먹을 수 있다. 호주의 농산물 생산량은 인구의 3배를 충분히 먹일 수 있고, 조금만 나가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운동할 수 있는 공원과 해변도 많다. 여전히 해가 뜨고 지며, 달도 뜨고 지고 있는데, 뭔 세상이 망해간다고 그 난리인가? 4. 물론 그동안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적어도 2백만 명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일부 사람은 죽는다.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다 죽는다. 독감과 교통사고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죽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침대 위에서 죽는다. 전쟁이 터지고, 괴물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면 무려 2천만 명이 한 번에 죽기도 한다. 그게 인간의 운명이며, 삶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마치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6개월이면 끝날 것이고, 그 전에도 끝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배우는 것이 없다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다. 내가 배우는 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당신은 어떤가? 뭘 배우려는가? 김성주목사 (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26/03/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김성주 목사(새빛장로교회) 1. 코비드-19가 거세게 확산 중이다. 2차 유행이 멜번과 시드니를 뒤 흔들고 있다. 지난 연말 산불이 온 사방을 태우고 있을 때 많이 어려웠다. 세상 끝이 오는 것 같았다. 그 보다 더 ‘쎈 놈’이 올 줄을 누가 알았던가? 유람선 루비 프린세스가 시드니항에 들어오면서 비상이 걸린 3월 말, 난 컬럼을 쓰면서 이런 제목을 붙였었다. “코로나바이러스, 곧 끝납니다.” 에볼라나 메르스처럼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4개월 동안 기승을 부리던 산불의 위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팬데믹, 즉 전세계적 위기다. 호주를 강타한 지 이미 5개월이 넘어간다. 이번 주 다시 NSW 산불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는 산불과 코비드의 협공을 받으며 남은 2020년을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지난 달 칼럼에서는 단테의 ‘인페르노(지옥)’편을 인용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렇게 올해는 우리네 인생에서 흑역사로 남는다. 2.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코비드 팬데믹에 겹쳐,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이 100년만의 홍수를 경험하고,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130년만의 살인 폭염이 찾아와도, 세상은 그리 쉽사리 망하지 않는다. 지구 표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땅과 하늘은 여전히 견고하다. 요새 그 땅의 위대함을 새삼 발견하고 있다. 집 밖 외출이 제한되니 집 안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내는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티로폼 박스를 모아왔다. 15리터씩 파는 고가의 흙을 사다가 채우고 야채 씨를 심었다. 40종이 넘는다. 그렇게 나는 농부의 남편이 되었다. 정말 흙(땅)은 위대하다. 흙에는 규소 28%를 비롯해서 무수한 광물들이 섞여 있다. 그 사이를 함량 47%의 산소가 헤집고 돌아다니며 영양을 섞어 줄 때, 흙에 품겨진 씨앗은 싹을 틔우고 푸르게 자란다. 신선한 산소를 공기 중에 뿜어주고, 먹을 것을 내주며,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땅을 마구 파헤쳐 거대 도시를 만들었다. 100층짜리 철골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올리며, 마당을 돌로 덮어 버렸다. 당연히 땅은 숨 쉬지 못하고, 박쥐는 갈 곳을 잃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는 경고한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고. 원래 흙에서 왔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인생인데, 돈과 야욕으로 지어진 도시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라고. 3. 시사 주간지 TIME에서 매일 전해 주는 코로나-19 소식을 들었다. 한 단어가 날아와 꽂혔다. 현 사회를 정의하는 ‘Apathy(냉담)’이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와 연대하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았다. 1969년 인류 최초로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홀로 하지 않았다. 선두 자리를 경쟁하지 않으며 묵묵히 뒤 따랐던 버즈 알드린이 있었고, 그 둘을 내려 보내며 홀로 달 착륙선을 지켰던 마이클 콜린스가 있었다. 그 세명 뒤에는 40만명이 넘는 나사의 과학자들이 있었고, TV를 보고 있던 수억의 미국인과 온 세계가 있었다. 나 역시 온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흑백TV로 그 광경을 보며 감격했다. 그 때로 말하자면 20인치 브라운관 흑백 TV 하나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일 장영철 천규덕의 레슬링을 보던 때다. 그 때만 해도 ‘함께’ 라는 단어가 사회와 가정에 존재했었다. (잘 기억나지 않으면 ‘응답하라 1997, 1994, 1988’을 보라.) 그러나 코비드-19를 거치면서 드러난 것은 ‘냉담’이다. 3,000년 동안 ‘함께’ 해 왔던 것들을, 단 ‘30’년 만에 갈아 치워버렸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오기 전에는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별 반응하지 않는다. 타인의 불행에 동감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하게 될 위험에도 불감증이다. 그렇게 좀비화된 인류를 코로나바이러스는 고발한다. 한 집에서 함께 살고, 교회당이나 비행기나 쇼핑 센터 안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악한 것에 감염될 수 있다는 역공격으로 이 시대를 고발한다. 4. 그래도 세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다시 코로나-19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다. 상황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냉담도가 증가한다는 말이다. 찔러도 피가 나지 않고, 피가 나도 그냥 돌아다니는 좀비의 세계가 된다. 현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위험이다. 계속 찾아올 변종 바이러스나, 자연의 반격이 아니다. 비인간화되고, 냉담화되는, 좀비의 세상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위기다. 이제라도 정신차려야 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라고 외치던, 1969년 만화의 주인공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처럼 몸부림 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단테의 를 펼쳤다. 은 3부로 되어 있다. 단테는 당연히 천국에 먼저 가고자 했다. 그러나 지옥을 먼저 살펴 봐야만 했다. 그 장면을 보자. “1300년 봄 35세의 단테는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음란한) 표범, (오만한) 사자, (탐욕의) 암늑대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때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말해준다. 저 아름다운 언덕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길, 즉 저승 세계를 거쳐 가야 한다고. 그리하여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저승 여행길을 떠난다. 하나의 시를 읊으면서. “..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 아, 얼마나 거칠고 황량하고 험한 숲이었는지 말하기 힘든 일이니 /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 죽음 못지않게 쓰라린 일이지만, 거기에서 찾은 선을 이야기하기 위해 / 내가 거기서 본 다른 것들을 말하련다.. ” 지금 이 세상은 ‘준(準)지옥’이다. 그러나 여전히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있다. 그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코로나-19에서 ‘선한 것’을 찾아 내야 한다. 도망갈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찾아내야 한다. 흙이 있는 땅을 밟고서. 김성주목사(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20/08/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김성주목사 1.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꽃의 계절, 화양연화’의 계절이 왔다. 샛노란 유채꽃으로 온 세상이 뒤덮인 카놀라 길(Canola Trail)을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왕복 8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망은 없다. 자카란다 계절이 돌아왔다. 노란색 유채꽃은 보라색 자카란다가 피기 전, 낙화하여 무릎을 꿇는다. 보랏빛은 황제의 색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당시 12,000개의 바다 달팽이를 부숴야 겨우 1.4g을 채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라색 옷을 입는다는 말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보라색을 입을 수 있다. 집 근처에도 몇 그루가 있다. 그래도 난 하버브리지 옆 라벤더베이나 키리빌리로 갈 것이다. 그 부자 동네에 내 집은 없지만, 보라색으로 물든 길을 지나간다고 누가 뭐라고 할 건가? 키리빌리에 관저가 있는 호주 총리 역시 나를 막지 못한다. 난 이 자유의 나라에서. 그 길을 거닐며 내 옷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게 할 것이다. 2. 다음 주 화요일은 미국 대통령 선거일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경합한다. 누가 이 시대 최고 강대국 대통령의 옷을 입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매스컴과 여론조사기관들이 자신들의 예상을 내놓지만, 2016년 선거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중국과 북한에 대한 정책이 달라진다. 당연히 한국과 호주는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영원하지 않다. 길어봐야 4년 혹은 8년이다. 그동안 미국이 확 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을 이끄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수호하는 정점에 연방대법원이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대단한 관심을 끌었던 기관이다. 미국 최고의 사법 기관으로,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권고와 동의 하에 연방대법원장과 8명의 대법관이 임명된다. 일단 임명되면 ‘선한 행동을 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종신직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18일 긴즈버그 대법관이 세상을 떠났다. 트럼프는 그 후임으로 보수의 아이콘인 48세 에이미 코니 배럿의 임명절차를 강행하여 지난 10월 26일 임명했다. 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임명하게 되었고, 연방대법원의 이념 구도를 보수 6, 진보 3으로 바꿔 놨다. 그렇게 트럼프는 재선 이후의 제왕적 꽃 길을 철저하게 준비해 놓았다. 그러나 신임 대법 판사가 존중하는 것은 자신을 임명한 트럼프의 당리가 아니다. 그녀는 원전주의(Originalism)를 따른다. 미국 헌법을 작성한 ‘건국 아버지들’의 뜻과 목적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 대립 되는 것은 ‘살아 있는 헌법(The Living Constitution)’이다. 헌법을 존중하지만, 변화한 현실을 고려하여 헌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주의다. 미국은 이 두 사상의 각축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래서 나온 것이, ‘수정 헌법’이다. 1787년에 만들어진 7조 21항의 헌법을 기초로, 1791년 10개의 수정 헌법이 나왔고, 27조까지 더해졌다. 미국은 이 헌법을 기초로 운용된다. 근본을 지키며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헌법이다. 미국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한 대통령의 꿈이 아니다. 이 헌법에 기초한 연방주의다. 50개의 주의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당리당략이 각자이지만, 그들 모두는 헌법의 권위 아래 들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 헌법 준수를 위해 검찰이 있고, 경찰과 군대, 그리고 FBI와 CIA가 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각 개인의 자유다. 심지어는 공화당이 배출한 대통령에 대해서도, 공화당원이 공공연히 반대할 자유를 인정한다. 공화당 상원의원 수잔 콜린스가 그 예다. 이번 배럿 대법관을 임명할 때 필요한 것은 100명으로 이뤄진 상원의원의 과반수 표결이다. 현재 공화당원 수가 53명이니, 53:47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52:48이 나왔다. 공화당 4선 의원 수잔 콜린스가 반란표를 던진 것이다. 그녀의 반란은 유서가 깊다. 지난 2016년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 때에는 ‘트럼프는 대통령에 필수적인 자질이 결핍되었다’라고 주장했고, 2018년 10월에는 트럼프가 지명한 브렛 캐노버 연방판사를 향해서도 입장을 유보했었고, 이번 배럿 후보의 인준 투표를 대선 이후로 미루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임명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 분이 여전히 공화당에서 4선 의원으로 일하며,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관인 ‘국토안보부’ 담당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며, 사사건건 트럼프가 하는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 때문이다. 그런 자유가 있으므로 미국은 세계 최강의 자리를 계속 지켜 나갈 것이다. 로마제국을 천년 동안 떠받힌 것이 ‘법’이듯이, 미국 역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헌법을 제대로 지키는 동안 견고할 것이다. 3. 선진국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정의와 자유의 법을 만들어,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나라다. 대통령도 어떤 조직도 헌법 위에 설 수는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며,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그토록 아름답던 유채꽃과 자카란다도 순식간에 지며, 권력이 10년을 가지 못한다. 한 나라가 천년을 가려면 좋은 법을 만들어, 법대로 지켜야 한다. 그 중 영원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호주 헌법을 보면 제일 앞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에 겸손히 의지한다’란 말이 나온다. 지극히 세속적인 현시대에도 호주가 가장 좋은 나라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헌법 덕분이다. 그리고 그 헌법의 공정한 실행을 믿고 감시하는 국민 때문이다. 난 그들의 일원이 되어 기어코 키리빌리 총리 관저 앞을 거닐 것이다. 자카란다 나무 밑에 서서 보라색 꽃비를 맞을 것이다.

  29/10/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phenomenon 현상 지난 월요일, 나는 ‘밤을 잊은 그대’였다. 이승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주일 전으로 역주행해야 한다. 지난주 화요일, Australia Day 논쟁 때문에 호주 매스컴이 조금 시끄러울 때, 나는 한국발 신문기사도 검색하고 있었다. 이승윤이라는 청년에 눈길이 끌렸다. 전날 25일 JTBC에서 방영하는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32세의 청년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아버지가 이재철 목사님이라는데 내 관심이 꽂혔다. “도대체 뭐지?”라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돌렸다. 신세계가 열렸다. 유희열 심사위원장을 포함한 9명 전원의 극찬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하나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코비드-19가 작년에 이은 ‘특이한 현상’이라면, 이승윤 역시 그랬다.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나에게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에 관한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 역주행했다. 홍대 앞 언더그라운드 공연장과 부산 등지에서 ‘체 게바라’처럼 살며 노래하고 공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만이 아니었다. 그의 도발적 매력에 칠순 할머니의 덕후질도 가세했다. 댓글 2개를 소개한다. “저는 시골의 70 이 가까워져 오는 할머니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다가 이승윤 가수를 보고, 우와 내가 재력이 된다면 완전히 음악만 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요. 충격 그 자체였지요”. “오늘 낮에 이 노래를 틀자마자 4살 아이가 달려와 꼭 안더니 제 눈을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놀래서 왜 그래 물었더니 ‘잊어지고 헤어지는 거잖아’라는 거예요. 뭐였을까요? 이 노래가 가진 힘이었을까요?” 사실 이런 현상에 가장 놀란 사람은 이승윤 자신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만 15년 이상 뒹굴면서 자신의 실력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다. 우물 안 개구리 같았지만, 청춘의 혼돈스러운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나가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던 결과다. 2. Algorithm 알고리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날 이승윤으로 이끌었다. 이 알고리즘은 시간마다 다르고, 경우마다 다르다. 내가 별 생각 없이 신문을 뒤적이거나, 유튜브를 켰을 때 내 앞에 떡 나타난다. 시작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지만 나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며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한다. 술, 마약, 섹스, 권력 앞에 노출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하느냐는 성격과 품성에 달려 있고, 무엇보다도 자라나오면서 받은 가정교육에 많이 근거한다. 나를 이승윤에게 이끈 것은 그의 아버지 이재철 목사였던 것처럼, 나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꽂히는 곳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곳이 내 인생의 놀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3. Mikrokosmos 소우주 어제 아마존의 CEO 베이 조스 기사가 떴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며, 최고의 혁신기업인이다. 코비드-19의 절망적 현상 속에서 오히려 기업의 가치는 높아졌고, 최고의 실적을 일궈낸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CEO의 자리를 내놨다. ‘나는 에너지가 넘친다. 다시 Day 1”. 지금까지 일궈 놓은 지상 최고의 기업으로는 아직도 ‘배고프다’는 그다. ‘아마존은 혁신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베이 조스를 바라보며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가한다. ‘아마존에서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 개혁의 아이콘인 베이 조스의 제2기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온 세계가 그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과거 성공 이력과 더불어 차기 관심 분야 때문이다. 두 가지다. 본격적 우주 사업과,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이다. ‘여전히 헝그리’한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우주산업에 대한 도전은 이해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세계는 ‘사람’에게 있다. 베이 조스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종업원 125만 명을 먹여 살려야 하고, 70억이 훨씬 넘어가는 세계 인구 중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심적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은, 깨끗한 부자의 당연한 관심거리다. 우주와 한 사람에 관한 관심. 매크로와 마이크로의 기막힌 조화를 아는 멋진 개혁 아이콘이다. 4. God’s Algorism 신적 알고리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난 월요일 밤, 기대를 가지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3시쯤 깼다. 참았던 궁금함을 담아 급히 유튜브를 열어봤다. 이승윤이 BTS의 ‘소우주’를 어떻게 불렀으며, 과연 6강에 올랐을까? 여전히 이승윤은 파격이었다. 기타도 화려한 액션도 없이, 매우 절제된 모습으로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예리한 유희열 심사위원장은 이승윤의 진가를 알아봤고, 넉넉하게 본선으로 진출했다. 그가 이번에 부른 노래는 BTS의 ‘소우주’다. 가사는 이렇다.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 밤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별빛 /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 한 사람에 하나의 별 /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 70억 가지의 world.” BTS가 세계적 현상이 된 것은, 소외된 한 사람에 대한 지극한 관심 때문이다. 내가 연구한 이승윤의 성공비결도 ‘어려운 삶을 사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이승윤은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노래할게 기도보다 아프게”. 나름 이렇게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신앙 하는 것 보다, 신앙에 근거하여 이웃을 위한 자신의 삶을 살아 내는 것이라고. 그는 기도를 녹여내서 노래를 만들었고, 불러 댔다. 신적 알고리즘에 의해 그는 세상 무대에 섰고, 그 노래로 70대 할머니부터 4세까지의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우려내고 있다. 이승윤은 계속해서 나의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훌륭했지만, 그분의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아들이 나타났다. 하나님 이야기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려는 이승윤이야말로, 현 세상이 필요로 하는 멋진 전도자라고 해석한다. 물론 아직 가공 중인 다이아몬드 원석이지만.

  04/02/2021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톰 행크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배우다. ‘다빈치코드’를 쓴 작가 댄 브라운의 소설 3권을 영화화한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해 졌다. 그가 지난 3월 호주 퀸즐랜드로 영화 촬영을 왔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다. 2주간의 격리치료를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호주에 소식을 전해왔다. 2주간 잘 치료해 준 의료인진들에게 감사하며, 한 소년에게는 타이프라이터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 소년의 이름은 코로나다. 이름 때문에 놀림 받는 그 소년의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코로나라는 이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코로나는 왕관을 의미하지. 이 타자기로 나에게 다시 편지를 써 주길 바란다.” 그 편지 끝을, 자신이 음성으로 연기한 ‘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코로나, 너는 내 친구야”. 이제 온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친구가 되었다. 나쁜 친구이지만 사이 좋게 지내야 하는 친구다. 호주와 한국은 이미 제2차 유행이 시작되었다. 엊그제 자정을 기해서 NSW주는 빅토리아주 경계를 봉쇄했다. 하늘길은 물론 찻길, 뱃길도 막았다. 아이들 방학을 맞이하여 주 경계를 넘어가 있던 사람들이 성급히 밤길을 달려 돌아갔다. 멜본은 9일부터 6주간의 록다운이 다시 시작됐고 시드니도 다시 경계 태세를 강화한다. 식당과 카페, 운동경기와 교회당 모임이 조금 풀리나 했는데 다시 불안하다. 예방 백신은 1~2년이 걸려야 나올 전망이다.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와 잘 지내야 한다. 다시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 사회로 돌아가는듯 살아야 한다. 각자의 사는 곳에서, 주어진 물자와 환경을 잘 선용하며 살아야 한다. 3개월 격리 후 조금 느슨해진 마음으로 시위도 하고, 해변과 펍과 경기장으로 달려가 즐긴 결과가 2차 유행이라는 것을 학습했으니, 이젠 자가격리를 생활화하며 살 수 밖에 없다. 2. 톰 행크스가 주연한 댄 브라운 원작의 영화는 세 개다. ‘다빈치코드’, ‘천사와 악마’ 그리고 2016년에 발표된 ‘인페르노(Inferno)’다. 지옥이란 말이다. 내용은 이렇다. 조브리스트라는 천재 생물학자는 현 문명에 대해 부정적이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수를 줄이는 것만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인류의 반을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만들었고, 동과 서의 교두보인 이스탄불의 거대한 지하 저수조에 숨겼다. 그 곳은 거꾸로 된 메두사 머리 위에 세워진 기둥으로 지탱되는 곳이다. 때마침 아름다운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그 곳이 바야흐로 지옥의 문이 되려는 순간, 우리의 용감한 톰 행크스가 몸을 던져 세상을 지켜낸다. 제목인 ‘인페르노’는 1320년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편에 나온다. 당시 유럽은 정말 지옥 같았다. 런던의 한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316년은 옥수수 등 곡물의 대품귀 현상이 발생한 때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양이, 말, 개를 먹었다. 심지어 어린이를 유괴하여 인육을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런 경제 공황 속에서 흑사병이 발생했고,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 세계 인구는 4억5천만 정도였는데 1억명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구는 계속 늘어 1518년에는 5억명이 되더니 위의 영화를 찍을 2015년에는 73억이 되었고 현재는 78억명의 인구를 자랑한다. 이런 인구증가 추세의 천정이 있을까? 바이러스가 인류를 그냥 놔 둘까? 사실 바이러스는 별 것 아니다. 인류 앞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죽음의 사자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3. 단테는 ‘인페르노(지옥)’편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 말을 들으면서 확실한 것은, 아직 우리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점령한 오늘날도 미래를 향한 희망은 오늘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당신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어차피 인간은 개인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 남은 기간 동안 뭘 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특히 이웃 나라나 이웃 동네로 가는 길이 막혀가는 지금,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잘 모르겠으면, 건전한 유투브 영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든가, 아니면 책을 펴면 된다. 당신 생각의 마중물이 된다. 나는 ‘시를 잊은 나에게’란 책에서 한 시를 읽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엊그제 식구들과 넬슨베이를 다녀왔다. 아나베이의 바다 사막을 걸었고, 토마리 산에 올라 석양을 봤다. 긴 등대 길과, 바다에 면한 깊은 숲을 걸었다. 온 식구가 함께 이렇게 다녀오는 것은 정말 오랜 만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때라고. 그 곳은 마치 ‘봄의 정원’과 같다. 온갖 아름다운이 그 곳에 있다. 나의 이기적인 삶을 살아내느라, 함께 있었지만 함께 있지 않았던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 많다고 좋은 것 아니요, 가진 것이 많아서 좋은 것도 아니다. 한 존재를 향해 마음으로 느끼는 감사와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 마음으로 한 마디 좋은 말을 하고, 한 방향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그게 지옥이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사랑을 주고 받을 사람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천국과 지옥은 내 앞에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나와 당신의 몫이다.

  09/07/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팬데믹 작년 3월 말, 시드니는 모든 것이 셧다운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호주는 코비드 영향권에서 조금 비껴난듯 싶다. 악수를 할 수 있고, 가정에서도 공회당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연말이면 거의 정상 수준으로 돌아갈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의 말은 다르다. 신문에 난 기사 몇 개를 인용한다. “이제 넥스트 팬데믹은 각국에 핵무기나 생화학무기 수준의 안보 위협으로 떠올랐다. 위험한 바이러스는 50만종, 밝혀낸 것 0.2%뿐. 백신과 치료제 개발은 상처에 밴드를 붙이는 수준에 불과하다. 인간이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기후변화로 야생 생태계를 침범하고 생물 종(種)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야생에 갇혀 있던 바이러스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숙주인 인간으로 옮겨 타고 있다. 바이러스는 통상 새로운 숙주를 만나면 더 가혹하게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바이러스성 감염병이 점점 더 자주, 강도 높게 인류를 휩쓸 수 있다.” 결국 인간이 문제다. 인간은 대단히 모순된 삶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망가뜨리면서 자신 혼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이기적 존재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바이러스 핵폭탄이 터질 수 있다. 몇 년 전 사스(SARS)로 인한 사망자 수는 774명, 메르스 858명, 에볼라 11,325명인데,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는 3월 10일 현재 2,628,752명이다. 다시 한번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어떻게 될까? 해법은 우리에게 있고, 지금부터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2. 미나리 팬데믹이 창궐했던 지난 1년, 우리집에는 정원이 만들어졌다. 그 수확물 중의 하나가 ‘미나리’다. 물만 주면 잘 자라나는 그 ‘미나리’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두 달 전인가 영화를 봤다. 화면 질이 별로 였다. 조금 보다가 졸았는데, 깨 보니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봐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국과 유럽에서 엄청난 상들을 휩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엊그제 좋은 화질로 다시 봤다. 여전히 그저 그런 영화였다. 음악이 좋고, 차분한 진행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할머니와 엮어가는 이민정착 스토리는 진부했다.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몇배 극적인 이민자의 삶이 내 주위에는 수없이 많다. 만약 우리들의 이민 역사를 아이삭 정 감독 + 호주인 라클란 촬영감독 + 배우 윤여정과 천재 꼬마 앨런 김 등을 붙여서 영화로 만든다면, ‘미나리’메 못 미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제작비도 단 2백만불 밖에 안 들었다. 그 정도면 집 팔고 은행 융자 얻어서, 자신의 이민 역사를 영화화 하여 100배의 수익과, 세계적 명성을 얻어볼만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나의 마음을 정해야 했다. 영화 ‘미나리’가 그 많은 상을 받을 만한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를. 3. 이민자 가족 ‘미나리’의 핵심은 ‘이민간 가족’이다. 배경이 되는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비록 얼굴이 편편한 한국계가 중심되어 만든 영화지만, 엄연히 ‘미국 영화’다. 이미 영화 ‘기생충’으로, 한국인이 만든 영화 수준에 대한 사전학습이 되어 있었던 상태다. 문화적으로는 생소한 결이지만, 자기들 땅으로 들어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보려는 또다른 이민자 삶을 높이 평가한 결과다. 그래서 그들은 맛갈나게 영어를 구사하며 인터뷰를 소화하는 할머니 윤여정에게 열광한다. 우리는 그 반대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할머니는 진부하게 익숙한 할머니다. 이민간 자식을 찾아오며 고추가루/멸치 봉다리를 주섬주섬 끄집어 내는 할머니. 살벌한 세관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해온 허름한 가방 속에서 왕밤 하나를 꺼내, 이빨과 혀로 살을 발라내 손주 입에 넣어 주려는 할머니. 우리는 그 할머니가 때로는 지겹다. ‘그랜마 스멜’이 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심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교회에서, 딸이 드린 100불짜리 헌금 지폐를 몰래 집어내 숨기는 할머니의 몰상식에는 창피할 뿐이다. 할머니는 그토록 역설적인 존재다.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다가 정작 아프거나 돌아가시면 눈물 펑펑 쏟으면서, 결국 그 할머니를 닮아, 그 할머니가 되어가는 우리들. 세상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가족’이다. 사회적 부정부패의 진원지는 가족 이기주의이며, 참혹한 전쟁의 진원지는 민족 이기주의일 때가 많다. 그래도 우리는 가족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조부모와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어리고 젊은 이민 2,3세대들이지만, 그들 역시 부모가 되고, 할머니/할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가족은 서로의 자리를 바꿔갈 뿐이다. 특히 이민 생활은 가족과 지지고 볶다가 한 그릇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삶이 전부다. 4. 에필로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뇌졸증에 걸려 창고를 태워 먹은 할머니. ‘나 같은 할망구, 내가 없어져야 애들이 잘 살지’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그 때 7살 먹은 손자가 할머니를 쫓아 달려간다. 심장에 구멍이 있기에, 뛰면 안되는 아이다. 그런데도 달린다. 점점 더 빨리 달린다. 무려 25초 동안, 달리는 그의 모습을 호주 출신 촬영감독이 클로즈업 시킨다. 그 장면을 보며 감동이 밀려왔다. 할머니 앞을 가로막으며 그 꼬마가 외치는 말, ‘할머니 어디가요? 이쪽이 아니예요. 우리 집은 저쪽 이예요. 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랑 같이 집에 가요!” 그러면서 서로 손을 잡는다. 할머니는 손자/손녀의 손을 잡고, 풍 맞은 오른쪽으로 기우뚱 기우뚱하며 걷는다. 그리고는 바퀴 달린 이동식 주택 거실에서 5식구가 함께 잔다. 그 장면을 되새기며 글을 쓰는 동안 내 눈에 눈물이 홍건해졌다. 그 눈물로 우리의 이민 ‘미나리’는 자란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난 미나리를 심으리라! 영화 ‘미나리’가 진부하다면, 내 마음이 진부해진 까닭이다. 이민 삶에 찌들려, 감정이 메마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세상에 소중한 것이 뭔지를 모르는 무정함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 ‘미나리’에 대한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회개한다.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이미 돌아가신 애들 할머니를 향하여, 오늘도 자생하는 미나리가 흥청대는 개울 옆 길을 홀로 걷고 계시는 애들 할아버지를 향하여. 김성주목사(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11/03/2021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위기는 파도처럼 온다. 산불이 4개월 덮치더니, 갑자기 코로나바이러스가 쳐들어왔다. 반 년째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인종갈등으로 인한 위기다. 과연 지구촌 시대답다. 하루면 못 가는 곳이 없는 시대라,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순식간에 ‘팬데믹’이 된다. 인간문명은 후진 기어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 대양탐험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살아도 함께 살고, 죽으면 다 죽는다. 이 다음에 어떤 파도가 올지 두려운 가운데 궁금하다. 찰스 브론슨이 주연한 1968년 영화 ‘아듀 라미’에서 물컵에 동전을 넣은 게임이 나온다. 이미 물로 가득 채워진 유리잔에 동전을 넣는다. 하나, 괜찮다. 둘, 괜찮다. 셋, 넷, 그러다가 물이 넘친다. 지금이 그 때인가? 세상의 종말은 시작되었는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위기가 중첩되다가 결국 파국이 오는가? 2. 현재 미국을 불태우고 있는 폭동의 시작은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부터다. 10일도 안됐는데 이미 전국 50개 주로 퍼져 나갔다. 거의 내전 수준이다. 주 방위군이 출동하고, 연방군대가 대기 중이다. 소말리아 내전에 출동했던 블랙호크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상공에 떠서 무시무시한 회오리 바람으로 시위대를 위협한다. 대통령은 잠깐 지하벙커로 피신하기도 했다. 시위대의 구성은 다양하다. 인류애로 뭉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이익을 보려는 야심가도 있고, 약탈자들도 있다. 조지의 동생 테런스 플로이드가 “나는 분노해도 날뛰지 않고, 지역사회를 망치지 않는다. 약탈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 외쳐도 소용없다. 한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6월 3일(수) 현재, 필라델피아 50건, 미니애폴리스 10건, 아틀랜타 4건이다. 미국은 원래 전쟁에 능한 나라다. 조국인 영국, 그리고 먼저 들어와 있었던 프랑스와 멕시코 심지어는 원주민과 싸우면서 거대한 땅을 독점했다. 특히 서부개척사는 총의 역사다. 지금도 개인의 총 소유는 헌법으로 보장하며, 어떤 주에서는 서부시대처럼 허리에 권총을 차고 다닌다. 시민 자위권도 있다. 수상한 자를 보면 권총으로 제압하거나 사살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시작되면서 총기 매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은 결국 자기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3. 그렇게 미국은 현재 두 위기와 전쟁 중이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인종갈등으로 인한 폭동이다. 이번 폭동이 급격하게 전 세계로 번져 나가는 주 원인도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4일(목)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죽은 미국인은 106,180명. 물론 20세기 초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한 5천만명 보다는 아주 적다. 그러나 지금은 팬데믹이다. 전 세계가 세기말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 외 유럽국가들의 사망자는 영국 39,452. 이탈리아 33,452. 프랑스 28,943, 스페인 27,127명 순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380,250명이 죽었다. 서구문명의 몰락 신호인가? 이런 위기 상황이 되면 어차피 죽을 것, 몸부림 쳐보겠다는 사람들이 생긴다. 특히 흑인들이 그렇다. 미국 인구의 13%가 흑인인데, 코로나바이러스의 사망자 중 22%가 흑인이다. 모두가 나그네 이민자로 들어온 미 대륙에서 3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그들은 분노한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한 많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이다. 계속 살아봐야 돌파구 없는 사회. 스스로 불나방 되어 위기의 불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게 파도처럼 계속 몰아 닥치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나는 외친다. “How Long? Why? 언제까지입니까?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게 하십니까?” 4. 지상 최고의 천국 호주는 아직 괜찮다. 코로나바이러스 진원지를 밝히라는 요구에 중국이 발끈하여 별 이상한 위협을 남발하지만, 아직 잘 버티고 있다. 6월 2일 시내에서는 인종차별 금지에 대한 시위를 벌였지만, 평화적으로 마쳤다. 난 그 전날 6월 1일에 시내로 나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이동 제한이 좀 풀렸고, 그날부터 주립미술관이 오픈한다해서 나갔다. 그 동안 집 주변만 왔다 갔다 했다. 병원가고, 마트 가고, 도보 운동만 하고 살았다. 마지막으로 시내를 본 것은 3월 18일이었다. 이미 텅 비었었다. 인터내셔널 페리 터미널에는 거대한 크루즈 선이 정박해 있었고, 그 뒤로 3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배가 죽음의 배 ‘루비 프린세스’였다. 그 때부터 사망자가 막 늘어나더니 지금은 102명이 되었다. 이제 조금 제한을 풀며 오픈한 미술관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했다. 호젓하게 전시관을 돌아 보다가 호주의 대표적인 화가 아서 보이드(Arthur Boyd: 1920~1999)의 ‘The Mockers (조롱하는 자들)’를 다시 만났다. 1945년에 그린 그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룬 그가 당 시대를 풍자하여 그렸다. 오른쪽 위에는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가 있고, 가운데에는 히틀러를 의미하는 독재자가 왕관을 쓰고 왕위에 앉아 있다. 그 주변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난동을 부리며 예수를 조롱한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와 세상을 구원해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이들의 조롱을 담담히 받아들이시며,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놔 두신다. 왜 그러시는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거짓과 선동, 모략과 폭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칼은 칼을 불러 올 뿐이다. 이 진리 앞에서 나는 좌절한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그 방법 밖에 없다고. 당신도 그렇게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파도처럼 겹쳐오는 팬데믹 위기 속에서 난 이 진리 앞에 다시 무릎을 꿇는다. 김성주목사 (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04/06/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위기는 항상 기회를 불러 온다. 위기의 끝판왕인 죽음도 그렇다. 죽어야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때가 올 때까지는 이 세상의 위기를 논한다. 현재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다. 이 위기를 기회로 선용한 기업들은 엄청난 세불리기를 하고 있다. 위기의 때를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 무장해재를 당해 두 손 묶여 있는 상황이라 그들의 독주는 더욱 돋보인다. 넷플릭스, 애플, 테슬라, 애프터페이(Afterpay), 카카오 등이다. 지난 연말 대비 주식값이 두배 이상, 심하면 10배까지 올랐다. 이런 기업들의 특징은 비대면 위기 상황에 창조적으로 대처했다는데 있다. 한국의 BTS 경우,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이 아니었다면 ‘빌보드 핫100’에 2주 연속 1위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로 국내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오히려 ‘세계화의 플랫폼’으로 만들었다. 2. 나는 그런 세계화 혁신의 최전선에 살고 있지 않다. 지난 20년 넘도록 세상의 변방으로 자처하는 호주 한 구석에 산다. 이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이 컬럼을 쓰고 있다. 마감 시간에 쫓기며 앉아 있는 나를 아내가 부른다. 호주 청정해역에서 자라난 홍합을 삶았으니 와서 먹으란다. 커다란 양푼에 가득 담겨있다. 바다 소금기가 풍만하게 배인 홍합 속살을 빠른 속도로 먹어 치웠다. 좀 더 다르게 먹어 보고 싶어서 그 위에 올리브유를 흠씬 뿌렸다. 하나씩 올리브오일로 코팅하여 집어 먹으며, 수퍼에서 파는 북유럽산 훈제 홍합이 생각났다. 맛은 그게 더 구수하지만 건강에는 이것이 더 좋다는 아내의 말에 수긍하며, 담백한 자연향을 입안 가득 담고 와서 다시 이 글을 쓴다. 아내는 아내대로 홍합을 건져낸 국물로 미역국을 끓인다. 그렇게 홍합은 한번 죽음으로 여러 사람을 살린다. 어제는 할로겐 전구를 바꿨다. 지은 지 20년, 우리가 이사온지 13년 된 집이라 거실 천정에는 할로겐 전구가 달려있다. 하나에 50와트짜리다. 10개를 켜면 500와트, 그 엄청난 부담감에 특별한 때가 아니면 어둡게 살았다. 그런데 정부가 보조하여 단 $33만 내면 숫자에 상관없이 LED로 갈아 준다는 안내문을 받았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바로 그 다음 날 전기 기술자를 보내 줬다. 사다리 두 개를 가지고 열심히 전구를 바꿔준다. 작업하는 이를 따라 다니며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 두 마디 건넸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봇물처럼 자기 인생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번 주 처음 나왔단다. 원래는 로보트 전문 기술자인데, 3개월전 일이 사라졌단다. 마지막 직장은 헌터밸리에 있는 석탄광산. 지하 100-200m를 내려가 자동기기를 다루던 젊은 가장이다. 3개월을 놀다가 이제는 일을 해야겠기에, ‘이런 일’이라도 하려고 나섰단다. 자신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전처럼 벌지는 못하지만 현재의 경제 위기를 이겨나가는데는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김에 코로나로 인해 확찐 몸도 좀 줄여 보려 한단다. 사다리에 올라가 팔을 들고 전구를 갈 때 드러난 뱃살이 그 증거인양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의 직업을 물어보는 그에게 미니스터라고 했다. 잠시 그의 눈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 다시 파스터라고 했다. 그 때야 얼굴이 펴지면서 말한다. ‘대화를 접어야 하나 잠시 걱정했다’고. 나를 장관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말해 줬다. 장관이나 목사나 다 섬기는 직업이라고. 서로에게 편안한 대화를 계속하다가 일은 끝났다. 그 동안 우리 집 건물의 위기를 해결코자 왔던 플러머나 전기공 등 중에서는 가장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이런 일을 많이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고, 인공지능이라는 동일한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었다. 13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불을 다 켜 봤다. 이전의 차가운 빛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불빛이었다. 집이 달라 보였다. 코로나로 인해 얼어 붙은 경제 상황 속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살아 있어 우리 집을 돌봐주고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성실한 기술자가 와서 잘 해 줬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현관 천정에 한 전구는 켜지지 않았다. 설치하면서 점검하지 않았던 불찰이다. 고민 좀 했다. 그냥 놔둘까? 그러다가 정중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집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전등 하나가 안켜지는군요. 이대로도 괜찮지만, 혹시 가능하시면 고쳐 주시면 좋겠는데…” 바로 답이 왔다. 시간 내서 가겠다고. 그렇게 어제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잘 지나갔다. 3. 세상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네 인생을 향해 때도 없이 위기가 들이닥친다. 그렇다고 항상 어렵지만은 않다. 야곱은 130년 험한 인생을 살았지만, 말년 17년을 아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면 좋겠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으니까. 이쯤에서 인생을 보는 눈이 둘로 갈라진다. 죽음이 끝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을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제작된 기계로 본다. 그러나 아니다. 인생은 잠시요, 죽음 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심하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막장 바이러스를 이미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변방인 호주 한 구석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나의 삶이 전혀 억울하지 않다. 오히려 감사하다. 세상을 보고 싶으면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된다. 넷플릭스를 보고, 유튜브를 보면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보다가 다시 부엌으로 내려간다. 홍합을 까먹고, 정원으로 나가 새와 꽃과 하늘과 바람 속에 들어간다. 그 정원의 청지기는 아내다. 많은 시간을 내어 야채를 심어 키우고, 꽃과 선인장을 돌본다. 그러면 그들은 정직하게 먹을 것을 내 놓는다. “날 잡아 잡수세요! 내 생존의 의무와 기쁨입니다.” 나는 거기서 나오는 무공해 신선한 야채들을 먹는다. 태국에서 건너온 안남미 쌀밥에, 한국에서 온 초고장을 비벼 먹는다. 그렇게 나는 이미 세계화의 한 가운데 있다.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다. 그렇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인생 최대의 위기라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 나의 창조주를 만날 것이다. 그 분은 나를 영접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실 것이다. 나는 한갓 바다의 홍합이나 정원의 쑥갓과는 다르다. 우연히 생겨나 진화한 유전자의 기계는 더더욱 아니다. 난 ‘부자 아버지의 찬스’를 써서, 이 위기를 기회의 플랫폼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김성주목사(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24/09/2020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시드니 인구는 날로 늘어난다. 2016년에는 4,609,642명이었는데, 2021년에는 5,029,782명이 된다. 그동안 뉴잉턴과 켈리빌, 그리고 로즈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2026년에는 5,458,272명이 되는데, 주로 시드니 제2공항 근처. 2031년까지는 5,878,238명이 될 것인데, 주로 켈리빌과 홈부시,그리고 파라마타 옆의 카멜리아가 인구 집중 지역이 된다. SMH(시드니모닝헤럴드) 신문에서 인용한 통계니까 믿는다. 10년 내 1백30만 명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사도 믿는다. 현 시드니 상황을 보면 좀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구절벽이 확실한 조국의 위기를 생각하면 즐거운 비명이다. 그만큼 시드니가 좋다는 의미이고, 또 모이다 보면 이럭저럭 살길이 열린다. 뉴욕이나 런던처럼. 2. 반면에 조국은 좀 어려워 보인다. 인구절벽은 머나먼 미래라 생각하는지, 현실 바닥에서 이전투구하고 있다. 이번에 강행한 법무부 장관 임명 사태로 작은 루비콘강을 넘어갔다. 시이저가 이겨서 황제가 될지, 아니면 원로원이 이겨서 공화정을 유지할지는 모른다. 미래는 우리 것이 아니다. 각자 소신대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다 보면, 역사 나름대로 결말을 짓는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더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소망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3. 조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이 지난 1달 동안의 신문 지면들을 빼곡히 채워 줬다. 유튜버들도 심각하게 혹은 즐거워하면서 신나게 영상을 올렸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 때문에 먹고 살고, 조금씩 즐긴다. 세상에 정치싸움만큼 전율과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가 없다. 그렇다고 그 일들을 가볍게 보자는 말은 아니다. 각자 삶의 현장이 다르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좌우의 대립에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조국 민주화를 위해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날을 잠시 살펴본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교 수업의 일부로 목총을 들고 교련 수업을 들었다. 대학1, 2학년 때에는 데모에 참여했다. 뭘 알고서 한 일이 아니다. 수업은 연기되었고, 누군가 모이라고 해서 급조된 군중 속에 있었다. 밀려서 교문 밖으로 나갔고, 한 50m 전진했다가 최루탄 가스에 밀려서 되돌아왔다. 정문이 아니라 뒷문에서였다. 3학년 봄이 되니 탱크로 무장한 군대가 대운동장으로 밀고 들어와 야영 천막을 쳤고, 교문은 잠겨졌다. 개학하자 마자 다시 임시 방학을 맞은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갔다.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침 구보 후, 정확하게 2mm만큼만 치약을 짜서 이빨을 닦았다. 특별한 저장법으로 간수했던 고구마로 밥을 먹으며, 군인으로서의 농민, 그리고 부모님과 하나님에 대한 효도를 배웠다. 다양한 사회계층 사람들이 동기생이었는데, 스님도 있었다. 제일 젊다는 내가 동기회 총무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그런 일에 몰입할 의식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졸업하고 간 군대에서는 그때 바로 시작된 얼차려 훈련 때문에, 구타를 당하지 않았다. 단지 개가 되려는 고참 상병과 제대를 앞둔 병장에게 세차게 세 번 뺨따귀를 얻어맞았을 뿐이다. 제대하고는 바로 취직시험을 봤다. 70학번 선배들과 함께 봤는데, 내 이름만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제대와 취직시험 사이에 12만 원 수강료를 주고 공부하여 딴 품질관리사 자격증이 힘을 발휘한 것 같았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매일 세종로로 출근했다. 야근하며 야식 맛을 들여갔다. 그러던 중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났다. 그 다음날 온 세계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들었고, 바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명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이상한 법 아래서, 친구들과 저녁밥을 먹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광기 어린 몇 개월이 지난 후 1980년 5월 15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모였다. 군부독재에 맞서는 조직적인 항거였지만 역부족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골목길로 도망하며 흩어지는 광경을 나는 내 직장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국의 앞날에 대해 많은 걱정이 있었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 역시 그들의 구호대로 이뤄지는 세상을 볼 수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잡혀갔고, 지하로 잠적했으며, 노동현장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나면서, 내가 다니던 직장은 정권의 철퇴를 맞고 공중 분해되었다. 그때 내 나이 31살. 봉급쟁이 생활에 미련을 버리고, 받은 퇴직금으로 호주와 유럽, 대만과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결혼한 후, 1988년 호주에 정착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났고, 요즘의 뒤숭숭한 조국의 소식을 들으며, 난 양심고백을 한다. “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조국에서 두 편으로 갈려 좌충우돌하는 그들을 행해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난 그동안 그 역사적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도 입이 있으니 한마디 한다면 이것이다. “너무 피 터지게 싸우진 마세요. 다 한편이에요!” 4. 옆집에 개 두 마리가 있다. 그 개들이 하는 일은 놀고먹고 뛰는 일이다. 낮에는 그렇게 놀다가, 주인 부부가 퇴근하면 집 안으로 들어가 따뜻하고 편안함 밤을 보낸다. 어느 날인가 밤이 되었는데도 주인이 돌아오질 않았다. 개들은 검은 밤을 향해 마구 짖어 댔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다. 백차가 길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빼꼼히 문을 열고 동정을 살펴보는 나를 향해 경찰이 걸어왔다. 질문을 받았다. 옆집 사람을 아느냐고? 뭔가 수상쩍은 점이 있느냐고? 아니라고 했다. 괜히 이웃 사람에게 안 좋은 말을 하기 싫었다. 경찰은 가지만, 옆집 하고는 함께 오래 살아야 하니까. 경찰은 그런 내 말을 참조하고는, 밖에서만 좀 더 살펴 보다가 그냥 갔다. 나중 한밤중이 되어서야 개 짖는 소리가 멎었다.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다음 날 보니 주인은 뒤뜰에서 휘파람 불며 나무 가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위층에서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잘 되었네. 아무 일도 아니었네. 개 짖는 소리가 좀 시끄럽고, 주말마다 전동공구 소리가 좀 나지만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지." 그렇게 옆집 주인은 가끔 나타난다. 대신 개들은 언제나 거기서 소란을 피운다. 힘이 넘치는 젊은 두 개는 서로 싸우듯이 레슬링을 한다. 푹신하라고 깔아준 이불을 물고 뜯어 온 사방에 솜을 헤쳐 놓는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우리 집 지붕을 쪼아 대는 까마귀를 쳐다보며 또 짖는다. 그래서 옆집 마당은 아주 어지럽고 시끄러운 개판이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쯤 주인이 정리해준다. 초록색, 빨간색 쓰레기통을 갖다 놓고, 개들이 어질러 놓은 쓰레기와, 무성하게 자라난 잔디를 정리해준다. 그 일을 하면서 개들에게는 전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개는 그저 개가 할 일을 하고, 주인은 그저 주인이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 옆집 개와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존중의 케미가 있다. 5. 며칠 전 '골든레이'란 배가 현대자동차를 싣고 가다가 미국 조지아주 해변에서 뒤집혔다. 승무원 모두가 구조되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구조된 선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관실 파이프 위에 앉아 있었다. 65.5도까지 치솟는 열기와 싸우며 구조를 기다렸다. 물은 점점 가슴 높이 차 올라와 겨우 숨 쉬는 상황이 되었다. “인간이 처한 상상 가능한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라고 구조대는 묘사했다. 나 같으면 벌써 심장과 뇌가 터져 죽었을지도 모를 상황이다. 그런데 그는 살아났다. 저쪽에 갇혀 있던 동료 3명의, 그리고 그 세 사람이 먼저 구출된 후에는 밖의 구조대가 선체를 두들기는 소리 때문이었다. 탕탕탕 … 탕탕탕. 구출된 후에 그가 말한다. “나는 속에 갇혀서 가만히 밤을 새웠지만, 구조대는 파이프를 자르고, 없던 길을 만들며, 나를 찾기 위해 밤을 새웠습니다. 강도가 다릅니다.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6. 나도 그 소리를 낸다. 탕탕탕 … 탕탕탕.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당신의 조국을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 우리가 당신에게 갈 때까지 절대 죽지 말고 살아 계세요.”. 그렇다. 나는 조국 민주화에 뭐 하나 제대로 이바지한 것 없다. 그렇다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희망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내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마저 손 떼고 있지는 않으시다. 나는 다만 내게 주어진 삶을 정직하게 살아낼 뿐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못되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서 오는 회복의 소망을 전하며 살 뿐이다. 당신 역시 그렇게 살기 바란다. 우리가 못 간 길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않은 것에 안타까워하자. 내 키가 작은데, 188cm의 조인성을 부러워한다고 뭐가 되겠는가? 아이큐 160이라는 신동엽을 부러워해서 뭐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다 태어난 한계 속에서 산다. 그 한계 때문에 지금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그릇 크기를 알고, 그 잔을 깨끗한 물로 채우며 살면 된다. 그다음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다. 김성주 목사(새빛장로교회 담임 목사) holypillar@gmail.com

  12/09/2019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

1. 몇 분들과 함께 불루마운틴 산자락으로 소풍을 갔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바위 길이 의외로 많았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분과 뒤에 남아서,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무료했기에 숲 속의 빈터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봤다. 바쁘게 올라갔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보였다. 나지막한 높이의 댐 때문에 고인 물 위로 신비롭게 걸어 다니는 초능력 모기들, 산사태 난 벼랑 위에서 허연 뿌리를 드러낸 채 강인하게 살아가는 유칼립투스, 산불에 그슬려 속이 시커멓게 타서 텅 비었는데도 새로운 줄기를 뽑아내는 이름 모를 불사목, 단단한 외피를 뚫고 거미줄보다 더 미세한 꽃술을 수도 없이 피어 내는 환희의 나뭇가지들.. 새롭게 발견한 자연의 세계였다. 바삐 가기를 잠시 멈추고, 고요히 주목하는 사람에게 열려지는 자연의 세계, 그것을 발견한 감동이 있었다. 2. 약 1년 전, 홀로 계시던 옆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에게 상속되는데 몇 개월이 걸렸고, 그 후 매물로 나온 집은 금방 개발업자에게 팔렸다. 건축 시기를 보는지 집은 방치되어 있다. 그 집 뒤 뜰을 바라보는 내 맘은 심란하다. 새 주인은 잔디를 깍지 않는다. 할머니 계실 땐 정확하게 두 주에 한번씩 정원관리사가 왔었다. 뜰 가운데 심겨진 큰 망고나무에는 언제나 열매가 달려있어서 마치 에덴동산 같았었다. 그런데 이젠 흉가처럼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는데, 희한하게도 요샌 풀들 자라나는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 아마도 땅 자체가 아는 것 같았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알아, 너무 망가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것 같았다. 3. 캥거루 아일랜드를 갔다. 뛰노는 캥거루는 몇 마리 보이지 않는다. 크레이들 마운틴에 갔다. 안장 얹을 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뭘 하러 그곳에 힘들여 갈까? 물론 때묻지 않은 자연을 보기 위함이다. 캥거루나 말을 은밀하게 품는 자연, 그 자체를 보러 간다. 자연과 동물은 하나다. 서로를 소비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공생 공존한다. 문제는 사람이다. 아무리 잘 관리한다는 국립공원에 가도, 사람 손이 닿았던 곳은 훼손된다. 완벽했던 자연의 상호공존 조화는 깨진다. 사람들은 세련된 개발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문명의 결과물은 쓰레기일 뿐이다. 개발 과정 속에서 자연은 훼손되고, 동식물은 착취당한다. 자연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정말 불필요한 존재다. 사람은 원래 자연계를 잘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런데 사람이 망가지니, 망가진 사람은 자연도 망가뜨리며 산다. 4. 얼마전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촌의 한 건물 15층을 방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고 1미터 정도되는 길이의 빤짝이 장식을 베란다에 걸어 놓으셨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현란한 빌딩숲을 감상하고 있는데, 말벌 한 마리가 날라왔다. 파리도 모기도 힘들어 못 올라오는 곳에 말벌이 올라온 이유는 그 빤짝이 장식물 때문이다. 꽃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빤짝이 주위를 붕붕대며 집적이고 있었다. 아무리 헤집고 다녀도 꽃술이 있을 리 없으니, 결국은 날라가 버렸다. 이상했다. 사람이 만든 아파트 빌딩 숲에 살다 보니, 말벌의 후각과 미각이 망가져 버린 모양이다. 벌 입장에서는 인간이 밉다. 일년 내내 모은 꿀을 몽땅 빼앗긴다. 대신 주어진 값싼 설탕물만 쪽쪽 빨아먹고는 정체불명의 꿀을 만들어 낼 뿐이다. 심지어는 인간에게 간택되어, 인간 살에 침을 쏘게 만든다. 벌침 맞은 인간은 치유 받고, 벌은 대신 죽는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다. 자기 하나 먹고 살고 즐기기 위해, 온 지구를 말아먹는다. 그런 인간의 본능 속에는 돈 욕심과, 불타오르는 정욕, 그리고 오만한 자존감이 또아리 틀고 있다. 5. 나 역시 그 본능에 따라 움직였고, 그렇게 2018년을 살았다. 은혜를 나누기도 했지만, 동시에 상처도 주고받았다. 그래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가 적지 않다.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좋다. 이기심 가득한 세상에, 이타적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으니 좋다. 난 지금 이렇게 이기적인 삶과 이타적인 삶의 중간에 서 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중간에서 한 쪽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증거다. 난 말벌과는 다르다. 말벌의 오감 본능은 학습되고 길들여지며 퇴화될 수 있지만, 난 육감을 넘어 영감까지 소유한 인간이 되어간다. 육으로 오셔서 영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나는 소망 속에 산다. 이번 해 보다는 좀 더 많은 은혜를 나누고, 좀 더 적게 상처를 주고받을 내년을 고대하는 소망으로 산다. 김성주 목사(새빛장로교회 담임 목사) holypillar@gmail.com

  13/12/2018
  금요단상 - 김성주 목사